Analytic/History of Analytic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1인칭 윤리와 자기긍정

Soyo_Kim 2023. 12. 6. 13:26

2021-1 역사트라우마의 이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1인칭 윤리와 자기긍정

 

 

만일 어떤 것이 선하다면, 그것은 또한 신적이다. 이로부터 기이하게도 나의 윤리학은 요약된다. 오직 초자연적인 어떤 것만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각주:1]

 

1. 오랜 시간 동안 윤리학에 관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는 다른 철학자들의 이론과 혼동되거나 윤리학의 종말을 선언한 것으로 이해되곤 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한편으로 우리가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의 내용을 순서대로 이해할 때 얻어지는 필연적인 귀결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했듯이,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일차적으로 프레게와 러셀이 발전시켰던 언어철학의 근본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명제가 뜻(Sinn)을 지닐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의미론적 명제론에 따르면 명제는 세계와 비교되는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각주:2] 달리 말해, 명제는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의 가능성을 올바르거나 그르게 묘사(darstellen)함으로써 현실을 모사할(abbilden) 때에만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3] 비트겐슈타인은 뜻을 지닌(sinnvoll) 명제들 중 참인 명제들을 자연과학의 명제들이라 부르며,[각주:4] 비록 뜻을 결여하고(sinnlos) 있긴 하지만 명제와 사실을 선험적으로 규제하는 언어와 세계의 논리를 명시하는 명제들을 논리적 명제들이라 부른다.[각주:5] 양자에 속하지 않는 명제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시도하는 무의미한(unsinnig) 명제들로서,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들이 이에 속한다.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들은 세계 안(in)에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들을 표현하려 시도하는 언어의 통사론(Syntax der Sprache)을 위반한 명제들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아무것도 말하거나(sagen) 보여주지(zeigen) 않는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각주:6]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이론 윤리학의 성립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크리스텐센의 지적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윤리관에 관한 어떠한 종류의 탐구도, 그가 우리에게 윤리학의 이론이나 윤리가 존재하는지의 여부, 혹은 윤리가 어떻게 존재하는 지의 여부에 대한 이론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는 가정을 포기한 채로 시작해야 한다.”[각주:7] 이로부터 우리는 윤리적 명제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서양철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 윤리적 명제는 무의미하므로 규범 윤리학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으며, (2) 윤리적 명제는 사고될 수 없으므로 (칸트의 경우와 달리) 실천이성의 영역 역시 성립할 수 없다. (3) 마지막으로 윤리적 명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므로 그 자체로 어떠한 신비주의적 함축도 지니지 않는다.

그렇다면 논고에서 제시되는 윤리적 명제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당위를 주장하는 윤리적 명제와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라는 무의미한 명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더 나아가, 윤리적 명제의 대상이 되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가정의 근거는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일견, 윤리적 명제의 가치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에이어의 이모티비즘(emotivism)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교두보처럼 보인다. 그러나 윤리적 가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적어도 윤리적 가치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루트비히 본 피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그 책이 당신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책의 의미가 윤리적인 것(ein Ethischer)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때 머리말에다, 지금은 실제로 거기에 없는 한 문장을 적을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께 그 문장을 적어드리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에게 아마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저는 제 작품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쓰고 싶었습니다: 여기 있는 것과 제가 쓰지 않은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것은 제 책에 의해,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한계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엄격하게, 오직 그렇게만 한계 지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짧게 말해,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지껄이는 모든 것을 저는 제 책 안에서 그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확정해 놓았다고 말입니다.”[각주:8]

 

2. 그러나 이러한 명시적인 차이는 우리에게 오히려 추가적인 의문만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과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모두 윤리적인 것이 언어 안에서 표현될 수 없으며 그에 관한 모든 철학적 물음이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논증을 통해 수행되는 철학적 사유의 전통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은 정당화되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말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스스로를 보여준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확신은 그저 모종의 직관에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의 언어철학을 채택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지성적으로 합당한 유일한 설명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르나크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이 순수한 신비주의적 통찰로부터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신비로운 것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그것에 관해 설명하거나 정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언어가 그것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말하거나, 묘사하거나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무의미해지는 신비로운 것을 명백하게 의미하고 있다. [...]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신비주의자라 불릴 수 있다.”[각주:9]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논리 실증주의자들 사이의 차이가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의 차이로부터 갈라져 나온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오랜 시간 천착하였으나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단 한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러나 논고에서 분명한 진리로 공언되고 있는 유아론의 주체(Subjekt)에 관한 문제이다.[각주:10]

앞서 설명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와 윤리를(그리고 논리적 명제와 윤리적 명제를) 서로 다른 이질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양자는 자연과학의 명제들과 차별화되는 특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논리와 윤리가 모두 논고안에서 초월적인(transzendental) 것으로, 즉 언어와 세계의 조건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는 학설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는 초월적이다(Die Logik ist transzendental).”[각주:11]
“윤리가 언표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윤리는 초월적이다(Die Ethik ist transzendental).
(윤리와 미학은 하나다.)”[각주:12]
 “윤리는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윤리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조건(eine Bedingung der Welt)이어야만 한다.”[각주:13]

이승종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언급으로부터 필연성이 지배하는 논리와 윤리의 세계가 우연성이 지배하는 경험 과학의 세계와 구분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각주:14] 이는 달리 말해, 절대적 가치를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윤리적 명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동어반복과 모순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 필연성을 구현하려 시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각주:15]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1929년에 행한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과학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사용되는 우리의 말들은 의미와 뜻, 즉 자연적 의미와 뜻을 포함하고 전달할 수 있을 뿐인 그릇들입니다. 윤리학은, 만일 그것이 어떤 것이라면, 초자연적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들은 오직 사실들만을 표현할 것입니다. [...] 저는 말하기를, 사실들과 명제들에 관한 한, 오직 상대적 가치와 상대적 좋음, 옳음 등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계속해 나가기 전에, 이것을 좀 명백한 예에 의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올바른 도로는 자의적으로 미리 정해진 목표로 인도하는 도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리 정해진 목적지와 별도로 올바른 도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분명합니다. 이제, ‘절대적으로 올바른 그 도로’라는 표현에 의해 우리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봅시다. 저는 그것은 이런 도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가야할 도로, 또는 가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도로. 그리고 비슷하게, 절대적 좋음[善]은, 그것이 기술될 수 있는 사태라면, 이런 것일겁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경향들과는 별개로, 필연적으로 성취할 것, 또는 성취하지 않으면 죄스럽게 느낄 것. 그런데 저는 그와 같은 사태는 하나의 키메라, 즉 망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태도, 그 자체로는, 제가 절대적 심판관의 강제력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각주:16]

인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만약 정언명령의 강제력이 사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논리적 필연성을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태는, , 필연적으로 맞아 떨어져야만 하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리적 명제가 주장하는 사태의 필연적 형식은 오직 뜻이 있는 명제가 지닌 논리적 형식의 유비(Analogie)로서만 성립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가상적으로만 모든 경험을 넘어설 수 있다.’; 그렇다, 이 단어조차 그저 가상적인 뜻을 지니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뜻이 있는 표현의 유비로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7]

이러한 결론은 우리를 무의미한 윤리적 명제로부터 그러한 명제를 사용하는 주체의 내적 상태에 대한 탐구로 이끈다.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에게 있어 세계가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윤리적 요구는 세계는 맞아떨어진 것이다(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각주:18]라는 우연성의 세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절대적 가치는 본질적으로 언어 안에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윤리적 명제를 통해 이러한 가치의 중요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주체는 곧바로 언어의 한계(Grenze der Sprache)에 부딪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저는 하이데거가 존재(Sein)와 불안(Angst)으로 뜻한 바를 곧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의 한계들로 달려가 부딪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경탄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경탄은 질문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 없고, 그 대답 또한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은 선험적으로(a priori), 그저 무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로 달려가 부딪칩니다. 이러한 부딪침을 키에르케고르 또한 보았으며, 심지어 그것을 매우 유사하게 (역설로 달려가 부딪침)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로 달려가 부딪침이 윤리입니다. [...] 그러나 이 경향성, 이 부딪침은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이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알고 있었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기, 미쳐 날뛰는 짐승이여, 무의미를 말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저 무의미를 말하거라,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각주:19]

우리는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에 앞서 있는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의 영역을 인정하며 바로 이 영역으로부터 윤리적 명제가 도출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도대체 왜 존재자이며 오히려 무()가 아닌가[각주:20]라고 물었던 하이데거의 철학과 근친성을 드러낸다.[각주:21]

논고의 언어철학에 따르면,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그 사태가 거짓인 경우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한 뜻을 지닌다. 반면 이 명제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존재하는 것 역시 명백하게도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존재에 관한 물음이 존재론적 역설에 직면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논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험, 무언가가 그러한 사태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경험이 아니다.[각주:22]

결론적으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무엇 그 자체에 대한 경험’, 즉 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따라서 사물들이 어떠한가에 대한 일상적 경험과는 구별된다.”[각주:23] 후자의 경험은 자연과학의 탐구 대상과 차별화되는 것으로서, 우리를 언어의 한계로 이끄는 것이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의 한계로 달려가 부딪침으로부터 초월적 주체의 존재를 논증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윤리적 명제를 통해 언어의 한계에 부딪침으로써 그 한계에 마주 서 있는(Gegen-stand) 자신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각주:24]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윤리적 명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명제를 사용함으로써 절대적 가치를 표현하려 시도하는 윤리적 주체의 의지이다. 이로써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해소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문제가 세계와 불화를 겪고 있는 주체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 비트겐슈타인이 앞서 편지에서 주장했던 논고의 윤리적 의미란 주체가 어떻게 세계와 화해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와 같은 물음들에 대한 통찰이다.

“나는 신과 삶의 목적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의 눈이 시야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그 안에 서 있음을 안다. 우리가 세계의 의미라 부르는 어떤 것이 문제적임을 안다. 이러한 의미가 세계의 안이 아닌 바깥에 놓여 있음을 안다. 삶이 세계라는 것을 안다. 나의 의지가 세계를 관통함을 안다. 내 의지가 선하거나 악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선과 악이 세계의 의미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삶의 의미, 즉 세계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 부를 수 있다. [...] 나는 세계의 사건들을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완전히 무력하다. 나는 오직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기를 포기함으로써만 세계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고-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각주:25]
“소망과 그 실현 사이에 어떤 논리적 연결도 없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 사실이다. 그리고 행복한 이의 세계가 불행한 자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각주:26]

3. 앞선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사이의 불화가 오직 나의 의지를 포기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각주:27] 그 이유는 설령 나의 의지와 세계의 사건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운명의 은총(eine Gnade des Schicksals)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8] 윤리적 필연성이 온전히 담보되기 위해서는, 내가 의지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사건이 어떤 경우에도 일어나야만 한다. 오직 그 경우에만 우리는 그 사건을 필연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우연성의 세계와 나 자신을 일치시킬 때에만 주체는 행복할 수 있고, 이 경우 주체의 의지는 세계 전체의 의지인 신(Gott)과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나의 의지는 세계의 밖에서부터 세계에 들어오며 그것을 하나의 완결된 것으로 취급한다. [...] 우리가 구속되어 있는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단순히 운명이거나, 또는-같은 의미로-우리의 의지에 예속되지 않은 세계이다. 나는 운명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두 개의 신성(Gottheiten)이 있다-하나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예속되지 않은 나이다.”[각주:29]
“시간 속에서 살지 않고, 현재 속에서 사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나는 세계와 일치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하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런 경우에 나는, 내가 예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낯선 의지와 일치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나는 신의 의지를 행한다.’”[각주:30]

그러나 나의 모든 의지를 포기하는 삶은 (그러한 삶이 가능한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주체적인 삶을 포기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을 의지하거나 악을 의지하는 것, 혹은 의지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의지하지 않는 자만이 행복한가? [그러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지하라는 것을 뜻한다!”[각주:31] 이승종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소망이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행복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신의 의지와 양심에 복종하는 데서 성취되는 것이지 현상으로서의 의지나 소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선과 행복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무의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는 것을 선한 것으로 간주했을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선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의지와 소망의 부정과 상호모순되는 것이 아니다.”[각주:32]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중요한 물음이 남는다. 신의 의지와 양심에 복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경우에 우리는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전쟁터에서 이러한 물음을 매우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일기로부터 4개월이 지난 114일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소망(Wunsch)과 의지(Wille)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게 된다. “의지 행위는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이다. [...] 소망은 행위가 아니다. 반면, 의지는 행위다.”[각주:33] 이로부터 그는 의지를 주체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입장(Stellungnahme)으로, ‘주체를 의지하는 주체(das wollende Subjekt)로 규정하게 된다.[각주:34] 슈토코프는 이를 다음과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행위에 앞서는 것과 행위의 원인(들 중 하나)을 구성하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소망’이라 부르는 것이다. 소망은 행위와 개념적으로 그리고 시간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는 인과적이며, 다시 말해 외적이고 그러므로 우연적이다. [...] 의지는 전적으로 행위의 다른 양상이다. 어떤 행위이든 간에 그것은 내적으로,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의지와 연관되어 있다. [...] 의지는 행위 그 자체이지 행위의 우연적 원인이 아니다.”[각주:35]

따라서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더이상 윤리를 세계가 이러저러해야만 한다는 특정한 소망의 실천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윤리란 주체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입장이자 관조적 행위이다. 이는 나 자신의 소망이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망의 실현을 행복과 불행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은 니체의 다음 구절에 조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삶이었던가?’ 나 죽음을 향해 말하련다.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각주:36]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의 고난을 막아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인식의 삶(Leben der Erkenntnis)을 통해서.”[각주:37]
“우리가 영원(Ewigkeit)을 무한한 시간의 지속이 아닌 무시간성(Unzeitlichkeit)으로 이해한다면, 그 경우 영원히 사는 사람은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 세계를 영원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 직관하는 것은 세계를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 직관하는 것이다.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로운 것이다.”[각주:38]

 

4. 우리는 지금까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윤리관을 자기 긍정의 1인칭 윤리로 파악하였다. 이승종이 지적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윤리는 전적으로 신과 나 사이의 문제이다.”[각주:39] 그러나 우리는 그의 1인칭 윤리가 함의하고 있는 사회철학적 통찰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가치가 외재적으로, , 사회적 혹은 역사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회가 그들이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지배적 가치를 통해 개인을 얽어매고 질식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의 세계가 처음이자 유일한 것인데! 나는 어떻게 내가 세계를 발견했는지 서술할 것이다.”[각주:40]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자살에 관한 바이닝거의 윤리관은, 가치를 사실과 동등한 이성적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3인칭 윤리가 어떻게 인간의 가치를 얽어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러나 이 주제는 다른 지면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윤리관이 함축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회철학적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어떤 문명이든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문명은, 그리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 아닌 합리적 선택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문명은, 언제나 그렇듯 종국에는 야만으로 밝혀진다.

“만약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만약 허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살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윤리의 본질에 대한 조명해준다. 자살은 말하자면 원초적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살을 탐구하는 것은, 마치 증기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수은 증기를 탐구하는 것과도 같다. 아니면 자살마저도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가!”[각주: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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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Wittgenstein, Zettel. in: Werkausgabe Bd. 8. 16 Aufl. hrsg. G. E. M. Anscombe und G. H. von Wright.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19.

Ludwig Wittgenstein, Vermischte Bemerkungen. in: Werkausgabe Bd. 8. 16 Aufl. hrsg. G. H. von Wright.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19.

  1. “Wenn etwas gut ist, so ist es auch göttlich. Damit ist seltsamerweise meine Ethik zusammengefaßt. Nur das übernatürliche kann das Übernatürlich ausdrücken.”(Ludwig Wittgenstein, Vermischte Bemerkungen, in: Werkausgabe Bd. 8,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19, 454.) [본문으로]
  2. 이승종,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논리철학적 탐구, 문학과지성사, 2002, 43쪽 참조. [본문으로]
  3.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in: Werkausgabe Bd. 1,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19, 2.18, 2.201. (이하 TLP로 표기하며, 관례에 따라 책 제목과 명제 번호를 밝힌다.) 이 책의 인용은 직접 번역하되 이영철 교수의 번역본을 참조하였으며, 특히 주요 개념어에 대한 번역은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다(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참조). [본문으로]
  4. TLP, 4.11. [본문으로]
  5. 이영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언어의 마법에 대한 하나의 투쟁, 책세상, 2016, 121쪽 참조. [본문으로]
  6.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what can be expressed (gesagt) by propositions)’말할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what can not be expressed by propositions, but only shown (gezeigt))’을 구분한다(cf. Ludwig Wittgenstein, Wittgenstein in Cambridge: Letters and Documents, 19111951, Oxford: Blackwell, 2008, 98). 두 개념의 차이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논고의 모순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P. M. S. Hacker, “Was He Trying to Whistle It?”, in: The New Wittgenstei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353-356쪽 참조. [본문으로]
  7. Anne-Marie S. Christensen, “Wittgenstein and Ethics”, in : The Oxford Handbook of Wittgenstei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796. [본문으로]
  8. “Denn Sie werden es nicht verstehen; der Stoff wird Ihnen ganz fremd erscheinen. In Wirklichkeit ist er Ihnen nicht fremd, denn der Sinn des Buches ist ein Ethischer. Ich wollte einmal in das Vorwort einen Satz geben, der nun tatsächlich nicht darin steht, den ich Ihnen aber jetzt schreibe, weil er Ihnen vielleicht ein Schlüssel sein wird: Ich wollte nämlich schreiben, mein Werk bestehe aus zwei Teilen: aus dem, der hier vorliegt, und aus alledem, was ich nicht geschrieben haben. Und gerade dieser zweite Teil ist der Wichtige. Es wird nämlich das Ethische durch mein Buch gleichsam von Innen her begrenzt; und ich bin überzeugt, daß es, streng, NUR so zu begrenzen ist. Kurz, ich glaube: Alles das, was viele heute schwefeln, habe ich in meinem Buch festgelegt, indem ich darüber schweige.”(Ludwig Wittgenstein, Briefwechsel: mit B. Russell, G.E. Moore, J.M. Keynes, F.P. Ramsey, W. Eccles, P. Engelmann und L. von Ficker,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0, 96-97쪽.) [본문으로]
  9. Justus Hartnack, Wittgenstein and Modern Philosophy, New York: Anchor Books, 1965, 39-40쪽. [본문으로]
  10. TLP, 5.62. [본문으로]
  11. TLP, 6.13. [본문으로]
  12. TLP, 6.421. [본문으로]
  13. Ludwig Wittgenstein, Notebooks 1914-1916,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77쪽. (이하 NB로 표기한다.) 이 책의 인용은 직접 번역하되 부분적으로 다음의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전쟁일기』, 박술 옮김, 읻다, 2016 참조. [본문으로]
  14. 이승종,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1인칭 윤리, 철학적 분석  6, 한국분석철학회, 2002, 76쪽 참조. [본문으로]
  15. 위의 논문, 77쪽 참조 [본문으로]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윤리학에 관한 강의」, 『소품집』,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29-30쪽. [본문으로]
  17. “Man kann nur scheinbar »über jede mögliche Erfahrung hinausgehen«; ja, dieses Wort hat auch nur scheinbar Sinn, weil es nach Analogie sinnvoller Ausdrücke gebildet ist.” (Ludwig Wittgenstein, Zettel, in: Werkausgabe Bd. 8,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19, 332.) [본문으로]
  18. TLP, 1. [본문으로]
  19. “Ich kann mir wohl denken, was Heidegger mit Sein und Angst meint. Der Mensch hat den Trieb, gegen die Grenzen der Sprache anzurennen. Denken Sie z. B. an das Erstaunen, daß etwas existiert. Das Erstaunen kann nicht in Form einer Frage ausgedrückt werden, und es gibt auch gar keine Antwort. Alles, was wir sagen mögen, kann a priori nur Unsinn zu sein. Trotzdem rennen wir gegen die Grenze der Sprache an. Dieses Anrennen hat auch Kierkegaard gesehen und es sogar ganz ähnlich (als Anrennen gegen das Paradoxon) bezeichnet. Dieses Anrennen gegen die Grenze der Sprache ist die Ethik. [...] Aber die Tendenz, das Anrennen, deutet auf etwas hin. Das hat schon der heilige Augustin gewußt, als er sagt: Was, du Mistwieh, du wilst keinen Unsinn reden? Rede nur einen Unsinn, es macht nichts!”(Ludwig Wittgenstein, Ludwig Wittgenstein und der Wiener Kreis. Gespräche, aufgezeichnet von Friedrich Waismann, Frankfurt am Mein: Suhrkamp, 2019, 68-69쪽.) [본문으로]
  20. 마르틴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정표 1, 신상희 옮김, 한길사, 2005, 174. [본문으로]
  21. 이승종, 반시대적 고찰: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12, 한국현상학회, 1999, 403쪽 참조. [본문으로]
  22. TLP, 5.552. [본문으로]
  23. 이승종, 앞의 논문, 400. [본문으로]
  24. 김현균, 김도식, 논리-철학 논고초월적(transzendentla)’ 개념에 관하여-세계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논리와 윤리, 범한철학 100, 범한철학회, 2021, 382-383쪽 참조. [본문으로]
  25. NB, 72-73쪽. [본문으로]
  26. NB, 77쪽. [본문으로]
  27. NB, 73쪽 참조. [본문으로]
  28. 같은 곳. [본문으로]
  29. NB, 74쪽. [본문으로]
  30. NB, 74-75쪽. [본문으로]
  31. NB, 77. [본문으로]
  32. 이승종,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1인칭 윤리」, 83쪽. [본문으로]
  33. NB, 87-88. [본문으로]
  34. NB, 87쪽 참조. [본문으로]
  35. Martin Stokhof, World and Life as One: Ethics and Ontology in Wittgenstein’s Early Thought,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 206-207쪽. [본문으로]
  36.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동호 옮김, 책세상, 2007, 522. [본문으로]
  37. NB, 81쪽. [본문으로]
  38. TLP, 6.4311, 6.45. [본문으로]
  39. 이승종, 앞의 논문, 85. [본문으로]
  40. NB, 82쪽. [본문으로]
  41. NB, 91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