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Kant & German Idealism

초월 논리의 또 다른 길 -칸트, 프레게,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Soyo_Kim 2023. 12. 6. 13:36

2023-1 사회철학연습
 

초월 논리의 또 다른 길

-칸트, 프레게,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1. 칸트와 논리학의 혁신 (1): 규준(Kanon)으로서의 논리

우리는 일반적으로 칸트를 독단론과 회의론이라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를 빠져나와 합리론과 경험론의 장점을 종합했던 철학자로 평가한다. 짧게 말해, ‘경험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합리주의 철학’이라는 기획은 이후 200년의 철학사를 지배했던 칸트의 유산이다. 그러나 한층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획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남아 있던 문제들이 그간의 철학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칸트는 그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학문을 창조해야 했던바, 본고는 이를 초월 논리(die transzendentale Logik)라는 키워드로 짧게 일별해 보고자 한다. 칸트는 고전이 된 『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의 머리말(Vorrede)에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전승되어온 철학의 세 가지 분야를 서술하며 논리학(Logik)이라는 학문의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세 가지 학(drei Wissenschaften)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자연학(Physik), 윤리학(Ethik), 그리고 논리학(Logik)으로. […] 모든 이성적 인식은 질료적(material)이어서 어떤 한 사물을 고찰하거나, 또는 형식적(formal)이어서 지성과 이성 그 자신의 순수한 형식, 그리고 사유의 보편적 규칙 전반만을 다룰 뿐, 사물들의 차이(Unterschied der Objekte)를 다루지는 않는다. 이러한 형식적 철학을 논리학(Logik)이라 부르는데, […] 논리학은 어떠한 경험적인 부분도 가질 수가 없다. 즉, 논리학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사유의 법칙이 경험에서 가져온 근거에 기대는 그러한 부분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논리학이, 즉, 지성이나 이성을 위한 규준(Kanon), 모든 사유에 타당하며 입증되어야만 하는 규준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


칸트에 따르면, 논리학은 사물들의 차이를 도외시하고 그러한 사물들에 대한 모든 사유의 보편적 규칙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형식적이다. 또한, 논리학은 지성이나 이성의 규준이 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논리학이 형식적이면서 규범적인 학문이라는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일견,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만하다. 그러나 실상, 규준(Kanon)으로서의 논리학이라는 칸트의 규정은 당대에 만연했던 관점인 기관(Organon)으로서의 논리학에 대한 반박에서 비롯된 것이다.[각주:2] 베이컨의 저작인 『신기관』(Novum Organum)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논리학은 전통적으로 “객관적 주장의 정립을 위한 도구”[각주:3]라는 뜻에서 ‘기관’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이렇게 정의된 논리학은 단지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Logik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에 불과한 것으로, “대상들에 관해 올바르게 사고하는 확실한 방식에 관한 규칙들(die Regeln, über eine gewisse Art von Gegenständen richtig zu denken)”[각주:4]을 포함할 뿐이다.
분명 기관으로서의 논리학, 즉,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도 올바른 사고에 대한 규칙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그러나 베이컨이 말하는 논리학은 그저 과학적 발견을 위한 규칙을 제공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론에나 비견되는 것이며, 논리학의 범위를 정당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식 논리학자들로부터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의미에서는 논리학의 발전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각주:5]다는 혹평을 받는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저서에 『방법서설』과 『정신지도의 규칙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러한 당대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바, 철학자들이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발견의 방법론’은, 적어도, 형식논리학의 본성을 통찰하는 데 있어선 극히 무가치한 것이다.[각주:6]
요컨대 발견을 위한 규칙을 제공한다는 특징은 과학적 방법론과 논리학이 우연히 공유하는, 논리학의 본성에 의해 따라 나오는 부차적 특징에 불과하다. 논리학은 그것 없이는 전혀 지성의 사용이 일어나지 않을, 대상들과 무관한 “완전히 필연적인 사유의 규칙들(die schlechthin notwendigen Regeln des Denkens)”[각주:7]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방법론과 차별화된다. 헤르츠가 역학(Mechanik)의 모델이 지녀야 할 세 가지 요건으로 논리적 허용 가능성, 경험적 자료와의 대응 가능성, 그리고 모델의 명료성을 제시했을 때, 그는 바로 칸트의 이러한 통찰을 고려하고 있으며 명시적으로 칸트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은 1권의 고찰들과 완전히 무관하다. 개진된 모든 진술은 칸트적 뜻에서의 선험적(a priori) 판단이다. 그것들은 내적 직관의 법칙들과 자체적인 논리의 형식들에 근거한다.”[각주:8] 즉, 논리학은 경험에 적용될 수 있는 선험적 연역 체계가 성립할 수 있는 규칙들을 다룬다. 칸트는 이를 ‘일반 논리학(die allgemeine Logik)’이라 부르며, 그중에서도 지성과 이성의 규준이 되는 선험적 원리들을 다루는 논리학을 ‘순수 논리학(reine Logik)’이라 칭하고 있다.[각주:9]
 

2. 칸트와 논리학의 혁신 (2): 초월 논리의 이념

앞서 설명한 것처럼, 칸트는 논리학을 도구라는 뜻에서의 기관(Organon)으로 바라보는 전통적 관점을 숫제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철학적 논리학(Philosophical logic), 즉, 일반 논리학을 기관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칸트에 따르면 일반 논리학은 한낱 평가라는 뜻에서의 규준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일반 논리학은 형식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질료적으로, 달리 말해 인식의 확장을 위해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10] 일반 논리학과 특수한 지성 사용의 논리학을 혼동하고, 전자를 후자와 마찬가지의 기관으로 간주하는 것은 변증적인 가상의 논리학을 산출한다(daß die allgemeine Logik, als Organon betractet, jederzeit eine Logik des Scheins, d. i. dialektisch sei).[각주:11] 따라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론(die transzendentale Dialektik)에서 일반 논리학을 도구(Werkzeug)로 활용함으로써 생기는 변증적 가상에 대한 비판(eine Kritik des dialektischen Scheins)을 수행한다. 이러한 논리학의 오용에 대한 (소극적 의미의) 비판 역시 형식 논리학자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칸트의 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각주:12]
그런데 칸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초월적 논리학(die transzendentale Logik)을 두 부분으로 구성하는 미묘한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이후 엄청난 논란을 초래한다. 칸트에 따르면, 초월적 논리학은 가상의 논리학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초월적 분석학(die transzendentale Analytik)이라 불리는 진리의 논리학(eine Logik der Wahrheit)을 서술해야 하는데, 본디 이 부분만이 경험적 사용에 대한 평가의 규준(ein Kanon der Beurteilung des empirischen Gebrauchs)일 뿐이다.[각주:13] 그러나 과연, 초월적 분석학이라는 칸트의 기획은 성립 가능한 것인가? 칸트의 주장처럼 논리학이 인식의 확장에 전혀 복무하지 않은 채 평가의 규준으로만 쓰여야 한다면, ‘진리의 논리학’이라는 표현은 ‘가상의 논리학’과 단순히 대비되는 일종의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아울러 일반 논리학과 초월 논리학이 맺고 있는 관계란, 정확히, 무엇인가? 양자 중 어느 것이 더 우선적이며, 칸트가 두 학문을 모두 논리학으로 간주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물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한 곳에서 일반 논리학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고 사고 일반의 형식(die Form des Denkens überhaupt)만을 고찰하는 반면, 초월 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구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각주:14] 그러나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 즉, 내용을 다루는 논리학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일 뿐만 아니라, 앞서 칸트가 제시했던 정의와는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각주:15]
박진은 칸트가 일반 논리학과 초월 논리학의 관계를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지 못하고”[각주:16] 있다는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단편적으로 서술된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초월논리학의 본래적 과제는 무엇이고 그 과제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이며, “초월논리학은 형식논리학에 의존하거나 병렬적인 또 하나의 논리학이 아니라 <논리학의 철학적 근거지움>으로서 간주되야 한다.”[각주:17]고 주장한다. 일반 논리학의 근본 원리는 모순율과 배중율, 그리고 충족이유율로서, 논리학자들은 이러한 원리들을 그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 그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수행하지 않았고, 이에 칸트는 일반 논리학에 대한 반성, 또는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기초에 대한 탐구를 초월 논리라는 이름 아래 수행했다는 것이다.[각주:18] 요컨대 일반 논리학의 근본 원리는 모순율이며, 이러한 모순율의 형이상학적 기초인 초월 논리학의 근본 원리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다.[각주:19]
그러나 박진의 해명은 왜 초월 논리학이 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의 주장처럼, 초월 논리학이 일반 논리학에 대한 철학적 근거 지움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일종의 형이상학 내지는 사고의 형식에 관한 심리학으로 여겨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해리스는 초월 논리학에 대한 형식 논리학자들의 무관심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논리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에 있어 낯선 것인 심리학적 고찰들을 포함하는, 인식론적이고 논리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식의 조건에 관한 그러한 탐구를 무시할 것이다.”[각주:20]
이에 더해, 강은아는 박진의 주장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설득력을 결여한다고 지적한다. 첫째, 박진은 초월 논리학을 일반 논리학의 철학적 근거지움으로 파악함으로써 양자가 모두 순수 인식이나 순수 사고의 형식을 다룬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논리학은 사고의 형식을, 초월논리학은 순수 인식의 형식을 재료로서 다룬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각주:21] 초월 논리학과 달리, 일반 논리학은 사고의 형식만을 다루기 때문에 대상 관련성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각주:22]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초월 논리학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각주:23]라는 명제로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는 인식을 지성과 감관의 통일로서만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각주:24]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예컨대 구문론과 의미론의 차이라 말할 수 있다. 일반 논리학과 초월 논리학은 모두 형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논리학이지만, 전자는 그것이 모순되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사고의 형식을 다루는 반면, 후자는 (헤르츠의 모델 이론이 고려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허용된 사고와 경험적 자료와의 대응 가능성을 인식의 형식의 한 요소로서 고찰하고 있다. 강은아에 따르면, “일반논리학에서는 문장의 구문론적인 규칙이나 추론의 타당성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에 초월논리학에서는 그 문장이 대상 관련성을 가지는지, 그래서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앎을 줄 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이 있다.”[각주:25] 예컨대, 일반 논리학은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라는 문장과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동일한 주술 판단으로 파악한다. 반면, 초월 논리학은 앞의 문장을 사고이긴 하나 인식은 아닌 것으로, 뒤의 문장을 인식으로 판별한다.[각주:26] 전자는 대상 관련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사고이며 세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후자는 언제나 대상 관련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문장이 성립하기 위한 형식적이고 선험적인 가능 조건들을 고려한다.
 

3.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논리학은 스스로를 돌봐야만 한다(Die Logik muss für sich selber sorgen.).”

초월 논리학에 대한 칸트의 이러한 통찰은 청년 비트겐슈타인에게서도 계승되어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논리는 초월적이다(Die Logik ist transzendental).” (TLP 6.13) 논리는 단순히 구문론적 규칙의 제공에 그쳐서는 안 되며, 실재에 적용될 수 있는 수학적 모델들 혹은 도식들(die mathematischen Modelle oder Schemata)의 구축에 종사하여야 한다.[각주:27] 논리학이 초월적이어야 한다는 이러한 요구는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프레게의 관점에서 정당하게(rechtmäßig) 형성된 문장은 모두 뜻을 가져야만 하는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모든 가능한 문장은 이미 정당하게 형성된 것이다. (TLP 5.4733) 문장은 논리적-통사론적 사용을 통해서만, 즉 “어떤 연관들 속에서만 하나의 낱말이 뜻을 낳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규칙들” (RLF, pp. 13-14)을 통해서만 현실을 모사할 수 있다.(cf. TLP, 2.18, 3.327). 그렇기에 명제는 통사론에 따라 현실의 가능성을 묘사하고(darstellen), 그럼으로써 현실을 모사할(abbilden) 때만 뜻을 지닌다(TLP, 2.06, 2.201). 반대로, 현실을 모사하지 않는 명제는 뜻을 결여하거나 무의미하다(sinnlos oder unsinnig). 따라서 “언어의 이러한 지나치게 큰 다양성(Mannigfaltigkeit)은 인위적 규칙들을 통해 제한되어야만 한다. 그 규칙들이 언어의 통사론(Syntax der Sprache)이다.”(WWK, S. 240)
칸트의 철학에서 자발적 개념이 도식을 통해 감성화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논리적 그림은 통사론적 사용을 통해 현실의 그림이 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통사론과 칸트의 도식론(Schematismus)은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 첨예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문제 의식과 접근 방식이 헤르츠를 매개로 한 우연 이상의 유사성을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들을 철학사적 연속성 아래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지성 개념을 그 사용에 있어 제한하고 있는,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이고 순수한 조건을 이 지성 개념의 도식으로, 이러한 도식들과 함께하는 지성의 절차를 순수한 지성의 도식론으로 부르고자 한다. (……) 따라서 하나의 개념에 그것의 그림(Bild)을 마련해주는 상상력의 일반 절차에 관한 이 표상을 나는 이 개념으로의 도식이라 부른다.[각주:2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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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 ― 칸트의 개념론과 판단론을 중심으로 ―」, 『대동철학』, 제19집, 대동철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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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국, 「칸트 선험론적 논리학의 이념」, 『철학연구』 제116집, 철학연구회, 2017.

Geier, Manfred, Wittgenstein und Heidegger. Die Letzten Philosophen. Hamburg: Rowohl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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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tgenstein, Ludwig, Ludwig Wittgenstein und der Wiener Kreis. Gespräche, aufgezeichnet von Friedrich Waismann. Werkausgabe Bd. 3. 12. Aufl. B. F. McGuinness (hrsg).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19. (WWK)

  1.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B. Kraft und D. Schönecker (Hrsg.), Hamburg: Felix Meiner, 1999, S. 3. [본문으로]
  2. 손홍국, 칸트 선험론적 논리학의 이념, 철학연구116, 철학연구회, 60-68쪽 참조. [본문으로]
  3. 손홍국, 칸트 선험론적 논리학의 이념, 60. [본문으로]
  4.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Werkausgabe Bd. , 6. Aufl., W. Weischedel (Hrsg.),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2, B 76,77 / A 52. [본문으로]
  5. 윌리엄 닐, 마사 닐, 논리학의 역사 1, 박우석, 배선복, 송하석, 최원배 옮김, 한길사, 2015, 543. [본문으로]
  6. 윌리엄 닐, 마사 닐, 논리학의 역사 1, 543. [본문으로]
  7.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B 76,77 / A 52. [본문으로]
  8. Heinrich Hertz, Die Prinzipien der Mechanik in neuem Zusammenhange dargestellt, Gesammelte Werke Band 3. Leipzig: Johann Ambrosius Barth, 1894, S. 53. [본문으로]
  9.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B 78 / A53, 54. [본문으로]
  10. 손홍국, 칸트 선험론적 논리학의 이념, 63-64쪽 참조. [본문으로]
  11.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B 87 / A62. [본문으로]
  12. 윌리엄 닐, 마사 닐, 논리학의 역사 1, 5장을 보라. [본문으로]
  13.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B 87-88 / A62-64. [본문으로]
  14.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et, wie wir gewies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d. i. von aller Beziehung derselben auf das Objekt, und betrachtet nur die logische Form im Verhältnisse der Erkenntnisse auf einander, d. i. die Form des Denkens überhaupt. [] In diesem Falle würde es eine Logik geben, in der man nicht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abstrahierte.”(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B 79-81 / A 55-57.) [본문으로]
  15. 손홍국, 칸트 선험론적 논리학의 이념, 69쪽 참조. [본문으로]
  16. 박진,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 칸트의 개념론과 판단론을 중심으로 ―」, 대동철학, 19, 대동철학회, 2002, 162쪽. [본문으로]
  17. 박진,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 칸트의 개념론과 판단론을 중심으로 ―」, 163. [본문으로]
  18. 박진,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 칸트의 개념론과 판단론을 중심으로 ―」, 163-164. [본문으로]
  19. 강은아, 초월논리학은 일반논리학에 우선하는가?, 철학사상, 42,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1, 69쪽 참조. [본문으로]
  20. Errol E. Harris, Formal, Transcendental, and Dialectical Thinking. Logic and Reality,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7, p. 72. [본문으로]
  21. 강은아, 초월논리학은 일반논리학에 우선하는가?, 70-71. [본문으로]
  22. 강은아, 초월논리학은 일반논리학에 우선하는가?, 71쪽 참조. [본문으로]
  23.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B 76-77 / A 52. [본문으로]
  24. “Der Verstand vermag nichts anzuschauen, und die Sinne nichts zu denken. Nur daraus, daß sie sich vereinigen, kann Erkenntnis entspringen.”(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B 76-77 / A 52.) [본문으로]
  25. 강은아, 초월논리학은 일반논리학에 우선하는가?, 75. [본문으로]
  26. 강은아, 초월논리학은 일반논리학에 우선하는가?, 75쪽 참조. [본문으로]
  27. Manfred Geier, Wittgenstein und Heidegger. Die Letzten Philosophen. Hamburg: Rowohlt, 2017, S. 61 [본문으로]
  28. 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A 140, 141 / B 18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