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c/Phil of Logic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근본 사상과 논리의 본성

Soyo_Kim 2024. 11. 8. 03:00

2023.12.21 - [Research/Publications] -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김현균.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건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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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석사논문 제2장 제3절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근본 사상과 논리의 본성

 

잘 알려져 있듯이, 러셀은 그의 분석의 핵심 도구로 삼았던 논리의 지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처럼, 논리 상항(logical constant)의 본성과 그것의 인식론적 지위에 관한 러셀의 생각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모리스(Morris)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감각소여(sense-data)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채로 접근하기 때문에, 러셀은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주장에는 어떠한 논쟁의 여지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설명에서, 감각소여는 단독으로 우리에게 외부 세계(the external world)를 제공하지 못하며, 오히려 감각소여 더하기 그것으로부터 나온 논리적 구조들(logical constructions)이 바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논리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러셀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존재자들은 감각소여만이 아니다. 그는 논리적 대상들과 논리적 형식들 또한 직접지(acquaintance)의 대상들 속에 포함시켰다. 러셀은 […] 직접지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것을 가지는 경우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별다른 통찰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Morris (2020), p. 780.

 

요컨대 러셀은 논리학을 ‘세계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특성들 및 이 특성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에 관한 탐구’로 생각했으며 이 중 세계의 가장 보편적 특성들을 ‘논리 상항’이라 불렀지만, 그러한 논리 상항의 종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일견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감각 소여에 대한 그의 인식론에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강진호 (2009), 88-89쪽 참조).

또한, 프레게와 러셀 모두 ‘대상(object)’, ‘개념(concept)’, ‘관계(relation)’, ‘함수(function)’ 등이 존재론적이고 논리적인 최상군들(summa genera)의 이름들이라 생각했다 (Hacker (1996), p. 27; Glock (1996a), p. 199 참조). 프레게에 따르면, 문장의 포화된 부분인 고유명(proper name)은 대상을, 불포화된 부분인 함수 표현은 함수를 지시한다.[각주:1] 특히, 프레게는 문장이 논리적 대상인 진리치(truth-value)를 지시하며[각주:2], 논리 연결사들은 함수들과 관계들을 지시한다고 생각했다 (Hacker (2021), p. 35 참조). 러셀에 따르면, “모든 논리적 개념은 […] 논리적 최상군이거나 그것에 속하는 것이며, 일반화의 과정을 한계까지 진행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Russell (1992), p. 97). 즉, 우리는 개체 상항이나 술어 상항에 변항들을 대입하고 이를 다시 일반화함으로써 오직 속박 변항들과 논리적 정의불가능자들(logical indefinables)만을 포함하는 명제를 얻을 수 있다.[각주:3]

러셀은 이러한 논리적 정의불가능자들이 논리적 용어들(‘대상’, ‘개념’, ‘관계’, ‘함수’ 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순수 형식들(pure forms)이라고 주장한다 (Russell (1992), pp. 97-98 참조). 그는 이 형식들을 ‘논리 상항들’ 또는 ‘논리적 대상들(logical objects)’이라 불렀으며, 우리가 논리적 경험이나 논리적 직관(logical experience or logical intuition)을 통해 이에 관한 직접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각주:4]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상항들과 논리적 대상들에 관한 프레게와 러셀의 생각을 거부한다. “여기에서 (프레게와 러셀의 뜻에서) ‘논리적 대상들(logische Gegenstände)’, ‘논리 상항들(logische Konstante)’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TLP, 5.4) 이는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제시했던 그의 근본 사상(Grundgedanke)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나의 근본 사상은, ‘논리 상항들’은 대표하지(vertreten)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실들의 논리는 대표될 수 없다는 것이다”(TLP, 4.0312). 그렇다면 프레게와 러셀의 뜻에서 논리 상항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과 논리 상항들은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그의 근본 사상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첫째, 비트겐슈타인은 부정(∼), 논리곱(∧), 논리합(∨)과 같은 논리 상항들을 존재자들의 이름들(names of entities)이 아닌 연산들(Operationen)로 파악한다 (TLP, 5.2341; Glock (1996a), p. 199; 박정일 (2016b), 268쪽 참조). 그에 따르면 연산은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만들기 위하여 그 명제에 행해져야 하는 것이며, 모든 명제는 요소 명제들을 토대로 가지는 연산들(진리 연산들)의 결과들, 즉,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들이다 (TLP, 5.23, 5.234, 5.3). 둘째, 연산은 함수와 구별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함수는 그 자신의 논항이 될 수 없는 반면 연산의 결과는 그 자신의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a, ∼a, ∼∼a, ∼∼∼a, ……) (TLP, 5.251). 셋째, 또한 연산 ‘∼’은 ‘∼∼p=p’의 경우에서처럼 두 명제가 논리적 동치인 경우 사라질 수 있다 (TLP, 5.254). 다시 말해, ‘∼∼p’와 ‘p’는 모두 동일한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x).∼fx’가 ‘(x).fx’와 동일한 것을 말할 때는 양화사 등의 논리 상항들이 사라지며, ‘(∃x).fx.x=a’가 ‘fa’와 동일한 것을 말할 때는 동일성 기호 등의 논리 상항들이 사라진다 (TLP, 5.441; 박정일 (2016b), 269쪽 참조. ‘∼(∃x).∼fx’는 ‘∼∃x∼Fx’로, ‘(x).fx’는 ‘∀xFx’로, ‘(∃x).fx.x=a’는 ‘∃x(Fx ∧ x=a)’로, ‘fa’는 ‘Fa’로 적을 수 있다). 넷째, 이는 러셀의 생각과 달리 논리 상항들이 실재하는 대상들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일 (2013), 361쪽 참조). 만약 ‘∼’이 논리적 대상의 이름이라면, ∼을 다루는 ‘∼∼p’는 ‘p’와 다른 것을 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TLP, 5.44). 다섯째, 또한 프레게의 생각과 달리, 문장은 진리치와 같은 논리적 대상을 지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논리적 연산들은 이미 요소 명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소 명제 ‘fa’는 ‘(∃x).fx.x=a’와 동일한 것을 말한다) (TLP, 5.47). 논리 상항은 실재하는 어떤 대상도 지시하거나 대표하지 않으므로, 요소 명제 역시 대상을 지시하거나 대표할 수 없다 (박정일 (2013), 360, 362쪽 참조. 그러나 논리 상항 ‘~’은 비록 세계 안에 실재하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이 있는 쓰임’ 혹은 ‘논리-구문론적 사용’에 따라 “‘~’의 규칙들이 따라 나오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박정일 (2014), 158쪽.)을 지칭하며, 이로부터 우리가 ‘~p’, ‘~~p’, ‘~p.~p’, ‘~p ∧ p’ 등등을 무한히 형성할 때 따라야 하는 공통적 규칙이 가능해진다. 즉, 논리 상항들은 의미(Bedeutung)를 갖는다(cf. 박정일 (2013), 357-360쪽).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대상을 대표하거나 지시하는(bedeuten) 것은 오직 이름(Name)이며, 요소 명제는 이러한 이름들의 연쇄로서 오직 뜻(Sinn)을 지닌다 (TLP, 3.203, 3.22-3.221, 3.3, 4.22). 여섯째, (뜻을 지닌sinnvoll) 명제의 가능성은 이름과 같은 단순 기호들이 대상들을 대표한다는 원리에 근거한다 (TLP, 3.202, 4.0312). 즉, 이름들이 명제 안에서 대상들을 대표하고 명제 안의 이름들의 배열에 상황(Sachlage) 안의 대상들의 배열이 대응하는 한에서, 이름들의 결합인 요소 명제는 하나의 상황을 그것의 뜻으로 묘사한다(darstellen) (TLP, 2.202, 2.221, 3.21-3.22, 4.031-4.0311). 반면 ‘∼’, ‘∧’, ‘∨’과 같은 논리 상항들의 역할은 이름들의 역할과 전혀 다른 것이며, 따라서 양자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논리 상항들은 대상들을 대표하지 않으며, 요소 명제들을 토대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인 복합 명제를 산출하는 연산들이다.

그리하여 러셀의 생각과 달리 ‘대상’, ‘복합체’, ‘사실’, ‘함수’, ‘수’ 등의 형식적 개념어들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적 경험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경험은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논리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논리적 대상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Hacker (2021), p. 39 참조). 오히려 형식적 개념은 그것에 속하는 대상과 함께 이미 주어진다 (TLP, 4.12721).

무언가가 한 형식적 개념(einen formalen Begriff)에 그것의 대상으로서 속해 있다는 것은 한 명제에 의해 표현될 수 없다. 대신에, 그것은 대상의 기호 그 자체에서 드러난다(zeigt sich). (이름은 그것이 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수 기호는 그것이 하나의 수를 지칭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등등.)
형식적 개념들은 고유한 개념들처럼 함수에 의해 묘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의 표지들(ihre Merkmale)인 형식적 속성들(die formalen Eigenschaften)은 함수들에 의해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TLP, 4.126

인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형식적 개념(또는 사이비 개념)과 고유한 개념(또는 실질적 개념)을 구분하고 있다. 『논고』에 따르면, 형식적 개념을 지칭하는 낱말들은 올바르게 쓰일 경우 언제나 가변적 이름에 의해 표현된다.[각주:5] 예를 들어, ‘……한 두 대상이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 안에서 ‘대상’이라는 낱말은 ‘(∃x,y)……’로 표현된다 (TLP, 4.1272). 그리하여 색깔(color)이라는 형식적 개념을 '()ᶜ'라는 변항으로 나타낸다면, ‘붉음은 색깔이다’라는 명제는 ‘붉음 ()ᶜ' 으로 속박되지 않은 변항(unbound variable)을 포함하기 때문에 형식이 잘 갖춰진(well-formed), 뜻을 지닌 명제일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Hacker (2017), p. 213 참조). “따라서 형식적 개념어는 완전히 분석된, 형식이 잘 갖춰진 명제 안에서 나타날 수 없다” (Hacker (2000), p. 362). 이는 형식적 개념어를 고유한 개념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명제들, 즉, ‘2는 수이다’, ‘붉음은 색깔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모두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임을 함축한다 [각주:6].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 개념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은 러셀이 제시했던 유형 이론(the theory of types)에 대한 비판으로도 기능한다. 러셀은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과 같은 논리적 역설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체들, 집합들, 그리고 집합들의 집합과 같은 유형들을 구분하는 유형 이론을 제시한다 (여훈근 (2000), 92-93쪽 참조). 즉, 그는 개별자들을 가장 낮은 유형(유형 0), 개별자들의 속성을 그보다 한층 높은 두 번째 유형(유형 1), 그리고 개별자들의 속성의 속성을 세 번째 유형(유형 2)으로 구분하고 ‘X ∈ Y’와 같은 표현을 Y가 한 차수 높은 경우에만 허용함으로써 ‘X ∈ X’ 또는 ‘X ∉ X’와 같은 표현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배제한다.[각주:7]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M은 사물이다’, ‘F는 속성이다’, ‘R은 관계이다’와 같이 어떤 것이 이러저러한 유형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한다 (박정일 (2018a), 29쪽 참조).

M이 사물이라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상징 ‘M’에 의해 무언가보인다. 같은 방식으로, 이 명제가 주어-술어 [형식의] 명제라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에 의해 보인다. […] 예를 들어, 한 주어-술어 [형식의] 명제에 대해, 만약 그것이 어떤 의미이든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그 형식을 본다는 것, 그리하여 곧장 그 명제를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심지어 설령 ‘M은 사물이다’ 형식의 명제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불필요할 것인데 (동어 반복적tautologous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말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이미 당신이 [상징] ‘M’을 볼 때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Ludwig Wittgenstein, “Notes dictated to G. E. Moore in Norway”, Appendix Ⅱ to Notebooks 1914-1916, pp. 109-110.

즉, 만일 ‘M’이 사물이라는 형식적 개념에 속하는 대상의 상징이라면, 그 점은 ‘M’이 나타나는 완전하게 분석된 경험적 명제들에서 보인다 (Glock (1996b), p. 334 참조). 그러나 이렇게 보일 수만 있는 것을 러셀의 경우처럼 말하려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보일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Was gezeigt werden kann, kann nicht gesagt werden).” (TLP, 4.1212) 따라서 보일 수만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해 형식적 개념들을 고유한 개념들처럼 사용하는 형이상학적 명제들 역시 무의미하다 (Hacker (2017), p. 216 참조). 이러한 명제들은 모두 논리적 구문론(die logische Syntax)을 위반한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들이며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다 (TLP, 3.325).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말하기/보여 주기(saying/showing)의 구분으로부터 논리적 명제의 본성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으로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논리적 명제들은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 준다.

소위 논리적 명제들은 언어의, 그러므로 우주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 주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신이 그저 그것들을 바라봄으로써 이러한 속성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올바른 명제 안에서는, 당신은 무엇이 참인지를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볼 수 없다.
이러한 속성들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당신은 물어진 속성들을 지니지 않았던 언어를 필요로 할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올바른(proper) 언어여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논리적 언어를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Ludwig Wittgenstein, “Notes dictated to G. E. Moore in Norway”, p. 108.

『논고』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말해질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을 말하려 시도하는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들인 반면, 논리학의 명제들인 동어 반복과 모순은 비록 뜻을 결여하지만(sinnlos) 무의미하지는 않다 (TLP, 4.461-4.4611).[각주:8]. 이러한 명제들은 0이 산수(Arithmetik)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것처럼 상징체계에 속한다 (TLP, 4.4611). 비트겐슈타인이 파악하고 있는 논리적 명제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어 반복과 모순은 요소 명제들에 N(-ξ)을 계속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 중 극단적인 두 경우이다 (TLP, 4.46; 이승종 (2002a), 36-37쪽 참조).[각주:9] 예컨대, 요소 명제 ‘p’에 연산 N을 계속적으로 적용한 결과 ‘N(N(p, N(p)))’는 ‘(p ∨ ∼p)’와 논리적 동치인 동어 반복이며, ‘N(p, N(p))’는 ‘(p ∧ ∼p)’와 논리적 동치인 모순이다 (이승종 (2002a), 35-41쪽 참조). 둘째,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들이며 분석적이다 (TLP, 6.1-6.11). 이들은 경험적 명제들과 달리 필연적으로 참이며 뜻을 결여한다. 예컨대,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라는 동어 반복은 ‘비가 온다.’라는 경험적 명제와 달리 날씨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TLP, 4.461). 셋째, 논리학의 명제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TLP, 6.11). 또한, 동어 반복과 모순은 자기들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을 보여 주며, 모든 동어 반복은 그것이 하나의 동어 반복이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 준다(zeigt selbst) (TLP, 4.461, 6.127). 넷째, 논리학의 명제들은 뜻을 지닌 명제들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명제들로 결합시킴으로써 명제들의 논리적 속성들을 명시한다 (TLP, 6.121). 또한,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 반복들이라는 것은 언어와 세계의 형식적(논리적) 속성들을 보여 준다 (TLP, 6.12). 예컨대, ‘∼(p.∼p)’가 동어 반복이라는 것은 ‘p’와 ‘∼p’가 서로 모순임을 보여 주고, ‘(p⊃q).(p):⊃:(q)’가 동어 반복이라는 것은 ‘p’와 ‘p⊃q’로부터 ‘q’가 따라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며, ‘(x).fx:⊃:fa’가 동어 반복이라는 것은 ‘fa’가 ‘(x).fx’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TLP, 6.1201).[각주:10]. 더 나아가, 우리가 동일한 목적을 위해 동어 반복이 아닌 모순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TLP, 6.1202). 다섯째,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 반복들이라는 것은 세계의 골격(Gerüst)을 기술하거나(beschreiben), 묘사한다(darstellen) (TLP, 6.124).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논리적 명제들의 역할은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되는 명제들이 지닌 구조의 속성들(Eigenschaften der Struktur)을 보여 주는 데 있으며, 이러한 속성들은 본디 그 명제들의 구조가 보여 주는 것이다 (TLP, 4.1211, 6.12). [각주:11] 또한, 명제는 자신이 지닌 구조의 가능성(die Möglichkeit der Struktur)을, 즉, 자신이 지닌 논리적 형식을 보여 준다 (TLP, 2.033, 2.15). “명제는 현실의 논리적 형식을 보여 준다(Der Satz zeigt die logische Form der Wirklichkeit)” (TLP, 4.121). 그리고 이러한 논리적 형식은 명제가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현실과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TLP, 4.12). 그리하여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반복들이라는 것은 언어와 세계의 골격을 기술하거나 묘사한다. 여섯째, 따라서 우리는 논리적 명제들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적절한 표기법 안에서는 명제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그 명제들의 형식적 속성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TLP, 6.122).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의 본성에 관한 그의 견해를 말할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에 관한 이론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프레게와 러셀은 물론 논리 실증주의와도 차별화되는 새로운 철학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카르납과 에이어가 품었던 『논고』에 대한 오해, 그리고 형이상학에 관한 비트겐슈타인과 논리 실증주의의 견해차는 모두, 실증주의적 해석이 말할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한편으로, 카르납의 관점에서, 형이상학적 명제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탐구 대상은 없다. 따라서 어떤 탐구 대상도 갖지 않는 “형이상학의 (사이비-) 명제들은 […] 생활 감정의 표현에(zum Ausdruck des Lebensgefühls) 종사한다” (Carnap (2004), S. 105).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보일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명제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관점은 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형이상학의 탐구 대상이 없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 말할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에 관한 이론은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한 이론과 함께 철학의 결정적인 두 물음이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러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고』의] 요점은 명제들에 의해 –즉, 언어에 의해- 말해질(gesagt) 수 있는 것에 관한 (그리고 같은 것이지만, 생각될 수 있는 것에 관한) 이론과 명제에 의해 말해질 수 없되 오직 보일(gezeigt) 수만 있는 것에 관한 이론이다; 이는, 내가 믿기에,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 Wittgenstein (2008), p. 98.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활동과 명료화, 그리고 언어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수행함에 있어 러셀이 제시했던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주요한 방법론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그는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는 시도를 비판함으로써 카르납과 에이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형이상학의 극복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고』에서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형이상학이지 논리를 토대로 하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우리는 후자의 성립 가능성에 관한 일차적인 근거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차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양자는 모두 형이상학이 논리 법칙들과 명제의 형식에 관한 올바른 분석 위에 근거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달리 말해질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며,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 반복들이라는 것은 언어와 세계의 (말해질 수 없는)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속성들에 관한 탐구는 존재론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양자가 공유하고 있는 언어 분석이라는 방법론이 칸트가 제시했던 경험의 형이상학과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의 형이상학은 경험적 인식의 가능 근거를 탐구하는 학문일 뿐, 감각의 세계를 거부하지도, 배중률과 같은 논리 법칙을 부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형이상학을 “감각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서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학문으로 보았으며” (김석수 (2011), 188쪽, 12번 각주), 경험의 형이상학을 토대로 특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러셀과 카르납, 그리고 에이어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존재론과 윤리학 역시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의 개념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논고』가 논리에 기초한 세계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고찰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형이상학적인 것이 어떤 식으로든 말해질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오직 (실증주의적 해석이 간과했던) 말해질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들에 관한 탐구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 장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형이상학을 제시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서론에서 살펴본 『논고』의 의미, 즉 언표될 수 없되 드러나는 윤리적인 것을 해명하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 “따라서, 예를 들어, 우리는 문장 ‘시저는 가울을 정복했다’를 ‘시저’와 ‘~는 가울을 정복했다’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두 번째 부분은 불포화되어 있다 - 그것은 빈 공간을 포함한다; 오직 이 자리가 고유명에 의해 채워지거나, 고유명을 대체하는 표현에 의해 채워질 때만 완전한 뜻이 나타난다. 또한, 여기에서 나는 이 불포화된 부분의 지시체(Bedeutung)에 ‘함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 경우 논항은 시저이다.”(Frege (1997), p. 139.) [본문으로]
  2. “한 대상은 함수가 아닌 어떤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표현은 어떠한 빈 공간도 포함하지 않는다. 한 문장은 빈 공간을 포함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지시체(Bedeutung)를 대상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지시체(Bedeutung)는 진리치이다. 따라서 [참/거짓의] 두 진리치들은 대상들이다.”(Frege (1997), p. 140.) [본문으로]
  3. 프룹스(Proops)는 이러한 러셀의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러셀의 아이디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일반화를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상항이 한번 또는 여러 번 발생할 때 이를 변항으로 대체하고 그 결과에 그 변항을 속박하는 보편 양화사를 붙이는 작업을 “통사적 일반화(syntactic generalization)”라 부르자. 이후 “진리치-보존 일반화(truth-preserving generalization)” (이하 t-일반화로 약칭)의 예시를 통해 우리는 진리치를 보존하는 통사적 일반화의 예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8]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는 t-일반화를 통해 [9] "∀x (x는 현명하다 ⊃ x는 현명하다)"로, 더 나아가 [10] "∀f∀x (fx ⊃ fx)"로 일반화된다.“완전히 t-일반화된” 명제는 더 이상의 t-일반화를 허용하지 않는 명제이다. 예를 들어, [10]은 완전히 t-일반화된 명제인데, 왜냐하면 이 문장의 논리 상항들-"⊃", "∀x", "∀f"- 중 어떤 것에 대한 대체도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실질적 함언(material implication) 관계를 관계들에 대한 속박 변항으로 대체한 결과는, 즉, [11]  " ∀φ∀f∀x (fx φ fx)"는 거짓인데, 이는 " φ"가 그것의 의미 범위(range of significance) 내에서 두 명제가 서로 다른 진리치를 갖는 경우에만 두 명제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Proops (2007), p. 17.) [본문으로]
  4. Hacker (2021), p. 36 참조. 해커는 이러한 러셀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러셀은 ‘논리 상항들’이 논리적 명제들을 구성하는 존재자들이 아닌 순수 형식들이라고 주장하고, 이어서 그것들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논리적 경험을 가져야만 하는 논리적 대상들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감으로써 혼란을 증폭시켰을 뿐이다.”(Hacker (2021), p. 39.) [본문으로]
  5. 앤스컴(Anscombe)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약 어떤 명제 ‘φA’가 형식적 개념에 속하는 무언가에 대한 상징 ‘A’를 포함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φ-' 혹은 ‘어떤 –에 대하여, φ-’의 두 빈자리에 변항의 적절한 표기법(the appropriate style of variable)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들창코이고 대머리이다’는-‘어떤 x에 대하여 x는 들창코이며 x는 대머리이다’이다. ‘소크라테스는 대머리이지만 플라톤은 그렇지 않다’는-‘어떤 f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f이며 플라톤은 f가 아니다’이다. […] 대상이라는 개념은 ‘소크라테스’를 사용함으로써 주어진다, 속성이라는 개념은 ‘대머리이다’를 사용함으로써 주어진다. […] 그리고 각각의 경우 형식적 개념은 변항의 표기법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Anscombe (1959), p. 123.) [본문으로]
  6. TLP, 4.1272; Anscombe (1959), p. 182 참조. 앤스컴과 블랙(Black)은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생각이 프레게가 생을 마치기 얼마 전 품었던 견해, 즉, 우리가 개념에 관해 말할 때 ‘어떤 것이 개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견해와 유사함을 지적한다(cf. Anscombe (1959), p. 122; Black (1964), p. 198). [본문으로]
  7. 여훈근 (2000), 93쪽; 박정일 (2018a), 4-5쪽 참조. 이렇게 유형 이론에 의해 ‘X ∈ X’ 또는 ‘X ∉ X’와 같은 표현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배제될 경우 러셀의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러셀의 역설은 ‘집합 자신이 그 집합의 원소가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인 S를 상정할 때, (S ∈ S) ⊃ (S ∉ S)이고 (S ∉ S) ⊃ (S ∈ S)이어서 결과적으로 (S ∈ S) ≡ (S ∉ S)가 되는 역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여훈근 (2000), 89-90쪽 참조). 그러나 본문의 설명은 단순 유형 이론(the simple theory of types)에 대한 설명으로, 분지화 유형 이론(the ramified theory of types)은 본문의 설명에 해당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8. 글록은 논리적 명제들을 동어 반복과 모순으로 파악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어 반복(Tautology)’이란 ‘말해졌던 것의 반복(repetition of what have been said)’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 19세기에, ‘동어 반복적(tautological)’이라는 용어는 형식 논리, 특히 ‘a=a’라는 동일률이 우리의 지식을 확장하지 않기 때문에 사소하고 무의미하다(trivial and pointless)는 것을 나타내는 데 경멸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 비록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논리학을 동어 반복적이라고 특징지었던 최초의 학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 용어를 엄밀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던, 즉, 동일성 원리나 문자 그대로의 반복들을 포함하는 명제들에 국한하지 않고 사용했던 최초의 학자였다. 이에 더해, 그는 이것을 논리학에 속하는 것으로 무분별하게 다루어졌던 명제들의 다른 유형을 구분하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논리적 명제들이 현실을 기술하지(describe) 않으며, 언어적 규칙들을 반영한다(reflect)는 생각을 설득력 있게 옹호했다. […] 비트겐슈타인은 진리 함수적 구성이라는 관념을 통해 ‘동어 반복’에 엄밀한 의미를 부여했다. 분자 명제의 진리치는 그 명제를 진리-함수로 갖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치에 의존한다. 명제들의 진리 함수적 조합들 가운데 두 가지 ‘한계 경우들’이 존재한다. 동어 반복들은 사실들과 무관하게 참인([그리고] ‘p.∼p’와 같은 모순들은 거짓인) 조합들이며, 이것은 모든 진리 가능성들(진리치들의 할당들)에 대해 참(이거나 거짓)만을 갖는 그들의 진리표에 의해 드러난다.”(Glock (1996b), pp. 353, 355.) [본문으로]
  9. N(-ξ)는 임의의 수의 명제들에 대한 동시 부정을 산출하는 연산으로, ξ는 괄호 쳐진 표현의 항들을 그것의 값으로 삼는 변항이고, 변항 위의 선은 변항이 괄호 속에 있는 모든 값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나타낸다(이승종 (2002a), 33쪽 참조). [본문으로]
  10. ‘∼(p.∼p)’는 ‘~(p ∧ ~p)’로, ‘(p⊃q).(p):⊃:(q)’는 ‘{(p ⊃ q) ∧ p} ⊃ q’로, ‘(x).fx:⊃:fa’는 ‘∀xFx ⊃ Fa’로, ‘fa’는 ‘Fa’로, ‘(x).fx’는 ‘∀xFx’로 적을 수 있다. [본문으로]
  11.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구조의 속성’을 ‘내적 속성(interne Eigenschaft)’이라 부르기도 한다(cf. TLP, 4.12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