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화양코뮌 발제문
경제-철학 수고의 배경
2장 초기 맑스주의 철학을 표현주의의 계보학에 위치시킴- 주체 변형으로서의 노동소외
1절 1770년대 헤르더를 위시한 독일 표현주의 이론의 계보학으로부터 맑스 철학을 이해해봄
1장에서 우리는 맑스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맑스의 초기 철학을 윤리적 주체의 관점에서, 푸코의 표현으로는 ‘자기 배려’의 관점에서 파악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파악을 시도할 때의 문제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맑스 철학의 이러한 특징들을 드러내야할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맑스의 초기 철학에서 주체의 변형, 주체와 진실의 관계, 윤리적 실천의 영역과 같은 문제들이 나타난다면, 이 문제들이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가에 대한 계보학을 구성해야할 필요가 있다. 1
얼핏 보기에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맑스가 헤겔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고, 헤겔을 비판하면서 나왔던 포이어바흐의 철학 역시 맑스가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고 있다. 이들의 철학에서 자기 배려의 문제가 발견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헤겔, 포이어바흐, 맑스에게서 나타나는 자기 배려의 문제의식과 그들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를 파악하는 일은 비교적 쉬운 작업이라 할지라도, 도대체 헤겔이 어떤 이유에서 이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를 통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계보를 1770년 대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구》를 발표했던 표현주의 사상가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로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헤르더로부터 시작되는 표현주의의 계보학에서 주체 변형으로서의 자기 배려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맑스 초기 철학에 내재되어있는 자기 배려의 문제들을 표현주의 이론이 가졌던 문제의식 틀 내에서 사유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사유해보려는 표현주의의 중요한 문제의식 두 가지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것은 인간학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와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것은 언어철학에서의 문제이다.)이다. 인간학의 문제는,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과 자연 안에서의 객체로서의 인간 사이의 미묘한 긴장에 의해 발생한다. 언어철학의 문제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관계, 즉, 언어가 실재를 어떠한 방식으로 반영하며, 즉물적 정의는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2
우리는 이 양자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표현주의 이론이 어떠한 이유에서 자기 배려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지에 대해 확인해 볼 것이다. 이 시도가 만족스럽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맑스의 초기철학을 자기 배려의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헤르더와 헤겔, 맑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해보는 새로운 철학사를 구성하는 일도 가능하다.
2절 근대 이후 인간학의 문제의식- 근대 이후의 인식 개념으로 다시 돌아가 봄
헤르더의 표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고의 1장 5절에서 다루었던 근대 이후의 인식 개념에 다시 한 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에서 다룬 것처럼, 데카르트가 이성의 정당한 자기 사용으로부터 인식의 예비 단계(인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준비를 통해 주체를 변화시킴으로서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를 분리시켰음을 알고 있다. 정당한 이성의 자기 사용은, 말하자면 고장 없이 돌아가는 기계 장치에 비유해볼 수 있다. 기계만 제대로 돌아간다면, 외부의 어떠한 작용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시도했던 이러한 단절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생각에 대비되는 세계관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성이라는 개념이 데카르트 이후부터 결정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면, 이러한 이해의 밑바탕에는 ‘해석적 세계관으로부터 탈피함’이 자리하고 있다. 해석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간단히 말해 세계를 의미의 범주들로 이해하는 것, 즉 세계를 이를테면 이념들의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혹은 하나님의 의지가 세계 속에 표현됨으로서 드러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비유로, 세계를 텍스트로, 우주를 책으로 파악하여, 신이 쓴 책을 인간이 읽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이러한 세계관의 대표적인 생각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러한 세계관은 “사물에 대해 의인적으로 투사함”으로 파악되곤 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저술한 글에서, 혹은 갈릴레오의 반대자들이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에 대해 기고했던 반박문에서 이러한 경향을 확인해볼 수 있다.
a)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K11A1)
아리스토텔레스와 히피아스는 그[탈레스]가 혼이 없는 것[무생물]들에게도 혼을 부여했는데, 마그네시아 돌[자석]과 호박한테서 그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Ⅰ. 24) 3
b) 동물에게는 머리 부분에 일곱 개의 창이 있다. 이를 통해 공기는 육체의 성막에 입장할 수 있고, 육체를 밝게 하고 따뜻하게 하며 양육한다. 이 소우주에서 이러한 창조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두 개의 콧구멍, 두 눈, 두 귀, 그리고 하나의 입으로 나타난다. 대우주인 하늘에서도 이와 같다. 잘 알려진 두 별, 불길한 두 별, 두 발광체, 그리고 수성이 그것이다. 이로부터, 그리고 자연 안에 있는 이와 유사한 것들, 예컨대 열거할 필요까지는 없는 일곱 금속 등으로부터 우리는 행성의 수가 필연적으로 일곱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4
¹¹
사물에도 혼이 깃든 것처럼, 모든 사물에 제 나름의 가치와 의지가 있는 것처럼 파악하는 신성화된 세계관, 신이 자신의 의지를 세계 속에 드러냄으로써, 모든 사물에 신이 부여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 근대인들이 –마음속에 내재한 의미들을 자의적으로 사실에 투영하는-유아적 경향으로 비판했던 이러한 생각들이 위의 인용문에서 발견되고 있다.
3절 근대와 근대 이전에서의 인식 개념 문제를 자아의 위상으로 이해해봄
그런데 이렇게 이성이 세계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세계 안의 사실들을 차이와 위계가 없는 독립적인 사실들로 파악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자아가 분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을 자아 안에서의 두 경향으로, 즉 가상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경향과 척박한 실재만을 보는 경향의 투쟁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우리가 지금 궤적을 따라가고 있는 철학사에서 두 번의 시기에 나누어 포착된다. 한번은 근대 이전과 근대 사이에 나타나는 외부적 의미의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철학들에 나타나는 내부적 의미의 분열이다.
첫째로, 근대 이전에는 주체를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연관으로 규정한 반면에, 근대의 주체는 자기 규정적이다. 이를테면 자기 현존의 개념은 Beisichsein으로, Bei sich sein의 합성어이다. Er ist bei sich라는 독일어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 머문다.”로 직역된다. 이것의 의미는 또한 “그는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다.”, “그는 제정신이다.”를 의미하며, 나아가 “그는 자유롭다”로 의미가 확대된다. 헤겔은 자기 자신에게 머묾을 의미하는 Beisichsein을 통해, 자유 개념으로 나아간다. 이에 따르면 한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그가 “타자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음”이라는 상태로부터 풀려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스스로 규정을 세우고 그 규정에 따름”이라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즉, 자기규정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머물 때 가능하며, 헤겔은 이에 따라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 머물 때 이를 자유라고 말한다. 5
반면 고대에서의 주체는 인간이 우주적 질서에 감응하며 스스로의 이성에 순응할 때 자기 자신에 온전히 머물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유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우주적인 질서가 부재한 상태에서, 혹은 이러한 질서에 무지한 상태에서 자기현존과 명료함에 도달한 주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환상으로부터 벗어남은, 근대 이전의 의미에선 사물의 질서를 보는 동시에 이러한 질서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주체는 본질적으로 질서 혹은 환상의 상이다. 이러한 개념은 자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므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 역시 의미 있는 질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의미 있는 질서가 초월적으로 존재하므로, 세계 내부의 사물들은 이 질서와 일치해야한다.” 데카르트의 Cogito는 이 지점에서 근대 이전의 주체 개념과 결정적인 단절을 이루고, 따라서 자아의 실존뿐만 아니라,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의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할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겉으로 보기엔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근대 사상가들은 자기규정의 주체를 통해 해석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러한 자유 개념 사이의 미묘한 대립과 긴장을 온전히 풀어내지는 못했다. 따라서 두 번째로, 위에서 언급하였던 자아의 두 경향과 그들 사이의 투쟁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의미 있는 질서를 없앤다는 것은, 자아의 개념 역시 재정의된다는 것을 뜻하며, 이에 따라 새롭게 정의한 자기 규정적인 주체 역시 독립적인 원자라는 한 측면과, 경험의 보편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다른 측면의 이중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했던 작업을 다시 상기해보자. 이 작업은 “초월적이고 필연적인 질서가 세계 내부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주장을 추방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즉, 초월성은 세계 내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따라서 사물들은 서로 우연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 주장을 따라 가다보면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연의 질적 요소들을 양적요소로 환원하여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자아 내부의 한계를 설정하려고 시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로, 세계가 텍스트나 의미가 아니라는 이들의 주장은 그러한 우연적 세계가 이해될 수 없으므로 거기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수학적 추론과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고 사물들 안의 우연적 규칙성을 발견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작적 통제를 가능하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연을 객체적인 하나의 원자로 이해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복잡한 사물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전체적인 속성이 아닌, 구성요소들의 작용적인 관계를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객체는 결국 외관상 질적으로 구분 가능해보여도 사실은 동일한 양적 요소들의 배열, 혹은 구성의 차이를 통해 환원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자기의 소유가 완전해지기 위해선, 우리는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초월적인 질서나 의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연이 그 자신의 내적 질서를 통해 움직일 뿐이기에, 우리는 이미 주어져있는 의미를 더 이상 사물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다만 이러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아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세계가 다만 가치중립적이고 (브라운 운동처럼) 우연적인 상호 연관의 장소라면, 이제 이러한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 통제하는 역할은 온전히 이성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규정하는 주체는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본질에 따라 우리가 행해야 할 것, 우리의 의지를 스스로 규정한다. 베이컨이 말한 “아는 것이 힘이다.”와 같은 경구나, 막스 베버가 표현했던 “탈마법화된 사물관”이 의미하는 것도 결국, 세계의 질서 속에서 세계와 합일을 추구하는 종전의 주체로부터, 세계를 이성의 질서에 따라 조작하고 통제하는 근대적 주체로의 이행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그러나 우연성을 통제하는 자기규정적인 주체와 우연적이고 어떠한 의미나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으로서의 객체의 이분법은 유지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주체 역시 세계 안에, 즉,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라는 존재론적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러한 욕망이나 의미와 같은 질적 요소들은 동시에 객체성의 원리에 따라 양적 요소로(즉, 가치 없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객체성을 통제하는 자기 규정적인 주체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종속적인 주체 사이의 불화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결정론의 문제에서 이들은 심각한 갈등을 빚는다.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유가 결정론 안에서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세우는 엄격한 필연성에 의해 제약되기 때문이다.
4절 근대의 자아 분리에 대한 헤르더의 비판- 표현주의 인간학
결국 근대 철학자들은 이런 미묘한 긴장을 해소하거나 종합하기보다는 이것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를테면 칸트에게 있어 자유의 요청은, 자연의 자극, 경향과 미묘한 대립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반면 계몽의 주류적인 사상에서는, 인간을 자연 안에서 욕망하는 존재로 놓고, 자연으로부터 행복과 선함에 이르기 위한 이성에 의한 합목적적인 계획에 규정된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칸트가 이 문제를 그대로 안고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립은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넘어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성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소유함으로서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지만, 이것은 또한 우연적인 자연의 내적 질서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규정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것은 우연성의 영역 안에서 불가능해 보인다는 문제가 있다. 즉, 자유는 인간을 객체로 파악할 때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도출되는 선함은 자기규정의 완성으로 이루어지는 선함이랑 대립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도덕과 같은 가치들은 분명히 질적으로 차이나는 것들인 반면, 자연 안에서 이것들은 분석을 통해 양적 차이로 환원됨으로서 사라져버린다. 즉, 척박한 실재로서의 세계 안에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칸트가 도덕을 초월적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헤르더는 이러한 결론을 매우 불만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는 인간 본성의 객체화를 거부했으며, 이러한 주체-객체의 분리 자체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그는 대안적 인간학으로 표현주의(Expressionism)로 불리는 사상을 전개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 정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표현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삶과 활동의 영역이 하나의 표현이라는 것에 있다. 나는 이러한 표현이 데카르트 이후로 주체-객체로서의 인간이 분리됨으로써 제거되어야할 것으로 여겨졌음을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의미나 표현, 목적은 데카르트가 ‘해석적 세계관’을 넘어섬으로써 같이 사라져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빌려 설명하자면, 자연은 이제 작용인의 설명으로만 그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목적인은 이러한 설명에 불필요한 것으로, 나아가 추방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르더의 이론은 ‘해석적 세계관’으로 다시 회귀하자는 순진한 주장에 머물러있지 않다. 말하자면 그는 ‘해석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동시에, 작용인으로 설명되는 기계적 세계관 역시 넘어서려고 한 것이다. ‘해석적 세계관’에서의 표현이란 초월적 질서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르더의 이론에서의 표현은 질서에 대한 재현이나 대응이 아니고, 우리가 자기규정으로서 성립한 의지와 윤리를 실현하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욕을 하거나 무언가를 때려 부술 때, 이것은 기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는 운동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표현주의의 관점에서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난 분노를 표현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주체의 특정한 상태의 표현이며, 우리가 앞서 설명했던 자기 배려의 윤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도 이해해볼 수 있다. 우리는 주체에 내재되어있는 삶의 형식들을 표현한다.
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개념은 복원된다. 왜냐하면, 삶을 표현으로 보는 것은 또한, 삶을 자기규정을 통해 구성한 목적(혹은 윤리)의 실현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아의 실현인 동시에 이념의 실현이며, 따라서 헤르더는 표현주의를 통해 해석적 세계관과 기계적 세계관 양자를 모두 넘어서려 한다. 해석적 세계관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자기실현의 영역과 기계적 세계관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 전체의 목적의 영역은 표현주의를 통해 모두 사유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세계를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며, 개별자의 특수성을 보존하는 형태의 윤리이다. “각각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척도를 가지며, 동시에 모든 감각적 느낌에 대한 자신만의 색깔을 갖는다.” 우리가 앞에서 이것을 자기배려의 개념을 통해 확인하였음은 물론이다. 6
헤르더의 표현주의를 이해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본고는 표현주의와 이전의 철학자들-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등의 관계를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의 실현(목적)은 무질서로부터 질서로의 이행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이러한 경향은 자연의 것이다. 그러나 헤르더에게 있어 이 지점은 세계가 주체에 가하는 압력에 대항하여 주체가 자기 자신의 형태를 실현하고 유지하려는 내적 힘(Krȁfte)의 선언이다. 따라서 헤르더는 이를 통해 자기의 실현에 있어 내부로부터의 실현과 외부적 이념의 실현이라는 양자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헤르더가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헤르더의 자기 스스로 전개하는 독립적 주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르더에게는 또한 스피노자의 영향이 드러나는데,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모든 사물은 자기 보존의 힘을 그 자신에 내재하고 있다.) 개념은 헤르더의 힘의 개념(Krȁfte)과 연관을 맺고 있다. 7
표현주의 이론의 또 하나 중요한 생각은, 형상의 실현은 형상의 본질을 분명하게 규정함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내가 보았을 때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표현주의를 받아들인 헤겔과 맑스의 차이가 이 지점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분노하고 있음”이라는 상태는 내가 그것에 대한 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음으로서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행하는 실천적 행위들은 나의 느낌과 열망을 명확하게 표현함으로서(규정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자신의 느낌을 분노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이 표현주의의 생각이다. 따라서 표현주의에서의 표현은 윤리와 목적의 실현뿐만 아니라, 그러한 목적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점에서 표현주의는 근대에서 발생한 자기 인식(Gnothi sauton)의 문제 속에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의 문제를 다시 끌어들이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기 인식(삶의 목적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것)은 자기배려(그렇게 명료화한 목적을 삶 속에서 표현하는 것)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명료화하고(Gnothi sauton), 그것을 다시 표현함으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윤리적으로(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형된다.(Epimeleia Heautou)
- 우리는 1장에서 자기배려의 주체가 진실을 얻기 위해 스스로에게 가하는 탐구, 변형, 배려를 푸코의 정의를 빌려 ‘영성’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푸코에게 있어서는 고대 철학에서 자기 배려의 계보학을 구성하기 위한 의도로 쓰였다는 점과, 이 개념이 영지주의,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종교적 개념으로 쓰였다는 사실 때문에, 맑스 철학을 분석함에 있어 이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자칫 맑스 철학에 종교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따라서 영성의 정의를 그대로 차용하되, 이것을 앞으로는 자기 배려의 문제로 통칭하기로 하겠다. [본문으로]
- 표현주의란 여기에서, Isaiah Berlin, 《Herder and the Enlightenment》, ed. Earl R. Wasserman, Aspects of the Eighteenth Century, Baltimore: Johns Hopkins Press, 1965의 정의를 가져온 것이다. 벌린은 여기에서 헤르더의 사상을 표현주의(Expressionism)로 정의하며, 테일러는 Charles Taylor, 《Hegel》, 1부 사변이성의 요청 中 1장 새 시대의 목표, 번역 정대성, 그린비, 2014, p. 34에서 20세기에 나왔던 표현주의 운동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표출주의(Expressivis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없어, 표현주의로 통칭한다. [본문으로]
-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탈레스 단편 35(DK11A1) [본문으로]
- Francis Bacon, 《Francis Bacon: A Selection of His Works》, ed. Sidnet Warhaft, Toronto: Odyssey Press, 1965, p.17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Charles Taylor, 《Hegel》, 1부 사변이성의 요청 中 1장 새 시대의 목표, 옮긴이 역주, 번역 정대성, 그린비, 2014, p. 20 [본문으로]
- Johann Gottfried Herder, Ideen, Ⅷ.Ⅰ, 《Herders samtiche werke》, Hrsg. Berhard Suphan, Berlin: Weidmann, 1831, Band 13, S. 291. [본문으로]
- Charles Taylor, 《Hegel》, 1부 사변이성의 요청 中 1장 새 시대의 목표, 번역 정대성, 그린비, 2014, p. 3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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