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Kant & German Idealism

『정신현상학』의 「서론」과 「서설」, 상승과 하강의 변증법적 운동

Soyo_Kim 2023. 12. 4. 09:55

2023-1 사회철학연습

 

『정신현상학』의 「서론」과 「서설」, 상승과 하강의 변증법적 운동

 

1. ‘정신의 현상학’의 의미와 「서설」의 위상

전공자들은 헤겔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동시에 가장 난해하고 모호한 저작으로 주저하지 않고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을 꼽는다.[각주:1] 그러한 평가를 방증하듯, 이 책은 어떤 주제를 서술하고 있는지조차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을 지니고 있다. 정신(Geist)과 현상(Phänomen). 이 두 가지 주제어는, 일견, 서양 근대 철학의 주된 목표와는 이질적인 것으로, 즉,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며 주체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대상들의 참된 본성을 알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인식론적 기획(the epistemological project of showing how knowledge is possible, of explaining how we as subjects can know the true nature of objects)”[각주:2]과는 동떨어져 있는 개념들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한편으로, 서양 근대 시기의 철학자들 대다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그들 인식론의 핵심과제로 여겼다. 이때, 주체는 사유·이성·도덕성을 지닌 의식적 인간으로[각주:3], 대상은 이러한 의식적 인간에 의해 파악되는 자연으로 특징지어진다.[각주:4]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 정신(Geist)은 인간의 의식으로 환원될 수도, 그러한 의식들의 총합으로 파악될 수도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철학이 다루었던 주체의 개념과 차별화된다. 마찬가지로, 정신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해 있는 전통적인 신으로 여겨질 수도, 신적 직관이나 신비주의적 수행을 통해 합일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도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의 신학이 다루었던 신(神)의 개념과 차별화된다. 오히려, 헤겔 철학 안에서 정신은 인간을 매개체로 삼음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철저하게 합리적인 존재로 그려진다.[각주:5] 당연하게도, 이러한 개념이 위에 제시된 인식론적 기획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파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인식론적 회의주의(Skepticism)가 현상(Phänomen)의 불확실성을 자양분 삼아 자라났음을 철학사의 수없이 많은 사례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흄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모두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한,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인과성의 개념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각주:6] “나는 왜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과거의 사례를 넘어서는 어떤 결론을 이 경험으로부터 형성하는가라는 물음을 되풀이할 것이다. … 원인과 결과의 궁극적 연관을 발견하려는 우리의 기대를 … 이성을 통해서 납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각주:7] 요컨대 흄에게 있어 모든 지식은 우연적이고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지각된 경험, 즉 현상일 뿐이다.[각주:8] 따라서 “아무것도 우리에게 약속하지 않는, 심지어 허용된 무지상태에 은거하는 것조차 약속하지 않는 회의론”[각주:9] 으로부터 빠져나가고자 했던 일군의 철학자들이 현상의 불확실성을 넘어서는 인식론을 구축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현상이 성립하기 위한 선험적 가능 조건을 밝힘으로써, 또는 ‘대상들 그 자체의 참된 본성’에 대한 합리적 추론을 제시함으로써 현상의 우연성과 대비되는 확고한 지식을 얻고자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전통적인 불신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금 현상을 기술하겠다고 선언한, 더욱이 정신의 현상학을 기술하겠다고 선언한 헤겔의 의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더해, 제목의 의미를 한층 더 유추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방대하기 짝이 없는 주제어들을 종횡무진으로 포섭하고 있는 『정신현상학』의 내용 그 자체이다. 단순히 열거만 하더라도, 칸트로부터 셸링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비판, 주인과 노예의 인정 투쟁, 고대 폴리스의 부흥과 멸망, 안티고네 비극에 대한 해석, 프랑스 혁명과 자유론, 자연 종교로부터 계시 종교로의 이행 등이 『정신현상학』에서 다루어진다. 핀카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정신현상학』은, 무엇에 관한 책인가?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론」[Einleitung]에서 분명하게도 이 작품이 지식 이론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 따라서 누군가는 이 작품이 감각 및 귀납의 증거에 관한 문제들, 인식론적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들이 의식에 있어 내재적인지 외재적인지[와 같은 문제], 그리고 그와 유사한 문제들과 연관된 작품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현상학』을 아우르는 주제들은, 그 대신에, 근대 철학 독자들에게 최소한 인식론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 짧은 도입부의 장과 함께, 초기 근대 유럽의 특징들의 형성, 칸트 윤리학, 종교의 철학과 역사학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어들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의 일반적 목표를 이해하는 일은 헤겔이 [그의] 지식 이론을 이 모든 다른 문제들과 어떻게 연관시키는지를 보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각주:10]

이러한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정신현상학이라는 제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탐구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본디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Wissenschaft der Erfahrung des Bewusstseins«)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출간하고자 하였다.[각주:11] 이 제목은 훗날 『정신현상학』으로 대체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핵심 주제를 오롯이 지칭하고 있다. 즉, 『정신현상학』은 한편으로 우리의 자연적인 의식(das naturliches Bewusstsein)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러한 ‘의식의 경험’이라는 운동을 서술하는 학문을 스스로 표방한다.[각주:12]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Bewusstsein)이란 소박한 감각적 확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의 일상적(ordinary) 의식, 즉 세계와 대립하고 있는 개별적이고 유한한 주체들(individual, finite subjects)을 의미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신현상학』을 근대 철학이 추구했던 인식론적 기획의 일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이라는 제목은 책의 한 가지 측면만을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그가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이라는 『정신현상학』의 목표를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곳은 「서설」(Vorrede)이 아닌 「서론」(Einleitung)이다. 베커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독자들이 「서설」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기 십상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자연적 의식의 경험을 서술한다는 목표에 봉사하는 실질적인 도입부에 해당하는 것이 「서론」인 반면, 「서설」은 그 분량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일견 『정신현상학』의 목표에 대한 방법론적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각주:13] 요컨대, 『정신현상학』 전체에서 「서설」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이 책을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았을 때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서설」의 저술 시기에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저술할 때 통상적인 방식으로, 즉 「서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본문으로 나아갔던 반면, 「서설」은 본문을 모두 쓴 이후에야 완성하였다. [각주:14] 바로 이 점에서 「서론」과 「서설」은 각각 『정신현상학』의 시작과 끝을, 인간적 의식과 우주적 정신을, 전자로부터 출발하는 상승의 변증법과 후자로부터 출발하는 하강의 변증법을 대변한다. 말하자면, 「서론」은 유한한 인간의 의식이 스스로 우주적 정신의 담지자로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인식론적 도정의 도입부를, 「서설」은 무한한 우주적 정신이 자신의 대립자를 극복함으로써 자기 소외로부터 복귀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존재론적 도정의 도입부를 떠맡고 있다.[각주:15] 결론적으로, 「서설」은 헤겔이 최종적으로 확정했던 책의 제목이자 책의 또 다른 측면, 즉 ‘정신의 현상학’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 비로소 그 위상이 온전하게 드러난다.

 

2. 상승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의 「서론」

이종철은 「서론」과 「서설」을 정반대 방향에서 쓰인 도입부로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론’에서는 주체로부터 실체로 가는 길이 ‘의식의 경험의 학’으로 나타나 있고, ‘서설’에서는 실체로부터 주체로 가는 길이 ‘정신의 현상학’으로 나타난다. ”[각주:16] 더 나아가, 「서설」과 「서론」에서 표현되고 있는 『정신현상학』의 두 측면은, “진리 혹은 절대자를 한편으로 절대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셸링의 동일성의 철학과, 다른 한편으로 의식과 반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칸트와 피히테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려는 헤겔식의 시도”[각주:17]로 이해될 수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실체가 본질적으로 주체라는 것(»daß die Substanz wesentlich Subjekt ist«)”[각주:18]을 주장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공허한 형식주의에 빠진 셸링의 실체(Substanz)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에 처한 칸트, 피히테의 주체(Subject)를 통합하려 시도한다.[각주:19] 우리는 이러한 통합의 시도가 「서론」과 「서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제시되었던 근대 철학의 인식론적 기획에 대한 철학사는, 거칠게 말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일련의 답변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증발된 영혼을 인간의 내면으로 수렴하고, 그렇게 수렴된 영혼을 의식적 사유를 본성으로 하는 정신적 실체로 규정”[각주:20]했던 데카르트 이래로, 정신과 대상의 매개체인 표상, 관념, 지각, 그리고 경험은 회의주의의 표적이 된 것이다.[각주:21] 칸트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경험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선험적 가능 조건들의 체계를 밝힘으로써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만, 동시에 이를 현상의 영역에 한정지음으로써 인식 주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물자체(Ding an sich)의 문제를 남긴다.[각주:22]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근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이 물자체로부터 촉발된 주체와 객체 사이의 심연을 메우는 일이었다.

헤겔이 「서론」에서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생각 역시 “인식(das Erkennen)과 절대적인 것(das Absolute)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는 확신”[각주:23]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곧장 상대주의로 귀결된다. 만약 인식이 도구라면, 그것은 대상을 알려진 것으로 변형시킬 것이며, 그 대상의 순수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인식이 매체라면, 그것은 매개물로서의 자신의 본성에 따라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하지 못한다. [각주:24]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헤겔이 도입하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변증법(Dialektik)이다. 헤겔이 인식론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하는 변증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일상 의식은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모순을 일으키며,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의식 그 자체의 운동은 의식의 양태를 변화시킨다. 헤겔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정신현상학』에서 경험(Erfahrung)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의식이 자기 자신을 형성하며 보다 고차원의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한다.[각주:25] 따라서 의식이 그러한 변화 속에서 자신이 최초로 믿었던 순진한 진리들을 부정하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며, 헤겔은 이러한 도정을 “회의의 길(der Weg des Zweifels)”, 더 나아가 “절망의 길(der Weg der Verzweiflung)”이라 부른다.[각주:26] 그러나 이러한 회의주의는 “순전히 추상적 부정성에 그치고 마는, 순전히 견해들을 실수로 치부하는, 그리하여 스스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회의주의”[각주:27]와 차별화된다는 점에서 방법론적 중요성을 지닌다. 요컨대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은 모순과 변화 속에서 지식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의식의 극복과정에 관한 기술(記述)인 것이다.

정신의 현상학에서 의식은 낯선 것에 붙들려 있는 것(mit Fremdartigem behaftet)으로 보이게 하는 관점들과 싸워서 궁극적으로 그 관점들을 극복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자기 자신을 정신의 자기 지(知)로 보게 된다. 고립된 의존적 존재가 이런 가상(Schein)을 통과하고 넘어가는 도정은 곧 현상학이며, 그 단계들은 일련의 의식 형태들(Gestalten des Bewusstseins)로 우리에게 나타난다.[각주:28]

따라서 헤겔은 오히려 다른 철학자들이 기피했던 현상적 지식(phenomenal knowledge)과 일상 의식(common consciousness)으로 복귀하며, 이처럼 가장 일상적인 지식에서 출발할 때조차도 절대적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필연적인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각주:29] 헤겔은 이러한 도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일종의 존재론적 변증법(the ontological dialectics)을 제시한다.[각주:30] 테일러에 따르면, 이러한 변증법은 다음의 세 가지 항으로 이루어진다.

① 기준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an adequate notion of the standard involved)
② 기준 혹은 목적이라는 것에 대한 몇몇 근본적이고 올바른 관념들과 그런 기준에 상응해야 하는 표준적 특성들 (some very basic, correct notions of what the standard or purpose is, some criterial properties which is must met)
③ 기준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현실 (the inadequacy of the faulty formula by trying to ‘realize’ it, that is, construct a reality according to it)[각주:31] 

예컨대, 인식하는 주체에게 있어 인식의 기준이 되는 척도(Maßstab)는 의식 자체의 진리관이다. 그러한 척도가 참된 진리관이라면 의식은 기준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를 현실화하면 인식이 될 것이다.[각주:32] 실제로,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감각적 확신과 같은 특정한 진리관에 호소함으로써 인식을 산출하고자 하는 의식의 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시금 감각적 확신이라는 척도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표준적 특성(예컨대, 말할 수 있는 능력 the ability to say)을 통해 실질적 인식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각주:33] 이러한 현실화의 불가능성은 의식으로 하여금 기존의 진리관을 포기하게 하는 회의와 절망의 길을 걷게 하지만, 동시에 지각(Wahrnehmung)이라고 하는 새로운 진리관을 창출하게끔 하기도 한다. 모순(Widerspruch)과 부정(Negation)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의식의 운동(경험)에 대해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논술된 것은 … 자연적인 의식이 참다운 지를 추구해나가는 도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혼이 그의 본성에 따라서 미리 지정된 정류장과도 같은 갖가지 혼의 형태를 두루 거치고 난 뒤에 마침내 정신으로 순화되어가는 그런 도정을 그려낸 것이다.[각주:34]
일면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 회의주의는 결론으로서 언제나 순수한 무(das reine Nichts)만을 알아볼 뿐, 이 무가 바로 그의 전제가 됐던 것의 무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 그러나 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제가 되는 것의 무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이때 비로소 그것은 결론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이로써 무는 그 자체가 한정된 무이며,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다. … 무를 한정된 부정(bestimmte Negation)이라고 보는 올바른 결론이 얻어질 경우에는 이 결론으로부터 곧바로 새로운 형식이 발생하므로 부정이 그대로 다음 단계로 이행하면서 이렇게 이어지는 형태의 전진이 자력(自力)으로 완전하게 행해진다.[각주:35]

이러한 상승의 변증법을 통해 헤겔이 보이고자 하는 바는 주체로부터 실체로 나아가는 과정,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던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이 다시금 자연으로 복귀하게 되는 과정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립과 모순 관계는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지양(Aufhebung)되고 화해(Versöhnung)를 이루며, 이를 통해 개별자의 의식은 보편자의 의식으로 성장한다.[각주:36] 테일러는 상승의 변증법이 지닌 궁극적 지향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궁극적으로 헤겔이 ‘절대 정신’이라고 부른 예술·종교·철학은 우리에게 정신의 자기 인식을 제공한다. 따라서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신은 필연적으로 숨겨져 있고 알려질 수 없다는 사상이 인간 발전의 어떤 단계에 필연적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런 사상은 여기에서 극복된다. … 경향성을 버리고 순수한 실천이성의 명령에 따라 행위하고자 하는 도덕적 행위자는 결국 이성에 의해 자기 자신을 정신의 매개자로 보는 견해에, 따라서 사물들의 본성[자연]과의 화해에 이르게 된다. 사변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런 본성은 정신의 표현이다. 이런 화해는 원래의 통일로의 회귀를 의미하지 않고, 합리적 자유를 보존한다.[각주:37] 

 

2. 하강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의 「서설」

앞서 살펴본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이 주체로부터 실체로 나아가며 칸트와 피히테의 의식 철학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정신의 현상학은 정반대 방향에서 실체로부터 주체로 나아가며 셸링의 자연 철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물론, 헤겔이 「서설」에서 공박하는 대상은 셸링에 그치지 않는다. 헤겔은 실재의 궁극적이고 참된 본성을 직관이나 감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일군의 낭만주의(Romantik) 사상가들 역시 비판하며, 절대지는 단박에 깨우칠 수 있는 대상도, 인식의 출발점도 아니라는 것을 다음의 인용문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각주:38] 

진리는 곧 전체이다(Das Wahre ist das Ganze). 그러나 전체는 본질이 스스로 전개되어 완성된 것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이는 본질상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종국에 가서야 비로소 그의 참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야만 하겠다. 바로 이 표현 속에는 절대적인 것의 본성은 현실적인 주체로서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각주:39]

실체를 추구했던 기존의 철학자들에 대한 헤겔의 비판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첫째, 직관이나 감정과 같은 비합리적 요소를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낭만주의의 기획은 보편자와 무한자라는 두 인식 대상을 인식 불가능한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 뿐이다.[각주:40] 둘째, 낭만주의가 결여하고 있는 이성적이고 개념적인 사유는 보편과 매개된 자아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바로 이 때문에 주체와 실체의 통합은 불가능해진다.[각주:41] 셋째, 신적 직관이나 예술을 통해 이러한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보는 낭만주의의 이념은 학문의 보편적인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헤겔은 이를 “소수의 개인에게만 비전된 재산(ein esoterisches Besitztum)”[각주:42]이라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전히 내용이 갖추어지고 그 성질이 밝혀진 것만이 공교적이고 개념적이며 또한 학습을 통해서 만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Erst was vollkommen bestimmt ist, ist zugleich exoterisch, begreiflich, und fähig, gelernt und das Eigentum Aller zu sein).”[각주:43]

다른 한편으로, 헤겔은 이처럼 개념이 아닌 감정과 직관(Gefühl und Anschauung)을 절대적인 것의 매개체로 여기는 관점을 인간 정신의 현 상황과 연관짓는다. 이에 따르면, 낭만주의의 대두는 인류 정신의 발전사의 한 단계로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즉, 급격하게 탈신성화가 진행되고 있는 근대의 비-목적론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겪고 있는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신적인 것을 다시금 추구하게 된다. “천상의 것을 갈구하는 정신의 빈곤함은 몹시도 극심하여 … 단 얼마만큼의 신적 감정이라도 누려보려는 필사의 노력을 기울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헤서 정신은 스스로 만족을 누리는 줄로 알지만, 오히려 또 그 만족만큼이나 정신의 상실은 클 수밖에 없다.”[각주:44] 요컨대 낭만주의는 비록 신과의 화해에 실패하지만, 그러한 화해가 바로 우리 시대의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헤겔은 “자연은 주체성의 무의식적 산물”이며, “자연 안에 있는 무의식적 주체성은 완전한 주체성과 재결합하고자 한다는 것”[각주:45]을 그의 자연철학적 원리로 제시하는 셸링의 철학이 공허한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한다. 셸링은 자연의 무의식적 세계와 도덕적·역사적 인간의 의식적 세계가 서로를 지향한다고 생각하였다.[각주:46] 그러나 헤겔은 “어떤 존재를 스피노자적으로 절대자의 양상 속에서 바라본다”[각주:47]는 셸링의 이상이 이성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무차별적 동일성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지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A=A의 형식을 띠는 절대의 상하에서는 ‘어떤 것인가’라는 등의 물음은 있을 수 없고 일체의 것이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절대의 상하에서는 일체가 동일하다는 이 한낱 형식적인 지를 구별과 내실을 갖춘, 아니 충실한 내용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인식에 대치시키면서 흔히 절대적인 것이란 캄캄한 밤중이며 모든 소가 검은색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는 투로 우겨대는 것은 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인식력의 결여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각주:48]

이러한 문제에 대한 헤겔의 해법은 다시금, 주체에 매몰되어 실체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했던 의식 철학의 문제에 대한 헤겔의 해법과 반대 방향에서 진행된다. 즉, 헤겔이 보기에, 낭만주의자들과 셸링은 실체에 매몰되어 주체성을 온전히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실체를 주체의 배후에 위치시키기 때문에 자연적 실체를 신비화하거나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거나 그러한 실체로부터 구체적 내용을 지닌 지식을 얻는 데 실패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칸트와 피히테 등의 의식 철학의 입장이 범했던 오류처럼, 주체와 실체의 관계를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주체가 최소한의 합리성을 지닌 주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분열로부터의 자기 귀환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우주적 정신은 합리적 주체로서 역사와 현실 속에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의 하강적 운동을 기술하는 일은 철저하게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즉, 철학이라는 학문적 체계를 통해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헤겔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가 현존하는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학문적 체계만이 있을 뿐이다(Die wahre Gestalt, in welcher die Wahrheit existiert, kann allein das wissenschaftliche System derselben sein). 철학이 학문의 형식에 가까워지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것, 말하자면 철학의 진의라고 할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Namen der Liebe zum Wissen)을 떨쳐버리고 현실적인 지(wirkliches Wissen)를 목표로 하여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지향하는 것이다. 지가 학문으로 승화되어야만 할 내적 필연성은 지의 본성 속에 깃들어 있는데,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오직 철학 그 자체의 서술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각주:49]

그렇다면 이러한 기획에 ‘정신의 현상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은 무엇인가? 칸트는『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들』에서 물리학의 선험적 전제 조건들에 관한 초월적 탐구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작업에 현상학(Phänomenologie)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여기에서, 칸트는 뉴턴이 외관상의(apparent) 운동과 참된 운동을 구분했던 방식을 비판하고, 자신의 현상학이 지닌 목표는 한낱 가상(Schein, appearance)을 진리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현상(Erscheinung, appearance)을 경험(Erfahrung)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헤겔은 정신의 역사적 운동에 대한 그의 이해가 자연 속의 참된 운동을 다루고자 하는 칸트의 현상학(Phänomenologie)과 닮아있다고 생각하여 이 책에 ‘정신의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요컨대, 정신의 현상학은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정신의 참된 운동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각주:50] 특히, 「서설」은 「서론」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정신이 각각의 의식의 형태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하강의 운동”[각주:51]에 주목하며, 이제 헤겔은 철저하게 합리적 필연성을 통해 전개되는 정신(Geist)의 자기복귀 과정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기복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헤겔의 정신은 자기 소외 및 복귀를 겪는다는 점에서 근대 유럽의 전통적 신론(神論) 중 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각주:52] 첫째, 헤겔에게 있어 정신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유신론으로 이해될 수 없다. 전통적인 유신론이 신과 우주의 관계를 창조에 의한 일방향적 관계로 파악하는 반면, 헤겔의 정신은 세계 없이는 실존할 수 없다. 정신이 세계의 필연적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정신의 필연적 조건이며, 정신은 언제나 세계 속 유한한 정신들에 체현되어 살아간다. 둘째, 마찬가지로, 헤겔의 정신은 무신론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데 이는 우주가 합리적 주체의 자기 인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셋째, 헤겔의 생각은 주체의 합리적 필연성을 세계의 실존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범신론과도 차별화된다. 예컨대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 세계영혼이 우리 인간의 영혼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 반면, 헤겔의 정신은 합리적 필연성의 주체로서 스스로 우주를 정립해 나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은 분명 세계 내에 존재하지만, 세계의 모든 것에 신적인 것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헤겔의 정신은 합리적 필연성에 따라 우주와 자기 자신을 정립해 나가는 설계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설계도는 우주 탄생 이전에, 또는 시초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정신은 합리적 필연성이 구현된 우주라는 그 자신의 목적을 자기 인식을 통해 완성한다. “정신에게 가장 큰 대립의 지점이 되는 일차적 대립은 정신이 자신과 상충하는 세계에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이 대립을 없애고자 하는 행위가 아직 전혀 수행되지 않았다. … 운동 속에서 절대적 주체는 자신의 실존 조건들을 정립하며, 그런 다음 자기 인식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일한 조건들의 대립을 극복한다.”[각주:53] 정신의 이러한 자기 인식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한 의식들은 의식과 자기의식의 형성을 거쳐 이성에 이르러 정신과 화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화해는 인간이 정신이라는 보다 큰 합리적 필연성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자연의 복귀인 동시에, 정신이 자기 자신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의 결과로인 자기 인식, 즉 진리이다. “진리를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해야만 한다.”라는 헤겔의 언명은 그리하여 실체로부터 주체로 나아가는 「서설」 전체를 관통하며, 이로부터 「서설」의 주제어인 학문적 인식의 의미 역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체계로서의 진리만이 현실이라는 것, 또는 실체는 본질적으로 주체라는 것, … 실로 정신이야말로 근대 또는 근대종교에 고유한 가장 숭고한 개념이다. 오직 정신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다(Das Geistige allein ist das Wirkliche). 그것은 본래 그 자체로 있는 본질이며 …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존재이다. 그러나 … 일단 그 첫 단계에서는 다만 정신적인 실체로서 있을 뿐이다. …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것이 정신 자신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야만 하고, 그것도 더욱이 직접 나타나 보이는 대로의 모습과 반성적으로 내면화된 모습을 함께 지닌 이중의 대상으로 나타나야 한다. … 마침내 정신이 이런 관계 속에 있는 자기의 실상을 자각하기에 이르면 … 자각적인 현존재로서의 정신은 자체 내로 복귀한 대상이 된다. 이렇게 전개되어가는 자기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의 이 정신의 모습이 바로 학문이다. 학문이란 정신 그 스스로가 현실성을 띤 가운데 자기의 고유한 터전 위에 쌓아올린 정신의 왕국이다.[각주:5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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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표적으로, Schacht (1971), p. 1; Pinkard (1994), p. 2를 보라. [본문으로]
  2. Krasnoff (2008), p. 18. [본문으로]
  3. Taylor (1977), p. 36; 테일러 (2014), 51쪽 참조. [본문으로]
  4. Taylor (1977), p. 44; 테일러 (2014), 90쪽 참조. [본문으로]
  5. Taylor (1977), p. 45; 테일러 (2014), 91-92쪽 참조. [본문으로]
  6. 서양근대철학회 (2001), 261-262쪽 참조. [본문으로]
  7. 흄 (1994), 110쪽. [본문으로]
  8. 흄은 지각을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으로 구분한다. 그는 전자를 생생하고(vivid) 직접적인 경험, 후자는 그러한 경험을 회상이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한다(cf. 서양근대철학회 (2001), 264-266쪽). [본문으로]
  9. 칸트 (2018), 47쪽. [본문으로]
  10. Pinkard (1994), p. 4. [본문으로]
  11. Hegel (1988) SS. XVII-XXII 참조. [본문으로]
  12. Taylor (1977), pp. 128-129; 테일러 (2014), 240-242쪽 참조. [본문으로]
  13. Becker (2023), p. 451 참조. [본문으로]
  14. Pinkard (2000), p. 230. [본문으로]
  15. 이종철 (2009), 153-172쪽; Taylor (1977), p. 104; 테일러 (2014), 197쪽 참조. [본문으로]
  16. 이종철 (2009), 169쪽. 강조는 필자의 것. [본문으로]
  17. 이종철 (2009), 155쪽. [본문으로]
  18. Hegel (1988), S. 18; 헤겔(2005), 61쪽. [본문으로]
  19. 이종철 (2009), 155쪽 참조. [본문으로]
  20. 서양근대철학회 (2001), 75쪽. [본문으로]
  21. 서양근대철학회 (2001), 76쪽 참조. [본문으로]
  22. 서양근대철학회 (2001), 368쪽 참조. [본문으로]
  23. Hegel (1988), S. 57; 헤겔(2005), 114쪽 참조.[/footnote]이다. 인식을 도구(Werkzeug)나 매체(Medium)로 보는 관점은 주체와 인식의 대상 사이의 분리뿐 아니라, 절대적인 것과 인식 사이의 분리를 함축한다.[footnote]Hyppolite (1974), p. 6 참조. [본문으로]
  24. Hyppolite (1974), p. 6. [본문으로]
  25. Taylor (1977), pp. 136-137; 테일러 (2014), 254-256쪽 참조. [본문으로]
  26. Hegel (1988), S. 61; 헤겔(2005), 118-119쪽 참조. [본문으로]
  27. Westphal (1989), p. 135. [본문으로]
  28. Taylor (1977), pp. 136-137; 테일러 (2014), 256쪽. [본문으로]
  29. Hyppolite (1974), pp. 6-7 참조. [본문으로]
  30. 테일러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하는 변증법을 역사적 변증법(the historical dialectics)과 존재론적 변증법(the ontological dialectics)으로 구분한다. 대표적으로 역사적 변증법은 「정신」 장에서, 존재론적 변증법은 「의식」 장에서 전개된다. 이러한 구분의 요점에 관해서는, Taylor (1977), pp. 131-134; 테일러 (2014), 246-250쪽을 보라. [본문으로]
  31.  Taylor (1977), p. 133; 테일러 (2014), 249쪽 참조. [본문으로]
  32. Taylor (1977), p. 133; 테일러 (2014), 253쪽 참조. [본문으로]
  33. Taylor (1977), p. 133; 테일러 (2014), 264쪽 참조. [본문으로]
  34. Hegel (1988), S. 60; 헤겔(2005), 118쪽. [본문으로]
  35. Hegel (1988), S. 62; 헤겔(2005), 120-121쪽. [본문으로]
  36. 이종철 (2009), 154쪽 참조. [본문으로]
  37. Taylor (1977), p. 119; 테일러 (2014), 226-227쪽 참조. [본문으로]
  38. Hyppolite (1974), p. 7 참조. [본문으로]
  39. Hegel (1988), S. 15; 헤겔(2005), 55-56쪽. [본문으로]
  40. 김현 (2008), 92쪽 참조. [본문으로]
  41. 김현 (2008), 92쪽 참조. [본문으로]
  42. Hegel (1988), S. 10; 헤겔(2005), 46쪽. [본문으로]
  43. Hegel (1988), S. 11; 헤겔(2005), 47쪽. [본문으로]
  44. Hegel (1988), SS. 8-9; 헤겔(2005), 42-43쪽. [본문으로]
  45. Taylor (1977), p. 41; 테일러 (2014), 85쪽. [본문으로]
  46. Taylor (1977), p. 42; 테일러 (2014), 86쪽 참조. [본문으로]
  47. Hegel (1988), S. 13; 헤겔(2005), 50쪽. [본문으로]
  48. Hegel (1988), S. 13; 헤겔(2005), 50쪽. [본문으로]
  49. Hegel (1988), S. 6; 헤겔(2005), 38쪽. [본문으로]
  50. Pinkard (2000), p. 204 참조. [본문으로]
  51. 이종철 (2009), 154쪽. [본문으로]
  52. 이하의 내용은: Taylor (1977), pp. 100-102; 테일러 (2014), 189-194쪽 참조. [본문으로]
  53. Taylor (1977), pp. 100-102; 테일러 (2014), 195-197쪽. [본문으로]
  54. Hegel (1988), SS. 18-20; 헤겔(2005), 61-63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