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화양코뮌 발제문
경제-철학 수고의 배경과 머리말
1장 맑스주의 철학에 입문해야하는 과제 - 철학의 독특한 존재 성격에 대해 대강 서술함
1절 “맑스주의 철학에 입문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입문의 의미에 대해 분석해봄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에 입문해보고자 한다. 입문이란, 우리가 어떤 사태의 바깥에서부터 그 사태 안으로 들어서려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맑스주의 철학의 현관쯤에 서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입문의 의미에 대해서, 즉, 들어섬의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해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이 현관에 서있으며, 왜 그 안에 들어가려 하는지에 대한 모든 물음은 그로써 혼란에 빠지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있다. 왜냐하면 ‘충분히 숙고하지 않음’은 단지, 우리가 실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리하여 의례적으로 사람들이 알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훑어봄으로써 그저 한번 말해볼 수 있게 만드는, 교양의 한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맑스주의 철학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에 대해, 또 입문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번 깊이 숙고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앞서 입문의 의미를 ‘들어섬’으로 파악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이 학문의 바깥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 이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가? 그 까닭은 우리가 맑스주의 철학에 이미 들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들어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맑스가 물음을 통해 대결하고자 했던 그 사태 속에 이미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태가 우리의 사유를 특정한 방향으로 강제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방식을 미리 결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맑스가 대결하고자 했던 사태에 관한 물음을 역사적(geschichte)인 것이 아닌 역사운명적(geschick)인 물음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들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들어서 있지 않음’이라는 상황이, 그 필연성을 이유로 우리에게 입문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입문이 ‘이미 들어서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그 이유에서 입문은 일반적인 학문에서의 입문과는 다른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여기서 ‘이미 들어서 있음’은, ‘들어서 있지 않음’으로 인해 은폐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이미 들어서 있음’은 여기서 하나의 잠재적인 것으로, ‘들어서 있지 않음’을 통해 은폐되어있는 자신을 지시함으로써 그것이 사유되어야함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가 일반적인 학문의 목표로 흔히 알려져 있는 이론과 지식의 생산과는 애초부터 무관함이 입문의 독특한 성격을 통해 드러난다.
2절 입문이 하나의 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 해방으로서의 입문함에 대하여
따라서 입문은 하나의 해방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해방이라는 단어로 ‘사유를 강제하는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면 그렇다. 왜냐하면 해방이란 예속되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묶여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즉, 현대를 그 안에서부터 움직이고 있는 어떤 내적 동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있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가치를 평가하는 자의 가치를 결정한다. 오늘날 과학은 더 이상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말은 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학이 말하는 사실들에 대해 가타부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들이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사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의 명제들로부터 존재의 목적이 규정된다. 인간은 유용성을 기준으로 평가받으며, 삶의 목적은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로 특정된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유용성인지, 삶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의지는 어떻게 이해되어야하며, 사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은 물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겉으로 보이는 자명성에 의해, 이러한 물음들은 단순히 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물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안이 점점 더 커질수록, 해방의 필요성도 점점 더 절박한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1
3절 “맑스주의 철학”의 의미에 대해 분석함- 맑스의 필연성 개념을 과학성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의 경우
우리는 앞서 맑스주의 철학에서의 입문이 다른 일반적인 학문에서의 입문과는 다르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입문의 독특한 성격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우리가 입문을 ‘어떤 사태의 바깥에서부터 그 사태 안으로 들어서려함’이라는 최초의 정의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우리가 들어서려하는 ‘그 사태’로부터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해명되어야할 것은 “어찌하여 맑스주의 철학은 그러한 독특한 성격의 입문을 요구해야 하는가?”이며, 이는 다시 “맑스주의 철학의 독특한 존재성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맑스주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맑스주의 철학은 한편으로는 맑스주의 경제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경제학으로 불린다. 겉으로 보기에 이러한 규정은 아주 명백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맑스가 대결하고자 했던 사태가 경제학에서 다루는 종류의 문제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 정치 경제학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맑스주의 경제학이 일반 경제학에서 말하는 문제들과 동일한 것을 다룬다면(즉, 과학적 사실의 영역을 다룬다면), 정치 경제학이라는 명칭은 결국 맑스가 다루고자하는 경제학에서의 물음이, 정치와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맑스주의 경제학과 일반 경제학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맑스주의 경제학은 일반 경제학과 동일한 대상을 다루지만, 일반 경제학과는 다른 방식의 개념을 통해 사실을 탐구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대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함에 있어 정치적 실천의 영역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행동의 결과물로서 경제학은 성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맑스주의의 이해는 과학적으로, 다시 말해 사실의 영역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한 이해가 존재할 수 있다. 단순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세계가 해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맑스의 명제를 상기해본다면 맑스주의가 주장하는 과학적 탐구의 영역이 극히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를 이렇게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위의 명제를 단순히 과학적 탐구의 기반으로 여기고, 더 이상의 철학적 물음들을 단순히 역사적인 것으로 여겨 치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정치 경제학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정치를 권력과 저항의 운동으로 이해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사실을 다시금 환원하는 것이기에, 즉 과학적인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많은 수의 철학자들은 맑스주의 성공을 그것의 과학성에서부터 찾으려 했다. 실상 칼 포퍼가 반증주의를 통해 비판한 맑스주의의 핵심도, 결국 “맑스주의는 과학적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맑스가 대결하고자 했던 사태를 필연적인 것으로, 즉, 역사운명적인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입문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필연성이 단순히 수사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맑스주의가 추구하고 있는 과학성은 해명해야할 것이 된다. 왜냐하면 과학에서의 필연성이란 결국 인과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엄밀히 말해, 하나의 우연성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과학적 필연성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해볼수록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과학에서의 진리 개념이 철학에서의 통속적 진리 개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즉, 발언으로서의 판단과 실제 대상 사이의 일치라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과성이 우연적으로 들어맞는다고 해도 여전히 규범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맑스주의가 주장하는 사실들이 우연적으로 들어맞는 것이라면, 이러한 사실의 변화 속에서(즉 역사 속에서), 주체의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주의 목표가 우리의 행위와 무관한 하나의 사실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위의 논의는 또한 맑스 그 자신이 1770년대 헤르더가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고》에서 주창했던 표현주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헤겔의 이론)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문헌적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헤르더가 사실과 언어의 관계를 실재의 반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즉, 사실과 판단사이의 일치로 보지 않았기에), 이 경우, 맑스가 과학성으로부터 필연성 개념을 도출했다고 보는 입장이 명백한 문헌적 증명의 부담을 져야 할 것이다.
4절 맑스주의 철학의 독특한 존재 성격은 그것의 철학함에 있다.
결국 우리의 물음은 “맑스주의 철학이 과학적인가?”로부터 “맑스주의 철학은 왜 과학적이어야 하는가?”로 귀결되는 듯싶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맑스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맑스에 대한 나의 관심사가 과학적인 영역이 아닌 철학적인 영역에 있으며, 이러한 철학적 탐구가 맑스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있어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글이 맑스의 초기사상을 다루려고 한다는 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선 이점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경제-철학 수고》는 오랜 시간 학계에서 “과학적이 아니고 철학적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개념들 역시 너무 ‘인본주의적’이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지 철학과 비슷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나에겐 이러한 “단점”들이 이 글이 목표하고 있는 것에 도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위의 비판들이 설령 옳다 할지라도, 그로부터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맑스의 초기 사상과 “부르주아지 철학” 사이의 유사성이 외견상으로 그러한 것인지, 혹은 내적으로 동일한 것인지, 혹시 내적으로 동일하다면 그로부터 맑스가 취하고 있는 전략은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들이며, 이러한 물음들을 단순히 “부르주아지 철학”이라는 이유로 넘겨버리는 것은 지적 나태의 증거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의 실마리는 결국 “맑스주의 철학”이 “맑스주의 경제학”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그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철학은 경제학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철학이 이중적인 의미로 파악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역사적으로 이중의 것으로 파악되어 왔다, 그 하나는 철학을 철학적 물음의 총체로, 즉 철학적인 물음들에 관하여(über)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Philosophia를 너무나 쉽게 “지혜를 사랑함”의 의미로, “모든 지혜의 학문”으로 번역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대상을 다루는 학문으로, 진보의 첫 단계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철학을 단순히 다른 학문의 시원으로 파악하고, 다른 학문이 철학적 문제를 역사적으로 점유하게 되었다고 여긴다면, 철학 내에 머무르면서 사유하는 것은 더욱 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에 철학에서의 입문은 일반 학문에서의 입문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물리학이나 식물학, 경제학 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학문의 목표는 그 학문들이 관계 맺고 있는 대상에 관하여(über)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물리적 대상에 관하여(über), 식물이라는 존재자에 관하여(über), 경제라는 개념에 관하여(über)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자리는 여전히 해명해야할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학문의 대상이, 탐구라는 과정을 통해 곧바로 학문의 지식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권력의 요구, 인정, 타자와의 긴장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 생산되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리를 대상과 판단 사이의 일치로 여기는, 현대 학문의 이념 역시 결코 확고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순수한 지식은 허상이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학문의 대상과 지식의 조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며, 우리는 학문의 대상이 과연 지식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역설적으로 그러한 조건이 탐구 방향을 이미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 우리의 의심은 해방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철학이 역사적으로 그 이상과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 학문의 엄밀함으로서 요구되는 가치중립의 태도가, 역설적으로 하나의 가치를 지향함으로써 현대의 가장 큰 위험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오늘날의 모든 지배적 가치는 진보라는 단어 속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철학은 결코 온전히 평가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가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이라면, 여기에 철학이 무엇인가에 관한 하나의 암시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유의 길 위에서 철학 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종전에 이해되었던 철학과 구분하기 위해 <철학함 Philosophieren>이라 부른다. 혹자는 이에 대해 철학이란 단순히 철학적 물음의 총체일 뿐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물음들을 다루지 않고 철학을 탐구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물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을 철학적 물음의 총체로 파악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히 옳은 것’과 ‘참된 것(das Whare)’을 구분하는 것이다. 어떠한 대상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시를 단어들의 집합으로 정의내리는 규정은 그 자체로 올바르지만 아직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다. 이는 단순한 사실이 그 자체의 본질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질로부터만 참된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본질이 가치 함축적이라고, 즉, 본질은 그 안에서 하나의 윤리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으로부터 우리가 예비해야 할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다음 잠언에 나타나있다.
너희는 내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 기울여라
(Habit ihr nicht mich, Sondern den Sinn vernommen,)
그러므로 (......) 지혜로울지니
So ist es weise, (......)) 3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 잠언에서 하나의 해방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über) 말하고 있는 ‘내’가 아닌 로고스로부터 진리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진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말해진 것으로서의 진리가 아닌, 진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것과 어떻게 관계 맺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진리를 수용하는 자의 위치이며, 그로부터 철학은 (윤리적 주체에게 있어) 하나의 해방이 될 수 있다.
5절 철학함으로부터 드러나는 윤리적 주체의 자리, 고대 그리스와 근대 이후 인식 개념의 결정적 차이 – 《알키비아데스》에 나타난 자기배려의 주체
흔히 근대 철학의 출발점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근대와 근대 이전 철학 사이의 연속성과 단절에 대하여 사유해보아야 한다. 근대 철학의 출발을 데카르트로 놓는다는 것은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답해야함을 뜻하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들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기에, 여기에서는 데카르트와 근대 이전의, 더 정확히는 고대 그리스의 인식 개념 간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서 하나의 관점에서 사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인식의 근거를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즉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res cogitans에서 찾았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근거에 하나의 전제가 숨겨져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전제는 현대의 사유를 특정하며, 특히 오늘날 자연과학의 인식 개념을 결정적으로 특정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주체에겐 그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적 회의의 근저에는 “이성의 정당한 자기 사용”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너무나 명백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Cogito Ergo Sum을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Gnothi sauton(너 자신을 알라.)에 연관시키는 것에, 즉, 데카르트의 사유가 Gnothi sauton의 근대적 변형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러한 “이성의 정당한 자기 사용”은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이르러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표현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로 Gnothi sauton이 그것이 실제 사용되던 맥락에서 벗어나 이해되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의 인식 개념은 오늘날 망각되어버렸다. 왜냐하면 Gnothi sauton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단독적으로 고려되는 개념이 아니며, 이 개념이 나오는 《알키비아데스》의 텍스트를 면밀히 살펴볼 경우 Epimeleia Heautou(자기 자신을 배려함, 자기 자신을 돌봄, 자기 자신에 몰두함)의 개념과 결부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념과는 달리, 《알키비아데스》의 어떤 맥락에서 Gnothi sauton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01년 《문헌학》에서 제시한 로셔의 해석에 따르면, Gnothi sauton은 소크라테스가 델포이의 신전에 쓰여 있던 글귀에서 가져온 것이며, 이러한 글귀는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처럼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Gnothi sauton에서 말하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너 자신의 이성을 알라는 의미가 아닐뿐더러, 무언가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주체에게 내재되어있는 것을 의미함은 더더욱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Gnothi sauton은 결국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있어 그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질문을 던지라는 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들은 결국 무녀를 통해 신의 말을 듣는 것이며, 신탁에 의뢰함에 있어 신탁을 들으러 온 자가 가져온 질문은 경건함을 따라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숙고된 것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Gnothi sauton은 신에게 질문함에 있어 스스로 먼저 질문을 검토해볼 것이며, 과다하게 질문하지 않도록 수를 줄여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인식의 능력이 주체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준비를 통해 주체를 변화시킴으로서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주체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고, 이렇게 얻은 진실을 통해 다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Gnothi sauton이 결국 Epimeleia Heautou의 종속된 형태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4
우리는 또 다른 사례를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구절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라고 충고하는데, 첫 번째 구절인 29d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구절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의 삶이 이러한 상황(재판을 받는 상황)에 처해진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이와 다른 삶을 살라고 한다면 거절하겠다는 말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말하는 자랑스러운 삶이란, 아테네 시민들을 따르기보다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삶이며, 그 삶이란 아테네 시민들에게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타이르고 가르침”이란 명예를 얻는 법이나, 재산을 늘리는 법, 장인의 기술(Techne)을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그들 자신의 명예나 지위, 재물 등을 얻기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어째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배려를 하지 않는가에 대해 타이르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 건강, 지위 등을 돌보려고 노력하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을 쓰지 않는다. “이성이라든가 진리라든가 또한 자신의 영혼을 부단히 훌륭하게 만드는 일에는 배려를 하지 않고 마음도 쓰고 있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는가?” 이것은 결국 주체가 스스로를 돌보고,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게 한다.
“나는 늙은이건 젊은이건 딴 나라 사람이건 내 나라 사람이건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할(자기 스스로를 배려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을) 것이고, (......)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하도록 신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인데, 이 점을 유념하길 바라고 또한 여러분을 위해서는 신에 대한 이 봉사보다 더 큰 선한 일은 아직 이 나라에 한 번도 없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5
이로부터 드러나는 결정적인 점은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인식 개념은 결코, 주체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인식을 위해서 주체는 말하는 자가 아닌, 귀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귀 기울임은 말하자면, 인식에 있어서 예비적인 것, 즉,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며 몰두하는 일련의 실천적 행위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주체는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한다. 이로써 주체의 인식은 주체 내부의 윤리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윤리적 주체의 인식과, 자기 배려에 관한 논의는 미셸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분석했던 Epimeleia Heautou의 계보학에서 (다소 거칠게) 가져온 것이다. 푸코는 이것을 영성으로 정의 내린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Spiritualite)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르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의가 맑스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나의 대답은 크나큰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 영성으로서의 인식은 단순히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 칸트, 헤겔, 셸링, 쇼펜하우어, 니체에게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며, 인식을 영성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는 데카르트를 위시한 철학자들과, 영성의 문제를 다시 다루려하는 철학자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가 철학사 내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맑스주의 철학의 과학성을 일반 경제학의 과학성과 구분해주는 것은, 그것의 내적 정합성, 과학으로서의 기능조건, 이데올로기, 주류 학문이라는 권력과 같은 문제들이 아니라, 맑스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영성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마르크시즘이나 정신분석학과 같은 지식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을 종교와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에 마르크시즘이나 정신분석학을 숙고해보면, (.......) 양자에서 주체 존재의 문제(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 존재가 되어야 하는 바)와 주체가 진실에 접근한다는 사실 때문에 주체의 변형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문제라는 이 두 문제는 영성 특유의 문제이고, (......) 마르크시즘의 지식의 중심부와 원리 그리고 귀결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시즘이 영성의 형식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정신분석학과 미르크시즘의 지식 내에서 Epimeleia Heautou라는 유구하고 근원적인 문제, 물음, 요구, 즉 진실 접근의 조건인 영성의 문제가 재발견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시즘이라는 지식 형식이 갖는 고유한 영성의 조건들을 다수의 사회 형식들 속에 은폐시키려 시도했습니다. 계급의 위치, 당의 효과, 단체, 학교에의 소속, 입문, 분석자의 양성 등과 같은 관념은 우리에게 진실 접근을 위한 주체 형성 조건을 참조케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사회적인 용어와 조직의 용어로 사유합니다. 우리는 실존과 영성, 그리고 그 요구 사항의 역사적 측면에서 이 관념들을 사유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와 동시에 ‘주체와 진실의 문제’를 단체, 학교, 당, 계급 등과 같은 것에의 소속의 문제로 몰아가기 때문에 결국 주체와 진실 간의 관계의 망각을 당연히 대가로 치르게 됩니다.” 7
- “Mensch(인간)이란 가치를 재고 평가하고 측정하는 존재로, 평가하는 동물 자체로 특징지어졌다.” Friderich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제 2논문 中 8장 [본문으로]
-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Moto, in Nestroy [본문으로]
-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48(DK22B50) [본문으로]
- W.H Roscher, 《Weiters über die Bedeutung des E[ggua] zu Delphi und die übrigen grammata Delphika, Philologus》, 60, 1901, p. 81-101 [본문으로]
- Plato, 《소크라테스의 변명》, 29d-30a, 전집 CEuveres completes, t. I, M. Croiset 번역, Paris, Les Belles Lettres, 1920, p. 156-157 [본문으로]
- Michel Foucault, 《주체의 해석학-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81-1982》 中 1982년 1월 6일 강의-전반부, 번역 심세광, 동문선, 2007, p. 58-59 [본문으로]
- Ibid., 1982년 1월 6일 강의-후반부, p. 67-6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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