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Phil of Mathematics

칸트의 수학 철학

Soyo_Kim 2019. 1. 16. 04:36

이 글은 스테판 쾨르너의 수학 철학(스테판 쾨르너, 수학철학, 번역 최원배, (주) 나남, 2015)의 칸트 부분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4. 칸트: 그의 견해 몇 가지

칸트의 철학 체계는 라이프니츠가 대표하는 합리주의 철학과 흄이 대표하는 경험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둘을 의식적으로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흄과 라이프니츠는 명제를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분석 명제와 사실 명제로 나누고 수학의 명제를 분석 명제로 간주하였다.[각주:1]

하지만 흄과 라이프니츠는 사실 명제를 두고 견해가 크게 달랐다. 흄은 순수 수학의 명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한게 없으며, 그가 말한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따라서 칸트의 수학 철학의 관한 견해는 주로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비판했다 볼 수 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와 흄이 받아들인 명제의 이분법을 삼분법으로 대체한다. 첫번째 부류인 분석명제는, 즉 부정하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명제는 흄이나 라이프니츠가 말한 분석 명제와 일치한다. 분석 명제가 아닌 것, 종합 명제는 칸트에게 있어 두 가지로 나뉜다. 경험적이고 후험적인 명제가 하나이고, 비경험적이고 선험적인 명제가 다른 하나이다.
후험적 종합 명제는 참일 경우 감각 지각을 기술하거나("내 펜은 검은 색이다.") 그런 명제를 논리적으로 함축("까마귀는 모두 검은 색이다.")한다는 점에서 감각 지각에 의존한다. 반면 선험적 종합 명제는 감각 지각에 의존하지 않는다. 선험적 종합 명제는 필연적이다. 물리 세계에 관한 명제, 특히 물리과학에 나오는 명제가 모두 참일 경우, 그것도 참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꾸어 말해, 선험적 종합 명제는 객관적 경험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여기는 선험적 종합 명제가 있다는 칸트의 명제를 비판적으로 논할 자리가 아니다. 또한 그러한 선험 종합 명제들의 목록을 완벽하게 체계적으로 나열하는 데 필요한 전제들을 제시했다고 하는 칸트의 주장, 즉 수학이나 자연과학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을 그런 목록의 전제들을 제시했다고 하는 칸트의 주장을 논의할 수도 없다.
칸트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직관적인 것과 논변적discursive인 것으로 나눈다. 직관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지각이나 지각 판단의 구조와 관련된 것이고, 논변적인 것은 일반 개념의 순서 기능과 관련된 것이다. 논변적인 선험 종합 명제는 예를 들어 인과율이다. 순수 수학의 명제는 모두 선험적 종합 명제 가운데 직관적인 부류에 속한다.
만약 우리가 "내 펜은 검은색이다"나 "내 펜은 두 개의 연필 사이에 있다"와 같은 물리세계에 관한 지각판단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판단의 참/거짓은 형식논리학의 정의나 규칙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이 명제들이 기술하는 지각 상황과의 대응여부에도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이 설득력있어 보인다.
펜과 검은색이라는 개념을 분석해도 이들 사이의 관계를 알 수는 없다. 그 관계는 경험에 근거한다. 또한 칸트와 같이 외부대상에 대한 지각의 경우 또는 외부대상에 관한 명제의 경우, 두 가지 서로 구분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경험적 질료와 시간 및 공간으로, 경험적 질료는 시간과 공간 안에 위치하며, 시간과 공간은 그 안에 경험적 자료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지각적인 공간과 시간의 구조는 경험적 질료가 바뀌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또한 시간 안에 위치하지 않은 지각은 없고 시간과 공간 안에 위치하지 않은 외부지각은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모든 지각의 형식이라 할 수 있으며, 형식에 속하지 않는 것은 모두 지각의 질료라 간주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은 지각이 가능하기 위한, 혹은 적어도 인간의 지각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시간과 공간이 특수자인지, 아니면 일반 개념인지, 특히나 관계인지 하는 물음에 대해 칸트는 첫번째라 말한다. 이를 물리적 대상의 예로 바꾸어 본다면, 시간과 공간이 물리적 대상과 비슷한 것인지, 아니면 물리적 대상의 속성과 비슷한 것인지, 혹은 물리적 대상들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것인지 하는 물음이라 말할 수 있겠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처럼 공간과 시간을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보지 않고, 뉴턴주의처럼 절대 공간이나 절대 시간으로 보지 않으며, 일개 개념에 불과하다고 보지도 않는다. 칸트에게 있어 시간과 공간은 일종의 표상으로 선험적이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핵심 이유는 특수자를 나눌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일반 개념을 나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데 있다. 특수자, 가령 사과를 나눈다는 것은 그것을 조각으로 자른다는 것이다. 일반 개념을 나눈다는 것은 그것을 하위 개념들로 나눈다는 것이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은 '색이 있는'이라는 속성을 여러가지 다른 색들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과를 조각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공간은 상자(box)와 아주 비슷하고 시간은 개울(stream)과 아주 비슷하다.
그렇지만 공간-상자와 시간-개울은 아주 특수한 형태의 특수자들이다. 그것들은 이른바 불변하는 용기로 그 안에 지각의 질료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변화하는 경험적 지각의 질료의 일부가 아니다. 불변하는 특수자라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은 플라톤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유사성은 별로 크지 않다. 칸트는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지각과 일반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가 객관적 경험을 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실재적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직관적 유형의 선험적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있다. 1) 시간과 공간을 기술할 때 우리는 특수자를 기술하는데, 이는 우리가 종합 판단을 내린다는 의미이다. 2) 시간과 공간을 기술할 때 우리는 감각인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영원하고 불변하는 주형(matrix)을 기술하는데, 이는 우리의 기술이 감각인상과는 독립되는 선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순수 수학을 정의의 문제이자 수학에 속하는 상정된 실재들의 문제라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순수 수학은 분석적이지 않다. 그것은 선험적이고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순수 수학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만을 받아들인다면, 수학은 시간과 공간에 순전히 귀속되는 것으로, 즉 시간에 있어 일차원적이고 방향이 있다는 주장과 공간에 있어 그것이 삼차원이라고 주장 이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칸트는 수학의 명제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술이라는 견해를 좀더 발전시켰다. 칸트는 수동적인 관조만으로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활동을 전제한다. "개념을 구성한다."는 것은 정의를 제시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것에 선험적인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념을 '구성'한다는 것은 개념에 맞는 대상을 상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주 자기일관적이기는 하지만 15차원의 구라는 개념은 구성될 수 없다. 물론 적어도 15차원의 '공간'에서 어떤 '점'도 공통으로 갖지 않는 그런 구가 적어도 두 개 '존재한다'는 진술을 할 수 있다면, 그런 대상을 상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3차원 공간에서는 3차원 구, 또는 원을 단순히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할 수 있다. 그것을 구성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3차원 구라는 개념이 자기일관적이어서가 아니라 지각 공간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제 과학에서의 관찰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4차원 이상의 대상들, 이를테면 초입방체인 테서랙트나 혹은 양자들이 세계에 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 지각을 통해 구성할 수 있는 대상을 넘어서서 상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칸트식의 이해에 따른다면 선험 종합 판단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헤르츠와 볼츠만의 과학 철학이론을 참조해야 할 것 같다. 공적표상Darstellung그림Bild 이론. 우리는 체계내지 모델을 그려 경험에 부여한다. 언어가 사고하면 되지 않은가?)
물리적 3차원 공간을 선험적으로 구성한다는 것과 나무나 금속으로 된 구를 물리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하지만 물리적 구성의 가능성은 선험적 구성의 가능성에 기초한다. 즉, 금속으로 된 구의 가능성은 공간에서의 구의 가능성에 기초한다. 이는 15차원의 구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그에 해당하는 선험적 구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연 지각의 선험적 구성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순수이성비판 재판 서문과 다른 곳에서 수학적 개념에 대한 사고-내적 일관성-와 이것의 구성-이를 위해서는 지각 공간이 일정한 구조를 지녀야 한다-을 칸트가 구분했다는 점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칸트는 통상적인 유클리드 기하학 이외의 기하학도 자기 일관적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런 기하학이 실제로 발전한다고 해서 칸트가 논박되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4차원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한다거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지각적 공간이 유클리드적이라고 주장한 칸트가 잘못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좀 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쾨르너는 지각적 공간이 3차원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기술된다고 가정한 점은 실제로 칸트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각적 공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서도 기술되지 않으며,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서도 기술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순수 산수의 명제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순수 기하학에 대한 그의 설명과 비슷하다. 3단위에 2단위를 더하면 5단위가 된다는 명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구성된 어떤 것, 즉 단위들의 연속과 모임을 종합적이고 선험적으로 기술한다. 여기서도 다른 산수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만 그는 그런 체계들은 지각적인 시간과 공간의 체계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의 본성에 관한 애초의 물음에 칸트가 어떻게 대답할 지 대략 알 수 있다. 순수 수학과 순수 기하학의 명제는 필연적 명제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선험적 종합 명제이지 분석 명제가 아니다. 그것들이 종합 명제인 이유는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의해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의 구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선험적 명제인 이유는 시간과 공간이 물리적 대상을 지각하는 데 필요한 불변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응용 수학의 명제들은 그것들이 지각의 경험적 질료에 관한 것이라면 후험적이며,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이라면 선험적이다. 순수 수학의 주제는 경험적 질료가 전혀 없는 시간과 공간의 구조이다. 반면 응용 수학의 주제는 경험적 질료가 들어있는 시간과 공간의 구조이다.
수학적 개념-이것들은 내적 일관성이 있다고 인정되거나 그렇다고 가정되며, 적어도 그것이 의심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의 사례를 제공하는 것으로서의 칸트의 구성 개념은 이후 수학철학에서도 여러 형태로 이어진다.
무한에 대한 그의 분석도 비슷한 영향력을 지닌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다만 칸트는 가무한(잠재 무한)과 실무한(실재 무한)을 좀더 분명하게 구분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수학적 계열이나 수열에서 이전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규칙이다. 칸트는 그런 규칙이 주어지면, 그런 단계들의 전체도 어떤 의미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마지막 단계가 없는 경우나 첫 번째 단계가 없는 경우에 특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연수 수열을 생각해보자. 이 수열의 첫 번째 원소는 0이며, 다른 원소들은 전자에다 1을 더해서 얻어지고, 그 밖의 다른 원소는 이 수열에 없다고 전제된다. 이 규칙에 따라 점점 더 커지는 이 수열은 완성된 수열과 아주 다르다. 이 수열의 원소를 추가로 만드는 과정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이 완성될 수 있다거나 완성된 수열이 이런 의미에서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가무한, 또는 생성으로서의 무한과 실무한, 또는 완전한 무한에 대한 칸트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과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실무한 개념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과 크게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감각 경험 안에서는 실무한의 사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의 아퀴나스처럼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무한한 계열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불합리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제 1원인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다.
칸트는 실무한 개념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이성의 이념Die Idee der Vernunft이라고 부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내적으로 일관된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감각 경험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사례는 지각될 수도 없고 구성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는 수 2를 구성할 수 있고 2개의 사물을 지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수 100000×100000×100000을 구성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많은 대상들의 모임을 지각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실무한의 모임, 이를테면 모든 실수의 집합을 지각할 수도 없으며 그것을 구성할 수도 없다. 
칸트는 구성될 수는 없으나 필요한 실무한과 구성될 수는 있는, 또는 구성된다는 점에서 존재하는 가무한이 대조된다는 점을 자주 강조했다. 수학적인, 그래서 구성적인 양을 측정할 때는

"상상력이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양의 단위를 무엇으로 잡든지 간에, 가령 1피트로 잡든 또는 1루테나 1마일 또는 심지어 지구의 반경으로 잡든, 지성은 똑같이 사용되고 만족된다. (...) 어느 경우든 양에 대한 논리적 측정은 방해받지 않고 무한히 진행된다."

"마음은 이제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이성의 소리는 모든 주어진 양에 대해 전체를 요구하며 (...) 무한도 이러한 요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무한도 완전히 주어진 것(즉, 전체가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각주:2]

구성적 가무한 개념으로부터 비구성적 실무한 개념으로 이렇게 옮겨가는 것이 칸트가 보기에 형이상학에서 혼동이 발생하는 주된 원인이다. 그것이 수학에 필요한 것인지, 수학에 바람직한 것인지, 수학에 들어오면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들어와도 상관이 없는 것인지 하는 문제를 두고 현대의 수학철학 학파들이 나뉜다고 할 수 있다.
 

<부록>

 

1) 상정할 수 없고, 그렇기에 구성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지각할 수 없는 것

이는 무(Nichts)와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2) 상정할 수는 있으나, 구성할 수는 없으며, 그렇기에 지각할 수 없는 것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도출되지 않으나, 자연과학의 관찰을 통해서 가능한 혹은 논리적 일관성을 적용하여 상정할 수 있는 대상들

z. B. 15차원의 구, 실무한 개념

 

3) 상정할 수 있고, 구성할 수 있으며, 그러나 지각할 수는 없는 것.

논리적으로(내적으로) 일관되고, (칸트에 따르면 지각적 공간이 3차원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3차원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도출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지각할 수는 없는 것.

z. B. 

100000×100000×100000,

가무한 개념

 

4) 상정할 수 있고, 구성할 수 있으며, 지각할 수 있는 것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도출되는 지각 가능한 대상들

z. B. 수 2, 두 개의 대상 

  1. Hume, Treatise, 1권, 3장, 14절 참조. [본문으로]
  2. 판단력비판, 번역 이석윤, 박영사, 1974 판단력비판, 번역 김상현, 책세상, 2005 판단력비판,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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