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Phenomenology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1)

Soyo_Kim 2019. 4. 2. 00:27

2019.04 사회철학반 발제문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1장 후설 이전의 근대 철학의 문제의식에 대하여 대강 서술함

 

1절 근대 철학 이전 존재론Ontology의 주요 개념들- 아리스토텔레스의 ‘ousia’ 개념에 대한 중세 철학의 수용

 

지성사에 있어 사유가 인식과 맺는 독특한 관계는 언제나, 하나의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철학사는 마치 자연수로부터 정수, 유리수, 실수로 나아가는 교과서와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되었을 텐데, 이는 철학사 곳곳에서 나타나는 돌발적인 사건들- 즉, 차이를 지닌 사상들 사이의 전투와 대립, 예기치 못한 공명과 결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철학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 것이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대 철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우리가 제시하는 상(像)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우리를 게으르게 사유하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유의할 때만, 앞으로 제시될 근대 철학의 전형적인 특징은 정당화될 수 있다.

흔히 근대 철학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철학은 그 존재론의 측면에 있어서는 중세 스콜라 철학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다. 존재론이라는 이름, 즉 Ontology는 onta(존재하는 것)과 logyia(학)의 합성어로 17세기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라틴어로는 ‘ontoligia’로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그의 저작《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면서 ‘있는 것’들의 으뜸가는 원인aitia (또는 원리arche)들을 찾아 나선다.[각주:1] 이는 그가 1권 3장(원리 및 원인에 관한 옛 철학자들의 이론)에서 다루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탈레스에서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고대 철학자들의 중심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탐구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얻은 다음에야, 즉 자연학Physica적인 탐구를 한 다음Meta에야”[각주:2]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자연학』190a 34-192b 1 참고)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으뜸철학prote philosophia, 혹은 신학theologike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의 존재 이유나, 그 원리를 찾는 탐구는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맥락에서) 신에 대한 탐구요,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물음으로 이끌었던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각주:3]은 중세 철학에 이르러서도 신학적 세계관의 구축과 더불어 기묘한 형태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누스(Plotinus)와 그의 후계자들의 철학이 어떻게 교부들을 거쳐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각주:4]로 이어졌는지를 언급하면 충분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 제 1권에서 말하길,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각주:5]하며 이러한 앎, 즉 지혜는 단순히 경험 있는 사람들보다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각주:6] 왜냐하면 경험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어떻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 때문에 그것이 그러는지는 알지 못하는 반면에, 기술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것이 그러는지와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각주:7] 또한 감각이란 개별적인 것에 대한 사실은 알려주지만, 그 원인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지혜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각주:8] 고로 “지혜란 사물들의 으뜸 원인과 원리arche들을 다루는 것이다.”[각주:9] 원리라고 불리는 arche는 그리스어로 법칙이나 원칙, 시작, 요소, 근원, 출처 등을 의미하며 이러한 까닭에 이것이 실제로 있는 것에 적용될 때는 존재의 원리principium reale, 형이상학의 주제가 되는 것이며, 인식에 적용될 때는 인식의 원리 principium cognoscene, 즉 논리학의 주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을 포함한 지혜, 즉 으뜸 원리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을 해왔다. 이를테면 탈레스(Thales)에게 있어서 그것은 물이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에게 있어 그것은 공기이며,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에게는 4가지 원소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원인이 네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인은 각각 형상인eidos, 질료인hyle, 목적인telos, 작용인이다. 우리는 대개 그들 가운데 하나를 우시아ousia라고 부른다.[각주:10] ousia는 einai의 현재분사 여성형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말 그대로는 "정말 있는 것"을 뜻한다.[각주:11]

형이상학 7권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ousia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말해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한다. 그 후보가 되는 것은 4가지로, 각각 “보편적인 것(to katholou)”, “무리 혹은 유(genos)”, “바탕이 되는 것hypokeimeinon”,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to ti en einai)”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이 네 번째 개념에서 ousia를 찾는데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ousia를 보통 “실체”로 번역하며,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to ti en einai)’를 “본질”로 번역한다.

각 사물의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본질)는 ‘(그 사물이) 자신(의 본성)에 의해 ...이다라고 말해지는 바’이다. 예를 들어 ‘너-임’(너의 본질)은 ‘교양 있는 것-임’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네가 너 자신인 조건에서 교양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 자신(의 본성)에 의해 ...인 바’가 너-임(너의 본질)이다.[각주:12]

그런데 “~임”이라는 정의Definition는 이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제시된 바 있으니,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여러 차례 “~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질문은 이 질문에 속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제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자들을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 제시되어야한다고 논박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테아이테토스, 우리가 던진 물음은 ‘어떤 것들에 대한 앎인가’나 ‘얼마만큼의 어떤 앎들이 있는가’하는 그런 게 아니었네. 우리는 그것들의 수효를 헤아리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라 앎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었던 것이거든. (...) 그러므로 ‘앎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어떤 기술에 대한 이름으로 대답할 경우, 그런 대답은 우스꽝스런 것이네.[각주:13]

이러한 이유에서 플라톤은 “~임”을 그것의 이데아Idea로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어 eidos는 원래 단순히 보임새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플라톤에 이르러 현상과 감각 세계의 궁극적 원인이자 참된 세계로 제시된다. 현상Phänomen은 이데아의 모방이자 이데아를 나누어가진 것(분유된 것이다.)

우리 후대 사람들은 플라톤이 모든 존재자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칭하기 위해 에이도스라는 낱말을 감히 사용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림잡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에이도스란 일상 언어에서는 가시적인 사물이 우리의 감각적 눈에 제공하는 모양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감각적 눈으로는 절대로 감지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명명하기 위해 이 낱말에 아주 생소한 의미를 요구했다. (...) 보임새, 즉 이데아는 듣거나 만지거나 느낄 수 있는 것, 어떤 식으로건 접근 가능한 모든 것의 본질을 형성하는 바로 그것을 말하며 또한 그것이기도 하다.[각주:14]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에 관한 탐구는 스승인 플라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eidos이 정의의 측면에서만 ‘사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choriston)’으로 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8권 1장 11043a 29)[각주:15] 이러한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시아”(실체)는 두 가지 (주된) 방식(뜻)으로 말해진다. 먼저, 더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해지지 않는 ‘맨 마지막에 있는’ 바탕(to hypokeimenon eschaton)이 실체이다. 그리고 이것이자 (정의의 측면에서) ‘(사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 실체인데, 각 사물의 형태나 꼴이 그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실체(ousia)는 우선 재료hyle와 형상eidos으로 결합된 개체 또는 개인을 말하며 이를 제 1실체라 일컫는다.(이들은 논리학에서 주어가 된다.) 반면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실체(어떤 것의 본질)는 정의(horismos), 사물의 본질(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규정(logos)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제 2의 실체이다.[각주:16]

어떤 으뜸가는 것에 대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 정의가 성립한다. 으뜸가는 것들은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무관하게) 서술되지(술어가 되지) 않는다. (...) 분명한 점은, 으뜸으로 그리고 단적으로, 정의와 ‘(어떤 것이)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어떤 것의 본질)가 실체에 ‘들어 있다’(적용된다)는 점이다.

[각주:17]

그런데 이러한 ousia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의 이중성(한편으로는 그것이 실체(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임이라고 말해지는 바)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단어는 중세로 넘어오면서 다소 혼란스러운 번역을 거치게 되었다. 먼저 ousia의 원뜻, “있는 것”의 라틴어 대응어는 esse(있음)인데, 일반적으로 역동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버클리(George Berkeley)의 유명한 명제인 ‘Esse est percipi’는 ‘있음은 지각되는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esse는 그것의 현재 분사형인 ens(있는 것)와는 또 다른 것이다. 중세의 철학자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1260-1328)는 그의 저서 《명제집Opus Tripartitum》에서 esse와 ens에 대한 구분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esse는 '있음 자체'이며, ens는 ‘있는 것’, ‘이것저것으로 있음’이다. 고로 에크하르트는 ‘Esse est Deus’, ‘있음은 신이다.’라는 명제를 언급함으로서 ‘있음 그 자체’는 오로지 신에게만 귀속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반면에 substantia란 고대 그리스어 hypokeimenon의 번역어로 본디 ‘밑에’ 라는 뜻의 hypo와 ‘놓여 있다’라는 뜻의 keisthai의 합성어이다.[각주:18] 이것은 ‘어떤 것의 밑에 놓여 있는 것’, 즉 ‘바탕이 되는 것’을 뜻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맥락에서는 형상edios과 재료hyle, 그리고 이 둘로 된 전체를 모두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각주:19] 이를테면 청동이라는 재료와 청동이 드러난 모양, 그리고 이 둘로 이루어진 조각상과 같은 것은 모두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각주:20]

위에서 말한 것처럼 hypokeimenon은 《형이상학Metaphysica》 7권 3장에서 실체ousia의 후보로 탐구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실체ousia는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즉 술어가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해서 나머지 것들이 말해져야 하는(주어가 되어야하는) 것이다.[각주:21] 고로 실체는 길이, 넓이, 깊이와 같은 모든 속성들을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문제가 하나 있다. 왜냐하면 실체ousia를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한다면 질료/재료(hyle)가 바로 실체가 되어야할 것인데, 이 질료는 규정되어있지 않은(unbestimmt)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2] 즉 실체의 특성인 따로 떨어져 있음(독립성)과 이것임(구체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가 실체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각주:23]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잠재 상태(혹은 가능상태, dynamis)와 완성 상태(entelecheia)의 구분을 제시한다. dynami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맥락에서 능력이라는 의미와 잠재태라는 의미의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며, energeia는 현실태 혹은 활동을 의미한다. 규정되지 않은 것(ahoriston)인 질료hyle는 동시에 A일수도 ~A일 수도 있는 잠재 상태에 있다. 이러한 질료에 형상eidos의 구체성이 부여됨으로써 완성상태인 A V ~A로 규정된다.[각주:24]

고로 중세에 이르러 esse와 substantia는 종종 교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쉐드(Shedd)에 따르면, esse는 역동적인 존재를 나타내며, substantia는 존재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 esse는 하나님을 (능동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속성들의 총화로 묘사하며, substantia는 하나님을 (수동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활동들의 기초적인 근거로 묘사한다.

2절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essentia/existentia 개념

고대 철학의 두 거목이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에 이르러서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에게 계승되어 그 명맥을 잇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접목이었다면, 아퀴나스의 신학 개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개혁이라 부를 수 있다.[각주:25]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함으로써, 실존(즉, 존재의 능동성)과 본질의 구분을 단행하였다.[각주:26] 적어도 “‘플라톤주의자들의 교리에 젖어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존재는 영원한 불변성”[각주:27]이었으며,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후계자들에게 있어 존재의 핵심은 본질essentia이라는 개념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아퀴나스는 존재라는 낱말의 핵심으로 “있다”라는 동사가 지시하고 있는 능동성, 즉 그것의 실존적 의미에 주목했던 것이다.[각주:28]

너무 앞서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실존주의를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모든 것, 즉 “기획투사Entwurf”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식의 생각을 모두 지워버리도록 하자. 아퀴나스의 맥락에서 실존이란 단어는 ‘던져져 있음’ 혹은 ‘결단’과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esse, 즉 ‘있음’은 능동성이므로 존재에서 고정되어 쉬고 있는 것이다. (esse est aliquid fixum et quietum in ente.)[각주:29]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의 구분을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에 적용한다.[각주:30] 하나님은 전체 본성이 능동성인 존재esse이다. 하나님은 ‘오직 존재esse tantum’[각주:31], 달리 부가되는 것이 없이 실존함(ipsum esse) 그 자체[각주:32]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ens은 순수 현실태이거나 혹은 그 본질의 구성 요소인 가능태와 현실태로 합성된 것이다.[각주:33] 앞서 우리가 살펴본 본질essentia, 즉 ‘무엇임quidditas’[각주:34]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리 사물 안에 존재했던 무엇’[각주:35]으로, 풀어쓰면 “자체 안의 존재로서 그 사물을 바로 그런 유의 사물로 만드는 무엇”[각주:36]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와 형상에 각각 가능태와 현실태를 부여한 것처럼, 아퀴나스는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에 가능태와 현실태를 부여한다. 이에 따르면 본질은 실재적 존재의 내적 구성 원리이자, 현실화와 실재성이 요청되는 의미에서 가능태이고, 현실성actualitas인 존재는 현실태이자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제 실존existentia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다. 실존이란 단어, existentia는 ‘(로부터) 나가다’, ‘나와서 현재 있다’를 의미한다. 실존existentia은 나타나게 되는 것(현실태)의 서 있음으로, 대상에 속하는 두 가지 측면 중 하나이다. 즉, 현실태인 실존과 가능태인 마주 서 있는 것의 무엇임(본질-가능성(essentia-possibilitas))은 대상의 두 측면이다.[각주:37] 따라서 실존은 무엇das Was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사실 존재daß-sein와 어떻게 존재wie-sein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존은 현존(Anwesenheit), ‘눈 앞에 있음’이다.[각주:38]

토마스는 유한한 유들 안에서 본질과 존재는 실재적 구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ens는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의 합성이다. 존재는 본질이 아니고 본질은 존재가 아니다. 본질은 존재 현실태의 주체이고, 존재는 그의 주체에 본질과 실존과 실재를 부여하는 완전함이다. (...) 그래서 본질은 존재를 수용하는 가능성potentia이고, 존재는 본질을 존재하게 하는 현실성actus이다.[각주:39]

 

이로써 실존주의의 실존Existenz 개념을 다루기 위한 예비적 작업을 일차적으로 마친 셈이다. 이로부터 하이데거Heidegger가 어떠한 이유에서 이 개념을 《존재와 시간Sein und Seit》에서 되살리는지, 또 사르트르가 어떻게 실존 개념을 그의 철학으로 수용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가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로 불리기 거부하며, 사르트르가 자신의 철학을 왜곡했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분석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

 

3절 존재론Ontology으로부터 인식론Epstemology으로의 전환 - subjectum/objectum의 구분지음

 

데카르트가 실체substantia로 제시한 res extensa(연장하는 사물)과 res cogitans(생각하는 사물)는 중세 존재론에 온전히 뿌리를 박고 있다. res, 즉 사물인 res cogitans는 ens(존재자)로, 창조된 존재자라는 존재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무한한 존재자인 신은 창조되지 않은 존재자이다.(Gott als ens infinitum ist das ens increatum[각주:40])[각주:41] 로마인들에게 있어 res는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각주:42] 이를테면, res publica(공화국)은 “국민 모두의 관심을 붙잡고 있는 것, 그래서 공적으로 협의되는 것을 의미한다.”[각주:43]

로마어 res는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와 닿는 것을 이름 한다. 와 닿는 것은 res의 실제적인 것(das Reale)이다. res의 실제성realitas을 로마인들은 와 닿음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 로마적인 res의 realitas는 후기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여 그러스적인 온ὄν으로서 표상된다. 온은 라틴어로는 ens로 이쪽에 섬(Herstand)이라는 의미의 현전(Anwesenheit)하는 것을 의미한다.[각주:44]

이로써 res는 (비록 그것이 중세에 이르러 모든 존재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나), 앞에 세워진 것(Vorgestellltes)이라는 의미의 현전(Anwesenheit)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각주:45] 이러한 앞에 놓여 있는 것(Ob-jekt)라는 의미의 대상Object이 주어지는 곳은 인간이 주체Subject가 되는 곳이다.[각주:46] 데카르트에 이르러 주체는 ego cogito, ‘생각하는 나’로 확립된다.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논리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도 그것이 방법적 회의의 사고 실험 거친 후에야 비로소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여긴다. 이러한 까닭에 cogito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것, “이미 자신 앞에-그리고 자신 쪽으로-세워진 것(das schon Vor-und Her-gestellte)”[각주:47]이다. cogito는 이렇게 모든 것을 자신sich에게로,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한 맞은 편gegen에로 세운다.

이렇게 마주-서있는 것(Gegen-stand) 즉 대상/사물을 앞에-세움(Vor-stellen)으로써 “대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로 철학의 물음은 전환된다. 다시 말해, 철학은 이제 존재론Ontology으로부터 인식론Epstemology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곧 존재론이 더 이상 철학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점의 변화로, 앞에-서있음Vor-stellung으로서의 존재자가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데카르트가 결행한 자아cogito의 확립으로 인해, 근대의 존재론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관계 위에서 성립하게 된다. 현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그러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감각을 넘어선 비-물질적인 구조에 대한 탐구가 존재론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18세기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철학을 계승한 볼프(Christian Wolff)의 본체론(ousiology)으로 정립된다.

이러한 눈앞에 있음Anwesenheit의 근거인 감각과 존재론적 구조의 근거인 이성은 곧 칸트가 구분지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구분 근거가 된다. 흔히 합리론자로 분류되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가 이성을 통해 인식론을 전개하는 반면, 경험론자로 분류되는 로크, 버클리, 흄 등은 경험을 통한 인식론을 추구한다.

칸트(Kant)는 위의 철학자들을 분류하고 계승함으로써 이후 철학사의 전개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버렸다. 동시에 그것은 표상Vorstellung으로 세워진 존재자가 오로지 현상Erscheinung일 뿐이며, 또한 인식Erkenntnis의 유일하게 가능한 대상임을 밝힘으로써 주체가 결코 알 수 없는,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 사이의 거대한 심연을 만들어냈다.[각주:48] 우리는 그것을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라 이름 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16 [본문으로]
  2. Ibid. p. 14 [본문으로]
  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15 [본문으로]
  4. 에티엔느 질송, 『중세 철학사』, 번역 김기찬, 현대지성사, 1997, p.117 [본문으로]
  5.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29 [본문으로]
  6. Ibid. p.33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Ibid. p.34 [본문으로]
  9. Ibid. p.35 [본문으로]
  10. Ibid. p.4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p.291 [본문으로]
  13.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번역 정준영, 이제이북스, 2013, 146e-147c, p.81-82 [본문으로]
  14.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27-28 [본문으로]
  15.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223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p.294-296 [본문으로]
  18.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43 [본문으로]
  19. Ibid. [본문으로]
  20. Ibid. p.288 [본문으로]
  21. Ibid. [본문으로]
  22. Ibid. p.290 [본문으로]
  23. Ibid. [본문으로]
  24. Ibid. p.171 [본문으로]
  25. 에티엔느 질송, 『중세 철학사』, 번역 김기찬, 현대지성사, 1997, p.505 [본문으로]
  26. Ibid. p.578 [본문으로]
  27. Ibid. p.510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Ibid. p.511 [본문으로]
  30. 김춘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번역 김춘오, 누멘, 2009, p.172 [본문으로]
  31. 에티엔느 질송, 『중세 철학사』, 번역 김기찬, 현대지성사, 1997, p.511 [본문으로]
  32. Ibid. p.515 [본문으로]
  33. 김춘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번역 김춘오, 누멘, 2009, p.104 [본문으로]
  34. Ibid. p.112 [본문으로]
  35. Ibid. [본문으로]
  36. Ibid. [본문으로]
  37.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형이상학의 극복,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94 [본문으로]
  38. Ibid. [본문으로]
  39. 김춘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번역 김춘오, 누멘, 2009, p.138 [본문으로]
  40. Martin Heidegger, 『Sein und Seit』, Mas Niemeyer Verlag Tübingen, 2006 p.24 [본문으로]
  41.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44 [본문으로]
  42.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사물,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225 [본문으로]
  43. Ibid. [본문으로]
  44. Ibid. p.226-227 [본문으로]
  45. Ibid. p.227 [본문으로]
  46.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형이상학의 극복,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107 [본문으로]
  47. Ibid. p.93 [본문으로]
  48. 중요한 점은, 이것이 칸트의 독단적 사유로 인해 발생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칸트는 그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 “학문적 정확성이라는 가장 엄격한 규칙”을 신봉하여 그 엄격함을 넘어서는 모든 사태에 대해 주저했던 엄격한 주저함을 추구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