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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반시대적 고찰 : 니힐리즘과 존재의 빛남

Soyo_Kim 2018. 12. 27. 17:58

2018-1 종교철학

 

하이데거의 반시대적 고찰 : 니힐리즘과 존재의 빛남

 

위험이 있는 곳에는 그러나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네.[각주:1]

- 프리디리히 횔덜린

 이 글은 하이데거라는 사상가의 종말론적(그리고 구원론적) 사유를 재조명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상가의 특정한 면모를 드러내고자 할 때에는, 그 면모가 사상가의 사상(Gedanken)에 있어 어떠한 방식으로 그 핵심을 담지하고 있는가를 먼저 고려해보는 것이 옳다.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가 단순한 흥미에서 비롯된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선 말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표는 종말과 구원의 사유가 하이데거 사상 전체의 핵심이자 그가 평생 동안 대결하고자 했던 사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 모든 철학의 근본물음은 반시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규정, 철학은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규정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따져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하이데거가 그 스스로의 사유를 반시대적이라고 여겼음은 확인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사유는 반시대적이라는 것인가? 이를 알기 위해선 하이데거가 파악한 시대적인 것의 의미를 먼저 파악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 물음의 실마리를 하이데거가 1953년 발표한 『기술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하이데거는 일차적으로 현대를 기술 시대로 규정한다.[각주:2] 그런데 우리는 기술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기술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술을 이용하는 데에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어 있으며, 기술을 가치중립적으로만 생각함으로써 기술의 본질을 은폐시키기 때문이다.[각주:3]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기술을 가치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가? 그 까닭은 기술을 하나의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망치를 사용하면서 망치가 일으키는 사건은 망치를 사용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망치 그 자체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기술을 도구로 보는 규정은 올바르기는 하나 참된 규정은 아니다. 어떠한 대상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이는 시를 단어들의 집합으로 정의내리는 규정이 그 자체로 올바르지만 시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인과성으로부터 기술의 본질에 접근한다. 원인에 관한 철학적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이러한 원인(causa)을 작용을 미치는 것으로, 어떤 결과로 떨어지다(cadere)로 이해하는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아이티온(aition)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원인이란 “무엇에 작용을 미치는 그것”이 아니라 “책임짐의 공속적 방식들”이다. 형상인(eidos)과 질료인(hyle), 목적인(telos)은 모두 사물을 완결시킴과 동시에 존재할 바의 그것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도록 책임진다.[각주:4] 이를테면, 은잔을 만드는 데에 있어, 은잔의 보임새(모양), 질료(재료), 목적(제사) 등은 은잔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만든다. 이것을 은장이는, 숙고를 통해 하나로 모은다. 숙고란 그리스어로 레게인(legein), 로고스(logos)이다.[각주:5] 따라서 이 네 가지 아이티온(aition)을 통해 은폐되어있던 것은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이게 되는 것이다.(poiesis)[각주:6] 그리스인들은 은폐되어 있던 존재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 탈은폐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로마인들이 베리타스(veritas)라고, 현대에는 통상 진리(Wahrheit)라 부르는 그것이다.[각주:7]

 따라서 기술은 탈은폐의 한 방식으로, 진리의 영역에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현대의 탈은폐가 더 이상 포이에시스(poiesis)의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기술의 본질은 닦달, 몰아세움(Gestell)이며, 이렇기에 현실적인 것은 부품(Bestand)으로 탈은폐되어버리고 만다.[각주:8]

“주문 요청하는 탈은폐로서의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 주문 요청하도록 인간을 닦아세우는 그 도발적 요청 역시 드러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각주:9]

이렇기에, 인간은 그 시원에서부터 존재와 맺어왔던 탁월한 방식, 포이에시스(poiesis)로서의 진리의 의미를 망각해버렸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즉, Gestell은 예전의 탈은폐의 방식을 숨겨버림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와 존재의 본질을 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기술과 그것이 품고 있는 무한한 진보라는 이념은, 존재망각의 대가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부품으로 되어가는 최고의 위험일 뿐이다. 이는 근대철학이 충분하 사유 없이 기독교의 종말론을 단순히 세속화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신마저도 그 표상 작용에서는 그 모든 성스러움과 지고함과 그 자신의 간격의 신비스러움을 상실해버릴 것이다. 신은 인과율의 빛 안에서는 하나의 원인으로, 능동인으로서 전락해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은 신학 내에서마저도 철학자의 신이 (......) 인과율의 본질의 출처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유해보지 않은 채- 규정해버리는 그러한 철학자의 신이 되어버린다.”[각주:10]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에 최고의 위험에 다다랐다고, 종말의 징표에 다름 아니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것을 사유했던 철학자로 하이데거는 니체를 주목한다. 왜냐하면 니체의 니힐리즘과 영원회귀를 하이데거는 현대가 겪고 있는 사태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의지하지 않기 보다는 차라리 무(無)를 의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대적 허무를, 무의미의 노리개가 되는 상황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그 자체로 견뎌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 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따라서 니체에게 있어 니힐리즘이란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 절대적 허무의 상황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 있어 이것은 존재 망각의 대가로 치러야할 당연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위험에 대한 해결책을 어떻게 제시하는가? 하이데거는 우리가 시원적 신으로, 인간이 시원에서 경험했었던 존재의 빛남을 다시 체험할 수 있었던 그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맨 위에 제시된 횔덜린의 시구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기술(techne)은 그리스에서 오늘날 말하는 것과 같은 제작으로서의 기술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예술의 포이에시스 역시 테크네로서 신들의 현존을 이끌어내고 인관과 신 사이의 상호 대화를 빛나게 해주는 최고의 탈은폐였다.[각주:11] 따라서 하이데거는 기술의 위험 아래에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고 있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시적인 것이 참된 것, 가장 순수하게 밖으로 비추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끌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2]

“과연 예술이 극단의 위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본질에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최고의 가능성을 보존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 위험이 더욱더 가까워질수록 구원자에로 이르는 길은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더욱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각주:13]

 이렇듯 하이데거의 사상에 있어 종말과 구원의 사유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하이데거는 종말과 구원의 사상을 세속화한 근대 철학의 사유가 그것을 올바로 사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망각의 틀 아래에서 사유해왔다고 비판한다. 즉, 근대 철학은 본래적 신을 형이상학적 신으로 대체함으로써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은폐시켰다. 사람들은 구원하다(retten)를 흔히 “몰락의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을 제 순간에 재빨리 붙잡아 계속 보존시키는 것”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있어 구원하다는 존재자의 존재를 밝혀 드러내는 것, 본질을 본래적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서 존재자를 본질에로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각주:14]

 하이데거는 현대의 이러한 흐름을 자신의 힘으로, 혹은 철학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각주:15] 그것은 하나의 역사운명적(Geschick)인 현상, 서양 사유의 시작에서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탈은폐의 사건이 전개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로부터 인간 본래의 존재를 회복하는 일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 있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각주:16]그렇다면 이 본래적 신이란 무엇일까? 또 그에게 있어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소리 없는 부름(Sage)으로부터 이 부름에 조용히 응답하며, 다가오는(zu kommen) 자들을 위해 사유한다.[각주:17] 이들이 존재의 고향에서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파수할 때만, 비로소 본래적 신의 신성이 세계 내에 말없이 드러나는 것이다.[각주:18] 따라서 본래적 신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감함이 바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철학이다. 그는 의지를 버리고 떠나있음(Abgeschiedenheit)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이학사, 2008, p.38 [본문으로]
  2. Ibid. p.20 [본문으로]
  3. Ibid. p.10 [본문으로]
  4. Ibid. p.14 [본문으로]
  5. Ibid. p.15 [본문으로]
  6. Ibid. p.16 [본문으로]
  7. Ibid. p.18 [본문으로]
  8. Ibid. p.27 [본문으로]
  9. Ibid. p.26 [본문으로]
  10. Ibid. p.36 [본문으로]
  11. Ibid. p.46 [본문으로]
  12. Ibid. p.47 [본문으로]
  13. Ibid. p.48-49 [본문으로]
  14. Ibid. p.38-39 [본문으로]
  15. 이승종 (1999). 반시대적 고찰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철학과 현상학 연구, 12, 395-424., p. 419 [본문으로]
  16. Ibid. p. 420 [본문으로]
  17. 신상희, 하이데거와 신, 제 2장 『철학에의 기여』와 궁극적 신, 철학과 현실사, 2007, p.83 [본문으로]
  18. Ibid. p.84-8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