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Feminist Philosophy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4) 인류의 역사 초기 단계에 나타난 여성의 타자화

Soyo_Kim 2024. 12. 26. 11:09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4. 인류의 역사 초기 단계에 나타난 여성의 타자화 

하지만 생산과 재생산은 영아살해, 제물, 전쟁을 통해 언제나 성공적인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집단의 존속이란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필요하다. 식량이 풍부했던 시대에는 아이의 보호자이며 양육자라는 여자의 역할이 남자를 어머니인 여자에게 종속시켰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모성에서 완전한 자주성을 끌어내는 동물의 암컷들이 있다. 여자는 왜 모성을 받침대로 삼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까? 노동력의 수요가 개발해야 할 원료의 수요보다 상회했기 때문에 인류가 가장 맹렬하게 출산을 요구하던 시대에서조차, 그리고 모성이 가장 숭앙받던 시대에서조차 인류는 첫 번째 자리를 여자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인류가 단순한 자연적 종種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신을 종으로 유지시키려 하지 않는다. 인류의 계획은 정체停滯가 아니다. 인류는 자기 초월을 지향한다.

원시 유목민들은 후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한 영토에 정착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안정된 것에 자신을 구현하지 않은 채 영속성에 대한 구체적인 관념도 형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는 일을 걱정하지 않았고, 자손들 안에서 자기 모습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후계자도 주장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풍요가 아닌 짐이 되었을 뿐이다. 그 증거로 유목민들에게 영아살해는 언제나 많았다. 그리고 많은 갓난아기가 살해당하지는 않았어도 일반적으로 무관심과 비위생으로 죽어 갔다. 그러므로 아기를 낳는 여자도 창조에 대한 자부심을 알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힘의 노리갯감으로 느꼈고, 고통스러운 출산은 무익한 일이거나 성가시기까지 한 사고였다. 나중에는 어린아이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긴 했어도 애를 낳고 젖을 먹이는 일은 활동이 아니라 자연적 기능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계획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거기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도도한 주장의 동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자는 수동적으로 자기의 생물학적 운명을 받아들였다. 여자가 헌신하고 있는 가사노동은 모성의 임무와 유일하게 양립할 수 있기 때문에 여자를 반복과 내재 속에 가두었다. 그런 노동은 몇 세기에 걸쳐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동일한 형태하에서 날마다 반복되었다.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남자가 집단을 먹여 살리는 것은 일벌처럼 단순한 생명 유지에 필요한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동물적 조건을 초월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태초부터 발명가다.

 

여기에 모든 의혹을 푸는 단서가 있다. 생물학 영역에서는 종種이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은 오직 자기를 새로 창조하면서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는 단지 여러 다른 형태 아래서 같은 생명의 반복에 불과하다. 인간은 실존에 의해 생명을 초월하면서 생명의 반복을 보장한다. 그는 이 초월에 의해서 단순한 반복에는 일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그런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 목적 없이 제멋대로인 수컷의 활동은 아무 계획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종에 기여하지 않을 때 그의 행동은 무익한 것이다. 반면에 인간 남성은 종에 기여하면서 세계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도구를 창조하며 발명을 하고 미래를 형성해 나간다. 그는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여자에게서 공모자를 찾아낸다. 왜냐하면 여자 역시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초월을 내부에 품고 있으며, 그녀의 계획은 반복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향해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존재 한가운데에서 남성적인 포부를 확인하고 발견한다. 여자는 남자의 성공과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에서 남자와 자기를 결부시킨다. 여자의 불행은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반복하는 운명이 주어진 반면에, 그녀의 눈에조차 생명이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존재 이유가 생명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주인의 특권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생명에 반해 정신을 주장한다는 데서 온다. 그러나 정복된 노예 역시 이런 위험을 감수한다. 반면에 여자는 본래 생명을 주지만 자기 목숨을 걸지 않는 실존자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결코 싸움이 없었다. 헤겔의 정의는 특히 여자에게 적용된다. “다른 [의식意識]은 의존적 의식인데 그 의식에게 본질적인 현실은 동물적 생명, 즉, 다른 실체에 의해 주어진 존재다.” 그러나 이 관계는 억압의 관계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여자 또한 남자들이 구체적으로 도달한 가치들을 목표로 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여는 것은 남자이고 여자 역시 미래를 향해 자기를 초월한다. 사실상 여자는 지금까지 남성의 가치에다 여성의 가치를 대립시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구분은 남성의 특권을 유지하기를 욕망하는 남자들이 만들어 냈다. 남자들은 단지 여자를 가두기 위해서만 여성의 영역 – 생명과 내재內在의 규칙 - 을 창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실존자는 모든 성적 특수성을 넘어 자기 초월의 운동에서 자기 정당성을 구한다. 여자들의 복종 자체가 그 증거다. 여자들이 오늘날 요구하는 것은 남자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실존자로서 인정받는 것이지, 실존을 생명에, 인간을 그 동물성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언제나 종의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애써 왔다. 도구의 발명으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남자에게 활동이자 계획이 되었다. 반면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행위에서 여자는 동물처럼 자기 몸에 묶인 채 꼼짝하지 못했다. 남자가 여자 앞에서 주인으로 군림했던 것은 인류가 자기 존재에 문제를 제기하고, 다시 말해 생명보다는 삶의 이유를 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계획은 시간 속에서 자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지배하고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남자의 활동은 가치를 창조하면서 존재 자체를 가치로 구성했다. 그것은 생명의 혼돈된 힘을 이겨 내고 자연과 여자를 예속시켰다. 이제 이런 상황이 수 세기 동안 어떻게 영속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인류는 그 내부에서 자신을 타자로 규정하는 인류의 일부에 어떤 자리를 마련해 주었나? 어떤 권리가 그 일부에게 인정되었나? 남자들은 그 일부를 어떻게 규정했던가?

 

그러나 많은 원시인은 아이들의 출산에 아버지가 하는 역할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특정한 나무와 바위 주위 그리고 특정 신성한 장소에서 떠다니는 조상의 영혼이 여자의 몸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로 사람들은 이 침투가 가능하려면 여자가 처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침투가 콧구멍이나 입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어찌 됐든 처녀성의 상실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신비한 이유로 ‘처녀성 빼앗기’는 드물게 남편의 전유물이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출생에 당연히 필요하다. 자기 체내에 정자를 보존하고 키우는 것이 여자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씨족의 생명이 퍼지는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다. 이처럼 어머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개 자기 어머니의 씨족에 속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르며, 어머니의 권리에 참여하고, 특히 그 씨족이 점유하고 있는 토지를 소유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재산은 여자들에 의해 전해졌다. 밭과 수확은 여자들에 의해 씨족의 구성원들에게 분배되었고, 역으로 씨족 구성원들은 어머니들에 의해서 각각의 토지에 보내졌다. 그러므로 대지는 신비하게도 여자들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자들은 경작지와 그 수확물에 대해 종교적인 동시에 법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와 토지를 결부시키는 유대 관계는 단순한 소속보다도 훨씬 더 긴밀했다. 모권제의 특징은 여자와 토지를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데 있다. 이 양자 안에서는 여러 가지 자기 변신을 통해 생명의 영원성이 성취되는데, 생명은 본질적으로 생산이었다. 유목민들에게 출산은 거의 사고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고, 땅의 풍요도 알려지지 않은 채 있었다. 농부는 밭이랑과 어머니의 배 속에서 개화되는 번식력의 신비에 감탄했다. 그는 자기가 가축이나 수확물처럼 생겨났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 씨족이 낳은 다른 사람들이 들판의 비옥함을 영속시키면서 자신도 영속시키기를 바랐다. 자연 전체가 그에게는 어머니처럼 보였다. 대지는 여자였다. 그리고 여자 안에는 대지와 마찬가지의 불가사의한 힘이 들어 있었다.4 농업 관련 노동이 여자에게 맡겨진 것은 일정 부분 이런 이유에서였다. 자기 태내에 조상의 영혼을 불러들일 수 있는 여자는 또한 씨가 뿌려진 들판에서 과실과 이삭을 움트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모두 창조적 작업이 아니라 마법적인 주술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남자는 땅의 생산물을 거둬들이는 데만 머무르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자기의 힘을 알지 못했다. 그는 기술과 마법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남자는 생존과 죽음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자연에 종속되어 자신을 무기력하게 느꼈다. 물론 그는 성행위와 땅을 길들이는 기술의 효용을 다소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수확물이 초자연적 선물처럼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생명의 신비한 근원에 파묻혀 있는 풍요를 이 세계에 끌어당기는 힘은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신비한 발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타자를 생각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고 앞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인간은 이원성의 기호 아래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이원성은 원래 성적 특성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동일자同一者로 내세우는 남자와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자의 범주에 분류되었다. 타자는 여자를 포함한다. 여자는 애초에 홀로 타자를 구현할 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타자 한가운데서 세분화가 이루어진다. 오래된 우주 생성 이론에는 동일한 요소가 종종 남자인 동시에 여자의 화신化身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이 바빌로니아인들에게는 대양Océan6과 바다Mer7가 우주의 혼돈을 나타내는 이중의 화신이었다. 여자의 역할이 커지자 여자는 타자의 영역을 거의 완전히 흡수해 버린다. 그때 여신들이 출현했고, 사람들은 그 여신들을 통해 풍요의 관념을 숭상했다.

 

모권제 시대에서 부권제 시대로의 이행은 엥겔스에게 ‘여성의 역사적 대패大敗’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상 여자의 황금시대는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여자가 타자라고 말하는 것은 양성 간에 대등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대지, 어머니, 여신인 여자는 남자에게 동류가 아니었다. 여자의 위력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인간계 너머의 피안에서였다. 따라서 여자는 인간계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는 항상 남성의 것이었다. 정치권력은 언제나 남자들의 수중에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사회에 관한 그의 연구를 마치면서 “공적 혹은 단순히 사회적 권위는 항상 남자들에게 속해 있다”고 단언하였다. 남자에게 동일자이고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동류이자 타인은 언제나 남성 개체였다. 집단 내부에서 이런 저런 형태로 발견되는 이원성은 한편의 남자 집단을 다른 한편의 남자 집단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들이 소유하는 재산의 일부고, 남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환 도구다. 오류는 완전히 서로 상반되는 두 형태의 이타성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다. 여자가 절대적 타자로, 즉 - 여자의 마력)이 어떠하든 간에 -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한, 여자를 또 하나의 주체로 바라본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불가능하다.9 그러므로 여자들은 남자 집단에 대항해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를 설정하는 별도의 집단을 한 번도 구성한 적이 없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결코 직접적이고 자주적인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결혼을 성사시키는 상호성의 관계는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을 수단으로 해서 남자들 사이에 확립되었고, 여자들은 그 관계의 주요한 계기가 될 뿐이다”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그러나 몇 번이고 강조해서 말해 둘 것은, 생명, 자연, 여자의 신비 앞에서 혼비백산하던 시대에서조차 남자는 결코 한 번도 자신의 권력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있는 위험한 마법에 겁을 먹고서도 여자를 본질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남자이며, 그는 이와 같이 자기가 동의하는 소외 속에서 자신을 본질로서 실현한다. 여자가 강한 번식력의 덕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비옥한 토지의 주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주인인 채 있다. 마법적인 비옥함을 구현하는 자연 역시 그러한 것처럼 여자는 정복되고 소유되며 착취당할 운명에 놓여 있다. 남자들 면전에서 여자가 누리는 위엄은 남자들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들은 타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 여신을 숭상한다. 그러나 여신이 제아무리 강력해 보이더라도 그녀는 남성의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을 통해 파악된다. 남자가 창조한 모든 우상은 아무리 무시무시하게 만들어졌더라도 실상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시사회에서 이러한 종속은 인식되지도 않았고 확립되지도 않았지만,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남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명확하게 의식하고, 감히 자기를 주장하고 대립시키게 되는 즉시 이 종속을 쉽게 수단화한다. 

차차 남자는 자기의 경험을 수단화했고, 실제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표상 속에서도 남성적 원리가 승리했다. 정신이 생명을 이기고, 초월이 내재성을, 기술이 마법을, 이성이 미신을 이겼다. 여자의 실추는 인류 역사에서 필연적인 단계를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가 권위를 이끌어 냈던 것은 여자의 긍정적 가치에서가 아닌 남자의 약함에서였기 때문이다. 여자 안에는 불안스러운 자연의 신비가 구현되어 있었다. 남자는 자연에서 해방될 때 여자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난다. 남자가 노동으로 땅을 정복하고 자기 자신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석기시대에서 청동시대로 이행하던 때다. 농부는 토지, 씨앗의 발아 상태, 계절의 우연성에 지배되고, 불행을 좇고, 수동적으로 기다린다. 그 때문에 토템의 귀신이 인간세계를 가득 채웠다. 농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런 자연의 힘의 변덕을 견뎌 내야만 했다. 그와 반대로 직공은 자기의 의도대로 도구를 만들어 낸다. 그는 도구에 자기 손으로 자기 계획의 형상을 아로새긴다. 그에게 저항하지만 결국 정복당하는 무기력한 자연 앞에서 그는 자기를 절대적인 의지로 주장한다. 그는 서둘러 도구를 완성하기 위해 모루 위에서 두드리는 데 속도를 낸다.

호모 파베르의 시대는 인간이 공간과 함께 시간도 정복할 수 있는 시대이며, 필연성·계획·행동·이성의 시대다. 대지와 대결할 때조차 인간은 이제 노동자로 맞서게 된다. 인간은 땅을 비옥하게 할 수 있는 방법과 땅을 쉬게 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여러 다양한 씨앗을 각각의 적절한 방법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결국 농작물을 키우는 것은 인간이다. 운하를 파고 토지에 물을 대고 뺀다. 길을 닦고 사원을 짓는다. 인간은 세계를 새로 창조한다. 어머니 여신의 지배하에 남아 있거나 모계제를 영속시켰던 민족들 역시 원시문명의 단계에서 멈춰 섰다. 남자가 자기를 자기 자신의 두려움의 노예나 자기 자신의 무능의 공모자로 만드는 한에서만 여자가 숭배되었기 때문이다. 즉, 남자가 여자를 숭배한 것은 사랑이 아닌 공포 속에서다. 남자는 여자를 먼저 왕좌에서 쫓아냄으로써 비로소 자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때 남자가 최고 권력자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창조력, 빛, 지성, 질서의 남성적 원리다.

이와 같이 가부장제의 승리는 우연도 아니고 폭력적인 혁명의 결과도 아니다. 인류의 태초부터 남성은 생물학적 특권 때문에 자신을 최고의 주체로 홀로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들은 이 특권을 결코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존재의 일부를 자연과 여자 안에 소외시켰지만 곧 되찾아 갔다. 타자의 역할을 하도록 선고받은 여자는 일시적 권력만을 소유하도록 운명 지어졌다. 노예이든 우상이든, 여자는 결코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신들을 만들고 여자들은 그 신들을 숭배한다”고 프레이저Sir James Frayser(1854~1941)가 말했다. 자신들의 최고의 신을 여자로 하는가, 남자로 하는가는 남자들이 결정한다. 사회 에서 여자의 자리는 항상 남자들이 지정한다. 어떤 시대에도 여자는 자기 자신의 법을 부과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