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3. 유물사관의 관점
인간 사회는 반자연(反自然)이다. 인간 사회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도록 개조한다. 이러한 개조는 내적이자 주관적인 작업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객관적으로 행해진다. 따라서 여자도 단순히 성적인 유기체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조건들 가운데 행위 속에서 구체적인 가치를 띠는 것들만이 유일하게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1895)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여자의 역사를 되짚고 있다. 즉, 이 역사는 무엇보다도 기술의 역사에 좌우될 거라는 것이다. 토지가 씨족 전원의 공동소유였던 석기시대에는 원시적인 삽과 괭이의 초보적 성격이 농경의 가능성을 제한했다. 여자의 힘은 채소밭 정도의 경작에 필요한 노동에 알맞았다. 노동의 원시적 분화에서 남녀 양성은 이미 두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두 계급의 관계는 평등했다. 남자가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는 동안 여자는 가정에 머물렀다. 가정의 임무에는 생산적인 노동, 즉 토기 제조, 직조, 원예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 여자는 경제적 생활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구리, 주석, 청동, 철의 발견으로 쟁기의 출현과 함께 농업은 그 영역이 넓어졌다. 삼림을 개간하고 들판을 경작하기 위해 집약적인 노동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다른 남자들을 노예로 삼아 이용하였다. 사유재산이 생겨났다. 노예와 토지의 주인인 남자는 또한 여자의 소유자가 되었다. ‘여성의 역사적 대패’가 바로 그것이다. 여성의 패배는 새로운 도구가 발명됨에 따라 노동 분화 속에 발생한 대혼란으로 설명된다. “집에서 여자에게 이전의 권위를 보장해 주던 그 원인, 즉 집안일에 여자를 가둬 두었던 것과 같은 원인이 이제는 집안에서 남자의 지배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때부터 여자의 가내노동은 남자의 생산적인 노동 옆에서 빛을 잃었다. 후자가 전부였고 전자는 무의미한 부속물일 따름이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권리가 어머니의 권리를 대체했다. 경지境地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상속되었고, 더는 여자에게서 씨족으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사유재산 위에 구축된 가부장 가족의 등장이다. 그와 같은 가정 내에서 여자는 억압당했다. 절대자로 군림하는 남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성적 방종을 허용한다. 남자는 노예나 창녀와 동침하고 많은 아내를 거느린다. 풍습이 상호성을 가능하게 하자마자 여자는 부정不貞으로 복수한다. 즉, 결혼은 당연히 간통으로 보완된다. 그것이 여자를 옭아매고 있는 가정의 노예 상태에 대한 여자의 유일한 방어책이다. 여자가 감내하는 사회적 억압은 그녀의 경제적 억압의 결과다. 평등은 양성이 동등한 법적 권리를 누리게 될 때 비로소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은 모든 여성이 공적 산업에 복귀할 것을 요구한다. “여자의 해방은 여자가 사회적으로 대규모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그녀에게 대수롭지 않은 정도로 요구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성 노동을 대규모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명백히 필요로 하는 대규모 근대 산업 안에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여성 문제는 여성의 노동력 문제로 귀결된다. 기술이 여자의 능력에 적합했던 시대에는 강력한 권한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활용하기가 불가능해지자 추락해 버린 여자는 근대 사회에서 남자와의 평등성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에서 이러한 평등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 남아 있는 낡은 가부장주의의 저항이다. 이 저항이 무너지는 날이 오면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소련에서는 이미 평등이 실현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가 전 세계에서 실현된다면 더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오직 평등한 노동자들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인류 역사의 핵심축은 공유재산제에서 사유재산제로 이행한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엥겔스도 “현재까지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32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역사적으로 상세히 모를 뿐 아니라 어떠한 해석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가 필연적으로 여자의 예속을 가져왔다는 것도 분명치 않다. 유물사관은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사실들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엥겔스는 검토도 하지 않고 인간을 재산에 결부시키는 ‘이해利害’의 유대를 정의한다. 그러나 사회 제도의 근원인 ‘이해’는 그 자체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이처럼 엥겔스의 설명은 피상적인 상태로 남아 있고, 그가 발견한 진리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유물사관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이런 진리를 더 깊이 연구하기란 불가능하다. 유물사관은 우리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은 전(全) 인간에 관련된 것이지, 경제적 인간이라는 추상적인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인의 소유라는 관념조차도 실존자의 근원적인 조건에서 출발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관념이 나타나려면 우선 주체 안에 자신을 그 본질적인 개별성 속에 놓으려는 경향, 즉 자기 존재를 자율적이고 분리된 것으로 하려는 주장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의향은 개인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만족시키는 실제적 수단이 없는 한 주관적이고 내적이며 진실성이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 초기의 인간은 적합한 도구가 없었으므로 세계에 대한 자신의 힘을 경험할 수 없었고, 자연과 집단 속에 매몰되어 수동적이고 위태로워지고 미지의 힘의 놀림감이 되었다. 오직 씨족 전체에 동화되어서만 인간은 감히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다. 토템, 마나, 대지는 집단적 현실이었다. 청동의 발견은 인간이 고되고 생산적인 노동의 시련 속에서 자신을 창조자로 발견하는 것을 허락했다. 자연을 지배하면서 인간은 더는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저항을 극복한 인간은 대담하게도 자기를 자주적인 활동력으로 생각하며 개별성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실현은 만일 인간이 근원적으로 원하지 않았다면 절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의 교훈도 수동적 주체에게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주체 자신이 도구를 만들고 대지를 정복하면서 자기를 단련하고 정복한 것이다. 한편, 주체가 되고자 하는 주장만으로는 소유를 설명하는 데 부족하다. 도전, 투쟁, 개별적 싸움에서 각자는 지배력을 확보하려 시도할 수 있다. 도전이 포틀래치potlatch34의 형식, 즉 경제적인 경쟁의 형식을 취하고 거기에서 우선 족장이, 그다음에 씨족 구성원들이 사유재산권을 주장하려면 인간 속에 또 하나의 근원적 경향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앞장에서 실존하는 인간은 오직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만 자기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를 가로질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다른 형상 아래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 토템과 마나 그리고 점유하는 영토 안에서 씨족이 만나는 것은 소외된 자기의 실존이다. 개인이 공동체에서 분리될 때 그는 개별적인 구현을 요구한다. 마나는 족장 안에서, 다음엔 각 개인 속에서 개별화된다. 그리고 동시에 각자는 땅 한 떼기, 노동 기구, 수확물을 사유화하려고 한다. 자기 것이 된 부富에서 인간이 다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소유물에 자기를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소유물에 자기의 생명만큼이나 기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재산에 대한 인간의 이해 관계는 그리하여 분명해진다.
인간 의식 안에 타자라는 근원적인 범주가 없었다면, 그리고 타자를 지배하려는 근원적인 의도가 없었다면 청동기의 발견이 여자의 억압을 가져올 수 없었을 것이다. 엥겔스는 이 억압의 특수성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양성의 대립을 계급 투쟁으로 축소시키려 했다. 게다가 그것을 별다른 확신 없이 그렇게 했다. 그 이론은 근거가 약하다. 성에 의한 노동의 분화와 그로 인한 억압이 어떤 점에서는 계급의 분화를 연상시킨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둘을 혼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계급 간의 분리는 아무런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 노동에서 노예는 주인에 대항해 자신을 의식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반항에서 언제나 자신의 조건을 체험했다. 그리하여 본질적인 존재로 돌아가 자신의 착취자들에게 위협적이게 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겨냥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소멸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여자를 오직 노동자로만 간주하는 것인데, 이는 기만적이라 할 수 있다. 여자의 생산능력만큼이나 재생산 기능은 개인생활뿐 아니라 사회경제에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쟁기를 다루는 것보다 아이를 낳는 것이 더 유익한 시대가 있었다. 엥겔스는 그 문제를 교묘하게 은폐했다. 그는 사회주의 공동체가 가족을 소멸시킬 것이라고 선언하는 데 그쳤다. 그것은 아주 추상적인 해결책이다. 생산과 인구 재증가에 대한 직접적 수요의 균형이 갖가지로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소련이 가족정책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전면적으로 바꿔야 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가족을 없앤다는 것이 반드시 여자를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와 나치 정권의 사례는 여자가 국가에 직접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남자에게 덜 억압받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진정으로 사회주의적 윤리, 즉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정의를 구하며, 개인들에게 책임을 지우나 개성을 말살하지 않는 그런 윤리는 여자의 조건이 제기하는 문제들로 인해 무척 복잡해질 것이다. 임신을 아주 단순하게 노동이나 혹은 군복무와 같은 봉사와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시민들의 일거리를 규제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여자의 삶에 불법으로 침입하는 것이다. 결코 어떤 국가도 성교를 감히 의무적인 것으로 강요할 수 없었다. 여자는 성행위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단지 시간과 힘만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바친다.
여자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직접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어머니가 되는 것이 유일한 출구인 상황에다 여자를 가두는 것이 전부다. 즉, 법이나 관습은 여자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피임과 낙태를 불법화하며, 이혼을 금지한다. 소련이 오늘날 부활시킨 것은 정확하게 가부장제의 이런 낡은 속박이었다. 결혼에 대한 가부장적 이론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련은 다시 여자에게 성적 대상이 되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의 한 담화에서는 소련의 여성 시민에게 몸매를 가꾸고 화장을 하고 남편을 붙잡아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요염해지기를 권고하고 있었다. 이 사례가 잘 보여 주듯이 여자를 단지 생산적인 힘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성적 파트너이자 재생산자이고, 에로틱한 대상이며 타자다. 남자는 이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찾는다. 전체주의나 독재 정권이 정신분석학을 만장일치로 금지한다 해도, 또한 집단에 충실하게 통합된 시민에게는 개인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선언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에로티시즘은 항상 그 일반성이 개인에 의해 다시 파악되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성적 일원론과 엥겔스의 경제적 일원론을 거부한다. 어떤 정신분석학자는 여자의 모든 사회적 권리 요구를 ‘남성적 항의’의 현상으로 해석할 것이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다소 복잡한 우회로를 통해 여자의 경제적 상황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음핵’이나 ‘질膣’의 범주는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의 범주처럼 살아 숨 쉬는 여자를 가두기에는 똑같이 무력하다. 인류의 경제사처럼 개인의 드라마가 기초가 되는, 인생이라는 이 특수한 형태를 그 통일성에서만 유일하게 이해하게 하는 실존적 하부 구조가 있다. 프로이트 학설의 가치는 실존자가 신체라는 사실에서 온다. 실존자가 자신을 다른 신체들 앞에 있는 신체로 체험하는 방식은 그의 실존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가치는 실존자의 존재론적 주장이 실존자에게 제공되는 물질적 가능성, 특이하게도 기술이 그에게 개방하는 물질적 가능성에 따라서 구체적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섹슈얼리티와 기술을 인간 현실 전체에 통합시키지 않는다면, 그 두 가지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에게 초자아에 의한 억압과 자아의 충동은 우연적 사실처럼 보이고, 가족의 역사에 관한 엥겔스의 이론은 가장 중요한 사건들조차 수수께끼 같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해 느닷없이 돌발한다. 여자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물학, 정신분석학, 유물사관이 이뤄 낸 여러 공헌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몸, 성생활, 기술을 인간존재의 총체적 전망에서 파악할 때에만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할 것이다. 근력, 음경, 도구의 가치는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 계획에 의해 결정된다.
'Analytic > Feminist Philoso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5) 모권제로부터 부권제로의 이행 (0) | 2024.12.26 |
---|---|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4) 인류의 역사 초기 단계에 나타난 여성의 타자화 (0) | 2024.12.26 |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2) 정신분석의 관점 비판 (0) | 2024.12.24 |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1) 생물학적 조건과 반자연으로서의 인간 (0) | 2024.12.24 |
Narayan (2002) Minds of Their Own: Choices, Autonomy, Cultural Practices, and Other Women (0) | 2024.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