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Feminist Philosophy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2) 정신분석의 관점 비판

Soyo_Kim 2024. 12. 24. 07:10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2. 정신분석의 관점

정신분석학이 정신생리학의 영역에서 이룩한 지대한 발전은 어떤 요소도 인간적 의미를 띠지 않고서는 정신적 생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신체 -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체험한 신체다. 여자는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는 것에 따라서 여자다. 생물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조건들이지만 체험된 상황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난자의 구조는 체험적 상황에 반영되지 않는다. 반대로 생물학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음핵 같은 기관이 체험적 상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를 규정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여자는 자연을 자기의 감성에서 다시 파악해 자신을 규정해 나간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운명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운명에 대해 먼저 기술하였고 거기서 몇 가지 특징만 수정한 채 그대로 여자의 운명을 기술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보다 먼저 성의학자 마라뇽Marañon은 “분화된 에너지로서 리비도libido(성욕, 성적 충동)는 남성적 방향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르가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겠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르가슴에 이르는 여자들은 ‘남성화된’ 여자들이다. 성 충동은 ‘일방통행’인데 여자는 단지 길의 절반쯤에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는 여자의 섹슈얼리티가 남자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독립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그는 “리비도는, 남자에게 나타나든 여자에게 나타나든, 변함없이 적법하게 남성적 본질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여성 리비도의 독자성을 인정하길 거부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필연적으로 여성 리비도가 일반적인 인간 리비도의 복잡한 일탈로 보일 것이다.

 

사내아이는 엄마에게 달라붙어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아이는 아버지가 이런 염원에 겁을 집어먹고 벌을 주려고 자기를 거세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부터 ‘거세 콤플렉스’가 생겨난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공격심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그의 권위를 내면화한다. 그리하여 근친상간 성향을 금지하는 초자아가 형성된다. 이러한 성향은 억압되고, 콤플렉스는 청산되며, 아들은 도덕적 규범의 형상으로 자기 안에 자리를 잡게 한 아버지로부터 해방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더 분명하게 표현되고 더 엄격하게 억제될수록 초자아는 더욱더 강해진다. 프로이트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이와 완전히 유사한 방식으로 기술했다. 그런 다음에 유아기 콤플렉스의 여성적 형태에 대해 엘렉트라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 자체로 기술했다기보다는 남성적 형태에서 출발해 기술했다는 점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둘 사이에 매우 중요한 차이를 받아들였다. 즉, 사내아이는 어떤 순간에도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지만, 여자아이는 우선 엄마에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구순기의 잔재다. 여자아이는 구순기에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다섯 살 무렵에 성기의 해부학적 차이를 발견하고 페니스가 없는 것에 대해 일종의 거세 콤플렉스의 반응을 보인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거세되었다고 상상하고 그에 대해 고통을 받는다. 그때 남성적인 주장을 단념하고 자신을 엄마와 동일시해서 아버지를 유혹하려 애쓴다. 거세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서로 강화된다. 여자아이의 실망한 마음은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그와 비슷해지려고 하는 만큼 더욱더 쓰라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역으로 이러한 낙담은 사랑의 감정을 강화한다. 즉, 여자아이는 자신의 열등감을 아버지에게 품고 있는 애정에 의해서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녀는 엄마에 대해 경쟁의 감정과 적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소녀 안에서 초자아가 형성되며, 근친상간의 성향은 억압된다. 그러나 이 초자아는 더욱더 약해진다. 왜냐하면 첫 번째 애착 대상이 어머니였다는 사실로 인해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보다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자신이 아버지가 단죄하는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의 금지명령은 경쟁자인 아들의 경우보다 강하지 못하다. 성기기의 발달처럼, 여자아이가 겪는 성적 드라마 전체는 남자 형제들이 겪는 것보다 한층 더 복잡하다. 소녀는 거세 콤플렉스에 대한 반동으로 자기의 여성성을 거부하고 페니스 선망을 고집하면서 아버지에 동화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소녀를 음핵 단계에 머물게 해 불감증이거나 동성애로 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두 가지 핵심적인 비난은 프로이트가 남성 모델을 원형으로 하여 모방했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는 여자가 자신을 페니스가 잘려 나간 남자로 느낀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페니스가 잘려 나갔다는 생각은 어떤 것과의 비교에서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내포한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는 오늘날 여자아이가 페니스가 없는 것을 애석해하지만 그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애석함조차 그렇게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해부학적 비교에서 생겨날 수도 없다. 많은 여자아이는 남자의 몸 구조를 늦은 시기에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다 해도 단지 시각을 통해서일 뿐이다. 사내아이는 자기 페니스에 대해서 생생한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은 그것으로부터 자랑거리를 끌어내게 하지만, 이러한 자부심은 자기 누이들의 굴욕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누이들은 남자의 기관을 외면상으로밖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 돌출물, 살로 된 이 약한 줄기는 단지 그들에게 무관심만을 그리고 혐오감조차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아이의 선망은 이것이 나타날 때에 남자다움에 부여된 가치에 대한 사전 지식의 결과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선망에 대해 마땅히 설명해야 할 때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넘어갔다. 한편, 여성의 리비도에 대한 독자적인 서술이 빠져 있기 때문에 엘렉트라 콤플렉스 개념은 대단히 모호하다. 사내아이들에게도 순수한 성기기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존재는 보편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매우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아버지가 딸에게 성적 흥분의 원천이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여성의 색정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음핵의 쾌감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여성의 몸 안에서 많은 성감대가 발달하는 것은 단지 사춘기 무렵에 질의 색정과 관련해서다. 열 살 된 어린아이에게서 아버지의 키스와 쓰다듬기가 음핵의 쾌감을 일으킬 ‘내재적 소지’가 있다는 것은 대부분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이다. 만약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극히 막연한 감정적인 성격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때는 감정에 대한 모든 문제가 제기되는데, 일단 이 감정을 섹슈얼리티와 구별하면 프로이트 학설로는 정의할 방법이 없다. 어찌 됐든 아버지를 신성화하는 것은 여성 리비도가 아니다. 어머니 또한 그녀가 아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욕망 때문에 신성화되지 않는다. 여성의 욕망이 최고의 권한을 가진 존재에게 간다는 사실은 여자에게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아버지의 절대적 힘은 사회적 질서의 사실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점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역사상 언제 어떤 권위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 절대적 힘을 갖도록 결정했는지 알 수 없다고 프로이트 자신이 고백했다. 그에 따르면, 이 결정은 진보를 나타내지만 그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것이 아버지의 권위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권위는 정확히 진보에 의해서만 아버지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마지막 저서에서 쓰고 있다.

 

유년기에 여자는 자기를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그다음 남자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자신의 자주성을 유지하고 남성화되거나 – 이것은 열등 콤플렉스가 긴장감을 초래해 신경증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 아니면 순종적인 사랑 속에서 행복한 자기 성취를 발견해 내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인다. 두 번째의 경우는 과거 최고 권력자인 아버지에게 가졌던 사랑 때문에 손쉬운 해결책이며, 여자는 애인이나 남편 안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구한다. 그리고 여자 안에서 성적 사랑은 지배당하고자 하는 욕망을 수반한다.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보상받을 것이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여자에게 또 다른 자주성을 회복시켜 준다. 이 드라마는 자기 나름의 고유한 역동성을 갖춘 것처럼 보이고, 변화무쌍한 우여곡절을 통해서 전개되며, 개개의 여자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감내한다.

 

예를 들면 현대의 한 정신분석학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콤플렉스가 있는 이상, 당연히 여러 개의 구성 요소가 있다. 콤플렉스는 이러한 잡다한 요소들의 집합 속에 있는 것이지 그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요소들을 대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요소의 단순한 집합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생활은 모자이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생활은 그 각각의 순간 속에 전체가 다 들어 있으며, 이 통일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오직 분분한 여러 사실을 통해서 인간 실존의 근원적 지향성을 재발견함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두 가지 다 똑같이 우발적이고 의미가 없는 충동과 금기가 서로 충돌하는 전쟁터처럼 보인다. 모든 정신분석학자에게는 선택이라는 관념과 그와 상관관계인 가치라는 개념에 대해 일률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것이 정신분석학 체계의 본질적인 취약성을 구성한다. 충동과 금기를 실존적 선택에서 단절시켰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그것의 기원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그것들을 주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는 가치의 개념을 권위의 개념으로 대체하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는 『모세와 그의 민족』에서 이 권위에 관해 설명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근친상간이 금지된 것은 아버지가 그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왜 금지하였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초자아는 독선적인 폭압에서 나오는 명령과 금지를 내재화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본능적인 경향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두 현실은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도덕이 섹슈얼리티와 별개의 것처럼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통일성이 깨져 버린 것처럼 보이고, 개인에서 사회로 가는 통로가 없다. 프로이트는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기 위해 기이한 소설을 지어내야만 했다. 

 

실존자는 성적 특성이 있는 신체다. 그러므로 실존자와 역시 성적 특성이 있는 다른 실존자들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섹슈얼리티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신체와 섹슈얼리티가 존재의 구체적 표현이라면, 존재에서부터 그것들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결여로 인해 정신분석학은 설명되지 않은 사실들을 기정사실로 인정해 버린다. 예를 들면, 여자아이는 엉덩이를 드러낸 채 쭈그리고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남자가 페니스가 있어서 우쭐대는가 아니면 페니스 안에 그의 자만심이 표현되는가를 자문하기 전에 자만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주체의 우쭐함이 어떻게 한 대상 속에 구현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섹슈얼리티를 환원 불가능한, 주어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실존자에게는 더욱더 근원적인 ‘존재에 관한 탐구’가 있다. 섹슈얼리티는 이러한 여러 측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파악한 세계 전체를 통해서 인간은 구체적으로 실존에 접해 보려고 한다. 흙을 주무르고 구멍을 파는 일은 포옹이나 성교만큼이나 근원적인 활동이다. 거기서 단지 성적인 상징들만을 보는 것은 착오다. 구멍, 끈적끈적함, 깊게 베인 상처, 딱딱함, 완전함은 최초의 현실이다. 인간이 이에 갖는 관심은 리비도에 의해 부여된 동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에 의해 리비도가 채색된다. 무결점의 온전함이 남자를 매혹하는 것은 여자의 처녀성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니다. 온전함에 대한 사랑이 그에게 처녀성을 귀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 전쟁, 유희, 예술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이 세계에서의 존재 방식이다. 이러한 존재 방식들은 섹슈얼리티가 드러내는 특질들과 뒤섞이는 특질들을 드러낸다. 개인은 이러한 존재 방식과 동시에 그러한 에로틱한 경험을 통해서 자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존재론적 관점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이러한 선택의 통일성이 복원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가 결정론과 ‘집단 무의식’의 이름으로 가장 격렬하게 배격하는 것이 바로 이 선택의 개념이다. 무의식은 인간에게 기성旣成의 이미지와 보편적 상징주의를 제공한다. 꿈, 이루지 못한 행위, 정신착란, 비유 그리고 인간의 운명 등에 대한 유사성도 무의식으로 설명될 것이다. 자유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런 불안의 일치를 설명할 가능성을 스스로 거부하는 게 된다. 그러나 자유의 관념은 어떤 불변하는 것들의 존재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만일 정신분석학의 방법이 이론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종종 훌륭한 성과를 거두는 것은 모든 개개의 사례 속에 아무도 그 보편성을 부정할 수 없는 주어진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상황과 행위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결정의 순간은 보편성과 반복 한가운데서 솟아 나온다. “해부학적 구조, 그것은 운명이다”라고 프로이트가 말하곤 했다. 이 말에 메를로퐁티의 “신체, 그것은 일반성이다”라는 말이 반향을 일으킨다. 존재는 개별 존재자들 간의 분리를 통해서 하나다. 즉, 존재는 유사한 신체들 속에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여자의 운명이라는 문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한다. 우리는 여자를 가치의 세계에 위치시키고 그 행위에 자유의 차원을 부여할 것이다. 우리는 여자가 자기 초월성의 확립과 대상에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모순되는 충동들의 장난감이 아니라 윤리적 서열이 존재하는 해결책들을 고안해 낸다. 가치를 권위로, 선택을 충동으로 대체시키면서 정신분석학은 도덕의 대용품, 즉 정상正常이라는 관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 관념은 치료학에서 분명 매우 유용한 것이나 일반적으로 정신분석학 전반에 걸쳐 위험스러운 지경에까지 확대 해석되었다. 서술적 도식이 법칙처럼 제시되고 있다. 확실히 기계론적 심리학은 윤리의 창안이란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에 마이너스는 설명할 수 있어도 플러스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실패는 인정해도 창조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한 주체가 전체적으로 정상이라 여긴 발전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발전이 중도에서 멈췄다고 말할 것이고, 이 정지를 실패이자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결코 긍정적인 결정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무엇보다도 이 점이 바로 위인들에 대한 정신분석을 그토록 어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러이러한 전이轉移, 이러이러한 승화昇華가 그들 내부에서 실행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하지, 그들이 어쩌면 그것을 거부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추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가 자유롭게 세워진 목표들에 의해 추동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개인에 대한 설명이 언제나 과거와의 관계에서이지, 계획을 세워 실현해 나아가는 미래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우리에게 결코 비진정非眞正한 이미지만을 줄 수밖에 없고, 비진정성 안에서는 정상 외에 다른 기준을 거의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의 운명에 관한 서술은 이러한 관점에서 대단히 놀랍다. 정신분석학자들이 이해하는 의미로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 ‘동일시하기’는 하나의 모델 안에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이고, 자기 실존의 자발적 움직임보다 다른 이미지를 택하는 것이며, 결국 존재하는 체하는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형태의 소외 사이에서 헤매는 여자를 보여 준다. 남자인 체하는 것이 여자에게 실패의 원천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여자인 체하는 것 또한 환상이다. 왜냐하면 여자인 것은 객체, 타자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고, 타자는 자기 포기 한가운데에서도 주체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진정한 문제는 이러한 도피를 거부하면서 초월로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때 남성적 태도와 여성적 태도라 불리는 것이 여자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 주는가를 아는 것이 관건이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지시대로 따라갈 때, 그것은 아이가 그들의 계획을 자유롭게 자기의 것으로 삼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의 행위는 목표들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 아들러 학설에서조차 권력에의 의지는 일종의 터무니없는 에너지에 불과하다. 아들러는 초월성이 구현된 모든 계획을 ‘남성적 항의’라고 부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아이가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은 사내아이와 대등해지기 위해서다. 그는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이 여자아이의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어린아이는 ‘페니스의 등가물’이 전혀 아니다. 그림 그리기, 글쓰기, 정치하기는 단지 ‘훌륭한 승화’일 뿐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 자체가 요구하는 목표들이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나의 설명과 정신분석학자들의 설명 사이에는 어떤 일정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관점 – 정신분석학자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이 관점을 취하고 있다 – 에서 소외 행위는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체가 자기의 초월을 설정하는 행위는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여성의 역사’ 연구자인 도널드슨Donaldson은 “남자는 인간의 수컷이고, 여자는 인간의 암컷이다”라는 정의가 불균형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남자만이 인간이고 여자는 암컷이라는 주장은 특히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여자가 인간으로 행동할 때마다 남자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학자는 여아와 소녀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을 가리켜 ‘남성적’ 경향과 ‘여성적’ 경향 사이에서 양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우리는 여아와 소녀가 여자에게 제시된 객체의 역할, 즉 타자의 역할과 자기 자유의 주장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우리는 일정한 몇 가지 사실에서 일치할 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여자들에게 제시된 비진정한 도피의 길을 고려하게 될 때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여자에게 프로이트학파나 아들러학파와 같은 의미를 절대로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여자는 가치의 세계에서 가치를 찾는 인간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경제적·사회적 구조를 아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는 실존적 관점에서 이 세계를 전체적 상황을 통해 연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