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5. 모권제로부터 부권제로의 이행
그렇지만 만약 생산노동이 여자의 체력에 상응한 채 있었다면, 여자는 남자와 더불어 자연 정복을 실현했을 것이다. 인류는 남성 개인과 여성 개인을 통해서 신들에 대항하고 자기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도구의 미래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여자의 실추에 대한 엥겔스의 설명은 불완전하다. 청동과 철의 발명이 생산력의 균형을 현저하게 변형시켰고, 그렇게 해서 여자의 열등함이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이 열등함은 그 자체로는 여자가 받은 억압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여자에게 불행인 것은 남자에게 노동의 동반자가 되지 못함으로써 인간적 공존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여자가 힘이 약하고 생산 능력이 열등하다는 것은 이러한 배제를 설명하지 못한다. 남자가 여자를 동류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여자가 남자의 노동과 생각의 방식에 참여하지 않고 생명의 신비에 종속된 채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타자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이상, 남자는 여자의 억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팽창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남자의 의지가 여자의 무능력을 저주로 탈바꿈시켰다. 남자는 새로운 기술로 열려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끝까지 이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남자는 노예의 노동력에 도움을 청하고, 자기의 동류를 노예로 삼았다. 노예의 노동은 여자가 제공할 수 있는 노동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여자는 부족 안에서 담당한 경제적 역할을 상실했다. 한편, 노예와의 관계에서 주인은 여자에게 행사한 완화된 권위보다 훨씬 더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번식력 때문에 숭배되거나 두려움을 사기도 하고, 남자와 다르므로, 그리고 타자의 불안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여자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때조차 어떤 면에서 남자를 자기에게 의존시켜 왔다. 주인 - 노예 관계의 상호성은 여자에게 현실적으로 존재했고, 그 때문에 여자는 노예 상태를 면했다.
특히 남자는 토지의 소유자가 될 때 여자의 소유권까지 주장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마나와 대지에 의해 소유당해 왔으나 이제는 얼마간의 영혼과 토지를 가지고 있다. 여자에게서 해방된 남자는 한 명의 여자와 자기의 자손을 요구한다. 남자는 자기의 전답을 위해서 이용하는 가족의 노동이 전적으로 자기 것이 되기를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그에게 속해야만 한다. 그래서 남자는 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예속시킨다. 그는 자기 재산을 양도함으로써 이승에서의 삶을 연장해 주고, 피안에서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자신에게 명예를 바칠 상속인을 필요로 한다. 집안의 수호신 숭배는 사유재산 형성과 서로 겹쳐지며, 상속자의 기능은 경제적인 동시에 비의적이다. 이처럼 농업이 본질적으로 주술적이지 않고 창조적인 일이 되자 남자는 자신이 생식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기의 수확물과 함께 자기 아이들을 요구한다.
원시 시대에 모계혈족이 부계혈족으로 대체된 것보다 더 중대한 이념적 혁명은 없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유모와 하녀의 지위로 떨어지고, 아버지의 절대지상권이 고양된다. 권리를 보유하고 전달하는 것은 아버지다.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Eumenides』에서 아폴론 신은 이러한 새로운 진리를 선포했다. “사람들이 아이라고 부르는 것을 낳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는 몸속에 들어온 종자를 기를 뿐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아버지다. 여자는 외부로부터 종자를 받고 만약 신들의 마음에 들면 그것을 보존한다.” 이러한 단언이 과학적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 고백이다. 필시 남자는 기술적 인과 관계의 경험에서 자기의 창조능력의 확신을 얻고, 생식에서 자신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관념이 관찰을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관찰은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역할과 동동한 역할을 부여하는 데 그친다. 관찰은 자연적 차원에서 정자와 월경의 만남이 수태의 조건이라는 것을 추정하도록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표명하는 생각, 즉 여자는 단지 질료일 뿐이고 “태어나는 모든 존재 속에 들어 있는 남성인 운동 원리는 더 좋고 더욱더 신성한 것이다”라는 생각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권력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의 후손을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남자는 여성성의 지배에서 결정적으로 빠져나와 여자에 대항해 세계의 지배권을 쟁취한다. 생식과 부차적인 일에 바쳐지고, 실제적인 중요성과 비의적인 권위를 박탈당한 여자는 이제 하녀처럼 보일 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실상 부권으로의 이행은 점진적인 변천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남성의 정복은 재정복이었다. 즉, 남자는 이미 소유하고 있던 것을 점유한 것에 불과했다. 권리를 현실과 조화시킨 것이다. 싸움도,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전설들에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 남자가 자신을 주체이자 자유로 주장하는 순간 타자라는 관념이 의식 속에 떠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타자와의 관계는 한 편의 드라마다. 타자의 존재는 위협이고 위험이다. 옛 그리스 철학에서는 이타성異他性이 부정과 같은 것이므로 악이라고 가르쳤다. 플라톤도 이 점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타자를 상정하는 것은 선악의 이원론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종교와 법전이 그렇게 많은 적의를 품고 여자를 취급하는 것이다. 인류가 자기의 신화와 법률을 문자로 편찬하는 단계까지 진보했던 시기에 가부장제가 결정적으로 확립된다. 법규를 만드는 것은 남자들이었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종속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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