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Feminist Philosophy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1) 생물학적 조건과 반자연으로서의 인간

Soyo_Kim 2024. 12. 24. 03:05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 생물학적 조건

인간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가 매우 정확하게 말했듯이, 인간은 자연의 종種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이다. 여자는 고정불변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성(生成)이다. 이러한 생성 속에서 여자를 남자와 비교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의 가능성을 규명해야만 할 것이다. 수많은 논쟁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과오를 범하는 이유는 여자의 능력에 대해 문제 삼으면서 여자를 과거와 현재의 상태로 축소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사실, 능력은 현실화되었을 때만이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초월과 초아적인 어떤 존재를 고려할 때 결코 계산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가 택한 관점 –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의 관점 – 에서 만약 신체가 사물이 아니라면, 신체는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를 파악하는 우리의 도구며 우리 계획의 소묘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약하고, 근육의 힘도 적고, 적혈구도 적으며 폐활량도 더 적다. 여자는 남자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고, 무거운 것도 들지 못한다. 여자가 남자와 경쟁할 수 있는 운동은 거의 없다. 싸움에서 남자와 대적할 수도 없다. 이러한 연약함에 우리가 앞서 말한 불안정, 통제의 결여, 과민함이 첨가된다. 그것들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여자의 점유는 남자보다 더 제한되어 있다. 여자는 계획에서 단호함과 인내력이 약하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도 약하다. 즉, 여자의 개인 생활이 남자의 개인 생활보다 덜 풍부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러한 사실들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들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실존에서부터 신체를 정의하면서 인간의 관점을 채택하는 즉시 생물학은 추상적인 학문이 된다. 생리학적 조건(근육의 열등함)이 의미를 띠는 순간, 이 의미는 곧 맥락 전체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 ‘약함’은 인간이 지향하는 목표나 사용하는 도구, 그리고 자신에게 부과하는 법칙에 비추어서만 비로소 ‘약함’으로 드러난다. 만약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길 원치 않는다면 사물에 대한 점유라는 개념조차 의미 없을 것이다. 세계를 파악하는 데 체력을 최대한 사용할 필요가 없을 때, 즉 사용 가능한 최소한의 체력만을 필요로 할 때 차이는 소멸한다. 관습이 폭력을 금지하는 곳에서 완력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약함이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으려면 실존적·경제적·도덕적 기준이 필요하다. 인류는 반자연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표현이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어진 조건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의해서 진실은 구성된다. 자연이 인간의 행동에 의해 파악되는 한에서만 자연은 인간에게 현실성을 갖는다. 인간 자신의 천성도 예외는 아니다. 여자가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는지를 헤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식 기능이 여자에게 끼치는 부담을 추상적으로 가늠할 수 없다. 모성과 개적個的 생명의 관계는 동물에서 당연히 발정 주기와 계절에 의해 정해져 있으나 여자의 경우에 그렇지 않다. 오직 사회만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 종에 대한 여자의 예속은 사회가 신생아 출생을 어느 정도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또 임신과 출산이 이루어지는 위생 조건에 따라서 다소 긴밀해진다. 이처럼 만약 고등동물 가운데 암컷보다 수컷에서 개체적 존재가 더 강압적으로 자기를 주장한다면, 인류 안에서는 개인적 ‘가능성’이 경제적·사회적 상황에 좌우된다.

 

요컨대 한 사회는 종이 아니다. 사회 안에서 종은 자기 자신을 실존으로써 실현한다. 종은 세계와 미래를 향해 자기를 초월해 가고, 그 습성은 생물학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개체들은 결코 자연에 내맡겨져 있지 않으며, 그들의 존재론적 태도를 표현하는 욕망과 두려움이 반영된 제2의 자연인 관습에 복종한다. 주체가 자기에 대해 의식하고 자기를 실현해 가는 것은 단순히 신체 그 자체 만으로서가 아니라, 금기와 법률에 예속된 신체로서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어떤 가치들의 이름을 통해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가치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은 생리학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생물학적 조건이 실존자가 부여하는 가치들의 옷을 걸치고 있다. 여자가 일으키는 존경심이나 두려움이 여자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면, 남자의 근육의 우월성은 권력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만약 어떤 인디언 부족들의 풍습처럼 젊은 여자가 자기 남편을 선택하거나 또는 아버지가 결혼을 결정한다면 남자의 성적 공격성은 남자에게 어떠한 주도권도 특권도 주지 못한다. 어머니와 자식의 친밀한 관계는 아이에게 부여된 다양한 가치에 따라서 어머니에 대한 존엄성 또는 모욕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사회적 편견에 따라 인정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