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5. 여자의 상황과 성격
여자가 매우 ‘육체적’ 존재로 보인다면, 그녀의 삶의 조건이 동물성에 극도로 중요성을 부여하도록 남자가 자극했기 때문이다. 여자라고 해서 남자보다 육체의 외침이 더 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몸의 가장 작은 소리도 귀담아듣고 증폭시킨다. 성적 쾌감은 고통의 예리함과 마찬가지로 전격적인 즉각적 승리다. 순간적인 난폭성으로 미래와 우주는 부정된다. 육체의 타오르는 불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잠깐의 화려한 개화에서 여자는 자기를 더 이상 불구나 욕구 불만 상태로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그녀가 내재적 승리에 그토록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내재성이 자기의 유일한 몫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경박함은 그녀의 ‘비열한 물질주의’와 그 원인이 똑같다. 여자는 큰 것에 접근하지 못하므로 사소한 것들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게다가 그날그날을 채우는 하찮은 일들이 대개는 매우 중요한 일들이다. 여자는 자기의 매력과 기회를 옷치장이나 화장에서 끌어낸다. 그리고 대개 게으르거나 무기력한 태도를 보인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순수한 시간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여자가 수다쟁이거나 엉터리 삼류 작가거나 한 것은 자기의 한가함을 속이기 위해서다. 즉, 여자는 행동할 수 없으니 말로 대체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다운 기획에 참여할 때에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이고 효과적이며 과묵한 태도를 보이고, 어떠한 괴로움도 견디어 낸다. 여자는 비굴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언제나 주인의 발치에 엎드리고, 자기를 때리는 손에 키스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일반적으로 여자에게 진정한 자존심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독자의 사연을 상담해 주는 칼럼에서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내나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하는 조언은 비열한 복종의 정신으로 고취된 것이다. 여자는 경멸하는 듯한 싸움에서 지친 나머지 결국 남자가 던져 주려는 빵부스러기를 주워 담는다. 하지만 남자가 유일한 수단인 동시에 삶의 유일한 이유인 여자가 남자의 지지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자는 모든 굴욕을 참아낼 수밖에 없다. 노예는 ‘인간 존엄’의 감각을 가질 줄 모른다. 그로서는 용케 궁지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컨대 여자가 ‘저속하고’ ‘가정적’이고 치사하게 타산적이라면, 그것은 그녀가 음식이나 만들고 오물이나 청소하는 데 자기 생활을 바치도록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서 그녀가 대단하다든가 위대하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는 없다. 여자는 자기의 우연성과 사실성 속에서 생활의 단조로운 반복을 보장해야만 한다. 그녀 자신이 거듭하고 되풀이할 뿐 결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는 것도, 시간이 둥글게 회전하여 어디로도 인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여자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일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 사물에 대한 이런 의존성은 남자들이 여자를 붙잡아두는 의존성의 결과이며, 그녀의 조심성 많은 절약이나 인색함을 설명한다. 여자의 삶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오직 수단에 불과한 것들, 즉 먹거리, 의복, 주거를 생산하거나 유지하는 데만 열중한다. 그런 것은 동물적 삶과 자유로운 존재 사이에 있는 비본질적 매개물이다. 비본질적 수단에 결부된 유일한 가치는 유용성이다. 주부는 유용성의 차원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녀 자신도 측근들에게 유용하게 되는 것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비본질적 역할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내 수단을 목적으로 삼고 – 특히 정치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 그녀의 눈에 수단의 가치는 절대적 가치가 된다. 이와 같이 유용성은 주부의 하늘에서는 진리나 아름다움이나 자유보다도 더 높게 군림한다. 그리고 여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바라본다. 그 때문에 그녀는 중용이나 범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도덕을 채택한다. 그런 여자에게서 어떻게 대담성, 열의, 초연, 위대함을 발견한단 말인가? 이러한 자질은 오로지 자유가 열린 미래를 통해 투신해 모든 여건을 넘어 떠오르는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자를 부엌이나 규방에 가두어 두고서 여자의 시야가 좁은 것에 놀란다. 여자의 날개를 잘라놓고는 그녀가 날 줄 모른다고 개탄한다.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 준다면, 그녀는 더 이상 현재에 정착해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자가 그토록 쉽게 우는 것은 그녀의 삶이 무력한 반항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여자는 생리적으로 교감신경계를 통제하는 힘이 남자보다 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육이 그녀에게 되는 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디드로나 뱅자맹 콩스탕도 눈물을 많이 흘렸으나 규율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풍습이 남자들에게 우는 것을 금지한 이래로 남자들은 울지 않게 되었다. 여자는 항상 세상에 대해 실패의 태도를 취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는 한 번도 세상을 진정으로 떠맡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세상에 동의한다. 불행조차 남자의 태도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남자는 불행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여자가 세상의 적의와 자기 운명의 부당함을 새롭게 자각하는 데는 장애물 하나로 충분하다. 그때 그녀는 가장 믿을 만한 피난처인 자기 자신에게로 서둘러 도망간다. 그녀의 두 뺨 위에 흐르는 미지근한 눈물 자국, 눈구멍의 그 욱신거림은 괴로워하는 그녀의 영혼을 보여 준다. 또한 피부에는 부드럽고 혀에는 거의 짠맛이 감돌게 하는 눈물은 연하고 쓰린 애무다. 얼굴은 온화한 물의 흐름 밑에서 작열하고 있다. 눈물은 탄식인 동시에 위안이고, 열기인 동시에 진정시키는 시원함이다. 또한 최고의 변명이기도 하다. 눈물은 뇌우처럼 갑작스럽게 단속적으로 오는가 하면, 태풍이나 파도나 바람, 우박, 눈을 동반한 소나기가 되어 여자를 구슬픈 샘물로, 요동치는 하늘로 변신시킨다.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안개로 뒤덮인다. 그 눈은 이제 시선이 아닌 비가 되어 녹아 내린다. 눈이 멀어 버린 여자는 자연물의 수동성으로 되돌아간다. 사람들은 여자가 정복되기를 원한다. 여자는 자기의 패배 속에 가라앉는다. 여자는 수직으로 가라앉아 익사하며, 떨어지는 폭포 앞에 있는 듯 어찌할 바를 몰라 여자를 바라보기만 하는 남자에게서 벗어난다. 남자는 이런 방식이 비열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여자는 싸움이 출발부터 비열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손에는 어떤 효과적인 무기도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다시 한 번 마법적 주술에 호소한다. 흐느낌이 남자를 짜증 나게 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그것에 더욱더 달려든다.
거부의 막바지에 이른 여자에게 열리는 출구 하나가 있는데, 바로 자살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보다 자살하는 수가 적은 것 같다. 이 점에서는 통계가 대단히 모호하다.197 성공한 자살을 고찰해 보면, 여자보다 남자가 훨씬 많다. 그러나 자살 시도는 여자의 경우가 훨씬 더 빈번하다. 그것은 여자들이 그런 체하는 연극에 더 만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여자들은 남자보다 더 자주 자살을 연기한다. 그러나 자살을 원하는 일은 훨씬 드물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자들이 잔인한 수단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여자들은 칼이나 총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오필리어198처럼 생명이 그대로 녹아들 수 있을 듯이 보이는 수동적이며 어둠에 가득 찬 물과 여자의 친화성을 드러내는 투신자살을 훨씬 더 선호한다. 전체적으로 여기서도 내가 이미 지적했던 모호성을 볼 수 있다. 즉, 여자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진심으로 떠나려 하지 않는다. 결별을 연기하지만 결국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남자의 곁에 머무른다. 자기를 괴롭히는 삶을 떠나는 체하지만 자살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여자는 결정적인 해결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에, 인생에, 자기의 조건에 대해 항의하지만, 거기서 탈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자는 남자에게 얼마간의 기다림으로써 자신의 생활인 그 긴 기다림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여자의 일생은 기다림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내재와 우연의 모호한 상태 속에 갇혀 있어서 그녀의 존재 의미가 항상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여자는 남자들의 경의나 지지를 기다리고 사랑을 기다리며, 남편이나 애인으로부터 감사의 마음과 찬사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는 그들에게서 자기가 사는 이유와 자기의 가치와 존재 자체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는 그들로부터 생활비를 기다리고 있다. 여자가 수표책을 손에 쥐고 있거나 남편이 주는 금액을 매주 혹은 매달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금액은 남편이 벌어야 한다. 여자가 식료품상에 셈을 치르고 새 옷 한 벌을 사 입기 위해서는 남편이 그만큼의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여자는 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여자는 경제적 예속 때문에 남자들에게 좌우된다. 여자는 남자의 삶의 한 요소에 불과한 데 반해, 남자는 여자의 인생 전체다. 남편은 가정 밖에서 자기 일을 하지만, 여자는 온종일 남편의 부재를 참아 낸다. 애인은 – 비록 그가 열정적이라 하더라도 – 자기 일에 지장이 없도록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결정한다. 침대에서도 여자는 남자의 욕망을 기다리고, 자신의 쾌락을 – 때로는 불안해하며 – 기다린다. 여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껏해야 애인이 정한 약속에 늦게 도착하는 것이며, 남편이 지정한 시간에 준비되지 않은 정도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확언하고, 자기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잠깐이나마 본질적인 주체가 되어 상대가 자기의 의지를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심한 앙갚음이다. 여자가 아무리 완강하게 남자들을 기다리게 한들 동정을 살피느라, 희망하느라, 남자의 뜻에 복종하느라 보내는 끝없는 시간을 결코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다.
여자들은 생활 경험에서 논리와 기술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들의 세계에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역으로 남자들의 도구의 위력은 여성 영역에 접근하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이 영역은 남자들이 고의로 무시하는 인간 경험의 한 분야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실제로 그 경험을 하고 있다. 자기의 기획을 수립할 때는 그토록 정확한 엔지니어도 자기 집에서는 조물주처럼 행동한다. 말 한마디로 식사가 차려지고, 풀 먹인 셔츠가 준비되고, 자녀들은 침묵을 지킨다. 아이를 낳는 것은 모세가 지팡이를 두드리는 것과 같이 신속한 행위다. 남자는 이러한 기적들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기적의 개념은 마술과는 다르다. 기적의 개념은 합리적으로 결정된 어떤 세계의 한 가운데서 원인 없는 한 사건의 철저한 비연속성을 설정하며, 그 원인 없는 사건에 대항하면 어떤 생각도 깨지고 만다. 한편, 마술적 현상은 비밀스러운 힘으로 통합되고, 순종적인 의식은 -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 그 힘의 지속적인 생성을 따른다. 갓난아기는 조물주 아버지에게는 기적이며, 아기의 성숙을 자기의 배 속에서 참고 견디어 온 어머니에게는 마술이다. 남자의 경험은 명료하게 이해하기 쉬운 것이지만 공백으로 구멍이 나 있다. 여자의 경험은 그 자신의 한계 속에서 어둡긴 하지만 꽉 차 있다. 이런 불투명성이 여자를 둔중하게 만든다. 여자와의 관계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가볍게 보인다. 즉, 남자는 독재자, 장군, 재판관, 관료, 법전, 추상적 원칙 등에 있는 가벼움을 지니고 있다. 어느 날, 주부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남자들은 생각이 없어!” 하고 중얼거릴 때는 필시 그런 가벼움을 의미했을 것이다. 또 여자들은 “남자들은 몰라. 도대체 인생이 뭔지 몰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자들은 사마귀 암컷의 신화에 경박하고 귀찮은 수벌의 상징을 대립시킨다.
이런 견지에서 여자가 남자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은 이해된다. 남자의 논리는 여자의 인생 경험과 합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성은 남자들의 수중에서 폭력의 음험한 형태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남자들의 주장은 여자를 현혹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남자들은 여자를 어떤 딜레마에 가두고 싶어 한다. 여자에게 동의하든가 거부하든가 하게 하려 한다. 여자는 공인된 원칙이라는 온갖 체계의 이름으로 동의해야만 한다. 동의하기를 거부하면 체계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그와 같은 굉음을 낼 수가 없다. 그녀는 다른 사회를 다시 만들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다른 사회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다. 반항과 노예 상태의 중도에서 여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자의 권위를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자는 매번 폭력으로 여자의 불확실한 복종의 결과를 여자에게 떠맡겨야만 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유 의지로 노예가 된 반려라는 망상을 추구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 뜻에 따르면서 정리定理의 명증성을 따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남자의 엄밀한 추론의 기초가 되는 전제를 남자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다. 여자가 그런 전제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남자가 여자의 입을 닫게 하기는 쉽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것이 자의적이라는 것을 아는 여자를 설득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남자는 화를 내며 여자가 고집을 피운다느니 비논리적이라느니 하며 비난한다. 여자는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여자는 진리가 남자가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진리가 없다고 믿는다. 여자에게 생명의 생성이 동일성의 원리를 의심하게 한다든가,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마술적 현상이 인과율의 개념을 상실하게 한다든가 하는 것만이 아니다. 여자는 남성 세계 한가운데서 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로서 자신 안에 온갖 원리와 가치,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호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여자는 그녀와 관련된 남자의 도덕이 하나의 커다란 기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기의 덕과 명예의 법전을 거창하게 밀어붙이면서 슬그머니 불복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남자는 이런 불복종을 기대하기까지 한다. 그런 불복종이 없다면 그가 배후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 모든 아름다운 외관은 무너질 것이다.
남자는 시민이 보편적인 것을 향해 초월함으로써 자기의 윤리적 존엄성을 획득한다는 헤겔 사상의 권위에 기꺼이 기댄다. 특정한 개인으로서 남자는 욕망이나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다. 따라서 그가 여자와 갖는 관계는 도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어떠한 행동을 해도 관심을 끌지 않는 그런 사소한 지대에 위치한다. 그는 다른 남자들과는 가치가 걸려 있는 여러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자신이 자유이며, 그 자유는 모두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법칙에 따라 다른 자유들에 과감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여자 곁에서 – 여자는 이런 의도로 고안되었다 – 남자는 자기의 존재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멈추고, 즉자존재卽自存在의 환영 속에 빠져들며, 비본래적 차원에 위치한다. 그는 전제적이고 가학적이며 난폭해지거나 혹은 유치하고 자학적이며 애처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자기의 강박관념이나 편집증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그는 공적 생활 속에서 취득한 권리의 이름으로 ‘긴장을 풀기’도 하고 ‘느슨해지기’도 한다. 그의 아내는 – 테레즈 데케루처럼 – 남편의 말이나 공적 행위의 고결함과 ‘그의 끈질긴 어둠의 날조’ 사이의 대비를 보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 그는 입으로는 인구 증가를 장려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활하게도 자기에게 필요한 이상의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는 정숙하고 정조가 있는 여자들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웃의 아내에게는 간통을 부추긴다. 앞에서 보았듯이, 매년 프랑스에서는 100만 명의 여자들이 남자 때문에 낙태하는 상황에 놓이지만, 남자들은 위선적이게도 낙태가 범죄라는 것을 법령으로 공포하고 있다. 남편이나 애인은 그녀들에게 이런 해결책을 아주 흔히 강요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이러한 방법이 채택되리라는 것도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들은 여자가 가벼운 죄를 짓는 데 동의하리라고 표면상으로 기대한다. 즉, 여자의 ‘부도덕’은 남자들이 존경하는 도덕적인 사회의 조화에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의 가장 명백한 실례는 매춘에 대한 남자의 태도다. 남자의 수요는 공급을 창출한다. 일반적으로 악덕을 규탄하면서도 자기들의 개인적인 괴벽에 대해서는 몹시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훌륭한 신사들을 매춘부들이 어떤 혐오에 찬 회의주의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로 살아가는 여자들을 사악하고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그녀들의 육체를 이용하는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남자’에 대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든가 혹은 동등하다든가 하는 것을 결정하려고 애쓰는 모든 비교론이 어째서 무익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상황을 대조해 본다면, 남자의 상황이 한없이 더 낫다는 것은 명백하다. 다시 말해 남자는 세계 속에 자기의 자유를 투사할 구체적인 가능성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남자들이 실현한 것들이 여자들의 경우보다도 필연적으로 월등하다. 여자들에게는 무엇을 하는 것이 거의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들의 한계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는지를 비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 이유는 정확히 그들이 그것을 자유로이 행사하기 때문이다. 악의에 찬 함정과 성실을 가장한 기만은 다양한 형태로 남자든 여자든 노리고 있다. 자유는 각자 속에 완전한 상태로 있다. 다만 여자에게서는 자유가 추상적이고 공허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여자는 반항 속에서만 진정성 있게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아무것도 이룰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들은 자기 상황의 한계를 거부하고 미래의 길을 여는 데 노력해야 한다. 체념은 자기 포기이며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에게는 해방을 위해 애쓰는 것 외에 다른 출구가 없다.
이런 해방은 집단적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여성 조건에서 경제적 변화가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단독으로 고독하게 개인적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여자가 과거에도 많이 있었고, 현재에도 있다. 그런 여자들은 자기 내재성의 한가운데서 자기의 실존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즉, 내재성 속에서 초월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것은 감옥에 갇혀 있는 여자가 그 감옥을 영광의 하늘로, 자기의 예속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유로 바꾸려는 – 때로 우스꽝스럽고 흔히 비장한 – 궁극적인 노력이다.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나르시시즘의 여자에게서, 정열적인 사랑을 하는 여자에게서, 신비주의적인 여자에게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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