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6장 헤라클레이토스
1절 개괄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스 출신이며 69번째 올림피아기인 기원전 504년-501년에 전성기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블로손의 아들이거나, 또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헤라콘의 아들이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오만하고 방자했다. 끝내 그는 사람들을 싫어하여 산 속에 은둔하였고 풀과 나뭇잎을 먹으며 살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수조에 걸리자 도시로 내려왔고 의사들에게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고 수수께끼처럼 물었다. 그런데 의사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외양간으로 가서 자신을 쇠똥에 묻고 쇠똥의 열기로 몸이 마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 효험도 얻을 수 없었으니 이렇게 해서 60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활약한 시기는 피타고라스와 크세노파네스 이후부터 파르메니데스의 이전까지로 여겨지며, 또 파르메니데스와 동시대에 절정기를 맞았다. 그 증거로 그의 저작에서 피타고라스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만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2절 그의 철학의 문체적 특징에 관하여
그의 철학은 예언자의 잠언 형식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지혜로운 것은 하나인데, 모든 것들을 통해서 모든 것들을 조종하는, 예지를 숙지하는 것이다.” 또한 “너희들은 나에게 귀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 ‘만물은 하나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함으로써 예언자적으로 말한 영원한 진리인 로고스를 추구하였다.
그의 이러한 예언자적인 철학스타일은 그를 황홀경 안에서 행해지는 진리의 발설을 추구하는 고고한 철학적 인간형으로 만들었다. 그는 참된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함으로서 금강석 같은 진리에 접근하는 긍지 높고 고독한 진리의 현자를 자처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오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당대에서부터 받았으며 다른 풍자적인 저술들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 그는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아 철학함을 자기 자신의 대한 탐구로 여겼으나,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널리 행해지던 정죄와 정화의 의식은 진흙에 몸을 씻는 돼지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며 그들을 비판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인 그들이 제의 행렬을 벌이고 남근을 찬양한 것이 디오니소스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것들은 가장 뻔뻔스러운 짓일 것이다. 그런데 디오니소스와 하데스는 동일하며 그를 위해 그들은 열광하며 제의를 벌인다.
3절 생성과 존재의 철학
헤라클레이토스 사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앋.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만물유전)의 철학자로 알려졌다. 니체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의 핵심을 생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전통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고전적인 헤라클레이토스 이해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이 20세기 중반부터 제기되었는데 그 선두에 버넷이 있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 사유의 핵심이 변화가 아닌 대립물의 통일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후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의 핵심이 변화보다는 변화 속의 통일을 꾀하는 법칙, 즉 로고스에 있다는 입장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된 것도 사실이다. 판타레이는 실제로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이 말한 적이 없으며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변화 속의 통일이라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법칙을 헤라클레이토스 사상의 정수라고 보는 사람들은 변화에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대립자를 전제해야하며, 대립자들 사이에는 반드시 대립자들을 연결하고 통일시키는 힘, 혹은 법칙이 존재해야한다고 본다. 이러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의 영속성과 순환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만물에서 “전쟁은 공통된 것이고 투쟁이 정의이며, 모든 것은 투쟁과 필연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대립과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인 법칙을 로고스라 칭하고 로고스는 꺼지지 않는 불로 상징된다. 불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생명력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파괴의 상징이다. 로고스는 세계의 질서와 더불어 인간의 인식 혹은 삶과 관련된 일체의 척도를 부여한다. 로고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현명한 자이고 깨여있는 자이다. 그렇지 못한 자는 어리석고 잠든 자이다.
니체는 젊은 시절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핵심을 첫째, 생성, 둘째 디케(정의), 셋째, 투쟁, 넷째, 불로 규정한다. 생성이 세계의 정의이며 그것은 투쟁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언제나 생동하는 불이 그것을 상징한다. 여기서 생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로고스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생성과 존재에 관계, 생성과 로고스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변화를 말한다는 점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가장 유사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니체의 헤라클레이토스의 해석의 핵심이 변화 개념에 있음을 분명히 간파할 수 있다. 세계는 매 순간 힘들의 우연적 놀이에 의해 발생하는 힘들의 파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세계는 목적, 인과의 법칙, 그리고 선악과 무관하며 그렇기에 지금 이곳의 세계와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달리 법칙마저도 이러한 변화의 정지한 한 순간을 지칭하는 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법칙 역시 생성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러한 이유로 니체는 후기에 헤라클레이토스의 법칙의 필연성이 궁극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 도덕적 질서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고 비판한다. 따라서 니체는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반복, 영원한 변화는 부정하지 않으나,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볼 수 있는 변화의 주기적이고 법칙적인 성격은 거부한다.
4절 헤라클레이토스와 불
그는 이오니아 철학의 전통 가운데 있으며,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세계는 모두에게 동일한데, 어떤 신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어왔고 있고 있을 것이며, 영원히 살아있는 불로서 적절한 만큼 타고 적절한 만큼 꺼진다.” 그러나 플라톤에 따르면 어디에선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나아가고 아무 것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은 강의 흐름에 비유하면서 “너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상반된 견해는 “차가운 것들은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은 차가워진다. 젖은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젖게 된다.”는 말에서 밀레토스 학파의 지수화풍의 일원론적인 운동의 상호 유전과 변화의 존재론에 가까워진다. 동일한 것...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깨어있는 것과 잠든 것, 젊은 것과 늙은 것. 왜냐하면 이것들이 변화하면 저것들이고, 저것들이 다시 변화하면 이것들이기 때문에.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은 신으로 또 어떤 이들은 인간으로 드러내며, 어떤 이들은 노예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전쟁은 공통된 것이고 투쟁이 정의이며, 모든 것은 투쟁과 필연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들어가면서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있으면서 있지 않다.”
이러한 단편들은 운동의 상대성과 상호성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자체를 신과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 유전을 주장함으로써 불변하는 물질적 실체를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들 중에는 만물 유전설의 직접적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가 의미한 불은 영혼의 역동적 운동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적 질료를 불에서 발견해낸 인물로 평가한다. 이러한 불은 곧바로 운동의 상대성과 모순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되고, 대립하는 것은 한 곳에 모이고, 불화하는 것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은 투쟁에 의해 생겨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현대적 관점의 질료로 이해하는 것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혼의 역독성이나 신적 작용을 상징하는 불에 대한 이해와는 다르다. 이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본성이 불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물론 이를 주관하는 영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의 영혼이 불로 되어 있어서 우리의 감관-지각적 경험에 주어지는 생성-소멸의 현상세계를 사변적으로 파악할 때 개념적으로 드러나는 모순과 대립을 조화와 통일의 정신적 시각에서 지혜롭게 파악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세계가 초월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 내재적이고 자체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고 봄으로써 만물 일체설을 주장한다. 그의 우주론에서 존재하는 것은 영원히 살아서 활동하는 불이며 우주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며 조정하는 신적인 힘이다. 그것은 조화로운 적도에 따라 켜지고 꺼지는 것으로서 죽음과 더불어 살고 재생의 상향운동과 죽음의 하향운동의 순환 속에 있는 불변하는 하나의 로고스이다. 자연은 성장하고 생성소멸하나 로고스는 하나로서 영원불멸하다.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로고스와 맞닿아 있다. 가장 아름다운 세계질서는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에서 운동에 대한 인간의 언급은 항상 상대성에서 기원하는 상호성과 모순성을 함축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인간의 말이 모순율에 따라 분석을 수행한 것에 반해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서로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것으로서 연속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러한 로고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의 배중률을 토대로 한 변증법과 다른 것은 그의 로고스가 일상 언어에 기초한 논리-변증법적인 것으로서 영혼의 운동과 관계하고 이 운동이 만물은 유전한다는 우주론적 운동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운동은 상호 연결되고 만물의 생성 소멸을 주관하기에 그리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모순된 것이 상호 연결된 반대의 것으로 파악되기에 그의 우주관은 순환적이다.
인식론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관 –지각의 직관적 증거를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신뢰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로고스는 감관-지각이 파악한 자연의 상대적 운동과 생성 소멸을 모순율에 따르는 사유에 의해 조화나 통합에 이르게 하는 자연의 절대적 원리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헤라클레이토스는 사유와 감각을 파르메니데스처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고 연속된 것으로, 나아가 로고스와 파토스를 통합하는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참된 앎은 대상과의 직접 접촉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가 말하는 로고스는 자신을 숨기면서 단지 징표만을 보이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인식기관으로 여겼던 사유하는 영혼은 감관-지각처럼 개별적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비교하고 그것들의 공통성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감관-지각은 사물의 구체성으로 사유는 일반성을 지향함으로서 그 인식기능은 상방된 방향으로 발휘된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대립자는 죄와 같은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대립 자체는 전쟁으로 나타나는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립자에 대해서 신적인 영혼의 역동적인 것으로 발전시켜 사유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에 숨어있는 합법적 통일성을 인식한 유일한 자이다. 하늘을 어떤 분석적 대상으로, 신화적 사유로 보는 것은 하늘에 대한 설명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하늘의 존재에 대해 보는 것은 비존재가 아닌 존재로부터 느껴지는 경이이며 철학의 근본기분-파토스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 존재자는 없다. 존재자는 일자의 존재가 지속적으로 개시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러한 일자는 모든 술어와 모든 성질들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Cosmos는 영원한 일자인 로고스가 입고 있는 옷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는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그러한 생성과 변화를 주재하는 로고스에 따라 만물은 하나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모든 개인들은 법도에 넘치는 일을 할 수 없다. 생성과 망각과 쓰러짐은 모두 정의의 작용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의 대립지향적 순환에 대해 말한다. 투쟁은 통일적이고 합법칙적이며, 선한경쟁으로 내모는 선한 투쟁이다. 경쟁의 승부란 내재적인 합법칙성으로 개개인은 마치 자신이 활동하는 그 영역 안에서 대가를 받을만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승리가 어디로 향할지는 이성이라는 심판관들이 내리는 냉정하고 엄정한 심판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가 좌절되는 것은 필연적이며 인간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할 적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도 또한 자연의 섭리이며 필연적인 것이다.
세계는 부패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휘저어야 하는 항아리이다.
변회와 생성은 영원한 유희이자 디케-정의이며 세계는 모래더미를 쌓아다가 허물었다가 하는 아이와 같은 제우스에 의해 주사위 던지기 놀이처럼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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