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Ancient & Medieval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정리 (4) 피타고라스

Soyo_Kim 2018. 12. 28. 16:02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4장 피타고라스

1절 개괄

철학자로서의 피타고라스는 하나의 철학적 섬이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철학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일뿐더러 기원전 B. C. 5세기에 활동했던 피타고라스 학파 역시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신비주의적이고 독특한 경향을 보여준다.

피타고라스는 새로운 철학적 삶의 형상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나이 18세 즈음 올림피아력 제 48기 1년(B.C. 588)에 소년들과 겨루는 권투 대회에 참가를 희망했지만 거절당하고, 장정리그에 가서 우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그의 출생년도는 B. C. 606년이 된다. 피타고라스가 기원전 606년에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보다 한 세대 이상 앞선 철학자이며 실제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에는 피타고라스에 대한 언급과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른 기록에선 그가 기원전 570년에 태어나 490년에 죽었다고 나오는데, 이 경우에는 한 세대까지는 아니지만,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절정기인 기원전 504년에는 이미 60대가 넘은 고령의 영향력 있는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비교적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간추리면 그는 폴뤼크라테스의 폭정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톤으로 이주하여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을 따른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는 종교적,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갖는다. 피타고라스 사후에도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일반적으로 수학자이며 합리론적 우주론자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는 혼의 전이설의 전파자이며 이른바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일화에는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짙으며 이것이 그를 다른 철학자들과 차별화한다.

 

2절 사상

이온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며, 사후에 혼의 삶이 있다는 견해를 편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사후에 혼의 삶이 있다는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혼이 불사적이며 다른 종류의 동물들로 옮겨간다, 따라서 모든 동물은 동족 관계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윤회 사상과 상당부분 유사한 지점을 보이고 있다.

피타고라스의삶의 방식은 피타고라스 공동체 내부에서 은밀하게 공유되었고 아무나 그 공동체에 가입할 수 없었다. 공동체의 자격요건은 까다로웠으며,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다라는 규칙을 받아들여야 했다. 또한 이 공동체에는 다수의 종교의식과 생활방식, 금기 등이 편재해 있다. 그리고 금기들은 글이 아니라 금언 형태의 가르침 속에 문어로 구현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정치적이면서도 종교 집단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었던 종교는 영혼의 불멸성에 기초한 윤회론에 토대를 둔 오르페우스 종교였다. 이 종교의 원래 신은 디오니소스였고 종교적 제전에서 맛보는 환희는 신적인 것과의 접촉이거나 영혼의 신성화 자체였을 것이다. 피타고라스 종교집단의 카타르시스는 신체와 영혼 양면으로 수행된다. 신체를 정화하는 방법은 약제사상과 절제와 금기의 윤리적인 계율들로 나타나는데, 건강을 중시하는 약제 사상은 그 당시 지수화풍에 따른 인간의 기질 분류로 설명되었다.

한편 영혼을 정화하는 것은 음악과 수학이었다. 음악은 최고의 “philosophia” 였으며, 이 음악을 기학으로 해명하고 음악적 비례를 인식함으로서 수학적 사고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비례 사상은 다양한 것들의 통일이라는 조화 사상으로 발전한다.

피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기배려에 대한 앎을 추구했던 신비주의적인 인물로 보인다. 그가 내세우는 규칙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지만, 재산 공유의 규칙, 자기 통제라는 도덕적 훈련을 위한 묵언의 규칙 등은 자기 배려의 계보에 있어 피타고라스가 차지하는 위치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신비주의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신피타고라스 학파로 이어지며, 종교적 실천의 신비적인 영역과 진리로서의 앎의 영역이 분리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수학에 대하여 했다는 기여 역시 수를 우주와 연관시키면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를테면 피타고라스는 수학에 기초하여 “우주는 수적인 비율로 표현될 수 있는 조화를 지닌 것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으며 수적 비율에 기초한 우주론으로서 합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혼불멸과 신화적 우주관을 상당히 차용하는 등 비합리적인 면 역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수학을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으로 여겨 자연과학의 합리적 세계관에 관심을 쏟기 보다는 오히려 일차적으로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문제에 치중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삶의 방식에 관한 관심에서 비롯된 철학자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문제에 답을 구하고자 했던 자기 자신을 돌보는 철학자였다.

피타고라스는 플리오스 출신의 통치자 레온과의 대화에서 올림픽 경기에 가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처럼, 우리들 삶의 유형도 이와 유사하게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으로 상품을 사고팔기 위해 가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의 분류는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영예를 얻고자 가는 선수들이다. 세 번째의 사람들은 돈이나 영예에 관심을 두지 않고 우주에 대한 탐구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예의주시하며 바라보는 관조적 인간이 있는데 그는 이러한 사람을 철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첫 번째 부류와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세속적인 욕망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로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이 영원한 윤회를 하면서 살고 있다. 철학이라는 말을 최초로 쓴 피타고라스가 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혼의 정화를 통하여 운명과 출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 사상의 주요 개념은 관조와 조화의 질서 그리고 정화 등의 개념들로 압축될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를 만났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개별적인 영혼과 이성에 충실한 사고였기에 자연주의적인 사고보다는 인간의 주체에 대한 인식과 사유에 충실하였고 그 결과 한계와 비한계에 대한 가치론적인 사고에서는 아낙시만드로스와는 역전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우주 창조에 운동의 원인으로서 영혼을 도입함으로써 아낙시만드로스의 자연 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우주를 인간 중심적인 지성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피타고라스와 그 추종자들은 자신의 전생 이야기와 결부된 윤회사상을 아낙시만드로스의 진화론적 사상과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보다 낮은 단계의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었는데, 이 이론을 피타고라스가 지신의 환생이론에서 수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