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괴짜란 ‘언제나’ 부분적이고 특수한 현상은 ‘아닐’ 뿐더러 오히려 바로 그가 이따금씩은 자신의 내부에 전체의 핵심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고로 그의 시대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어떤 거센 돌풍으로 인해 왠지 잠깐동안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버린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말 : 사유, 혹은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마지노선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다루는 논문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하며 글을 시작하는 것이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기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철학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러셀(Russel)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보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훨씬 많이 읽었다. 실제로 그는 러셀의 책에 대해서는 단지 경멸을 표했을 뿐이지만 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거의 전문을 외우다시피 했다. 3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마주할 때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이론을 상징하는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상징하는 도스토옙스키는 동시에 다루어지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때로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은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의 철학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언어비판을 통해 심오해 보이던 철학의 물음들이 그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밝혀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상의 맥락에 무지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 사상을 오해할 수 밖에 없다” 4는 점에서, 이러한 의견은 절반의 진실, 혹은 1.5배의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5
물론 대중이 한 철학자에게 가지고 있는 통속적 견해와 실제 사이의 불일치는 철학사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에 관해서는, 대중뿐 아니라 철학자들에게서조차 광범위한 망각의 역사가 이어져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륙철학의 전통에 있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아직도 낯설거나, 논리실증주의의 동의어로 여겨지곤 한다. 6 비트겐슈타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은 이러한 견해가 가진 오류를 어렵지 않게 지적할 수 있지만, 그런 이들에게조차 위와 같은 독특한 사실이 개인의 흥미로운 전기적 요소 이상으로 간주되진 않았던 것 같다. 프레게와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미친 영향은 진지한 연구 주제로 손색 없는 것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즐겨 읽었던 도스토옙스키나 오토 바이닝거를 우리는 전기의 한쪽 끄트머리에서나 간신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으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과, 그럼에도 끝없이 그것에 관해 ‘무언가 보여주려’ 시도하는 그의 삶 사이의 괴리는 정말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일까? 7
이제 다시금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되새김질해 본다면, 우리는 그의 개인적 면모를 ‘언제나’ 부분적이고 특수한 현상으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그 개인적 면모 안에 전체의 핵심이 담지되어 있고, 그것이 심지어 우리 시대 전체를 앞질러, 이제 다시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이름 아래 돌아오게 된 것이라면?
“이 책은 이 책이 씌어지게 된 정신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들을 위하여 씌어졌다. 내가 믿는 바로는 이 정신은 유럽적이고 미국적인 거대 문명의 정신과는 다른 것이다. 이 문명의 정신은-그 표현이 현대의 산업, 건축, 음악, 파시즘 그리고 사회주의인데-필자에게는 낯설고 공감가지 않는 정신이다. [...] 내가 전형적인 서구 과학자에 의해 이해 또는 평가될지 여부는 나에겐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어떤 정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를 어쨌든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명은 진보라는 낱말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8
이 글은 1930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이 새롭게 출판하려 했던 책의 서문 초고로, 여기서 우리는 그가 가지고 있던 사유의 방향성에 대한 실로 중요한 실마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가 단순히 개인적 삶에 있어 반시대적 정신(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혐오, 진보에 대한 비관적 태도, 엄격한 삶의 양식에서 드러나는 종교적 함축)을 일관되게 유지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책의 목적으로 여겼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더해, 그가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의 의미는 윤리적인 것이며, 책에 쓰이지 않은 이 두 번째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출판업자에게 설명했다는 문헌적 증거 9를 고려해보면, 이러한 반시대적, 윤리적 특성들을 그의 사유가 지닌 전반적 경향으로 이해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경향성은 그를 설명하는 맥락으로 항상 등장하는 러셀과 빈 학파의 것과는 아예 반대된다고 할 정도로 이질적인 것이다.
“나는 [...] 과학에서처럼 진리에 계속 접근해갈 수 있고, 각각의 새로운 단계가 전에 지나간 일의 거부가 아니라 개선이 되게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광신 행위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갈등을 빚는 혼란한 상태에서 통일을 이루어내는 소수의 힘들 가운데 하나가 과학적 진실성으로서, [...] 이러한 덕을 철학에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철학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의 고안은 내가 속한 분석철학 학파의 주요한 장점이다.” 10
“묵시록적 세계관은 원래, 사물들은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믿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과학 기술의 시대는 인류의 종말의 시작이며, 위대한 진보의 이념은 진리의 궁극적 인식이라는 이념과 마찬가지로 기만이며, 과학적 인식에는 훌륭하거나 바람직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얻으려 애쓰는 인류는 함정에 빠진다고.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11
이로부터 우리는 그의 정신이 단순히 이론에 부차적으로 덧붙여지거나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이 정신에 따라 글을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이 그를 자신과 같은 부류의 철학자로 오해했던 것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지니고 있던) 현대 문명의 정신과 자신의 것의 차이를 ‘수단으로서의 명료함’과 ‘명료함 자체’의 구분을 통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12 첫째, 그는 완성된 서문에서, 현대 문명의 정신이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식을 통해 세계의 주변부(다양성)를 파악하려 시도하는 반면, 자신의 정신은 원래의 자리에 남아 세계의 중심부(본질)를 파악하려 시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13 따라서 러셀에게 있어 명료함이란 과학적인 진리성으로 대표되는 구조(structure)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명료함이란 구조와는 무관한 본질의 파악 그 자체이다. “[나의 정신이] 파악하려 시도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존재한다.” 14 둘째, 그는 러셀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서구 과학자였던 프랭크 램지의 사유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국가의 본질에 관해서는 반성하지 않았고, [...] 오히려 이 국가가 어떻게 이성적으로 정리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 반성하였다. 이 국가가 유일하게 가능한 국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부분적으로 그를 불안하게 하였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를 지루하게 하였다.” 15
명시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 이 대조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논고』를 겉으로 드러난 유사성에 따라 분석철학의 초기 흐름에 편입시키려 했던 여러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논고』의 저자는 정작 진보의 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과학적 방법론의 철학’이나 ‘과학적 세계관에 봉사하는 철학’을 단 한 번도 진정한 철학적 숙고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되려 그는 그러한 사유들이 철학에 있어 비본질적이라 여겼다. 이러한 대조는 그가 『논고』를 문제의 본질적인(im Wesentlichen) 해결책으로 간주했다는 점 16을 고려해 볼 때 한 층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우리는 통속적 견해에 따라, 순수논리학의 문제를 해결하려 철학에 투신한 천재 공학도의 ‘계산적인 사유(das rechnende Denken)’ 17의 결과물이 『논고』라고 쉬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위의 견해를 만들어 낸 근거들과, 그러한 근거들을 가능하게 한 해석학적 지평이 철저하게 비판에 붙여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이 비판의 피고가 자신의 해석의 엄밀함을 호소하면서도 실은 어떤 자의성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논고』에 표현된 사상과, 그로부터 배제되어 ‘취향의 문제(Geschmacksache)’로 격하되어 온 비트겐슈타인의 윤리적 견해가 그가 파악했던 동일한 본질의 다른 표현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편이 오히려 더 온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논리학자였던 만큼이나 논리적 사유에 의해 지탱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가였으며, 이 정신은 현대의 지배적 가치들에 대해 무심함을 넘어 허무주의와 종말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18 이에 따라 이 사유의 정체를 통찰해야 하는 필요성 역시 한층 더 긴급해질 것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 당대에 허무주의(Nhilismus)에 대항하는 마지노선이었던 사유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최전선으로 변했다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나는 위에 제시된 잠정적 가능성들을 앞으로 역사적, 윤리적 해석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확인해 볼 것이다. 이 해석의 최종적 목표는 물론 위에 언급한 괴리를 극복하는데, 즉 잊혀진 비트겐슈타인을 추사유(追思惟)함에 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이에 대한 일련의 선행작업이 필요함을 본다. 왜냐하면 작금의 망각에는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은 망각에 반비례하여 계속해서 승리를 구가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논고』의 지배적 해석 19이라 부른다. 따라서 본고는 『논고』의 초기 수용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적, 윤리적 해석을 시도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야하는 예비작업이다. 이 예비작업의 전초전은 『논고』가 출판된 1918년부터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 복귀한 1930년 사이의 기간에 형성된 지배 해석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수행된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김연경 옮김, 믿음사, 2007, 12쪽. [본문으로]
- 레이 몽크, 『비트겐슈타인 평전: 천재의 의무』, 남기창 옮김, 필로소픽, 2012, 76-77쪽 참조. [본문으로]
- 같은 책, 207쪽 참조. [본문으로]
- 앨런 재닉 · 스티브 툴민,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석기용 옮김, 필로소픽, 2013, 36쪽. [본문으로]
- Karl Kraus, Werke, Heinrich Fischer ed., 14 vols. munich: Kösel, 1952-1966, 161쪽 참조. [본문으로]
- 대륙철학의 계통에 있는 철학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통속적인 상(像)을 그의 철학 전체로 여김으로써 그를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논문으로는 김영건, 「하이데거와 분석철학 -카르납, 로티, 비트겐슈타인-」, 『철학논집』 제23집,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0, 72-74쪽 참조. [본문으로]
- 그러나 이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유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영미권에서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이란 대주제 아래에서 여전히 관련 논의들이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연구들은 이전까지 경시된 비트겐슈타인의 윤리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철학 이론 사이의 괴리를 메꾸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목표와 일치한다.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서는 Alice Crary and Rupert Read(eds.), The New Wittgenstei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 앨런 재닉 · 스티브 툴민,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참조. [본문으로]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36-37쪽. [본문으로]
- “[...] der Sinn des Buches ist ein Ethischer. [...] Ich wollte nähmlich schreiben, mein Werk bestehe aus zwei Teilen: aus dem, der hier vorliegt, und aus alledem, was ich nicht geschriben habe. Und gerade dieser zweite Teil ist Wichtige.”(Joachim Schulte, Suhrkamp BasisBiographie 9 Ludwig Wittgenstein,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5, 60쪽 재인용.) [본문으로]
- 버드란트 러셀, 『서양철학사』,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09, 1038쪽. [본문으로]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123쪽. [본문으로]
- 같은 책, 37-38쪽 참조 [본문으로]
-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Remarks, Rush Rhees, eds., Raymond Hargreaves and Roger White trans., Oxford: Blackwell, 1975, 7쪽 참조. [본문으로]
- 같은 곳. [본문으로]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62쪽. [본문으로]
- Ludwig Wittgenstein,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3, 8쪽 참조. [본문으로]
- 마르틴 하이데거, 『동일성과 차이』, 신상희 옮김, 믿음사, 2000, 123쪽 참조. [본문으로]
- 이승종, 「반시대적 고찰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12집, 1999, 414-417쪽 참조. [본문으로]
- 이 지점에서 나는 기본 용어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한정한 후에 글을 진행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어떤 특수한 종류의 해석들을 지칭하기 위해 쓰는 표현은 각각 ‘표준적 해석’, ‘단호한 해석’, ‘지배적 해석’의 3가지이다. ‘단호한 해석’은 “The resolute reading”의 번역어로, 미국의 철학자 코라 다이아몬드가 자신의 논문에서 『논고』의 “Er muss sozusagen die Leiter wegwerfen, nachdem er auf ihr hinaufgesteigen ist.”라는 구절을 문제삼은 이래 등장한, 『논고』의 모든 구절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읽어야 한다는 해석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앞의 해석을 ‘단호한 해석’(또는 ‘새로운 해석’)으로, 반대로 『논고』를 유의미하게 읽을 수 있다는 해석을 ‘표준적 해석’(또는 ‘전통적 해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는 강진호, 「초기 분석철학 연구의 최근 쟁점들」, 『철학과 현실』 통권 제72호, 철학문화연구소, 2007, 117-119쪽 ; 변영진, 「『논리-철학 논고』의 무의미성」, 『철학사상』 제51집,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4, 201–203쪽 참조. 위의 두 논문을 따라 ‘의미’를 기준으로 대립되는 두 해석을 ‘단호한 해석’과 ‘표준적 해석’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표준적인 해석의 틀을 형성한 『논고』의 초기 수용자들(러셀, 논리실증주의 등)의 해석”을 지칭하기 위해 ‘지배적 해석’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이 경우 ‘지배적 해석’이란 표현은 ‘표준적 해석’과 마찬가지로 “『논고』를 유의미하게 읽어야 한다는 입장 전체”가 아니라, “1918년부터 1930년 사이에 형성된, 지금까지도 통속적인 비트겐슈타인 상(像)의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는 『논고』 해석들”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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