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Proposals & Drafts

[초고] 『논리-철학 논고』의 ‘초월적(transzendental)’ 개념에 관하여

Soyo_Kim 2024. 7. 12. 02:10

2023.12.21 - [Research/Publications] - 『논리-철학 논고』의 ‘초월적(transzendental)’ 개념에 관하여― 세계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논리와 윤리 ―

 

『논리-철학 논고』의 ‘초월적(transzendental)’ 개념에 관하여― 세계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논

김현균, 김도식. (2021). 『논리-철학 논고』의 ‘초월적(transzendental)’ 개념에 관하여-세계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논리와 윤리. 범한철학, 100(1), 353-389.

georgia15.tistory.com

 

 

【주제분류】언어 철학, 존재론, 윤리학
【주요어】비트겐슈타인, 칸트, 『논리-철학 논고』, 초월-철학, 존재론적 역설
【요약문】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해석할 때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 중 하나는 낯선 개념의 범람이다. 이를테면 그가 『논고』의 주요 개념으로 사용하는 그림(Bild)이나 의지(Wille)와 같은 용어들은 프레게와 러셀의 저작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개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을 쓴 재닉과 툴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일어났던 사유의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한 가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방향성을 토대로 『논고』의 ‘초월적(transzendental)’ 개념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기획을 조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초월적’ 개념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후, 이 개념에 관한 다이아몬드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이 개념을 통해 논리와 윤리의 공통된 본성을 해명한다는 점에서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하지만, 동시에 그 의미를 부주의하게 축소하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명을 제시함으로써 칸트의 근본 청사진이 『논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을 보일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보존의 원인을 재닉과 툴민의 역사적 방법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본고는 『논고』가 생각(Denken)에 한계를 그음으로써 절대적 가치의 영역을 지켜내려 했던 칸트적 기획의 현대적 계승임을 논증한다.
논리와 윤리는 근본적으로 하나이며 같은 것, 스스로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
-오토 바이닝거[각주:1]

 

1. 들어가는 글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이하 『논고』)를 해석할 때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 중 하나는 낯선 개념의 범람이다. 이를테면 그가 『논고』의 주요 개념으로 사용하는 그림(Bild)이나 의지(Wille)와 같은 용어들은, 『논고』를 이해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읽어야 하는 프레게와 러셀의 저작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개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독창적인 사적 개념인가, 아니면 프레게-러셀과는 전혀 다른 사유에서 유래한 것인가? 앞의 경우는 불필요하게 많은 자의적 해석을 허용하며 뒤의 경우는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철학자들 사이의 연관을 설득력 있게 재구성해야 한다는 문제를 남긴다. 그런데 첫 번째 문제엔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반면 두 번째 문제엔 그 해결책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길의 가능성을 먼저 모색해보려 한다. 우선 이 길을 구체화할 두 가지 근거를 살펴보겠다.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이 개념과 문제의 재생산에 특화된 철학자라는 점에 있다. 예컨대 후기 저작에서 그는 다른 사상가의 생각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하고, 이어지는 단상들 속에서 그 생각을 명료화하는 데 주력한다. 그렇다면 『논고』 역시 이러한 재생산의 결과물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가 남긴 글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나의 사고는 실제로는 단지 재생산적일뿐 …내가 하나의 사유 노선을 창안해 내었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나는 다만 그것을 즉시 열정적으로 받아들여 명료화하는 작업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볼츠만 · 헤르츠 · 쇼펜하우어 · 프레게 · 러셀 · 크라우스 · 로스 · 바이닝거 · 슈펭글러 · 스라파는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CV, pp. 48-49).[각주:2]

 

이중 볼츠만, 헤르츠, 쇼펜하우어, 크라우스, 로스, 바이닝거는 그가 『논고』를 쓰기 이전부터 탐독하고 영향 받았던, 그러나 우리에게 그 연관이 흐릿하게만 드러나 있는 낯선 사상가들이다. 또한 이들의 사상이 『논고』에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각주:3], 우리는 이제 『논고』의 낯선 개념들의 유래를 밝힐 하나의 실마리를 얻게 된 셈이다.

두 번째 근거로 탁월한 선행 연구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을 쓴 재닉과 툴민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논고』를 잘못 독해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일어났던 사유의 맥락을 무시한 채로 이 책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재닉과 툴민은 그 대표적인 예로 그림 개념의 형성과 오해의 역사를 제시하며, 이를 통해 논리 실증주의가 “헤르츠와 볼츠만의 이론에서 파생된 한 언어철학 저서의 논증을 마흐주의적인 경험론의 인식론적 활용 사례인 양 왜곡했던 것” (재닉 · 툴민 2013, p. 247)이라 결론 내린다.

본고는 이들이 제시한 방향성을 토대로 『논고』의 ‘초월적(transzendental)’ 개념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기획을 조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논문에서는 먼저 ‘초월적’ 개념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후, 이 개념에 관한 다이아몬드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이 개념을 통해 논리와 윤리의 공통된 본성을 해명한다는 점에서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하지만, 동시에 그 의미를 부주의하게 축소하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명을 제시함으로써 칸트의 근본 청사진이 『논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을 보일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보존의 원인을 재닉과 툴민의 역사적 방법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본고는 『논고』가 생각(Denken)에 한계를 그음으로써 절대적 가치의 영역을 지켜내려 했던 칸트적 기획의 현대적 계승임을 논증한다.

 

2. ‘초월적’ 개념에 관한 문제 제기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자. 『논고』의 ‘초월적’ 개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 그것은 왜 중요한가? 이 개념은 『논고』 전체를 통틀어 단 두 번 등장한다.

 

논리는 학설이 아니라, 세계의 투영상(Spiegelbild)이다.
논리는 초월적이다(Die Logik ist transcendental). (TLP, 6.13)

 

윤리가 표명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윤리는 초월적이다(Die Ethik ist transcendental).
(윤리와 미학은 하나다.) (TLP, 6.421)

 

『논고』의 다른 명제들처럼 ‘초월적’ 개념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은 극도로 압축되어 있다. 이 개념은 또한 프레게-러셀의 저작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역시 쉽지 않다. 예컨대 그것은 일상적 의미의 초월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칸트가 이 단어에 새롭게 부여했던 의미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론적 체계를 의미하는가?

우리는 먼저 “윤리는 초월적이다”를 앞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을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탐구,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LE, p. 26) 등으로 정의한다. 즉, 윤리학은 절대적 가치를 다루는 학문이며 윤리적 명제는 그 본성상 필연적, 당위적 성격을 지닌다(LE, p. 30). 그러나 『논고』에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Gesamtheit der Tatsachen)” (TLP, 1.1)로 정의되며 개개의 사실은 그것이 성립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연적이다. 사실들은 상호 간의 비교에 의한 상대적 가치를 지닐지언정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는 못한다. 따라서 “가치는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 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TLP, 6.41)

이렇게 하여 윤리의 초월성은 쉬이 해명된다. 윤리는 세계를 넘어서 있는 절대적 가치를 다루기 때문에 초월적이며, “현실의 그림(Bild der Wirklichkeit)” (TLP, 4.01)인 명제에 담길 수 없기 때문에 초월적이다. 그러나 같은 설명이 논리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논고』에 따르면 “논리적 명제들은 세계의 골격을 기술하거나, 더 정확히는 그것을 묘사한다.” (TLP, 6.124) 그렇다, 논리는 세계의 형식과 연관된 것이지 세계로부터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앞의 설명은 논리의 초월성을 적절히 해명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이 개념의 두 번째 의미를 취해보자. 우리는 “논리는 초월적이다”를 칸트가 부여했던 의미로 이해해볼 수 있다. 즉, 논리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윤리의 경우이다. 앞서 이해한 바대로 윤리가 세계 밖에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세계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난점에 대해 누군가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은 해법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단어를 다의적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함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개념(Begriff)이 아니며, 탐구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그 경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논리와 윤리가 『논고』 안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논고』의 목표는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긋는 것이다(TLP, 서문). 그리고 이 작업은 일상 언어라는 옷에 숨어 있는 “몸의 형식(Form des Körpers)” (TLP, 4.002), 즉 언어의 실제 논리적 형식을 통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가 규정한 논리의 본성을 해명하는 일은 당연히, 『논고』의 전체 기획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에 한계를 긋는 논리적 작업은 또한 윤리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윤리가 오로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논고』의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논리에 관한 탐구는 곧 ‘윤리적인 것’을 확정하기 위한 교두보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책은 당신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책의 의미가 윤리적인 것(ein Ethischer)이기 때문입니다. (……) 즉, 저는 제 작품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쓰고 싶었습니다: 여기 있는 것과 제가 쓰지 않은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것은 제 책에 의해,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한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엄격하게, 오직 그렇게만 한계지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짧게 말해,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지껄이는 모든 것을, 저는 제 책 안에서 그것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확정해 놓았습니다(Briefe, pp. 96-97).

 

그러므로 이제 논리와 윤리의 탐구는 어떤 이행 관계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논고』의 제작 과정이 담겨 있는 『전쟁일기』에서 이러한 이행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의지하는 주체이며, …여기서 주체의 본질은 아직 전적으로 베일에 싸여 있다. 그렇다, 내 작업은 논리의 기초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본질까지 확장되었다.[각주:4]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의미 이론의 정립을 곧장 윤리에 관한 해명 전체로 여기고, 그리하여 윤리를 단지 무의미하며 침묵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할 경우, 다음과 같은 난점들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첫째, 그것은 엄밀히 말해 논리에서 윤리로의 이행을 적극적으로 해명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 분석을 통해 정립한 뜻을 지닌(sinnvoll), 뜻을 결여한(sinnlos), 무의미한(unsinnig) 문장들의 구분을 윤리적 명제에 소극적으로 적용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설명 아래에서 『전쟁일기』와 『논고』에 남아 있는 ‘의지하는 주체’에 관한 사유는 전연 해명될 길이 없다.

둘째, 이 설명은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적인 것을 『논고』의 의미로 여긴 이유에 관한 설득력 있는 해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가 윤리에 부여했던 중요성이 오랜 시간 동안 대개 무시되거나 ‘취향의 문제(Geschmacksache)’로 여겨진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컨대 카르납은 언어의 논리적 분석에서 멈춰선 후 그 자리에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을 도입하며(cf. Carnap 2004, pp. 81-109), 해커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과 논리 실증주의의 견해 차이를 단지 비트겐슈타인의 믿음으로 설명한다(Hacker 2000, pp. 372-373).

셋째,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윤리를 말할 수 없는 것, 침묵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윤리와 의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 6.373-6.522의 명제들을 거쳐 도출되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각주:5] 그리고 그는 이 명제들을 올라간 후에 던져 버려야 할 사다리로 간주하고 있다(TLP, 6.54). 따라서 마지막 문장을 근거로 앞선 논의를 그저 무의미로 부정하는 것은 “싹이 떨어져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싹이 꽃에 의해서 부정되었다고 얘기하는 것” (헤겔 2005, p. 36)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국 논리에서 윤리로의 이행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둘의 차이를 넘어선 공통의 속성을 먼저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의미론적으로, 논리적 명제는 뜻을 결여하고 윤리적 명제는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둘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둘이 전적으로 다르기만 하다면 그들은 또한 아무런 관계에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이라는 단어가 그저 대충 쓰인 게 아니라 깊은 숙고 끝에 쓰인 것이라면, 이 개념은 이제 둘의 관계를 해명할 단초로 고려될 수 있다.

 

3. ‘초월적’ 개념에 관한 다이아몬드의 해설과 그 문제점

『논고』에 관한 ‘단호한 해석(Resoulte Reading)’[각주:6]을 제시한 다이아몬드는 ‘초월적’ 개념에 관한 새로운 해설을 제시한다. 그녀의 주장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우리는 『논고』의 명제들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읽어야만 한다. 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상력(imagination)을 통해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③ 『논고』의 ‘초월적’ 개념은 칸트의 초월-철학과 연관되며, 주장 ①과 ②를 정당화한다.

다이아몬드의 주장들은 기본적으로 『논고』의 문장들이 스스로 제시한 유의미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전체가 언어의 오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논고』 안에 그러한 문장들을 썼고, 나아가 책 전체가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TLP, 6.54).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이아몬드는 문자 그대로 『논고』를 무의미하게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오히려 그럴 때만 그의 의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논고』의 치료적(therapeutic) 성격과 윤리적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이해하는 『논고』의 윤리적 의미는 한마디로 윤리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계를 넘어서려 하는 윤리적 사고의 초월성은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질병이자 치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상상력에 의해 무의미한 문장들을 마치 의미 있는 것처럼 여기는 환상 속에 빠져 있으며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세계와 삶에 대한 태도인 윤리적 정신은 모든 생각이나 말에 침투할 수 있다.” (Diamond 2000, p. 153). 따라서 『논고』의 목적은 독자의 환상을 치료하고 그 환상에 접근하는 것을 경고하는 데 있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나 칸트를 읽을 때, ‘초월적’이라는 용어를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다. 칸트에게 있어 윤리와 초월적 주체 사이의 연결은, 윤리적 사고를 알 수 있는 것의 영역, 경험적 세계에 도입할 경우 윤리는 파괴되며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유사성은 …의지에 관한 경험 심리학을 거부한다는 점이다(Diamond 2000, p. 168).

 

다이아몬드의 설명은 앞서 제기된 난점들을 적절히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윤리는 이제 순전히 의미론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상상력을 매개로 주체와 연결되며, 『논고』의 의미로 격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논고』의 문장들은 단순한 무의미가 아니라 철학적 질병의 치료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의도적 무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다이아몬드의 주장 ③만이, 대대적 수정을 거친 이후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①을 정당화하기 위해 ‘초월적’ 개념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축소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①은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변영진의 지적처럼 ‘단호한 해석’은 자기반박적이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언어의 무의미성 규정에 관한 이해가 다시금 『논고』 진술들을 통해” (변영진 2014, p. 213)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이아몬드는 『논고』의 ‘초월적’ 개념을 칸트와 연관 지어 설명함으로써, 스스로 무의미하게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문장을 마치 의미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둘째, 다이아몬드의 주장 ③은 오히려 ①에 의해 반박된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설령 전혀 다른 문장을 썼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하므로 책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각주:7] “윤리는 초월적이다”와 “윤리는 내재적이다”는 동일하게 이해 불가능한 문장이므로, 이제 전자가 후자로 바뀌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는 후자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경고를 읽어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셋째, 『논고』의 ‘초월적’ 개념이 칸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다이아몬드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또한 이 개념의 의미를 부주의하게 축소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초월적’ 개념의 근본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표상들에는 전혀 경험적 기원이 없다는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관련할 수 있느냐 하는 가능성만을 초월적이라 부를 수 있다.” (KrV, A 56, 57 / B 81) 간단히 말해, 초월적 인식은 그 자신은 경험적이지 않으나(곧, 선험적이지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Bedingungen)에 관한 체계적 인식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전쟁일기』에서 바로 이러한 의미의 초월로 윤리를 사유하고 있다. “윤리는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윤리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조건들 중 하나여야 한다.”[각주:8]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초월적’이라는 단어를 순전히 윤리에 대한 접근 금지 경고를 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옳지 않다.[각주:9]

그렇기에 다이아몬드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철학적 질병에 대한 경고 이상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실상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칸트는 한편으로 독단적 형이상학이 범하는 무용함과 오류를 공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물음 자체는 인간 이성의 운명(Schicksal)으로 여기기 때문이다(KrV, A VII f). 비트겐슈타인 역시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저 형이상학을 경멸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과거의 위대한 철학적 체계 중 일부는, 제 생각에 인간 정신의 가장 고귀한 산물 중 하나입니다.”[각주:10] 윤리가 단순히 철학적 질병의 원인이자 접근 금지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왜 중요한가? 윤리를 이해의 영역 밖으로 추방하는 다이아몬드의 해석은 오히려 카르납의 극복(Überwindung)과 닮아 있다.

 

4. 존재론적 역설 : 한계 지음과 보여줌

앞선 해석자들과 정반대로, 다이아몬드의 문제점은 논리와 윤리의 공통점만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그녀는 『논고』의 모든 문장을 무의미로 여기기 때문에 둘의 명백한 의미론적 차이를 무시한다. 따라서 핵심은 둘의 차이를 보존하면서 공통점을 드러내는 데, 둘의 공간적 상호 위치를 규정함에 있다. 우리는 『논고』에서 바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논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험”은, 무언가가 그러한 사태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경험이 아니다.
논리는 모든 경험-무언가가 그렇게 있다는 것-에 앞선다.
그것은 ‘어떠함’에는 앞서 있지만, ‘무엇임’에는 앞서 있지 않다(TLP, 5.552).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이 그 의미를 따져볼 것 없이 모순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그는 어떤 특수한 종류의 “경험”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경험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론적으로, 이 문장은 다이아몬드의 말마따나 참으로 헛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 말의 논리적 ‘배경’ 혹은 ‘지평’은 그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 어떤가?” (한대석 2012, pp. 117-118). 칸트는 인식 능력에서 자발성(Spontaneität)을 담당하는 지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독단에 빠진다고 진단한다. 생각(Denken)에 한계를 그으려 하는 『논고』의 시도와 칸트가 설정하려 하는 앎의 한계는 바로 이 독단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철학의 의무는 오해에서 유래한 신기루를 폐기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많은 칭찬과 호평을 받던 망상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말이다.” (KrV, A XIII, XIV) 그런데 칸트의 목표가 신기루와 함께 도덕을 폐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유일하게 성립할 수 있는 터전인 예지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각주:11], 위의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이 말하는 바도 이제 명확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론적 역설(das ontologische Paradoxon)’의 기술(記述)이다.

논리와 윤리가 초월적이라면, 그것은 논리와 윤리가 모든 경험(사물의 어떠함)에 앞서 있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달리 말해 양자는 그 자신은 의미 있지 않으나(곧, 뜻을 결여하거나 무의미하지만), 의미 있는 명제들(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그리고 이 조건들은 의미 있는 명제 안에서 단지 보여진다(zeigen). 그렇기에 “우리는 논리적 명제들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것” (TLP, 6.122)이다.

그러므로 윤리는 이제 세계의 조건으로서 특정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유의미한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선 일단 그것이 존재해야 할 테니 말이다. 또한 이 조건들은 카르납의 생각처럼 올바른 ‘논리적 통사론(die logische Syntax)’을 정립한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어를 아무리 열심히 정비한다 해도, 언어는 여전히 존재할 테니까 말이다.[각주:12]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논리를 적용해볼 수 있겠는가?” (TLP, 5.5521)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그것에 필연적,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어떤 탁월한 “경험”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LE, p. 30). “저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가’와 같은 그런 문구를 곧잘 사용합니다.” (LE, p. 31) 그러나 모든 명제는 논리에 의해 구성된 ‘어떠함’만을 표현할 수 있는 반면, 이 명제는 논리에 앞서는 ‘무엇임’을 표현하려 시도하기 때문에 뜻(Sinn)을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가상의 명제(Scheinsatz)’가 만들어내는 물음이 바로 독단적 형이상학의 원천이자, 존재론적 역설의 결과이다. “경험이, 사실이, 초자연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역설이다.” (LE, p. 34)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전략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 인식될 수 없음을, 예컨대 칸트가 보여 주었듯이 이율배반에 빠지게 되는, 어떤 한계에 달려가 부딪치는 물음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있다[sein]’란 동사가 존재하는 한, …인간들은 똑같은 수수께끼 같은 난점들에 되풀이해서 부딪힐 것이며, 어떠한 설명으로도 떼어버릴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무엇인가를 계속 응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더욱이 초-현세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 준다. 왜냐하면 “인간 지성의 한계”를 본다고 믿음으로써 사람들은 자연히, 그것을 넘어서서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CV, pp. 58-59).

 

이로써 비트겐슈타인의 역설은 칸트가 결행한 현상(Erscheinung)과 물자체(Ding an sich)의 구분 아래에서, 그리고 후자를 지탱하는 의지(Wille) 개념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전쟁일기』에서 쇼펜하우어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쇼펜하우어식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표상의 세계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하고 악한 것은 의지하는 주체이다.”[각주:13] 이 역설은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존재(Sein)의 이러한 독특한 성격이야말로 하이데거가 평생을 천착했던 물음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하나의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 속에서 움직인다. 그것으로부터 존재의 의미에 대한 명확한 물음과 그 개념으로의 경향이 생겨난다.” (Heidegger 2006, p. 5)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하이데거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하이데거가 존재(Sein)와 불안(Angst)으로 뜻한 바를 곧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의 한계로 달려가다 부딪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경탄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경탄은 질문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 없고, 대답 또한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선험적으로(a priori), 그저 무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달려가 부딪칩니다. 이러한 부딪침을 키에르케고르 또한 보았으며, 심지어 그것을 매우 유사하게 (역설로 달려가 부딪침)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로 달려가는 부딪침이 윤리입니다. (……) 그러나 이 경향성, 이 부딪침은 무언가를 가리킵니다(deutet auf etwas hin). (WWK, pp. 68-69)

 

이제 이 무언가(etwas)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쫓아 보자. 1) 우리는 이미 이해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인식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 2) 그러나 그 무언가는 의미 있게 인식될 수 있는 한계 바깥에 있다는 것.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언가는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것. 우리는 이와 같은 결론이 한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이미 사유된 것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의지의 원인성으로서 자유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근거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것과도 같은 경우다. 나는 거기에서는 철학적 설명근거를[den philosophischen Erklärungsgrund] 포기하게 되며, 달리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는 예지계 안에서, 즉 예지적 존재들의 세계 안에서 떠돌아다닐 수는 있다. (……) 그런데 이것은 내가 감성의 영역에 한계를 지음으로써[begrenze] 바로 이 영역이 모두를 자신 안에 포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 바깥에도 여전히 더 많은 것이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zeige]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더 많은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 그러니 여기가 모든 도덕적 탐구의 가장 높은 한계다. 그렇지만 이 한계를 정하는 것 또한 정말로 대단히 중요하다.[각주:14]

 

따라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초월적’ 개념은 그 근본적 의미에서 일치한다. 칸트 철학에서 사변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를 정초하기 위해 쓰인 ‘한계 지음’과 ‘보여줌’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두 기둥이다. 그러므로 이제, 『논고』를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혹은 ‘선험론-철학’)이라 불러도 크게 무리가 있을 것 같진 않다.

 

5.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 칸트적 기획의 보존

그렇다면 칸트의 기획은 왜 『논고』에 보존되어 있는가? 우리는 재닉과 툴민의 분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논리 실증주의를 비롯한 많은 해석자들이 그림(Bild)을 ‘감각적 표상(Vorstellung)’으로 오해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논고』를 프레게와 러셀, 논리 실증주의의 연속성 아래에서만 이해할 경우, 이 개념을 흄의 인상(impression)이나 로크의 관념(idea)과 같이 순전히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것으로 여기기 쉽다. 논리 실증주의는 세계의 요소를 감각으로 규정했던 마흐의 철학에서 출발하였으며(cf. 마흐 2014, p. 674), 프레게 역시 표상과 직관을 ‘감각적 인상’의 생생한 정도에 따라 구분한다는 점에서 흄과 유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Frege 2008, p. 26). 여기에 영국 경험주의 전통에 있던 러셀의 영향이 더해짐으로써 그림은 수용성(Rezeptivität)만을 지닌 심상(心象)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림은 실상 칸트의 인식 능력과 마찬가지로 자발성과 수용성의 측면을 모두 지닌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사유의 연원으로 지목했던 헤르츠에게서 일찍이 사용되었던 바, “한 체계의 묘사(Darstellung eines Systems)에 관한 것” (Briefe, p. 94)이었기 때문이다.

 

헤르츠는 자기가 도입한 그림이나 상의 기능을 지칭하기 위해서 ‘Darstellung’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지 감각 인상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 그런 유형의 표상이 아닌, (이를테면) 역학의 전체 체계를 의미했다. (……) 이러한 표상의 양식에서, 인간은 흄 식의 ‘인상’이나 마흐 식의 ‘감각’ 같은 ‘표상’이 그저 발생하기만 할 뿐인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다. 공적 용법으로서의 표상Darstellung은 그와는 반대로 앎을 위해 의식적으로 구성된 도식이다(재닉 · 툴민 2013, pp. 238-239).

 

헤르츠에게 있어 그림은 실재의 묘사(Darstellung)를 위해 의식이 능동적으로 구성한 모델(Modell)이다. 그는 역학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요건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논리적으로 허용 가능해야 하며, 둘째, 경험적 자료에 대응해야 한다(재닉 · 툴민 2013, p. 240).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가 모델을 자발성과 수용성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헤르츠의 체계에서 선험적인 요소이며, 그는 이것을 《역학의 원리》 1권에서 탐구한다. 2권에서는 더 나아가 어떻게 그런 선험적인 연역 체계가 경험과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고려한다.” (재닉 · 툴민 2013, p. 240) 따라서 논리적으로 허용 가능한 그림들은 경험(사물의 어떠함)에 앞서서 구성된다. 헤르츠는 이렇게 말한다. “경험은 1권의 고찰들과 완전히 무관하다. 개진된 모든 진술은 칸트의 뜻에서의 선험적(a priori) 판단이다. 그것들은 내적 직관의 법칙들과 자체적인 논리의 형식들에 근거한다.” (Hertz 1894, p. 53) 우리는 헤르츠의 철학을 받아들인 볼츠만에게서도 같은 논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모상(Abbild)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언제나 외부세계(Außenwelt)에 점차적으로 맞춰가는 것이 인간 정신의 고유한 경향이다. [...] 이러한 모상의 첫 번째 증축, 지속적 완성이 오늘날 이론의 주요 과제이다. 상상력(Phantasie)은 언제나 이론의 요람이며 관찰하는 지성(beobachtende Verstand)은 이론의 교육자이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부터 헤겔과 셸링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우주론들은 얼마나 앳된가. 그 당시 상상력은 지나치게 생산적이었고, 실험을 통한 자기 검증에 실패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이후의 모든 주요 이론들의 싹을 품고 있었다(Boltzmann 1979, p. 55).

 

따라서 이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지각된 것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실재에 적용될 수 있는 수학적 모델들 혹은 도식들(die mathematischen Modelle oder Schemata)의 구축이었다(Geier 2017, p. 61). 이 구분은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준다. 프레게의 관점에서 정당하게(rechtmäßig) 형성된 문장은 모두 뜻을 가져야만 하는 반면,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모든 가능한 문장은 이미 정당하게 형성된 것이다(TLP, 5.4733). 이러한 의미에서, 그림은 묘사대상(Dargestellten)으로부터 독립적이다.[각주:15]

 

모든 묘사에 공통된 것은 그것이 옳거나 그를 수 있으며, 진리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묘사방법[Darstellungsweise] 역시 전적으로 묘사대상[Dargestellten]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둘을 합쳐야 진리 또는 거짓일 수 있으며, 특정한 방식을 가진 그림일 수 있다(이는 물론 요소명제에도 해당된다).[각주:16]

 

우리는 평면Ⅰ 위의 모든 타원들이 각각 평면Ⅱ에서는 원으로 나타나야 하고, 모든 직사각형은 각각 Ⅱ에서는 정사각형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규칙을 정한다. (……) 일상 언어의 경우도 아주 유사하다. 실재의 사실들이 평면Ⅰ의 타원들과 직사각형들이라면, 주어-술어와 관계 형식들은 평면 Ⅱ에 있는 원들과 정사각형들에 해당한다(RLF, pp. 15-16. 강조는 필자의 것).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묘사방법(Darstellungsweise)을 화법기하학(die darstellende Geometrie)의 화법(畫法)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화법기하학이란 3차원 현실의 대상을 2차원 지도에 올바르게 그릴 수 있는 규칙들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명제라는 그림이 논리적-통사론적 사용을 통해서만, 즉 “어떤 연관들 속에서만 하나의 낱말이 뜻을 낳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규칙들” (RLF, pp. 13-14)을 통해서만 현실을 모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cf. TLP, 2.18, 3.327). 그렇기에 명제는 통사론에 따라 현실의 가능성을 묘사하고(darstellen), 그럼으로써 현실을 모사할(abbilden) 때만 뜻을 지닌다(TLP, 2.06, 2.201). 반대로 말해, 현실을 모사하지 않는 명제는 뜻을 결여하거나 무의미하다(sinnlos oder unsinnig). 따라서 “언어의 이러한 지나치게 큰 다양성(Mannigfaltigkeit)은 인위적 규칙들을 통해 제한되어야만 한다. 그 규칙들이 언어의 통사론(Syntax der Sprache)이다.” (WWK, p. 240)

칸트의 철학에서 자발적 개념이 도식을 통해 감성화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논리적 그림은 통사론적 사용을 통해 현실의 그림이 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통사론과 칸트의 도식론(Schematismus)은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 첨예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문제 의식과 접근 방식이 헤르츠를 매개로 한 우연 이상의 유사성을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들을 철학사적 연속성 아래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지성 개념을 그 사용에 있어 제한하고 있는,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이고 순수한 조건을 이 지성 개념의 도식으로, 이러한 도식들과 함께하는 지성의 절차를 순수한 지성의 도식론으로 부르고자 한다. (……) 따라서 하나의 개념에 그것의 그림(Bild)을 마련해주는 상상력의 일반 절차에 관한 이 표상을 나는 이 개념으로의 도식이라 부른다(KrV, A 140, 141 / B 180).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가 『논고』의 목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아보자. 우리의 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TLP, 4.002). 즉, 일상 언어는 무의미한 가상의 명제(Scheinsatz)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고(Gedanke)는 뜻을 지닌 명제이다.” (TLP, 4)[각주:17] 그렇다면 가상의 명제는 곧 가상의 사고, 칸트식으로 말해 변증적 가상(der dialektische Schein)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통사론의 확립은 이제 “언어비판(Sprachkritik) (TLP, 4.0031)이 된다. 그것은 가상의 사고를 배제하고 참된 사고인 뜻을 지닌 명제들만을 남김으로써 사고에 한계를 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의 선험적 조건인 논리와 윤리는 말할 수 있는 것 안에서 단지 보여질 것이다.

 

6. 나가는 글

본고는 『논고』의 ‘초월적’ 개념을 중심으로 논리의 기초에 관한 탐구가 세계의 본질에까지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를 부족하게나마 해명해 본 것이다. 우리는 『논고』를 칸트적 기획의 현대적 계승으로, 즉 윤리적인 저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앎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사고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예지계를 결코 알 수 없지만, 예지계의 존재자인 것처럼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세계에 대한 경험 이전의 “경험”은 그야말로 “신비로운 것(das Mystische)” (TLP, 6.44)이다. 그리하여 절대적 가치는 앎의 한계 바깥에서 보존되며, 세계는 불가피하게 둘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가능한 학적 물음들이 대답된 채로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전혀 손대지 못한 채로 있다고 느낀다. 말할 나위 없이, 그 경우엔 정말 어떤 물음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TLP, 6.52).

 

삶의 물음과 학적 물음의 주체는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각주:18], 삶의 물음들은 침묵 속에서 보존될 때만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파악해 본 『논고』의 윤리적 의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윤리학 책을 쓸 수 있다면, 이 책은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책들을 폭음을 내면서 파괴할 것” (LE, p. 29)이다. 왜냐하면 윤리야말로 진정으로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그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며, 어떠한 설명(Erklärung)도 의지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한다. “나는 선(善)한 것은 신이 명령한 것이라는 첫 번째 해석이 심오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설명의 길을 끊어 버리기 때문이다.” (WWK, p. 115)

따라서 나는 이제 세계와 주체의 본질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신적인 것과 “형이상학적 주체(das metaphysische Subjekt)” (TLP, 5.641) 사이의 연관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어떻게 세계와, 비록 알 수는 없지만 존재함으로써 참여하고 있는 이 세계와 불화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쇼펜하우어와 바이닝거를 이어 의지(Wille)라는 이름으로 사유하고 있다. 비록 그가 의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그 길에 발을 들이지조차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걸었던 사유의 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행 가능하며,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Sein)는 우리에게 경탄(Erstaunen)만큼이나 불안(Angst)을 야기하며, 이로 인한 삶의 물음들은 언제나 동일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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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On the Concept of ‘transcendental’ of the Tractatus

― Logic and Ethics as a priori Conditions of the World ―

 

The fundamental problem when we are trying to interpret the Tractatus is a flooding of unfamiliar concepts. For instance, the concept of ‘picture’ (Bild) or ‘will’ (Wille) is something that cannot be found in the philosophy of Frege and Russell. So, how can we take an approach to understand these concepts? Janik and Tulmin, authors of Wittgenstein’s Vienna, suggest one way to solve this problem by describing the geography of thought that occurred in the Empire of Austria-Hungar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urvey the Wittgenstein’s philosophical project by examining the concept of ‘transcendental’ of the Tractatus, based on this orientation. At first, I will be raising the issues about the meaning and importance of the concept of ‘transcendental’. Afterward, I will critically analyze the Diamond’s interpretation of this concept. Diamond approaches the problem correctly by explaining the common nature of logic and ethics through this concept. But, she also tarnishes the meaning of this concept inattentively. By offering a more persuasive explanation, I will show that Kant’s fundamental blueprint is preserved in the Tractatus. Moreover, we can confirm the cause of this preservation through the historical methodology of Janik and Tulmin. In conclusion, I will show in this paper that the Tractaus is a modern succession of Kantian project, which sought to preserve the realm of absolute value by drawing limits to thought itself.

 

Subject Sphere: Philosophy of Language, Ontology, Ethics

Key Words: Wittgenstein, Kant,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cendental-Philosophy, Ontological Paradox

 

  1. Weininger (1932), p. 198. [본문으로]
  2. 이 논문에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의 다음 문헌들은 약호로 표기한다(서지사항은 참고문헌에서 밝힘).

    [TLP] =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인용시 관례에 따라 책 제목과 명제 번호를 밝힌다.)

    [WWK] = Ludwig Wittgenstein und der Wiener Kreis. Gespräche, aufgezeichnet von Friedrich Waismann.

    [Briefe] = Briefwechsel: mit B. Russell, G.E. Moore, J.M. Keynes, F.P. Ramsey, W. Eccles, P. Engelmann und L. von Ficker.

    [RLF] = 「논리적 형식에 관한 몇 가지 소견」.

    [LE] = 「윤리학에 관한 강의」.

    [CV] = 『문화와 가치』.

    [KrV] = Kritik der reinen Vernunft 1. (인용시 관례에 따라 책 제목과 A/B판 면수를 밝힌다.)

    [본문으로]
  3. 대표적으로 헤르츠를 들 수 있다. 헤르츠가 『논고』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 박홍렬 (1991) 참조. [본문으로]
  4. 비트겐슈타인 (2016), p. 411; Wittgenstein (1984), p. 174. (인용은 번역본을 따랐으며 수정이 있을 경우 각주로 밝힌다.) 강조는 필자의 것. [본문으로]
  5. 이 분류는 글록을 따른 것이다(cf. Glock 1996, p. 364). [본문으로]
  6. ‘단호한 해석’이란 다이아몬드가 자신의 논문에서 6.54 명제의 “Er muss sozusagen die Leiter wegwerfen, nachdem er auf ihr hinaufgesteigen ist.”라는 구절을 문제삼은 이래로 등장한, 머리말과 6.54, 7 이외의 『논고』의 모든 명제들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읽어야만 한다는 해석들을 의미한다. 이 해석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 강진호 (2007), pp. 128-131 참조. [본문으로]
  7. 변영진 역시 이와 유사하게 반문한다. “하지만 왜 마찬가지로 무의미인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변영진 2014, p. 219) [본문으로]
  8. 비트겐슈타인 (2016), p. 401; Wittgenstein (1984), p. 172. 강조는 필자의 것. [본문으로]
  9.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경고로서의 초월은, 칸트에게 있어 ‘초월적’ 개념의 파생적 의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험적 조건들이 어떻게 경험의 대상들에 관련할 수 있는지를 안 이후에야 이성이 특수한 경우 잘못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Rush Rhees (Hrsg.), Ludwig Wittgenstein. Porträts und Gespräche,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7, S. 119. quoted in : Geier (2017), p. 207. [본문으로]
  11. 칸트 (2019), p. 128; Kant (1999), pp. 94-95. [본문으로]
  12. 카르납은 존재(Sein)와 무(Nichts)를 명사화하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통사론적 착각’이라 비판한다. 이 비판이 온당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착각’이 아니기 때문에, 하이데거도 존재와 무가 통사론 안에서 사유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는 새삼스레 학문에 의해 폐기될 필요조차 없다. 흔히 인용되는 사유의 근본규칙 자체가, 즉 모순을 피하라는 원칙이, 다시 말해 일반 ‘논리학’이 이 물음을 폐기해버린다. 왜냐하면 사유는 본질적으로 언제나 어떤 것에 관해 사유하는 것이므로, 무에 대한 사유는 사유 그 자체의 고유한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2005, pp. 154-155) 이 지점에서 카르납의 비판은 조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물음과 조건 그 자체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본문으로]
  13. 비트겐슈타인 (2016), p. 411; Wittgenstein (1984), p. 174. [본문으로]
  14. 칸트 (2019), pp. 127-128; Kant (1999), pp. 93-94. (인용은 번역본을 따랐으며 수정이 있을 경우 각주로 밝힌다.) 강조는 필자의 것. [본문으로]
  15. 더 정확히 말해, 그림의 논리적 자발성은 그림의 묘사적 수용성으로부터 독립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어를 오용할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묘사방법에 따라 묘사하는 그림이 자발성과 수용성의 양 측면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16. 비트겐슈타인 (2016), p. 119; Wittgenstein (1984), p. 110. 논문의 일관성에 맞게 주요 개념들의 역어를 수정하였다. [본문으로]
  17.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사고란, “명제가 통사론에 따라 현실을 모사할 때의 바로 그 명제”이다. 그렇기에 “논리학에서는 우리가 기호들의 도움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필연적 기호들의 본성이 스스로 말한다.” (TLP, 6.124) 달리 말해, ‘나는 생각한다(Ich denke)’가 명제 p에 언제나 수반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나’가 명제 p로부터 독립적으로 어떤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가상의 명제 q 역시 ‘나는 생각한다’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공허하다. 그래서 “A는 p를 생각한다”는 “‘p’는 p를 말한다”의 형식일 따름이다(TLP, 5.542 참조). [본문으로]
  18. “진실은, 사실을 바라보는 과학적 방식은 그것을 기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LE, p. 3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