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History of Analytic

Glock (1997) Kant and Wittgenstein: Philosophy, Necessity and Representation

Soyo_Kim 2020. 12. 18. 14:41

Hans-Johann Glock (1997) Kant and Wittgenstein: Philosophy, necessity and representation, International Journal of Philosophical Studies, 5(2), 285-305.

 

몇몇 작가들은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심오한 유비 관계를 발견하였다. [285] [...] 내 생각에, 이 논쟁은 매우 자주, 그다지 명쾌하지 않은 형태로 진행되었다. [...] 비트겐슈타인이 신-칸트주의 학자인지에 관한 질문이라면, 그 대답은 명백하게도 아니오이지만, 그 대답은 그다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는 않다. 논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나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연관 관계에 있어 네 가지 다른 측면들을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1) 실질적인 영향, (2) 방법론적 차원에서의 평행선, (3) 철학적 논리학에 관한 본질적 유사성, (4) 심리철학에 관한 본질적 유사성. 나는 (1)은 다루지 않으려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역사적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 그가 칸트주의적인 (실제로 신-칸트주의자는 아니지만)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와 헤르츠, 볼츠만에 친숙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수학의 지위와 같은 칸트적 문제는 그가 프레게와 러셀에게서 계승한 문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4) 역시 다루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 주제는 그 자체로 지나치게 장황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나는 (2)와 (3)에 집중하고자 한다. 첫 번째 파트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공유했던 철학에 관한 비판적 신념이, 그들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방식 혹은 표상하는 방식을 지시함으로써 필연적 명제의 선험적 지위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특히 형이상학에서의 그러한 명제들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임을 논증한다. 두 번째 절은 경험의 선제 조건을 상징적 표상의 선제조건으로 대체함으로써 논고가 어떻게 이 아이디어를 언어적으로 변형하는지 보여준다. 세 번째 절에서, 나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들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한편으로는 사고와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와의 동형성에 관한 관념에 연루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과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상징의 형이상학 모두 이러한 동형성을 왜곡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자율성 논제를 근거로 하여 상징주의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며, 4절에서는 이러한 아이디어와 진리 대응 이론에 반대하는 칸트의 후퇴 논증 사이의 평행선을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선험적 명제들이 개념적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옳은 반면에, 칸트의 경우, 그가 선험 종합 명제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명제 자체와 연관된 개념들을 분석하는 것을 칸트가 거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286]

 

I Critical Philosophy and the Reflective Turn

 

주체의 본성과 관련하여 칸트와 비트겐슈타인보다 그것을 더 천착한 이는 없다. 실제로 이러한 연관은 그들의 작업들의 핵심에 놓여 있다. 순수이성비판의 궁극적 물음은, 그것이 종종 그렇게 이해되는 것처럼, 인식론적 회의주의, 특히 외부 세계와 귀납추론과 연결된 회의주의의 여러 변형된 형태에 대항하여 (잘 알려진 뉴턴 물리학과 같은) 경험지식의 가능성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287]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인식론적 문제제기가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그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카르트적 광기나 해가 내일 뜰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흄적인 신경증 환자에 맞서 그의 주요 논증들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더 합리적인 회의주의에 맞서고 있는데, 이 회의주의는 실재의 본질에 관한 선험적 직관에 근거하는 형이상학적 지식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회의주의이다.

이러한 도전은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과학, 형이상학의 형이상학(Dreams of A Spirit-Seer/11368; Letter to Herz, 11 May 1781/X:269)을 필요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학리의 최종적 물음은, 다른 한편으로 순수 이성의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방법론적인 것이며, 즉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과학만큼 가능할 수 있는가?(B 22, A 758-69/B 786-97; Prolegomena §§5, 57, 59) .

유사하게, 대다수의 분석철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론적 관점을 당혹스러운 일탈 정도로 무시하고 언어철학과 심리철학에 관한 비트게슈타인의 기여들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주장하기로는,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구체적 결과가 아니라, 철학함의 새로운 방식, 우리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나 기술에 있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방법론에서 그들이 기여한 위치에 있어 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발전시킨 철학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특징들에서 연합되어 있다. 논고가 칸트에 의해 개시된 비판적 철학함의 전통 위에 서 있다는 것은 종종 주장되어져 왔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사실에 의해 지지된다. 첫째, 양자 모두 철학을 담론의 적법한 형식과- 자연과학의 논쟁적인 영역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는- 적법하지 않은 철학적 사변-칸트가 초재적인 혹은 독단적 형이상학이라 칭한,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단순하게 형이상학이라 칭한- 사이에 경계선을 그리는 전략으로 설정한다. 둘째, 양자 모두 철학을 지식을 확장시키는 원칙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대신에 형이상학의 과잉을 억제하고 비-철학적 사고-칸트에게 있어 그것들의 인식적 지위,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그것들의 논리적 구조-를 명료화하는 비판적 활동으로 간주한다(4.112, 6.53; A 11-12/B 25-6, A 735/B 763, 850-1/B 878-9; Dreams of a Spirit-Seer/ll: 368). 실제로, 칸트는 오늘날의 분석 철학자들의 나쁜 책으로 비트겐슈타인을 밀어 넣는 '체제전복적'인 방법론적 아이디어 대부분을 예상했다. [287]

그것의 시작 이래로 줄곧, 철학은 어떤 종류의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는 인지적인 학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과학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287]

플라톤주의자에게 있어, 철학은 경험적 실재를 기술하지 않는 ,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추상적인 존재자의 세계를 아프리오리한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게 있어, 형이상학(혹은 제1철학)은 특정한 대상들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묘사하지 않고, 다만 존재자로서의 존재자'being qua being' (Metaphysics W.I)를 다룸으로써 특별한 과학과는 차별화된다. 영국 경험론자들에게 있어, 급진적인 경험주의자들(밀, 콰인)이 철학, 수학, 논리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들이 경험적 증거를 기반으로 한 실재를 묘사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철학은 인간 마음의 과학이다. [287-288]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B xvii)은 내가 반성적 전회라고 부르는 것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합의에 도전한다. 

그것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 안에서, 비트겐슈타인 역시 공유하고 있는, 아이디어는 이렇다: 철학은 대상들의 서로 다른 종류들 혹은 실재의 더 일반적인 특징들을 기술함으로써 과학과 단지 양적으로 다른 학문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학문이다. 과학, 그리고 상식과는 다르게, 철학은 실재와 그것의 대상과는 관계하지 않고, 우리가 비-철학적인 담론 속에서 현실을 경험하고 표상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을 다룬다. 철학은 어떤 종류의 대상도, 심지어는 플라톤주의에 의해 상정된 추상적 존재자도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물질세계의 대상들에 관한 우리 앎, 경험, 혹은 묘사의 전제조건이나 본질적 특징들 반성하는 이차적 활동이다. 이러한 반성적 전회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단락은 B25이다.

 

I entitle transcendental all knowledge which is occupied not so much with objects as with the mode of our knowledge of objects in so far as this mode of knowledge is to be possible a priori, (see A 56/B 81)

 

몇몇의 논평자들은 이 단락과 철학적 탐구의 90절 사이에 직접적인 평행선을 발견하였다.

 

We feel as if we had to penetrate phenomena: our investigation, however, is not directed towards phenomena, but, as one might say, towards the 'possibilities' of phenomena. We remind ourselves, that is to say, of the kind of statement that we make about phenomena. Thus Augustine [in dealing with the question 'What is time?'] recalls to mind the different statements that are made about the duration, past present or future, of events. (These are, of course, not philosophical statements about time,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90, see §§383, 194) 

 

두 단락은 모두 철학이 현상의 배흐에 있는 본질을 발견하려고 하는 시도에서 우리가 비-철학적 담론 속에서 현상계(물질적 세계)를 표상하는 방식과 연관된 비판적 고찰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행은 제시된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288]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과학이 실제적 지식을 조사하는 반면에 철학이 논리적 가능성들의 고정된 질서를 조사해야 한다는 관념은 탐구보다는 논고에 더 들어맞는다. 이것이 왜 90절이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이 현상들의 가능성들을 조사해야 한다는 관념을 철학이 우리가 비-철학적 담론 속에서 만들어내는 진술들의 종류를 반성한다는 주장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이유이다. [289]

 

더 대단한 관심사는 B25에 대한 관점과 함께 요구된다. 이 단락에 따르면, 초월 철학은 경험과 관계맺지 않고, 혹은 일반적 지식과 관계맺지 않고, 오직 대상에 대한 선험 종합적인 지식과 관계맺는다. 따라서 초월 철학은 처음에 형이상학의 가능성의 접근에 관한 방법론적인 의미 속에서 단지 반성적으로 작동하며, 칸트에 따르면, 그러한 지식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 종합적 지식을 보이고,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초월 철학은 반성적 전회를 시행하며, 즉 경험적 대상-자연과학과 같이- 혹은 경험을 넘어선 대상 - 초재적인 형이상학과 같이- 에 관한 주장으로부터 경험적 대상의 경험의 가능성의 필연적 전제조건에 관한 주장들을 만들어 낸다. [289]

형이상학의 지위를 명료화하는 목적을 위해, 칸트는 두 가지 유명한 두 가지 이분법을 도입한다. 첫 번째는 감각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후험적인 지식과 경험 독립적인 선험적 지식을 대비시킴으로써, 그것의 기원을 간주하는 대신에, 그것의 타당성을 간주한다.(B 1-3). 두 번째는 분석적인 판단과 종합적인 판단 사이의 구분이다. 처음에, 칸트는 분석 판단을 술어가 주어의 개념을 내재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판단으로 규정하는 반면, 종합 판단은 술어가 주어-개념의 부분이 아니지만, 제 3자를 통해 연결되는 판단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설명이 악명 높게도 부적절하긴 하지만, 나는 후에 이 부분으로 다시 돌아오려 한다. 어떤 사건이든,  그것의 결함은 칸트의 두 번째 설명에 의해 피해질 수 있다: 분석 판단은 모순의 원리의 덕분에 단독적으로 참이다. 이는, 그것의 부정이 자기모순적임을 뜻한다. 종합판단이 그것들이 지시하는 대상들에 연구를 통해서만 검증되어야만 하는 반면에 분석판단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념들의 연구를 통해 단독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 (B 12, A 151-2/B 190-1, A 598/B 626; Prolegomena §2; following Kant, I confine the distinction to true judgments).

분석적 종류(형식 논리)의 선험적 판단들은 문제시되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것들의 참이 그것들을 구성하는 개념들의 상호연관 속에서 보증되기 때문이다. (B11). 따라서 종합 판단은 후험적(경험 과학)인데, 그 까닭은 주어와 술어의 연결이 주어-개념이 지시하는 대상의 경험에 의해 지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움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음'(A 9/B 12)은 그러나, 선험종합 판단에 있어, 대상의 참을 붙자고 있지만 동시에 경험 독립적이다. -대상과 접촉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see A 10-11/B 14-15, A 50/B 74, A 131/B 170;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W: 38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수학과 형이상학의 명제를 이 범주 안에 집어 넣는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289] 

 

보편적인 경험이 가능성의 조건은 경험의 대상의 가능성의 조건과 같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선험 종합 판단은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

 

이 유명한 단락은 비판의 방법론적인 최종물음-형이상학의 가능성-을 경험의 전제조건에 관한 인식론적인 연관과 연결 시킨다. 형이상학적 판단은 경험과 독립적으로(즉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의 참을 붙잡고 있다(즉,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경험하는 대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필연적인 전제조건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의 대상들을 경험하며, 인과법칙에 따른 주체의 질적 변화의 중심으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것들은 인간 본성에 관한 경험적 사실이 아니다. 대신에, 그것들은 동시에 경험의 대상이 무엇이여야만 하는지를 규정하는 경험의 필연적 특징들이다. 경험과 그것의 대상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경험의 내용은 우연적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경험의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특징들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경험의 대상들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특징들을 규정한다.

그 결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는 경험속에서 대상들이 주어지는 방식에 대한 이차적인 반성으로 전환된다. 칸트는 형이상학(보다 정확하게는, 형이상학적 일반성)이 존재자의 존재자 혹은, 그의 용어대로라면, 그것이 그러한 한에 있어서는 무엇이든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A 845/B 873).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이것은 경험의 개념으로부터 추상의 과정으로 이른다거나 경험적 사실의 일반화 등을 뜻이 아니다. 대신에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탐구는 대상의 본질적 특징들에 대한 연구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무엇이 대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로 이해된다. 이러한 대상의 본질적 특징들은 우리가 대상을 경험하거나 표상하는 본질적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형이상학은 대상을 다루지 않으며, 대신에 인식을 다룬다. 그것은 사물과 연계된 독단적 탐구로부터 가능한 지식의 한계에 관한 비판적 지식으로 전환된다(A 758/B 786; Reflections §4853, see §§3952, 4457). [290]

이에 따라 칸트의 비판철학 개념의 근거는 형이상학적이고 수학적인 명제의 고귀한 설명에 놓여 있다. 칸트는 급진적인 경험주의자의 관점-이러한 필연적 참이 실재의 가장 잘 스며든 특성들에 대한 잘 성립된 경험적 지식 속에서 용해된다는 입장-과 온화한 경험주의자의 관점-분석적 참은 오직 그것들의 구성된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290]

그러나 그는 또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추상적 존재자에 대한 진리를 인정하는 플라톤주의적 입장에도 저항한다  (see, respectively, B 3-4 and B 307ff., A 823/B 851, A 853-6/B 881-3; 'What is Orientation in Thinking?'/ VIII:143). 그의 대안은 그들이 경험하는 대상에 관한 필연적이거나 본질적인 선제 조건을 표현하는 것이다. [290-291]

 

II The Linguistic Turn and the 'Logic of Representation' in the Tractatus

오직 칸트에게서만 함축된 반성적 전회는 비트겐슈타인 안에서 중심적 단계를 차지하며, 급진적으로 전환된다. 부분적으로 헤르츠와 쇼펜하우에게서 영감받아, 그는 칸트의 문제 -어떻게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가를 어떻게 우리가 실재를 표상하고 묘사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실재를 표상을 가짐으로써 표상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대조적으로, 표상(Darstellung)은 정신적 함축보다는 논리적-언어학적이다. 우리는 모델(Bilder)을 구성함으로써 실재를 표상한다.

논고는 세계를 그리거나 표상하는 과학과 표상의 선제조건과 본성을 반성하는 철학 사이의 대조 속에서 칸트주의를 따르고 있다. 철학은 사고와 연관되며, 그것의 구조와 한계와 연관되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표상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재를 반영한다는 것이 사고 속에 있다. 상징들의 시퀸스는 그것이 사고의 표현일때만 세계를 옳거나 그르게 묘사하는 의미있는 명제이다. 동시에,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적 사유를 언어적으로 비튼다. 사고는 우리의 언어적 표현 뒤에 있는 엔티티가 아니다. 그것은 심리적 사건-데카르트와 영국 경험주의에 의해 가정된 정신주의의 전통-도 아니고, 추상적 존재자-플라톤주의자들이 심리주의에 반대해서 가정한(볼차노, 프레게, 무어) 것도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문장의 사용이며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명제적 상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거은 언어 속에서 완벽하게 표현될 수 있으며, 철학은 사고의 언어적 표현에 한계를 그음으로써 사고에 한계를 세울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한계는 언어 속에서 그어져야만 한다.

 

for in order to be able to draw the limits of thought, we should have to find both sides of the limit thinkable (i.e. we should have to be able to think what cannot be thought). It will therefore only be in language that the limit can be drawn, and what lies on the other side of the limit will simply be nonsense. (Preface)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현상들 혹은 경험의 대상의 가능성들)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사물 그 자체 그리고 모든 가능한 경험을 초월한 것들)로부터 경계를 긋는다. [291]

야코비로부터 브래들리에 이어지기 까지 이러한 입장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우리는 현상의 알 수 있는 것의 영역과 사물 그 자체의 알 수 없는 영역 사이에 후자의 지식을 미리 은밀하게 가정하지 않고서는 선을 그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동일한 문제를 진단한다.  'In so far as people believe that they can see the "limits of human understanding", they naturally also believe that they can see beyond these' (CV, p. 15). [291-292]

그는 이러한 문제를 앎의 한계로부터 사고의 한계로 전환함으로써, 그리고 후자를 의미있는 담론의 한계로서 간주함으로써 피해간다. 정의에 따르면, 사고의 한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은 사고가 아닐 것이며, 그러한 까닭에 의미 있게 표현될 수 없다. 'Thought can never be of anything illogical, since, if it were, we should have to think illogically' 그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논리는 사고의 필연적인 선제조건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고의 한계는 양쪽 측면을 말하는 명제에 의해서 그어질 수 없으며, 오직 안으로부터만 그어질 수 있다. 이것은 논리적 구문론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논리적 구문론이란 어떤 상징의 조합이 가능한 사태를 표상할 수 있는지, 그러한 까닭에 명제가 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기호규칙을 일컫는다.  이러한 경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예지체나 물자체가 아니라 오직 기호들의 무의미한 조합일 뿐이다.

칸트의 반성적 전회와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전회는 필연적 진리의 특유한 지위를 설명하는 것의 요구에서 일어난다. 그의 경우엔 논리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는. 칸트는 지식의 대상으로부터 추상된 일반적인 혹은 형식적인 논리학과 대상에 대한 사고의 전제조건을 탐구하는 초월 논리학을 구분한다. 형식 논리학은 분석적이고 선험적인 진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자는 선험 종합 명제적인 형이상학의 참을 설명한다. 논고는 대상에 관한 사고의 전제조건이라는 아이디어를 형식 논리의 분석적 진리로 확장하면서 선험 종합적 명제는 거부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형식 논리학은 칸트적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그것은 상징적 표상들의 가능성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전제조건을 구성하는 표상의 논리이다.

필연적 명제는 (심리적 논리학자들이 유지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고하는 방식에 관한 진술도, (러셀이 가지고 있던) 실재의 가장 만연한 특징에 대한 진술도 아니다. 또한 프라톤주의자인 프레게가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존재자에 관한 진술 역시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상징적 표상의 본질을 반영한다. 논리적 구문론은 참과 거짓에 관한 질문에 선행한다. 그것은 경험적 명제들에 의해 뒤집힐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의미있는 명제로 간주되는 것을 위배하는 어떤 경험명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연적 명제의 특수한 지위는 그들의 주장된 지시의 추상적 본성 때문이 아니다. - 논리적 상항 혹은 대상은 없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한 진술도 아니고, 상징의 규칙들을 반영한다. [292] 

이러한 연결고리의 본성은 필연적 명제의 유형에 따라 바뀐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명제는 무의미하다. 그것들은 논리적 구문론을 은밀하게 위배하거나(전통 형이상학), 논고에서 스스로 선언된 것처럼, 오직 보여질 수만 있는 것-실재를 묘사하는 규칙들에 의해 반영되어야만 하는 실재의 본질적 구조들-과 그러나 그 자신은 반영되지 스스로 묘사되지 않는 것이다. 논리적 명제들의 유일하게 묘사될 수 있는 필연성은 동어반복이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경험적 명제를 진리함수 적용의 규칙에 따라 구성하며,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실제적인 정보는 상쇄되기 때문이다. [292-293]

 

Ill Isomorphism, Transcendental Idealism and the Metaphysics of Symbolism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칸트와 전기 비트겐슈타인 모두 보편적인 필연적 명제들의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며, 특정한 철학적 명제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현실을 표상하는 전제조건들을 반성한다. 선험적 판단들은 대상이나 현실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은 우리가 일반적인 대상을 표상하는 방식을 반성한다. 그 까닭은 마음이나 언어가 이러한 대상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이해될 경우엔, 대상의 본질적 특성들-실재의 구조-가 우리가 대상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동형성 혹은 구조적 동일성의 논제와 연관된다. 사고(경험, 언어)가 한편에, 현실이 다른 한편에 서 있고 양자에는 동일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성은 필연적이거나 형식적인 측면에 배타적으로 연관된다. 칸트는 경험의 대상을 경험의 선제조건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실제 대상의 성질은 후험적이다. 그러나 그 성질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그러한 특징이 반드시 경험되기 위해 소유해야만 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만약 어떤 것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단독적으로 경험될 수 있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가능성의 조건들은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들과 같다.

논고에서, 더 명백한 동형론적 형식은 그림 이론의 핵심이다. 명제가 참이고 거짓이고의 여부는 사물이 어떻게 있는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기호들의 조합이 명제를 구성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경우, 그것은 참되든 그르든 간에 가능한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것으로, 논리적 구문론의 규칙에 따르는, 그러한 간으한 상황과 논리적 형식의 공유에 의해 구성된 것인지의 여부로부터 규정된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모두 필연적 명제들은 우리가 현실을 표상하는 방식(경험과 현실 혹은 언어와 현실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구조적 특징들)을 표현하거나 반영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넓은 몇몇 차원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 우리가 현실을 표상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은 그의 초월적 관념론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는 사물의 선험적 질서를 오직 우리 스스로 그것에 밀어 넣을 때에만 알 수 있다(B XVIII). 전통적인, 그리고 가장 단순한 해석은 이것을 발생적 주장으로 간주한다. 경험의 필연적인 전제조건들은 경험의 대상이 일치해야만 하는 특징들인데 그 까닭은 그것들이 감각(Empfindungen)-우리 경험의 물질적 구성체들- 과정 속의 절차 속에서 우리의 인지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것들은 외관상으로만 유지되며 우리의 인지적 기관에 촉발(affzieren)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의 원인이 되는 사물 그 자체에 적용되지는 않는다(see, e.g., A 19-20/B 34). [293-294]

비판의 어두운 측면으로서 스트로슨이 초월척 관념을 폄하한 유명한 비판에 반해, 최근의 논평자들은 인식론적으로 얌전한 형태의 관념론을 제안한다. 확실히, 초월적 관념론은 버틀리식의 경험적 관념론으로 융해되지는 않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외관의 물질적 구성요소들이 완전히 비-물질적이고 속성의 문제임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칸트는 초월적 관념론을 현상이 존재로 간주되는, 하나이자 모든 것인, 그저 표상에 불과한 독단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표상은 그리고 암시적인 현상에 의한 표상은 우리 마음의 내적인 수정이다. 그것은 만일 그것이 범주를 조건으로 한다면, 대상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A 197/B 242, see also A 320/B 376-7).

이것은 칸트가 로크의 표상주의의 모호한 버전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자, 강, 돌), 즉 현상이 알려질 수 없는 물자체의 한낱 표상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채택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심지어 초월적 관념론이 이러한 부담으로부터 면제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발생적 이론과 연결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가끔씩 초월적 심리학, 즉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그것의 본질적이거나 구조적인 특징들을 얻을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심리학이다. 비판이, 특히 1판이 이러한 발생적 논증과 연관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지점은 이 논증이 초월적 연역의 주관적 영역으로 제한될 수 있는가의 여부와, 초월적 관념론이 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이 자리에서 이러한 복잡한 질문들을 모두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칸트의 최종적 문제-즉 선험 종합판단을 설명하는 것의 관점에서, 초월적 관념론이 제안하는 답변을 보는 것은 어렵다. 마음에 부과된 구조라는 유전적 이야기외는 말이다. 그러나 발생적 논증은, 그것이 어떤 메리트나 결점을 가지고 있든 간에, 칸트의 최종적인 물음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은 칸트 자신의 우리가 어떻게 특정한 종류의 지식 혹은 경험을 얻는가(사실문제)의 문제와 지식의 논리적이고 인식론적인 지위는 무엇인가(권리문제)의 반발생적인 구분을 침해한다. 특정한 지식-주장 혹은 경험의 특징들을 가져다 쓰려고 준비가 된 요소들에 관한 진술은 발생적 과정의 결과로서의 기술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통각의 초월적 통일 - 나의 경험은 오직 내가 그것을 스스로 기술할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간주된 무언가라는 분석적 주장-은 그러한 통일이 어디서 왔는지, 즉, 어떻게 경험이 통일의 과정 속에서, 칸트에 따르면 자기-기술적인 것을 허용할 수 있는 지를 수반하지 않는다. [294-295]

초월적 심리학의 발생적 논증은 그래서,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종합적이어야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후험적이라면, 그것들은 경험 심리학, 로크가 제시한 인간 이해의 심리학과 같은 것으로 격하되지,초월철학과 같은 선험적 학문이 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초월적 관념론은 선험종합적인 명제로 스스로를 구성해야만 하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러한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순환 논증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선험종합적인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위한 독립적인 논증이 존재하지 않는이상, 초월적 심리학은 기껏해야 경험 심리학 이론으로 용해되며, 최악의 경우, 그저 동화에 불과한 것이 된다. 

칸트의 초월적 심리학은 심리주의의 주된 영감이 되었으며, 잘 알려진 Fries, Hamilton 그리고 Nelson에 등에 의해 19세기에 논리의 지배적 개념이 되었다. 심리주의에 따르면, 논리적 명제들은 인간 존재가 그들의 기초적인 심리 작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설명하는 사고의 법칙이다. 그것의 더 칸트주의적인 현시에서, 심리주의는 논리의 필연성을 이러한 법칙들이 우연적인 생물학적 구성체가 아니라, 사고의 본성에 의해 부가된 초월적 구성체임을 주장함으로써 논리의 필연성을 정당화하려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논고는 프레게의 반-심리주의를 계승하였다. 그것은 논리가, 즉 철학이 사고 과정과, 그것이 경험적 심리학에 의해 정당화되든 초월적 심리학에 정당화되든 간에,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열렬하게 거부한다. 그 결과, 그것은 법칙 데이터의 수입 밖에 있는 경험을 구성하는 초월적 심리 기계 안에 표상의 전제조건을 위치시키지 않고, 언어적 규칙의 체계 안에 위치시킨다. 이에 더해, 논고는 어떠한 종류의 발생적 설명도 피하려 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우리가 어떻게 상징들을 결합하냐를 규정하지 않고, 상징의 조합이 의미를 만들어내는가의 여부를 규정한다. 

위에 언급된 어려움들이 고려할 때, 그것은 초월적 심리학에 의해 특징지어진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발생적 설명을 그가 피하려고 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신용이다. 불운하게도, 그의 전기 입장은 그 자신이 나중에 상징의 신화라 부르는, 상징표상의 본질로 들어가는 본질직관이라 주장된 것에 얽혀 있다.  논고는 색인의 동어 반복을 제외하고는 모든 필연적인 명제들을 밀어넣는 경험적 명제들만이 오직 의미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칸트의 초월적 노동의 형이상학 수확물로 간주된 선험종합판단을 배제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유일하게 표현가능한 필연성은 동어반복인 논리적 필연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분석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선험종합 명제들이 외관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밝혀내는 단편적인 분석을 통해서도, 심지어는 명제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지에 관한 일반적인 탐구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없다. 대신에, 그것은 묘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라 불리는 것을 근거로 성립한다. 의미 있는 명제가 묘사하는 것은 가능한 사태들이며, 그것은 사태들이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그러나 또한 그것을 획득할 수 없는 현실의 본질의 부분들이다. [295-296]

논고가 경험적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논리적 구문론의 본질적 특징들에 관한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책이 스스로 무의미한 가상의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악명 높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결론을 책의 말미에서 받아들인다. 이러한 언급은 비판철학을 독단적 형이상학과 같이 옹호될 수 없는 지위에 놓지 않기를 꿈꾸었던 칸트와 날카롭게 대조된다. 동시에, 이것은 칸트의 입장이 헤겔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는 문제에 대한 영웅적 대답이다. 칸트는 경험적이고 수학적인 지식의 가능성과, 그리고 독단적 형이상학에 의해 찾아진 초재적 지식의 불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경계에 대한 그 자신의 초월적 통찰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 특히, 이러한 통찰이 경험적 지식의 한계에서 감각적 지식의 한계를 끌어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논고는 비판철학이 그 자신의 제한과 문제가 생기는 곳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자기반박적인 결과와 함께 한 걸음 더 비판적 입장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차이는 필연성의 원천과 관련된다. 논고에 있어 필연성이 논리적 구문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최종적인 원천은 객관적인 마음 혹은 언어의 구조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연성은 비록 그것이 형연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놓여 있다. 언어는 인식적 질서에 앞서 있지 본질적 질서에 앞서 있지 않다. 논리적 필연성의 본질은 명제 혹은 표상의 본질에 놓여 있으며, 그러나 이러한 것을 구체화하는 것은 세계의 본질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동형성의 개념에 따르면, 필연적 명제는 언어가 만일 현실을 묘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실과 반드시 공유해야만 하는 논리적 형식 -구조적 특징-을 반영한다. 그러나 논리적 구문론의 규칙들은 언어적 규약(논리실증주의가 나중에 고수했던)이 아니다. 논리는 세계의 거울 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비계[발판]을 묘사한다. 명제의 논리적 형식은 그것의 구성체인 이름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의 논리적 형식, 즉 결합의 가능성들, 단순 대상이 대리하는 것의 거울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자들은 세계의 실체를 구성한다. 그들의 경합의 가능성들은 어떤 사태(대상의 가능한 조합들)가 가능한지를 규정하고, 그러한 이유로 가능성들의 고정된 질서-현실의 형식 혹은 세계의 형식-를 구성한다. 표상은 표상(언어)의 무엇임과 표상되는 것(현실) 사이의 논리적-형이상학적 동형론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전자가 후자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칸트주의적 관점으로부터, 그리하여, 논고는 반성적 전회의 언어적 버전과 필연성의 원천에 관한 전-비판적 태도를 결합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논고는 표상의 오직 한가지 형식만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비록 그 이유는 다르지만 칸트에 동의하고 있다. 칸트에게 있어, 지성과 내적 직관의 형식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주관적임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현실을 그릴 수 있는 모든 상징-체계는 세계의 거울이 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논리이다.  [296-297]

 

IV The Autonomy of Language and Kant's 'Diallelus Argument'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논고의 언어적 전회를 급진화시킨다. 그는 철학적 탐구를 논리적인, 혹은 문법적인 탐구로 간주한다. 철학은 문법을 묘사하는 데, 그것은 우리 언어의 구성적 규칙들이며 문법은 표상의 형식 혹은 방법을 구성한다.

하나의 명제가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인 것은 문법에 속하지 않는다. 문법에 속하는 것은 현실과 명제를 비교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방법)이다. 이것은, 모든 이해 혹은 의미의 필연적 조건이다.

논리적 구문론과 마찬가지로, 문버은 어떤 상징의 조합이 의미를 가지는 지 규정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상징의 조합은 참의 후보자들로 간주 된다. 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경험적 반박을 조건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말한 것과 현실 사이의 일치에 선행하는 것에 의해 정당화된다.

동시에, 여기에는 초기 버전의 언어적 전회와 후기 버전의 언어적 전회 사이에 날카로운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비트겐슈타인과 칸트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해명한다.

그 한가지는,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형연할 수 없는 형이상학을 제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의미의 경계를 그리려는 시도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는 자기 반박적인 주장을 버린다. 언어적 규칙을 그가 문법적 명제들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완벽하게 적법하다. 이러한 문법적 명제들에는 "사자의 집합은 사자가 아니다" 혹은 "어떤 것도 동시에 붉은 색이면서 초록색일 수 없다"등이 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점은 이러한 명제들이 형이상학적 본질의 서술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어의 올바른 사용의 기준을 표현한다. 

다른 한편으로, 칸트와의 연계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경험적 담론의 전제조건이 존재론적 본질을 반영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문법은 우리의 표상의 형식을 구성한다. 그것은 현실의 표상으로 간주된 것을 규정하고, 그 자신 스스로는 철학적으로 연관된 방식으로 현실에 응답하지 않는다. 현실의 현상적 본질은 다름이 아니고 문법의 그림자이다 : 우리는 현실의 본질에 대한 필연적 진리로서의 문법의 위장된 규칙들을 오해한다. 실제로, 그는 우리의 개념적 도식, 표상의 형식에 대한 진짜 대안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칸트를 넘어선다. [297-298]

이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문법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증 중 하나는 칸트주의적인데, 그것은 단지 그 궤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심지어 각론에서조차 그러하다. 우리는 문법적 규칙들을 언어안에서 표현하지 않고서는 문법적 규칙들을 지지하느 사실들을 들먹일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문법적 규칙들을 정당화하는 것은 단지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떤 명제도 그 자체로 어떤 언어 안에서 표현되며, 그리하여 특정한 문법적 틀을 전제한다. 우리가 주어진 문법적 체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난 선-개념적 관점 혹은 비-언어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PR, pp. 54-5; PG, pp. 97, 114; LWL, p. 83).

이러한 논증에 깔려 있는 하나의 가정은 우리가 명제를 특정한 선-언어적인 것을 들먹임으로써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문법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다른 명제를 제시함으로써만 정당화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을 옹호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논고 안에서 정교하게 구축한 진리 대응이론을 거부한다. 사실은 공간과 시간 속에 자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것의 원본 옆에 모델을 세울 수 있는 방식으로 명제 다음에 자리될 수 있는 세계 안의 특정한 존재자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명제를 입증하는 사실들을 들먹이는 것은 선-언어적인 존재자를 산출하는 것이 아닌데, 그 까닭은 그것이 명제를 반복하는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The limit of language is shown by its being impossible to describe the fact which corresponds to ... a sentence, without simply repeating the sentence. (This has to do with the Kantian solution of the problem of philosophy).

 

이것은 실제로 논리학에서의 칸트의 후퇴논증과 이 언급 사이의 눈에 띄는 평행선을 보여준다.

 

진리는, 누군가 말하길, 대상과 인식과의 합치로부터 구성된다. 이러한 그저 명목상의 정의에 따른다면, 내 인식이 참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그것이 대상과 일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오직 나의 인식과 대상을 그것을 인식함으로써만 비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나의 인지는 스스로 확인하는 것을 가정하며, 그러나 그것은 참을 만족 시키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대상이 외부에 있고 인지가 내부에 있기 때문에,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대상에 대한 나의 인지가 대상의 인지에 일치하냐의 유무일 뿐이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다음과 같은 언급에 익숙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위대한 철학자들이 종종 다른 이들의 사고를 학자들이 그들에게 신용을 주는 경향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모두 진리 대응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뻔한 말인 "그것인 것에 대해 그것이라고 말하거나 그것이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진리이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이 없이 공격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름뿐인 정의가 다음과 같다고 인정한다. "p가 p와 필요충분조건일 때 그것은 참이다" 그러나, 진리대응론자에게 유용한 이득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응을 검증하기 위해 진리를 만들어내는 여분의 언어적 혹은 정신적 존재물(사실이나 대상)과 결부된 명제 혹은 인식을 비교할 수 있거나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존재치 않는다. 누군가는 q라는 명제를 지시함에 의해 p라는 명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 누군가는 또한 성공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카펫이 붉다라는 진술은, 이를테면, 카펫을 봄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p라는 명제를 p라는 사실이라 주장함으로써 그 명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얼빠진 일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사실인 명제의 투영도일 뿐이다. p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p가 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양자 모두 실제로 p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298-299]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이 점에서 옳다면, 진리의 개념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통찰도 제공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뻔한 말을 넘어, 칸트에 따르면, 진리의 일반적인 물리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진리의 유일한 형식적 기준은, 즉 지성을 위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규칙들과 일치하는 것은, 바로, 형식 논리의 규칙들이며, 그저 진리의 필수불가결한 부정적인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 뿐이다. 초월 논리학은 진리의 논리학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어떤 지식도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고는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모든 대상과의 연관 그리고 모든 참과의 연관이라는 것이다. 초월 논리학에 따르는 것은 판단이 참이라는 것을 보증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오직 진리의 운동 속에 있을 수만 있다. 여기에서 칸트가 진리라는 단어를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진리의 형이상학적 퍼즐은 표상의 선제조건에 대한 반성의 방식을 제공하며, 진리 혹은 거짓 모두의 대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의 선제조건에 대한 반성의 방식을 제공한다.

 

V The Synthetic A Priori and the Norms of Representation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선험종합 판단에 대한 전기 시절의 거부를 리뷰하고 있다. 그는 어떤 것도 붉은 색인 동시에 초록색일 수 없다. (혹은 붉은 초록색은 없다)와 같은 명제가 논고의 의미에서 분석적이지 않고도 논리적 필연성을 갖는다고, 다시 말해 진리함수조합의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필연성을 갖는다고 인식한다. 그 결과, 그는 그러한 명제들을 다음과 같이 부르기로 고려한다. 수학적 명제들과 같이 선험 종합적인 것으로. 어떤 차원에서, 이것은 술어 계산을 통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문법적 명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 상응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선험 종합명제에 대한 칸트의 관념이 심오한 통찰을 표현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수학과 형이상학의 명제는 그 현실의 경험을 전제하지 않고도 경험적 현실을 예측한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적 현실을 넘어서는 존재자들에 대한 진술이 있다는 플라톤주의의 관점과 말할 것이 없다는 실증주의의 관점 양자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299-300]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선험 종합판단에 대한 칸트의 관념을 거부하면서도 그의 문제의식을 받아 들인다. 필연적 명제들은 엄격하게 선험적인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그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니고, 그럼으로써 칸트적 의미에서 종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적 명제들은 가능한 사태들을 기술함으로써 말해지는 반면, 필연적 명제들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그들의 역할을 기술적이라기보다는 규범적이다. 그것들은 문법적 명제들(혹은 동어반복의 경우 문법적 명제들과 연결시킴으로써)의 기능을 한다. 이 명제들은 전형적으로 표상의 규범 혹은 문법적 규칙들을 표현하며, 경험과 연결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필연적 명제들의 외관상 미스터리한 단단함은 문법적 명제들-이를테면 어둠은 흰색보다 어둡다와 같은 문법적 명제들이 그것의 무해한 의미에서 경험에 앞선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그것은 추정적인 진술-이 하얀색 물체는 검은색 물체보다 어둡다와 같은 진술-에 의해 전복되지 않는데, 그 까닭은 후자가 기호들의 무의미한 조합이기 때문이다. 흰색 물체가 검은 색 물체보다 어둡다는 것이 논리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대상을 흰색인 동시에 검은 물체보다 어둡다라고 말할 수 없음을 함축한다. 우리의 규칙들을 고려해 볼 때, 하나의 그리고 같은 대상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사례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야 할 때라면 언제든지, 우리는 경험의 규범들을 사용한다. 논리적 연결은 언제나 문법 안에서의 연결이다. 

이러한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논쟁적인 설명에 대한 옹호는 내 글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이 글의 현재 목적은 그것이 논리적 필연성이 표상의 형식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아이디어를 보존하고 있으며, 그것도 마음의 초월적 구조에 대한 주장에 전념함이 없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의미의 경계는 선험종합적인 원칙에 의해 그어지지 않으며, 대신 언어 놀이 속에서의 특정한 활동을 제외하는 언어적 규칙에 의해 그어진다. 이러한 규칙들은 더 이상 칸트가 분석적으로 간주한 진술들에 비해 미스테리하지 않다. 실제로, 말들의 캐슬링과 같은 진술보다 미스테리한 진술은 없다. 이에 따라, 모든 논리적 필연성은 분석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념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어적이며,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단어들의 의미 있는 고용으로 다루는 것들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가 사물의 선험적 질서에 대해 알 수 잇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사물에 부과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칸트의 발생적 설명이었다) 단지 사물의 개념에 우리가 부과한 것이거나, 혹은 경험의 대상에 우리가 부과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칸트의 초월적 증거에 대한 이론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예측하고 있다(A 155-7/B194-6, A 184/B227-8, A 216-7/B 263^, A 221-2/B 269, A 238-9/B 298, A 259/B 315, A 719-37/B 747-65, A 782-3, B 810-1). 어떤 종합적인 판단이든 간에 세번째 것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이것은 주어와 술어의 종합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선험 판단들의 경우에, 그것은 경험적 직관이다. 수학적 명제의 경우에, 그것은 순수 직관이다. 형이상학의 명제의 경우엔 그러나, 그것은 개념, 즉 경험의 가능성의 개념들이거나 가능한 경험의 개념들이다. [300-301]

이러한 아이디어가 발생적 주장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것은 심지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의 빈틈을 채우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문법적 명제들-현실의 본질에 대한 기술처럼 보이는, 그러나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명제들-을 위장한다는 것을 고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과성의 원칙-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는 칸트가 생각하듯이 선험종합적인 진리가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부분적으로 우리가 사건으로 뜻하고자하는 것을 규정하는 문법적 규칙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칸트가 규제적 원칙이라 불렀던, 언제나 사건의 원인으로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심지어 이치에 맞는 대리자가 시야에 없을지라도, 고전역학의 표상들의 규범들에 의해 옹호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느날 천장에서 공룡의 발자국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지 않고 "그것들 중의 하나야"라고 말할지 모른다. 대신에,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믿기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찾고자 한다.

불운하게도, 간단한 해석은, "모든사건이 원인을 갖는다"라는 명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처가 우리의 문법이 단순히 무의미한 표현들인 "원인이 없는 사건"을 제외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다. 우리가 발자국의 설명을 위한 어떤 연구를 포기할만한 이유를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를테면 자연법칙이 그것을 산출해내기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는 까닭에. 양자역학의 예시는 어떤 수준의 가능성에서도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이 경우에조차도, 우리는 발자국의 외관을 사건이라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물리적 변화는 사건인데, 그것은 심지어 제외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인과적 설명일지라도 그러하다. 결과적으로, 원인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건이라는 용어에 대한 우리의 설명의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적 규칙들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건이 원인을 갖는다"라는 것이 분석적임을 거부하는 칸트의 주장은 옳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그것의 지위는 사건 개념에 대한 단순한 지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칸트의 거부는 옳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럴싸하게도,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가 선험적 지위를 갖는 이유는 오직 우리의 개념적 도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것의 구성적 규칙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칸트 역시 그럴싸하게도, 사건의 개념이 단순한 방식으로 명백해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진퇴양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은 사건 개념과 인과성의 개념 사이의 연관이 세 번째 개념에 의해 제공된다는 아이디어 속에 놓여 있다. 이 아이디어란, 판단 속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즉, 경험의 개념이다. 사건은 랜덤하고 카오틱한 변화가 사건에 자격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카오틱한 사건이 자기-의식 경험의 가능한 대상들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다. 스트로슨의 기억할만한 구절인, 그것들은 "우리가 지성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떠한 경험의 개념"의 부분도 형성하지 못한다. [301-302]

이러한 주장이 실제로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의 경우 속에서 지속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악명높게도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 사례로부터 독립적으로, 만약 나의 논증이 옳다면,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비교는 철학적 역사기록학이나 분류학의 목적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칸트를 가르칠 수 있는데, 이 가르침이란 경험의 전제조건이 신경생리학적인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논리적 의미에서 개념적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데, 중요한 개념적 연관은 경험의 개념 혹은 더 일반적으로, 우리의 인식론적 개념들의 전체 연관을 통해 관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