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History of Analytic

Hacker (2013) Kant and Wittgenstein: The Matter of Transcendental Arguments

Soyo_Kim 2021. 1. 4. 14:31

P. M. S. Hacker, "Kant and Wittgenstein: The Matter of Transcendental Arguments". in: Wittgenstein: Comparisons and Contex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pp. 31-53.

 

1. Wittgenstein and Kant

 논고와 탐구 양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광의적 의미의 칸트적 정신 아래 초월적 논증의 형태에 이르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가설이 종종 제기되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만약 언어의 수단에 의한 표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순 대상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논증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만약 명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실(사태들의 획득 혹은 비-획득)이 가능해야만 하지 않은가? 양자는 논리와 언어-혹은 사고(이성)과 표상함)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이지 않은가? 유사하게,  탐구에서, 그는 언어 발화자의 공동채가 언어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존재해야만 한다고 논증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경험의 다른 주체들이 경험의 자기-귀속의 가능성의 조건이어야만 한다고 논증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초월적 논증이 아닌가? 그것은 초월적 논증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 기반하고 있고;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논증했던 것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본다.

이 챕터에서, 나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에 관한 도식적 전망을 제공하려 한다. 여기에서는 중요한 유사성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초월적 논증'이라는 용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는 어떤 초월적 논증도 없다고 논증하고자 한다. 우리가 그 용어를 느슨하게 받아들인다면, 즉 어느 정도의 의미로는 칸트에게 있어서 불쾌한 방식으로 받아 들인다면, 누군가는 논고의 성격묘사의 한 사례를 초월적 논증을 이용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례는 탐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의 작업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칸트의 사유에 대한 그의 태도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세목을 대강 그려보고자 한다. 논고 이전의 노트북에서, 칸트는 한번 언급된다(NB 19.10.14): 동어 반복의 이론은,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하기로, "순수 수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칸트의 물음에 빛을 던져 준다 [31-32]. 논고의 6.36111에서, 오른 손과 왼손의 부적합 모순에 관한 칸트의 문제가 논의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친구인 루트비히 핸젤과 함께 카시노에 있는 포로 수용소에서 1919년 순수 이성비판을 읽었다. 내가 아는 한으로, 그들이 같이 그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얼마나 그것을 읽었는지에 관한 정보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이후의 유고에서, 칸트는 두 번 언급된다. 한번은, 그가 언어의 한계는 어떤 문장에 대응하는(그것의 번역인) 사실을 바로 그 문장을 반복하지 않고는 기술하기가 불가능함에서 드러난다라는 문장을 쓸 때이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철학의 문제에 대한 칸트적 해결과 관계를 맺는다고 쓴다(TS 211, 173). MS 107, 183(=BT 672)에서 그는 언급하기를, "내가 여기에서 말한 것이 칸트가 5+7=12가 분석적이 아닌 선험종합적 명제라 말할 때 의미한 바와 같지 않은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TS 209, 45에서, 그는 이것을 보다 자세히 말하고 있다. "방정식이 동어반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칸트가 수학의 명제들이 분석적이 아니라 선험종합적이라 주장함으로써 뜻했던 바를 설명해준다." 그의 학생의 노트와 회상록 속에서, 나는 칸트에 대한 몇몇 언급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Desmond Lee에 의해 쓰여진 철학의 방법론에 대한 Broad의 분류이다. Broad는 초월적 비판의 방법은 칸트의 것이며, 그러나 칸트가 그것에 대해 특별히 응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열정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올바른 종류의 접근이다. 흄, 데카르트,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은 "Cogito ergo sum"과 같은 하나의 명제에서 시작하였고,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연역해나갔다. 칸트는 이러한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였으며, 우리가 알 수 있다고 가정한 것에 대한 타당성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LWL 73).

이러한 대대적 조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빈약하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미친 어떤 중요한 칸트적 영향도 제시하지 않으며, 심지어 어떤 칸트적 영감의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 1931년, 그는 그에게 영향을 준 철학자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리스트를 작성한다(MS 154, 16r). [32-33] 쇼펜하우어가 언급되고 있기는 하나(명백히도 논고의 5.6-s와 6.4-s를 염두에 둔다면), 칸트는 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도 쇼펜하우어를 통한 "칸트주의의 영향"은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측면의 일부 사이엔 강력한 친연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전기와 후기 비트겐슈타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이러한 친연성이] 반드시 영향의 징조라고 생각될 이유는 없다-아마 그저 철학의 정글을 뚫고 나아가는 길의 부분적인 수렴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렴점은 분명 흥미로우며, 상세히 설명될 가치가 있다.

1. 메타-철학 : 주체의 역사 속에서 다른 어떤 철학자들도 철학 그 자신의 지위와 본성에 관해서 그토록 사로잡힌 적이, 그리고 그토록 유익하게 사로잡힌 적이 없다. 양자 모두 철학이(혹은, 칸트의 말에 따르면, "순수 철학") 자연 과학 혹은 수학적 과학과 연속성이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양자 모두 그것이 이차적 활동이며, 반성적 학문이라고 논증한다.

2. 변증법 : 주체의 역사에서 다른 어떤 철학자들도 이성의 변증법-개념적 환상의 논리-이라는 개념에 그토록 사로잡힌 적이 없다. 양자 모두 철학적 오류로 빠지게 되는 더 혹은 덜 체계적인 패턴이 있다는 데 동의하며, 개념적 혼란의 원천에 대한 명료화에 으뜸가는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에 더해, 양자 모두 이러한 명료화를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 철학적 논쟁들에 깔려 있는 물어지지 않은 가정들을 확인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3. 감각[의미]의 경계 : 양자 모두 감각[의미]의 경계를 성격묘사하는 것과 중요한 연관을 맺는다. 칸트는 선험적 개념들의 연역(그것의 원천을 언급함으로써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을 통해 이러한 일을 수행하려 분투하며, 이 연역은 판단 속에서의 그것들의 사용의 선험적 조건을 탐구하고, 가능한 경험에 대한 그것들의 지성적 적용의 [범위를] 한계 짓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길을, 즉, 언어의 의미 있는 사용의 조건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4.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 두 철학자 모두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전통에 대한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양자모두 데카르트나 로크와 같은 종류의 토대주의 인식론을 거부한다-사물이 어떻게 세계 속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가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사물이 어떻게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보이는가로부터 추론된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데카르트 주의만큼이나 마음에 대한 흄의 개념들을 거부한다-마음은 비물질적인 실체도, 인식의 번들도 아니다.

5. 필연성의 본성 : 양자 모두 필연성의 본성을 명료화하는 데 사로잡혀 있었다. 양자 모두 경험으로부터 발견될 수 있는 후험적인 데 레 필연성을 거부한다. 칸트는 논리학의 필연적 참이 '완전히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의 동어반복이 '뜻이 없다'(i.e. have 'zero sense')를 갖는다고 논증한다. (이 단락의 senseless는 sinnlos를 뜻한다.) (p. 33) 양자 모두 수학과 기하학의 필연적 명제가 분석적이라는 것을 거부하며, 순수 수학은 개념-구성물이라는 데 동의한다(pp. 33-34). 보다 일반적으로, 양자 모두 비-논리적 필연성의 뿌리를 우리 안에 둔다.-비록 다른 이유와 매우 다른 의미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6. 이성적 신학 : 두 철학자 모두 이성적 신학을 반대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다른 수렴점들 역시 발견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정도가 충분할 것이다. 위에 제시된 것들은 강력하면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략적으로 연구될 때, 수렴점의 의미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변한다. 먼저, 부정적인, 비판적 합의가 구성적 동의에 의해 일치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세계-상, 즉 철학적 세계관Weltanschauung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사고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려 준다.

불일치의 가장 근본적인 원천은 칸트의 영감의 가장 깊은 뿌리에 달려 있다. 순수 이성 비판의 근본 기획은 : "선험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B 19)이다. 그리고 이것은, 즉 수학의 선험 종합적인 참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한쪽으로 치워 놓는다면, "자연과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성립할 수 있는가?(B22)로 해설된다. 이러한 물음을 해소하는 그의 비판적인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모든 이전의 형이상학의 체계들은, 그가 생각하기에, 모든 우리의 지식이 반드시 대상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를테면, 실체는 시간을 초월해 지속해야만 하며, 대상은 상호 간의 인과 관계 속에서 대신되어야만 하거나, 모든 사건은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칸트는 이러한 연구가 뒤집어 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자연이, 그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한, 우리의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구조의 조건들에-그리고 직관의 선험적 형식과 지성의 선험적 범주들에 순응해야만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의 급진적 결론은 지식이 가능한 경험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우리가 경험하는 대로의 세계)에 관한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진리를 알 수 있으나, 우리는 신의 실존에 관한 지식,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지식, 혹은 사물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를 수 없다. 자연의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명제는 가능한데, 칸트의 생각으로 그 까닭은 마음이 자연에 가능한 경험의 조건으로서의 구조적 원칙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선험적 지식 안에 있는 어느 것도 사고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끄집어 낸 것 이외에는 대상의 결과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는 사물의 선험적인 것에 관해서는 오직 우리가 우리 스스로 사물에 부과한 것만을 알 수 있다."[34-35]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가능하다.

"우리가 선험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들, 상상력의 종합 및 초월적 통각에서의 저 종합의 필연적 통일을 가능한 경험 인식과 관련시키고,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며, 그렇기에 한 선험적 종합 판단에서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말한다면 말이다." (백종현 역, p. 393)

마음은 자연의 발판을 만들어낸다. 이 발판에 위에서  현상이 인식된다. 이러한 발판은 형이상학의 선험 종합 명제에 의해 기술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판 덕분에 자연의 경험적 지식이 가능하다. 

그가 '선험적a priori'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에 철학으로 복귀한 후에, 철학적 전통 안의 [그 단어]의 사용이 가장 깊은 오해 속에서 분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1931년):

그것이 아닌 곳에서 선험적인 것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과거의 문화적 시기의 이론가들의 성격묘사이다. 혹은 나는 과거의 문화적 시기의 성격묘사가 선험적인 것에 대한 형식/창조/개념/혹은 비-개념이라고 말해야 할까. 만일 그 시작에서부터 우리가 그러하듯이 그것이 사물로//상황으로// 보였다면, 그러한 개념은 창조되지 않았으리라. (그 경우 세계는 위대한 것을 상실할 것이다. 내가 뜻하는 바는 중요한-오류를.) 그러나 실제로 누군가는 이 개념이 여러 문화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방식으로 논증하지 않을 수 있다 (MS 183, 81).

이것은 가지를 내는 함축들을 포함하는 중요한 관찰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실제로 '선험적'이란 용어를 그의 후기 철학에서 사용하지만, 선험적 지식에 관한 칸트적 개념과 그가 사용하는 표현 사이에는 분명한 격차가 있다. 그가 수학의 명제들과 논리학의 명제들이 선험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논리의 명제들이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산수arithmetic의 명제들이 분석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는 분명히 '어떤 것도 초록인 동시에 붉은 색일 수는 없다' 혹은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와 같은 선험적 종합 명제들을 선험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분석적이지 않은) 선험적 명제들 중의 하나가 사물이 자연 속에서 필연적으로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묘사의 참을 아는 것으로(knowing the truth of a description) 성격묘사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러한 명제들은 세계의 발판에 관한 선험적인 묘사descriptions가 아니다. 대신에, 그것들은 묘사의 규범들norms of description이다. 세계는 발판을 갖지 않는다-원본적인(전통적인 형이상학) 발판은 물론이고, 구성되고 부과된(칸트적인 경험의 형이상학) 발판도 갖지 않는다. 그러한 (분명한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명제들은 우리가 묘사하는 세계로부터from which we describe the world 발판을 구성한다constitute. [35]

따라서 그러한 지식은 표상의 규칙들에 관한 지식이다. 빨강색이 핑크색보다 어둡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예를 들어, 정확하게는 어떤 것이든 만약 붉은 색이라면, 그것을 보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그것이 어떤 핑크색보다도 어둡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선험 종합 명제들, 즉 자연에 관한 분명하게 필연적인 진리들은 묘사를 가장한 추론규칙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관련된 색 술어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구성하는 추론 규칙이다. 결과적으로 칸트의 질문인 "어떻게 자연의 선험 종합명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손 안에서 바스라진다. 칸트는, 분명하게도 논증하였듯이,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정확하게 사물들이 어떻게 필연적인가를 기술한다고 잘못 생각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자연의 필연성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리고 칸트가 지성이 자연을 구성하기 위하여 직관에 부과한 선험적 원칙들에 대해 논증한 것은, 우리 언어의 문법에 의하여 자연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를 밑에서 후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착수한다. 논고에 나타난 그의 전기 철학에 대한 반응 속에서, 그는 '탐구는 전환되어야만 하고, 그러나 우리의 실제 요구를 중심으로 회전해야만 한다'(PL 108)고 선언한다. 우리는 숭고한 것으로부터 일상적인 것으로, 본질직관Wesenschau으로부터 문법으로, 세계의 본질로부터 '언어적 사실들의 조용한 칭량'(Z 447)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논리의 미적분학은 세계의 선험적 질서의 거울상이 아니며*, 인간 언어의 표면적 문법 뒤에 숨어 있는 것 역시 없다; 그것은 특정 종류의 추론의 연역적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에게 부과되는 격자이다. 그것은 재-현의 형식이다.(It is a form of re-presentation). 비트겐슈타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효하게 이해되었던, 그리고 논고에서 유효하지 않게 가졌던 세계에 대한 선험적 지식의 여러 관념을 거절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36-37].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그러한 질서가 있다고 생각하였는가? 어쨌든, 5.634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물의 선험적 질서는 없다". 이 언급은 문맥으로부터 동떨어져서 이해될 경우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의 문맥 아래에서, 그것은 5.63을 윤색한 것[5.63의 각주로서]으로, "나는 나의 세계이다"의 [각주이다]. 그의 경험 아래에서 어떠한 주체도 맞닥드릴 수 없다는 사실(흄에 의해 주장된 것처럼)은 "경험의 어떤 부분도 동시에 선험적이지 않다"와 연관되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세계 속에서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필자가 보기에, 그러한 것들은 우연적이라는 뜻). 그래서 선험적으로 참인 그림은 없다(TLP 2.225). 그러나 현실의 논리적 형식, 즉 세계에서 묘사될 수 없는 것, 그러나 경험 세계의 참 이면서 거짓인 묘사들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은, 당연히도, 선험적이다. [p. 36. 4번 각주]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형연할 수 없는 진리들이 언어의 잘-형식화된 문장에 의해 보여지는 사물의 본질적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잘-형식화된 문장들은 사고(이성)와 상징적 표상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대조적으로, 사물의 형이상학적 질서로 드러나는 것은 -유효하든 유효하지 않든-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사물의 형이상학적 질서는 없다. 선험적인 것은, 그는 말하길, 그것의 비구름과 함께 제거되어야 한다(MS 157b, 3v).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알려 주는 필연성들을 철석같이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선험적 명제들이 묘사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실제로는 표상의 규범들의 표현이다. 선험적인 것은 또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를테면,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정신이나, 시간-여행처럼. 그러나 논리적-형이상학적 불가능성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가능성들이 아니다. 선험적인 명제들이 배제하는 것은 가능성들이 아니다; 그것들이 배제하는 것은 비지성적인 불가능성들 역시 아니다. 그것들은 단어들의 형식들과 규칙의 형식들을 배제한다. 단어의 형식들은 무의미로 배제된다. 규칙의 형식들(이를테면, 'x는 하얀색이다' 그리고 'y는 검은색이다'로부터, 'x는 y보다 어둡다'가 규칙으로서 따라나오는 것)은 모순으로 배제된다. 

 

2. Kant's presuppositions seen from Wittgenstein's viewpoint.

데카르트주의와 경험주의 전통에 대한 심오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그것의 틀(framework)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나는 전통이 그의 사유에 영향을 미친 네 가지 핵심적인(salient) 관점들을 골랐다.

(1) 선험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철학적 작업은 지각 경험에 의해 획득된 경험적 지식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을 묘사함으로써 구성된다. 따라서 이 작업은 두 부분의 인식론적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인식론의 방법론적인 으뜸업무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선험 종합 명제들이 묘사의 규범들과는 반대되는 자연의 선험적 법칙들(경험의 대상으로서 사물의 법칙에 대한 필연적인 순응)에 대한 명제들로 생각되는 한에서, 인식론적 방향성은 도전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도전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의 틀과 함께, 칸트의 독창성은 전자의(형이상학의) 지식의 가능성을 후자의(경험의) 지식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을 언급함으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데에 있다. [37]

(2) 그의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 속에서 칸트의 방법론은 추상적이고 비인간적이며impersonally 자기중심적egocentric임에도 불구하고 확고부동하다. 선험 종합적인 명제들에 관한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설명은 결국 통각(초월적인 자아-의식)의 초월적 통일의 요구에 의존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되어야만 한다. 오직 이 조건 아래에서만 직관에 주어진 잡다가 종합되고, 경험과 그것의 대상을 구성하기 위해 개념 아래로 [종합된 잡다를] 가져올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경험적인 자기-의식의 분석에 대한 접근(칸트가 그 용어를 이해한 바대로) 자기중심적이다. 우리는 그가 '그의 경험의 의식'이라고 타인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 자신을 정당화한 상태 아래에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분명히 그에게 있어 사물은 이러저러한 식으로 보인다. 우리는 또한 그가 사물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타인의 주장 속 우리를 정당화하는 조건들 아래에서 우리 자신을 탐구할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경험의 주체가 그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가능한 경험에 의해 충족되어야만 하는 조건들을 밝혀야 한다. 

(3) '초월적 연역'의 핵심부에 놓여 있는 의식의 관념The conception of consciousness, 그리고 칸트의 초월적 논증의 중심이 되는 이 개념은, 의식에 관한 데카르트와 로크의 관념의 후손이며,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통각의 관념을 이어받고 변형시킨 것이다. 물론 칸트의 관념은 그의 선배들의 결점으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는다: 초월적 통각은 한 사람의 지각을 인지perceiving하는 문제가 아니며(로크가 제시하였듯이), 오히려 그것을 그 자신의 것으로 가질[상상할]conceive 수 있는 능력에 관한 문제, 하나의 지속적인(추상하여) 경험의 주체에 속하는 것으로서그것을 의식할conscious 수 있는 능력에 관한 문제이다. Jäsche의 논리학Logic에서(그는 칸트의 강의록을 받아 적었던 학생이고 이 강의록은 1800년에 출판되었다), 칸트는 의식을 '모든 일반적인 인지의 보편적 조건'으로 특징짓는다. 그는 계속하여, 그것은 '실제로 다른 표상이 나의 속에 있다는 표상이다'라고 말한다(JL p. 33). 개념에 대한 그의 작업 속에는 지속적인 얼버무림이 나타나며, 그의 사고 속에는 여전히 불명확함이 남아 있다. 이 얼버무림은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의식은 경험의 보편적 형식('보편적 조건')으로 말해져야 한다. [38-39] 다른 한편으로, 의식은 경험에 수반 가능한 것으로 말해져야 한다-'"나는 생각한다"는 모든 나의 표상에 수반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애매성,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은, 데카르트의 저작에 나타난 철학적 의식 개념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얼버무림은 두 가지 체계적인 불명료함을 일으킨다. 먼저, 초월적 자기-의식과 경험적 자기-의식(마음 속에서 흐르는 것에 관한 지식으로 간주되는) 사이의 관계에 관한 불명료성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둘째로, 경험적 자기-의식과 의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불명료성이 남아 있다. 

여기가, 경험적이고 초월적인 자기-의식 때문에, 칸트의 논증의 아킬레스건이 되는 지점이다. 칸트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텐데, 모든 나의 표상들에 수반될 수 있어야만 하는 '나는 생각한다'와 모든 나의 표상들에 수반될 수 있어야만 하는 '나는 말할 수 있다' 사이에서 허구적인fictitious 혼동을 겪고 있다. 우리 자신과 같이 분별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생명체의 독특한 점은 우리가 '우리의 표상들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다(혹은 가질 수 있다)가 아니라(칸트가 가정하였듯이), 우리가 사물이 어떻게 우리와 있는지를 말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지각들, 감정들, 그리고 욕구들에 언어적 표현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경험적 의식과 경험적 자기-의식(사물들이 어떻게 한 사람의 자아와 함께 있는지에 관한 의식)을 융합하였고, 결과적으로 양자의 왜곡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내가 가지고 있음'과 허구적인 '내가 알고 있음', 즉 주관적 경험의 의식 혹은 지식과 함께하는 경험의 자기-신빈성을 혼동하였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연구는 또 다른 경우에 대한 과제이다.

(4) 칸트는 데카르트주의와 경험주의 사유와의 조화 속에서, 의식에 관한 다른 주체의 지식은 우리 자신의 주관적 경험의 자기-의식 지식에 관한 지식을 상정한다고 주장한다. [39] 우리의 의식에 관한 지식과 타인들의 의식에 관한 양상은, 우리 자신의 사례로부터 나온 유비적인 논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고수한다. [39-40] 

나는 외부적 경험을 통해서는 사고하는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표상도 가질 수 없고, 오직 자기-의식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대상들[다른 사고하는 존재자들]은 이러한 나의 자기 의식을 다른 사물로 이전한 것 외에 그 무엇이 될 수 없으며, 이러한 사물들은 오직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사고하는 존재자로서 표상될 수 있다. A 347/ B 405

칸트가 이러한 입장으로 달려가는 까닭은, 그가 경험의 개념이 행위와의 어떤 연관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숙달될 수 있고 그러해야만 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이의 경험으로서 나의 것이 아닌 감각적 경험을 사고하는 것에 앞서서, 그리고 독립적으로 감각적 경험을 나의 것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떻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통찰과 논증일 이 모든 것과 연관시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제시된 네 가지 칸트주의적 약속과 연관된 비교적인 개요를 시작하고자 한다.

(1) 분명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로서의 그의 커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데카르트의 방법론적인 인식론의 제 일원리를 거부하고 있다. 필연성의 본성과 필연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추정되는 지식에 관한 그의 설명들은 결코 지식의 조건들의 슥듭을 언급함으로써 주어지지 않는다. 논고에서, 그는 논리적 필연성의 본성을 분명한 문장과 그것의 진리-함수 조합의 가능성들의 본질적 본성을 언급함으로써 설명한다. 모든 논리적 진리들이 뜻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같은 것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적 진리들에 대한 지식은 사물들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있는가를 아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비트겐슈타인은 물론이고 칸트 역시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는 수학적 방정식들이 의미를 가진 명제들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실제로, 논리의 명제들과 달리, 그것들을 잘-형식화된 문장들조차 아니다. 그것들은, 그는 이어서 주장하는데, 가짜-명제들pseudo-propositions이다(TLP 6.2). 그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본성을 표현들의(변수에 의해 보여지는) 범주들에 관한 형식적인 특성들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필연성은 어떤 의미를 지닌 문장을 통해서도 묘사될 수 없다. 대신에, 그것들은 이러한 범주적 변수들의 값의 지정들을 포함하는 잘-형성된 경험적 명제들에 의해 보인다. 따라서 논고에서 발전된 진리들을 아는 것은(여기에 제시된 사고의 진리성, TLP, Preface) 언어 속에 표현될 수 있는 명제적 지식을 소유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논리적 관점'에 이르는 문제이며, '세계를 바로 보는 것'(TLP 4.1213, 6.54)의 문제이며, 말할 수는 없지만 보일 수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의 문제이다. [40]

1930년대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착수한다. 그는 수학mathematics에 대한 전기 시절의 주장을 발전시키고 수정하였다. 그는 이어서 산수arithmetic의 필연적 명제들이 수의 영역에 대한 기술들discriptions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에, 산수는 수의 문법이다. 산수의 명제들은, 그것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사물들이 어떻게 있는가에 대한 양적인 기술들의 변형을 위한 처방전들(규칙들)이다. 기하학의 명제들은 공간이나 (우리가 그 속에서 현상들을 인식하는) 현상적 공간에 대한 기술들이 아니라, 공간적 관계의 기술을 위한 문법들이다. 대안적인 기하학은 대안적인 문법들이다. 논리의 명제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기에, 추론 규칙들과 연관되어 있는 뜻이 없는 명제들이며, 부분적으로 논리 연산자의 의미들을 구성한다. 논리의 명제가 참임을 아는 것은 사물이 어떻게 있는가에 대해 아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한 명제를 아는 것은 논리의 명제가 추론의 규칙임을 아는 것이다(LFM 277). 그는 형이상학적 데 레 필연성을, 그것이 유효하든 유효하지 않든 거부하며, 대신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연관된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진리들로 나타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실제로 기술들을 가장한 표상의 규칙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필연적 명제들에 관한 탐구를 위한 적절한 질문 인식론적 물음이 아니다. 그러한 물음들은 선험 종합적 필연성의 '원천'관 관계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러한 질문들은, 첫째: 그러한 명제들이 필연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그것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명제들은 어떤 쓰임이 있는가? 

(2) 칸트와 달리, 실제로 데카르트 주의와 경험주의적 전통들 전체와도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경험과 그것의 양태에 관한 개념적 명료화에 자기중심적 접근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경험상의 술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자기-귀속의 가능성이 본질적으로 행동적 기준에 구속되어 있는 그것의 3인칭 귀속의 숙달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3) 비트겐슈타인은 암암리에 필연적 의식에 대한 데카르트주의적 개념인 생각cogitationes(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무언가로서의 '생각')을 거부하며, 초월적 통각이라는 칸트주의적 개념 역시 거부한다. 이것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41-42]

데카르트는 '그것은 내가 이러저러하게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에게 보인다'로서 사고를 구성하는 지각의 형식을 상상했다(*현상적 지식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함). 그러한 사고는 의심될 수도 없고 오류를 일으킬 수도 없다. 그것이 확고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은 코기토cogito를 위한 전제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의 필연적인 대상으로 여겨진다-우리는 사고를 그것에 관한 의식 없이 가질 수 없다. 함축에 의해서,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적 사고가 누군가의 고유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것이 먄약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의식의 대상 역시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의식하는 것은, 그가 그 무언가를 안다는 것 역시 함축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데카르트는 의심의 논리-문법의 배제를 확실성의 현존과 혼동하고 있으며, 실수의 논리-문법의 배제를 무오류인 지식의 현존과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의심과 실수, 무지가 있는 곳은 문법에 의해 배제된다. 확실성, 무오류성,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안다'에 할당한 것은 엄밀히 말해, 누군가 모든 의심과 무오류의 지반을 배제하는 입장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심과 무오류성이 경험에 의해 배제되지 않고 경험에 앞서는 논리에 의해 배제된다면, 만일 나의 코기토에 대한 의심을 갖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만일 사물이 어떻게 감각적으로 나에게 보이는 지에 관해 알지 못함으로서 그러한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안다'를 위해 배제되는 것은 없고, 그것을 위한 인식론적 작업도 없으며, 그것을 위해 차지하고 있는 논리적 공간도 없을 것이다.

유사하게, 비트겐슈타인은 암시적으로 칸트의 '나는 생각한다'를 거부한다. 칸트에게 있어 '나는 생각한다'는 모든 나의 표상들에 수반될 수 있어야만 하는 능력이고, 의식의 보편적 형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에 관해 의식한다(I am conscious of)'와 '나는 무엇을 의식한다(I am conscious that)'은 허구적이다. 양자는 (만일 참이라면) 그것의 피연산자가 참임을 보증하는 '나는 안다'의 형식들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대조적으로, factivity-cancelling operator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는 나의 표상들에 관한 의식들의 표현일 수 없다. 만일 통각의 일반적 형식이 '그것은 감각적으로 나에게 사물이 이러저러하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면, operator인 '그것은 감각적으로 나에게 ~인 것으로 보인다'는 '나는 생각한다'로 말해질 수 있다-그러나 의식들의 형식의 표현일 수는 없으며 모든 표상들에 수반되는 것일 수도 없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나에게 사물이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를 수반하는 의식들의 '나는 안다'를 위한 인식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같은 이유에서 위에서 언급된 데카르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나에게 ~하게 보인다는 것을 안다'는 아마 강조의 형식일 수 있다 : 그것은 실제로 그러하게 나에게 보이거나, 그것은 그러한 경우에 무지의 논리적 가능성을 배제하는 문법적 명제일 수 있다; 혹은 그것은 문법적 농담일 수도 있다. [42]

(4) 마지막으로, 개인에게 속하는 그 자신의 경우에 대한 유비에 근거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위한 경험적 술어들의 귀속시킴과는 거리가 먼, 경험적 술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자기 귀속은 다른 이들의 행동으로부터 보장된 다른 이들에 대한 귀속의 조건에 대한 한 사람의 이해에 의존한다. 누군가는 한 면의 코인만을 갖을 수 없으며, 혹은 [그에게] 다른 이들에게 앞서 한면의 코인이 주어질 수 없다. 감각의 술어들과 지각의 술어들은 이와 같이 양면의 코인들이다. 데카르트적/칸트적 관점은 불가피하게 한 사람에게 사적 언어의 이해를 전념하게 한다. 경험적 술어들의 자기-귀속이 논리적으로 경험의 다른 주체에 관한 그들의 귀속에 앞서 있다면, 그들의 의미는 주관적 경험 그 자체를 언급함으로써만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 사적인 지시적 정의가 경험의 표상을 샘플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논증하듯이, 비지성적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눈을 통해 조망한 개념적 지도는, 모두 낯설고-그러나 새롭지는 않다. 데카르트주의와 칸트주의의 관점과 비례하여, 모든 것은 변한다-그러나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3. Are there transcendental argument in the Tractatus?

누군가 논고의 형이상학과 존재론이 사실상 초월적 논증의 형식에 의해 세워졌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의 명제들이 이름은 뜻을 가지고 요소 명제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논증하지 않는가(TLP 6.124)? 그러나 이름들의 뜻은 그것이 존립하는 단순 대상들이다(TLP 3.203). 단순 대상들은 세계의 실체이다-그것은 맞아 떨어진 것과 독립적으로 존속한다(TLP 2.024). 만약 단순 대상들이 있다면, 사태들-가능한 대상들의 배열- 역시 존재한다. 실제적인 대상들의 배열이 사실이다. 사실은 사태를 획득하거나 획득하지 않는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TLP 1.1). 이러한 것들은 -논리적 명제의 존재로부터 세계의 본질적 본성으로 나아가는-초월적 논증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이에 더해, 누군가는 이 논증을 다른 방식으로 진행함으로써 동일하게 드라마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단순 대상들이 없다면, 명제가 의미를 갖는지의 여부는 다른 명제가 참인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TLP 2.0211). 그것은 무한한 퇴행을 발생시킬 것이다. [43-44] 또한 의미를 만드는 것은 사실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의미는 실제 사례의 무엇임과는 독립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단순 이름들의 뜻인 단순 대상들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단순 이름들의 논리적 형식(그것들의 조합적인 가능성은 논리적 구문론과 일치한다)은 그것의 뜻이 되는 대상들의 형이상학적 조합 형식과 같아야만 한다. 언어에서 가능한 것은 현실에서 가능한 것을 초과할 수도, 떨어질 수도 없다. 언어와 현실은 똑같은 논리적 다수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표상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다시 한번, 단순 대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는 규정되지 못할 것이다(TLP 3.23). 그러나 문장의 의미가 규정되지 않는다면, 배제의 규칙은 그 가운데에서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극성은 의미를 가진 문장을 구성한다. 따라서 의미의 결정성의 선험적 보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명제들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표상 역시 존재할 수 없고, 논리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우리 자신에게로 표상하며, 논리의 명제들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단순 대상들은 존재한다. 따라서 사태들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연쇄고리에 따라] 사실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진리들에 의존하지 않는다(And these are not contingent truths).

논리는, 비트겐슈타인은 단언하기를, 초월적이다(TLP 6.13). 그것은 사고(이성)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할 수 있다(이성). 따라서 논리에 의해 가정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경우이다. 

이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려들부터 사물이 어떻게 현실에 있어야만 하는지를 추론하는 많은 종류의 초월적 논증 아닌가?-즉, 사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추론, 사고, 표상되는지에 관한 논증들 아닌가? 이것은 솔깃한 결론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기껏해야 오독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초월적 논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현재의 일반적인 초월적 논증의 일반 형식에 대한 구성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V를 할 수 있다(혹은 우리는 V를 한다.)
사물들이 현실 안에서 이러저러하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V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들은 현실 안에서 이러저러하게 있다.

혹은 보다 도식적으로, 간단한 modus tolens를 사용한다면,

p
if ~q, then ~p (이는 논리적으로 q v ~p와 동치임)
q

칸트는 실제로 초월적 논증을 논증의 형식으로 여기지만, 그것을 형식적 논증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이 초월적 논증의 일반 형식이라면, 논고는 초월적 논증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44-45] 따라서 실제로 어떤 철학이든간에 논리, 사고, 언어 혹은 경험의 부인할 수 없는 성격으로부터 세계가 어떻게 있어야만 하는지를 논증하는 철학이라면 그것은 [초월적 논증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해석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려 한다.

첫째, 많은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증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칸트적 용어를 확장하는 것에 대한 명백하게 유익하거나 빛을 비추어 주지는 않는다. 철학사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언어 혹은 사고의 본성으로부터 세계의 본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다른 이들을 언급하지 않고)을 초월적 논증들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특징지어주는 데 도움을 주는 어떠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둘째로, 따라서 초월적 논증들을 그들에게 적용하기 위한 해석은, 말하자면, 선험적인 과학적 논증들의 형식로부터 최선의 설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문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만일 행성 궤도의 편차가 존재한다면, 최선의 설명은 다른 행성의 존재가 중력을 [그 행성에] 행사한 것이다;
행성 X의 궤도에 편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가장 최선의 경험적 설명은 행성 Y가 행성 X에 중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경험적 논증들로부터 최선의 설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험 속에서 확증될 수 있고(해왕성), 혹은 반증될 수 있다(불카누스). 이제, 누군가는 형이상학의 많은 형식들이 최선의 선험적 설명을 고용하고 있다고, 이를테면, 플라톤주의의 이데아의 존재를 술어의 가능성에 대한 최선의 설명으로서 논증하고 있다고, 혹은 제1의 원동자를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에 대한 최선의 설명으로 논증하고 있다고, 혹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그러한 방식으로 논증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들은, 과학들과 달리, 경험적으로 검증되지도 않고 반증되지도 않는다. 이에 더해, 그러한 형이상학자[자연을-넘어서는 사람들]은 흔히 우연적 결론의 (필연적인) 귀결과 필연적 결론의 귀결을 혼동한다. 즉, '필연적으로, 만일 [만일 p라면 q이다] 그리고 p이면; q이다.',와 '만일 [만일 p라면 q이다] 그리고 p이면, 필연적으로 q이다.'를 혼합시킨다. 확실히, 그들은 전형적으로 현실 속에서 우연적인 것이 아닌 필연적인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는 형이상학이 그 자신을 해치면서 과학의 방법을 모방한다고 불친절하게 논증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가 '초월적 증명'이라 부른 것은 실제로 이와 같지 않다. 그는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로크가 그러했듯이, 우리 관념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세부 대상들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지 않다. 유비 속에서 그는 우리가 자연의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진리들, 이를테면 인과법칙과 같은 것을 알 수 있고 알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45-46] '초월적 연역'에서 그는 범주들의 선험적 타당성-가능한 모든 경험에 필연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범주들-을 밝히려 시도한다. 그리고 '관념론 반박'에서조차 보여지는 것은 내적 경험이 대상들의 외적 경험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미리 전제[상정]presupposes되어야 한다는 것-대상들의 실존이 내적 경험의 최선의 설명인 것이 아니라-이다. 그가 고려하는 문제는, 합리주의자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초재적인, 비-경험적인, 경험의 조건들과 그것의 대상들을 조사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가능한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는 범주의 적용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이러한 법해석은 초월적 증명에 대한 칸트의 생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한다. 먼저, 엄밀하게 그가 형이상학의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진리들을 증명하는 문제에 관여하기 때문에, 즉, 분석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개념에 관한 명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연결 시키는 '제3항'이 있다고, 즉 가능한 경험이 있다고 논증한다. 가능한 경험에 대한 언급은 초월적 증명의 필수적인 성분이지만, 그것의 형식의 (현대적) 해석에서는 결여되어 있다. 둘째로(그리고 그 결과로), 칸트는 초월적 관념론(A 130)의 참을 요구하는 어떤 증명도 문제[선험종합적 지식]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분명하게 생각하였다(Prolegomena 377).

따라서 우리가 칸트 스스로가 그러했듯이 '초월적 논증'을 해석한다면, 논고는 초월적 논증에 종사하고 있지 않다.

(1) 그것은 선험 종합 명제의 가능성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실제로, 논고는 그러한 명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왜냐하면 논고는 모든 표현가능한 필연성all expressible이 논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한에서 그것은 의미를 가진 명제 속에서 표현될 수 없으며, 따라서 명제적 지식의 내용이 될 수 없다.

(1) It is not an attempt to vindicate the possibiity of synthetic a priori knowledge. In fact, it denies that there is any such thing, since it holds that all expressible necessity is logical necessity. Insofar as thare is metaphysical necessity it is inexpressible in propositions with a sense, and so cannot be the content of propositional knowledge.

(2) 논고는 가능한 경험과 그것의 가능성에 대한 선험적 조건을 언급함으로써 독립적인 개념들을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즉, 종합적 명제로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 (대신에, 그것은 질료적 개념들과 질료적 개념들의 의미가 실제 값이 되는 실제 변수인 형식적 개념들을 연결시킨다).

(2) The Tractatus does not link independent conepts by reference to possible experience and the a priori conditions of its possibility. (Rather, it links material concepts with the formal concepts that are in effect varibles of which the meanings of the material concepts are values.)

(3) 논고는 현상의 세계(외적 경험)이 내적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한 대상들이 존재하며 사태가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의 상정이지 경험의 상정이 아니다. 

(3) The Tractauts does not attempt to prove that the worlcd of apperances (outher experience) is a condition of the possibility of inner experience. That objects exist and that there are states of affairs is a presupposition of logic, not of experience.

물론 누군가는 초월적 관념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독트린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적 논증의 기본적인 구조는 거기에서부터 구출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출될 수 있는 형식은 위에 언급된 형식-우리가 할 수 있는 것(그리고 명백하게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 사물이 현실 속에 어떻게 있어야만 하는지를 논증하는 것이다 [46-47]. 만약 그렇다면, 희석된 의미에서, 논고에 초월적 논증이 있다고 논증할 수 있을 것이다.

명백하게도,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사물을 우리 자신과 이성에 표상하는 일)는 사실로부터 세계는 특정한 발판을 가져야만한다고-필연적인 구조와 형식들- 논증한다(물론 그는 또한 사물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지에 관한 그러한 추정상의 형이상학적 진술들이 오직 보여질 수 있는 것만을 진술하려는 시도 속에서 의미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논증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초월적 논증을 우리가 하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에 관한 고려로부터 사물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현실 속에서 있는 지를 설립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면, 또한 우리가 논고에서 제시된 형이상학적 논제들의 무의미성을 무시한다면, 그렇다면, 약화된 의미에서, 누군가는 논고가 초월적 논증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물이 현실 속에서 이러저러하게 있어야만 한다고 논증하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물을 표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명제적 표상으로부터 다른 하나로 유효하게 추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생각을 1930년대에 들어서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는 이러한 점을 독단론(cf. MSS 111, pp. 87, 119f.; MS 115, 57; MS 130, 53)이라고 언급한다. 그것은 표상된 대상들로 향하는 표상의 방법론에 대한 투영적 특징들의 독단론이다. 그것은 [사물이] 반드시 이러 저러하게 있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러저러할 수 없을 것이라 주장한다.

 

4. Are there Transcendental Argument in the Investigations?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작한 1930년대 초에, 그는 필연적인, 그러나 말할 수 없는, 형이상학의 진리가 논리와 상징적 표상의 가능성에 의해 전제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먼저, 우리가 위에서 서술했듯이, 말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진리로 보이는 것-말할 수 없지만 보여질 수는 있는-(그들이 참인 한에서) 것들은 표상의 규칙들이다. 빨강이 분홍색보다 어둡다는 명제는, 이를테면, 추론 규칙을 아는 것 그 이상이 아니다. 만약 A가 붉은 색이라면, 그리고 B가 핑크색이라면, 누군가는 A가 B보다 어둡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 규칙은 부분적으로 단어들인 빨강, 분홍, 그리고 보다 어두운의 의미로부터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빨강이 분홍보다 검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자연에 관한 선험종합 명제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아는 것이다. [47-48] 따라서 또한, 칸트가 형이상학의 선험종합적 명제라 생각했던 것은, 이를테면 모든 사건이 원인을 갖는다와 같은 것은, (만일 칸트가 옳다면) 사건과 연계된 담론의 문법을 숙달하는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경험적 인지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인 선험 종합적 명제들로 보이는 것이 표상의 규범들 그 이상이 아니라면, 그러한 진리들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가능한 가에 대한 물음은 그저 사라진다. 여기에는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이 없다(철학에서는 신비로운 것이 없다. 오직 신비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명제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 언어의 규칙에 대한 지식일 뿐이다-표상의 독창적 형식에 관한 지식. 만일 인과법칙이 실제로 표상에 대한 우리의 형식에 관한 지식이라면, 모든 사건이 원인을 갖는 다는 앎은 그저 만일 무언가가 사건으로 기술될 수 있다면, 그것은 원인을 갖는다로부터 추론될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E가 사건이다라는 명제로부터 E가 발생되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선험적으로 적법하다면, 그 까닭은 그것이 사건의 의미로부터 부분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선험 종합적 진리들이 현실에 대한 필연적인 제약을 묘사한다는 칸트의 생각은 그저 비트겐슈타인이 부른 '문법적 명제들'이 희미한 형태로 제시된 것이다. 문법적 명제는 사물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에 대한 기술로 위장된 표상의 규칙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에서, 문법이 우리 언어의 표현의 의미들로부터 부분적으로 구성된 규칙들의 엇겨진 연결망이기 때문에, 문법적 명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 또는 아마도: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언어적 실천을 현시한다. 우리는 우리 언어의 단어들을 이러한 표상 규칙에 따라 사용한다. 우리는 규칙들을 그것에 따라 서술한다. 누군가 A는 붉은 색이고, B는 핑크색이고, 따라서 A는 B보다 밝다라고 추론한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를 교정시켜야만 할 것이다. 혹은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해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법적 명제들을 단어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기준으로서 사용하며, 타당한 추론을 위한 측정도구로서 사용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러한 명제들을 들먹인다(아냐, 아냐!만약 그것이 붉은 색이라면, 동시에 초록색일 수는 없어. 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외국인에게 설명하는데, 이 경우 우리 언어의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잇는 것이다(만약 어떤 것이 한 발자욱만큼 길다면, 그것은 12인치보다 작지 않을 것이다(작을 수 없다)라고 우리는 설명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중요한 (문법적인) 통찰 한 쌍은 (1) 문법의 규칙들과 대응하는 세계에 대한 사실의 추론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 혹은 세계에 관한 사실에 대응하는 문법규칙들의 추론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문법의 자율성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강조에 의해 부분적으로 뜻한 것이다. [48-49] 어떤 사실도, 어떤 우연적 사실-그리고 그것을 진술하는 명제도 표상규칙의 내용을 수반하지 않는다. 반대로, 표상규칙의 내용은 현실 속에 이러저러하게 있는 사물을 수반하지 않는다. 저 붉은 색이 색깔이라는 것은 추론 규칙이다. 저 붉은 색이 색깔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이나 붉은 혹은 색깔이 있는 다른 것을 수반하지 않는다. 추론규칙-묘사로 위장된 문법적 명제-은 붉은 색이 색깔이라는 사실에 의해 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붉음이 색깔이라는 사실 역시도 아니다. 만일 붉음이 색깔이라는 것이 사실(사실문제)이라면, 우리는 붉음이 색이 아닌 경우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할 수 없다-그것은 단어의 무의미한 형식일 따름이다.

문법의 자율성은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확고하게 주장했던 다음과 같은 생각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 특정한 문법적 형식들의 실존, 이용 그리고 유용성은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잇는 세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종사에 관한 일반적 사실들의 거대한 다양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과 행위에 관한 규칙들 만큼이나 세계 속의 많은 규칙들을 전제한다. 그러나 철학의 작업이 표상의 구체적 규범들의 실존으로부터 그러한 규칙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누군가 추론하고자 하듯이, 혹은 심지어 그렇게 추론하기를 원하듯이, 체스 규칙의 실존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실존을 추론하는 것처럼 말이다.) 먼저, 우리는 이미 유의미한 진리들을 알고 있으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그것을 추론할 필요가 없다. 둘째로,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와 달리 무언가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 철학적 작업의 일부분이라는, 혹은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최소한 외부 세계의 존재와 같은 것). 그러한 증명(내가 존재한다는 것,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증명의 불필요성에 있다. 철학의 일은 한 종류의, 혹은 또 다른 종류의 회의주의로부터 제기된 도전을 탐구하고, 왜 우리가 이런 점에서 우리 자신이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잘못 인식된 것인지 보여준다. (이를테면 방 속에 물질적 대상이 없다는 것, 휴게실에 다른 이의 마음이 없다는 것 등).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는 사적인 지시적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는 누군가, 그의 삶 속에서 그저 한번, 규칙을 따를 수 없음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물론 이러한 것들은 부정적인 존재 언명들이다-그러나 그것들은 존재 언명들이다. [49-50] 증명된 것은 세계에 관한 진리, 실제로-필연적인 참, 심지어 그저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그러한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존재 언명들은 불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우리 언어에서 사용되지 않는 단어의 형식을 배제할 뿐이다. 그것의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현실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언어 사용(그리고 무사용)과 관련된 문법적 진술들이다.

철학은 문법과 함께 움직인다. 그것은 개념들과 우리의 개념적 도식의 개념적 연관들의 연결망을 명료화한다. 다른 것들 혹은 사물의 어떤 종류들이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철학의 업무가 아니다-철학은 오직 회의주의가 말하는 바, 이르테면 우리가 탁자가 옆방에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진술이나, 혹은 잭이나 질이 두통을 앓고 있다의 여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진술의 비일관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등하게 그가 주관적으로 사물이 그와 함께 어떻게 있는지에 대해 아는 반면에도 그가 다른 이들에게 사물이 어떻게 있는 지에 대해 관해 알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의 비일관성을 보여 준다.

몇몇 철학자들은 탐구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절차들의 기술에 관해 반대할 것이다. 물론, 칸트의 의미에서 초월적 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을 언급함으로써 선험 종합 명제들의 참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논고가 희석된 초월적 논증을 시도하고 있다고 어떤 의미에서 논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탐구도 그러한가? 사적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논증은 초월적 논증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보였다: 양자 모두 (1) 우리의 주관적 경험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의 개념적(문법적, 선험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혹은 (2) 주관적 경험의 자기 귀속의 가능성에 대한 개념적(문법적, 선험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경험의 주관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실존)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등하게, 비트겐슈타인의 규칙따르기와 연관된 것에 관한 세부적인 연구에서 제시된 것은 규칙따르기를 수행하는 누군가의 가능성의 개념적(문법적, 선험적)조건은 이와 같이 규칙따르기를 수행하는 타자의 존재를 요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의미-구성의) 규칙을 따르는 기준이 공동체의 실천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일반적으로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규칙따르기라 불려지는- 따라서 규칙따르기는 내가 따르는 규칙을 따르는 다른 이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은, 느슨한 의미에서, 언어 사용자의 공동체의 실존에 대한 초월적 증명이 아닌가? [50]

이것은 오독이다. 그것은 사적 언어 논증에 의해 보이는 바와 규칙 따르기에 대한 탐구에 의해 보이는 바를 오해하고 있으며 보이는 것에 의한 방법론을 오해하고 있다.

먼저, 논리적인 사적 언어의 개념에 대한 탐구는 (1) 사물이 누군가와 어떻게 있는지에 관한 지식, 혹은 경험의 자기 귀속의 가능성에 대한 지식이 오직 (2) 누군가 경험의 다른 주체가 있어야 함을 아는 경우에만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심지어 시도하지조차 않는다.

(1) 비트겐슈타인은 누군가 고통에 빠져 있는 것 혹은 사물이 감각적으로 누군가에게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것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과 모른다고 말하는 것 모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따라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작업 속에서) 데카르트에 의해 해석된 자기-의식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에 대한 탐구는 모두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해 해석된 자기-의식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초월적 자기-의식) 역시 없다. '나는 생각한다'는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 감각적으로(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나에게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는 것은 명백하게도 훌륭한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표상의 표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고, 표상 진술의 유효성에 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상 진술의 유효성의 가능성은 유효하지 않은 표상 진술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사물이 나에게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라는 언어게임은 '사물이 이러저러하게 있다'라는 언어게임의 선제적 숙달을 전제한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경험의 자기-귀속의 가능성의 벌거벗은 조건으로부터 타자의 마음의 존재와 지식을 추론하는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오해에 불과하다. 

(2)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경험의 다른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다른 이의 마음을 보여주려 시도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회의주의를 퉁명스럽게 두 가지 명백한 근거들로 치워 놓는다. 먼저 우리가 만약 안다라는 단어를 그것의 일반적인 사용으로(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는가?) 사용한다면, 우리는 사물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있는지에 관해 매우 자주 알고 있다. 둘째로, 그냥 시도해라-실제 사례에서-다른 이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의심하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에서 회의론을 반박하는 것에 관심이 없으며, 칸트가 초월적 연역(관념론 반박의 반대항으로 제시된)에서 사용한 것 이상으로 그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목표는 근거 없는 고백의 가능성(이해할 수 있음)의 조건과 경험의 허공이 다른 이에 대한 경험의 귀속을 위한 논리적 기준의 인지라는 점이다. [51-52]

그리하여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경험의 개념에 대한 즉각적인 적용의 가능성과 다른 이에 적용하는 조건들에 대한 숙달 사이의 연관에 있다. 그는 우리가 다른 경험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증거가 필요한가? 그는 이렇게 조롱할지도 모른다). 이제 이러한 작업은 회의주의를 발가벗긴다-그러나 그가 거부하는 우리가 알 수 있음에 대한 우리의 앎을 증명함으로써는 아니다. 다른 이의 마음에 대한 회의주의는 그가 사물이 그와 함께 어떻게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고, 혹은 적어도, 사물이 그와 함께 어떻게 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그러한 회의주의는 동시에 다른 이의 경험의 귀속의 행동 기준의 타당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 주장대로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보다 간단히 다른 곳에서 광범위하게 논의했던 공유된 규칙들-언어공통체로서의-을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의 실존에 대한 초월적 논증으로서의 규칙 따르기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에 대한 해석을 다루고자 한다. 소위, 비트겐슈타인의 규칙따르기에 관한 '공동체 관점' 해석은 (거칠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으로 말해서, 만약 그것이 

규칙따르기는,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하듯이, 실천이며-그리고 실천은(흔히 말해지듯이) 사회적 실천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V에 대한 나의 규칙따르기의 가능성의 조건은 규칙을 따르는 공통적인 실천에 종사하고 있는 규칙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존재함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러한 해석이 비트겐슈타인의 관찰에 대한 오해임을 보여주었다. [52-53] 그가 사용하는 방식[활용]Praxis이라는 독일어 표현에서, 행위의 패턴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부르는 용어법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규칙을 따를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행위를 한다는 주어진 규칙을 올바르게 따르는 기준이 없음을 의미한다. 대신에, 어떤 이가 스스로 올바르게 규칙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올바르게 규칙을 따를 수 있다면, 그들은 한 사람이 그 자신의 규칙을 따르는 것과 같은 규칙을 따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