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History of Analytic

Stenius (1960) Wittgenstein’s ‘Tractatus’. A Critical Exposition of the Main Lines of Thought. Ch. 11

Soyo_Kim 2021. 1. 9. 14:29

Stenius, Erik, Wittgenstein’s ‘Tractatus’. A Critical Exposition of the Main Lines of Thought.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60.

 

Chapter 11

Wittgenstein as a Kantian Philosopher (pp. 214-226)

 

이전의 챕터에서 우리는 논리학자이자 언어학자로서의 논고의 저자에 주로 집중했다. 이 마지막 챕터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체계에 대한 짧은 분석을 주고자 한다. 

 

그가 '논리적 원자론'을 고수하는 한에서, 보다 앵글로-색슨적인 타입의 형이상학자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 이러한 종류의 형이상학은 그의 철학 체계 내에서 오직 두 번째 위상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며, 그의 철학 체계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독일 형이상학과, 더 구체적으로 말해 칸트의 형이상학과 관련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종류의 선험 종합적 명제들의 가능성도 거부한다.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의 기본 전략이 '어떻게 선험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강한 반큰트주의자라 추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적어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그 본질적 측면에서 칸트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반-칸트주의는 오직 그가-다른 칸트주의자들처럼-칸트의 체계를 변형시키고, 그러함으로써 그 자신만의 칸트주의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의 저작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로 명확하게 진술된 칸트주의의 영향을 받기 위해 칸트를 [직접] 읽을 필요는 없다; 독일 언어의 지성적 분위기가 그것에 속한다. 이에 더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그 자신만의 칸트주의의 방식을 따랐던 쇼펜하우어를 읽고 그 진가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안다(pp. 214-215). 어떤 의미에서든 비트겐슈타인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나는 지금부터 설명해 보려 한다.

 

1. Kantian Philosophy

 

나는 칸트주의 철학의 한 가지 특별한 특징을 강조하면서 시작하려 한다. '선험적 종합 판단은 어떻 가능한가?'라는 칸트의 질문은, 물론, 순수이성비판의 기본 물음이기는 하지만, 이 물음 속에서 그의 관심사는 그저 그러한 종류의 인식론적 물음이 아니다. 선험성에 대한 그의 탐구는 그의 철학적 전망 속에서 여전히 더 근본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이론 이성'의 실제적 영역에 속하는 것과 거기에 속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양분dichotomy이다. 칸트가 독단주의라 불렀던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의 오류는 그것이 이론이성의 형식들을 이론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물음들-신, 영혼불멸, 전체로서의 세계, 자유의지, 도덕 등등-에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모든 질문들은 '실천이성'의 영역에 속하며 그 영역에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만 대답될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칸트적 사유의 핵심 지점을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의 영역에 각각 속하는 물음들을 양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동일한 구분이-그럼에도불구하고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는, 보다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쇼펜하우어의 주된 작업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실천 이성의 영역에 대응하는 의지로서의 세계와 이론 이성에 대응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칸트의 기본적 물음이 이론 이성의 영역의 한계를 설정하는 근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 '어떻게 선험종합적 판단이 가능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칸트의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인간 경험으로서의 인간 경험 속의 두 가지 구성요소들에 관한 '발견'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요소는 우리의 감성에서 나오며, 이것은 경험적이고 후험적이다. 그러나 또한 이론 이성으로부터 나온 구성요소도 있으며, 이것은 선험적이다. 후자의 구성요소는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감성'(Empfundung)은 아직 '인지'(Wahrnehmung)된 것이 아니다. 인지를 일으키기 위하여 감성은 반드시 공간과 시간의 틀의 내부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pp. 215-216); 그리하여 공간과 시간은 인지의 선험적 형식을 구성한다. 그래도 우리의 인지는 여전히 '경험'이 아니다; 경험이 되기 위해 그것은 반드시 경험의 개념적 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 틀은 -인지의 형식과 함께- 경험의 선험적 형식을 구성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경험의 선험적 형식을 갖는다는 사실은 다수의 선험적 종합 판단들의 원천이다: 인지의 형식은 수학적 명제들의 형식이며, 경험의 개념적 틀은 '순수 과학'적 명제들, 이를테면 인과법칙의 원천이다. 그러한 진술들은 분석적이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참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든 경험으로서의 경험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연이 이론 이성에 의하여 경험되어질 수 있는 한에서 자연에 앞서 미리 정해져 있다. 

 

이론 이성에 관한 탐구는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들을 보여주며, 그리하여 어떤 종류의 물음이 한계 바깥에 있는지 보여 준다. 그러한 탐구를 칸트는 초월적 연역이라 부른다-그것은 우리의 이론 이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초월적'이란 반드시 '초재적'인 것, 즉 이 한계를 벗어난 것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초재적인 것의 영역은 사물 그 자체이며, 즉 경험의 형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다. 쇼펜하우어는 현실을 덮고 있는 이론 이성에 의해 성립하는 '마야의 베일'을 찢어발기는 의지의 직관을 통하여 마음이 물자체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명백하게 칸트주의를 뒤집어 버리는 반-칸트주의이다. 칸트 그 자신에게 있어 모든 종류의 지식은 이론 이서의 문제이다; 실천이성의 윈칙들은 어떤 특별한 직관의 능력에 의해서도 알려질 수 없고, 오직 도덕적 세계 질서의 존재에 대한 필연적 조건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다. 

 

초월적 연역에서 칸트에 의해 사용되는 방법은, 그리고 특별히 그의 인지의 형식에 관한 연역에서 사용되는 방법은 우리가 만약 그의 관점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비교해볼 경우 흥미로운 일이다. 인간 마음에 의해 인지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의 법칙에 따라야만 한다고 칸트는 논증한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pp. 216-217) 그가 이러한 지식에 도달하기 위하여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은 그가 부르는 우리의 직관에 대한 분석이다. 직관Anschauung은 일반적으로 'intuition'으로 번역되며, 그러나 우리의 현재 관점에서는 매우 안좋은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대신에 우리는 상상력'iamgination'이란 번역어를 쓰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기하학적 공리들의 선험적 성격이 우리가 순수 직관[상상력]의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직관은 어떤 감성도 언급하지 않은 '순수한 상상력'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러나,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기하학의 공리가 유효하지 않은 세계를 상상조차 할 수없다. 그리고 그것이 인지될 수 있는 한에서의 실제 세계가 반드시 상상된 세계이기 때문에, 기하학의 공리들은 필연적으로 실제 세계에서 참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상상할 수 있는 것에 관한 탐구는 우리에게 인지와 연관된 선험적 참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같은 방식으로 이론 이성의 이해할 수 있는 것에 관한 탐구는 다른 관점에서 우리에게 경험 세계에 관한 추가적인 선험적 지식을 제공한다.

 

내가 칸트주의 철학이라 부른 것은 따라서 다음의 테제들로 요약될 수 있다.

 

(a) 이론 철학의 작업은 이론적 담론의 함계와 연관된 초월적 연역을 만드는 것이지, 이 한계를 넘어서는 것, 그렇기에 이론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b) 세계는 그것이 오직 이론 이성에서 '가능할' 때에만 가능한 경험의 세계일 수 있다. 즉 그것을 상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c) 우리의 경험은 이론이성의 기반이 되는 '형식'과 감성에 기초를 두는 '내용'을 갖는다.

(d) 참된 종합적 명제들은 만약 그것이 오직 경험의 형식을 언급한다면 선험적이고, 그것이 내용도 같이 언급한다면 후험적이다.

(e) 따라서 선험적 종합 명제가 있다(이를테면 수학적 명제들, 인과 법칙).

(f) 또한 초재적인 명제들이 있다(즉, 신, 영혼불멸, 전체로서의 세계, 자유의지, 도덕 등등에 관한 명제들). 이러한 명제들은 이론적 지식에 의해 참된 것으로 알려질 수 없으며, 오직 실천 이성(칸트)이나 의지에 의한 직관(쇼펜하우어)을 통해서만 '상정될 수 있다.' (p. 217). 그러한 명제들의 성립은 실천 이성의 작업 속한다. 

(g) 물자체는 초재적이다.

 

2. Wittgenstein's Transcendental Deductions

 

이렇게 형식화될 수 있다면, 물론 비트겐슈타인 보다는, 우리의 칸트주의적인 논지 방식은 오직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체계의 중심요점으로 변형되기 위한 한 가지 관점에서 개량될 필요가 있다.

 

논제 (b)로부터 시작하겠다. 거기에 있는 논지는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사고할 수 있는' 것임을 인식해야 하며, '사고'는 '현실의 논리적 그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고할 수 있는' 것이 논리적 그림에 의해 우리가 표상할 수 있다는 것, 혹은 다른 말로, 모사하는 언어 속에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언어를 모사하는 언어로 가정하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언어 속에서 묘사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b)는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론 이성에서 가능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의 의미 있는 언어 속에서 묘사될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가능성에 대응한다. 이것은 칸트적 관점의 핵심적인 개선으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사이의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론) 이성의 작업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칸트에게서처럼 이론적 담론의 한계를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 담론에 속하는 것이 언어 속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 전부이기 때문에, 이러한 하계에 대한 탐구는 언어의 논리에 대한 탐구이며, 세계의 논리를 보여주는 탐구이다. '논리는 이론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6.13에서 이렇게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논리는 초월적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칸트의 초월적 연역은 행하는 것을 의도한다: 이것은 언어의 논리적 분석에 의해 행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논제 (a)가 비트겐슈타인의 체계 속에서 변형되는 방식이다. '철학은 자연과학 담론의 영역을 한계짓는다'(4.113). '철학은 생각될 수 있는 것을 구분짓고, 그럼으로써 생각될 수 없는 것을 구분지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안으로부터, 생각될 수 있는 것을 통하여, 생각될 수 없는 것을 한계 지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4.114-115).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이성의 한계를 언어의 한계로 옮겨 놓는다. 칸트가 '이론 이성에 있어서의 가능성'을 '논리적 가능성' 보다 좁은 개념으로 생각한 반면, 이 두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동일하다(pp. 218-219). 그러므로, 칸트가 '경험의 형식'이라 부르는 것은 모든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에 공통된 형식, 즉 실체의 논리적 형식 혹은 실체의 내적 구조이다. 이 형식은 -만약 우리가 논리적 원자론을 보증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논리적 분석에 의해 드러나는 언어의 내적 구조에 의해 보여 진다. 그러므로 논제 (c)는 이러한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체계 속에서도 참이다-우리가 반드시 여기에서 말해진 내용에 현실의 외적 구조 또한 포함해야만 한다 할지라도 말이다(cf. Ch. VI, 10절).

 

실체의 논리적 형식이 모든 경험에 앞서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선험적인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cf. above, Ch. V, 10절).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만약 오직 그러한 진술들이 존재했다면 형식에 관한 진술을 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 형식'은 언어의 형식이기 때문에, 형식에 관한 어떤 의미 있는 진술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d)는 반드시 현실의 선험적 형식은 오직 언어에 의해 보여질 수만 있고 문장들에 의해 표현될 수는 없다고는 논제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따라가면 논제 (e) 역시 거짓이다. 그러한 문장이 종합적이다라는 것은 그것의 부정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그 부정이 참인 세계 역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적 명제들은 어떠한가? '수학'은, 비트겐슈타인은 논증하기를 '논리적 방법'(6.2)이다; 그것의 문장은 '등식이며, 그러므로 사이비-명제이다'(6.2).(cf. Ch. VIII, 5절) 아마 우리는 이것을 다음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적 진술들은 그것의 묘사적 내용이 공허하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이 진리-함수적 의미에서 동어반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어반복'이다. 그리고 따라서 그것들은 세계의 논리를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가 수학적 물음들의 해결을 위한 직관이 필요한지의 여부에 관해 묻기 위해서는, 여기서는 바로 언어가 그 필요한 직관을 제공한다고 함으로써 대답되어야 한다(6.233).

 

인과법칙과 같이 선험적인 법칙의 종류는 단 한가지이며, 그것은 논리적 법칙이다(6.3, 6.31). '인과 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다(6.32)-즉, 경험적 법칙은 만약 그것이 특정한 특정한 유형에 속한다면 인과법칙이라 불릴 수 있다(6.321). 이러한 종류의 법칙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언어 속의 이러한 형식의 가설을 형성할 수 있는 한에서만 오직 선험적으로 참이다(6.3211 f). '인과법칙'인 것은 만약 그것이 선험적으로 참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연관의 가설을 자연 속에서 일반적 법칙의 형식으로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그리고 칸트주의는 이러한 논리적 형식이 사고할 수 있는 자연 속의 연관 아래의 유일한 형식인 한에서 옳다- 자연법칙이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6.36). (pp. 219-220)-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말해질 수 없고 오직 보여질 수만 있다(6.36). 그리고 여기에서 언어에 의해 보여지는 것이 모든 자연 연관들의 기술에 의해 보여지기 때문에, 인과법칙인 것은 기술될 수 없는 것을 배제한다(6.362).

 

요약하자: 그가 인지하는 언어의 논리적 분석이 칸트적 의미에서의 '초월적 논증'의 한 종류이며, 그 목표는 모든 의미 있는 언어에 의해 오직 보여질 수만 있는 경험의 논리적 형식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렇기에 말해질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전망은 본질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논고는 순수 언어 비판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책은 사고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혹은 차라리-사고가 아니라,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사고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 우리는 한계의 양 측면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며(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생각할 수 있어야만 히기 때문이다- 한계는, 그러므로 오직 언어 안에서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반대편에 있는 것은 그저 무의미일 것이다(서문).

 

3. Trancendental Lingualism

 

칸트주의는 비판적 관념론 혹은 초월적 관념론으로 불려 왔다. 이러한 용어들은 칸트주의가 경험의 형식, 그러나 오직 그 형식이 인간 마음의 구조를 통해 경험의 세계에 부과될 수밖에 없다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관념적 철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떤 면에서 경험의 형식은 따라서 주관적인 것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주관적이라는 것은 오직 형이상학적 혹은 초월적 의미에서인데, 그 까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주체, 자아가 형이상학적이거나 초월적인 주체가 아니라 이미 초월적 주체의 마음에 의해 전제된 형식을 갖는 경험 세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어에 대해 고려해볼 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체계는 비판적 언어주의 혹은 초월적 언어주의 심지어는 언어적 관념론으로 불릴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또한, 경험의 형식은 초월적 의미에서 주관적이며, 형이상학적 주체는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주체이고, 언어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세계의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경험적 주체와는 마땅히 분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pp. 220-221). 그러므로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5.6). 형이상학적 주체의 세계의 한계는, 혹은 형이상학적 주체의 가능한 세계들의 논리적 공간의 한계는 그의 언어의 한계에서 규정된다. 

 

과학의 실제 세계는 의미 있는 언어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세계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세계이다:

 

5.62 요컨대 유아주의가 뜻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다만 그것은 말해질 수 없고, 드러날 뿐이다.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것은, 언어(내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그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러셀과 같이 나는 두 번째 단락의 '유일하게'라는 단어가 관계 대명사 die를 언급한 것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이 단락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고 본다: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것은 언어(내가 이해하는 유일한 그 언어)의 한계들이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삽입어구는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초월적 한계이기 때문에, 그리고 언어가 나의 언어(내가 이해하는 유일한 그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나의'라는 단어인 자아는 여기서 형이상학적 주체를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5.631). 왜냐하면 그것은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에 속하지 않고 세계의 한계이다(5.632)-그것은 눈과 시야의 관계에 비견될 수 있다. 눈은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5.633-6.331). 그리고 형이상학적 주체는 경험적 자아와 구분된다: '내가 발견한 대로의 세계'라는 책 속에서 기술되어야만 하는 자아가 존재하지만, 형이상학적 주체는 그 책 속에서 언급될 수 없을 것이다(5.631). 만약 '나의'라는 단어가 형이상학적 주체를 가리킨다면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아론이 어떤 의미에서 진리로 간주된다는 것을 암시한다(pp. 221-222); 다시 말해, 유아주의가 뜻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가 형이상학적 주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해질 수 없다. 형이상학적 주체가 초월적이라는 것은 또한 '유아주의가 엄격히 관철되면 그것은 순수한 실재주의와 합치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아주의의 자아는 연장 없는 점으로 수축되고, 그것과 동격화된 실재가 남는다.'(5.64). 

 

4. Nonsense

 

비트겐슈타인의 초월적 연역에 의해서 사고에 그어진 한계는, 우리가 보았듯이, 오직 언어 속에서만 적절하게 그어질 수 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지만, 우리는 사고들을 표현하지 않는 언어적 표현들을 형성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히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칸트주의적 용어들에 속하는 것과 이론 이성에 속하지 않는 것 사이의 한계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논리적 구분에 의해 보여진다. 

 

이것은 칸트에 따르면 이론이성에 의해 제기될 수 조차 없는 해결될 수 없는 물음들로 [우리를] 이끈다. '가장 깊은 물음들은 물음들이라 적절하게 말할 수 없다(4.003). '물음 속에서 표현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표현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6.5). 

 

그러나 초험적 명제들과 같은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칸트주의적 논제인 (f)를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6.522에서 이를 인정한다. '이것들은 스스로 보여준다. 이것들은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실천 이성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의 바깥에 놓여 있다. 신은 이러한 영역에 속한다. '신은 세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6.432). 윤리 역시 언어의 너머에 있다. 우리는 (칸트가 그러했듯이) 윤리의 주체로서의 의지에 관해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의지는 오직 심리학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6.432). 윤리가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윤리는 초월적이다(6.421)-내가 생각하기에, 비트겐슈타인이 만약 위에 제시된 초월적과 초험적 사이의 구분을 사용하려 했다면 그는 차라리 '윤리는 초험적이다'라고 썼을 것이다(p. 222). 영혼의 불명성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책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다. (6.4312).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어휘인 무의미성은 순수하게 부정적인 무언가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신비로운 것과 표현될 수 없는 사이의 동일성은 그에게 있어 무의미성이 오히려 긍정적인 고리인 것처럼 보인다. 독일어 단어 Unaussprechlich는 그저 표현될 수 없음을 뜻할 뿐 아니라 형연할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6.522에 제시된 신비로운 것과 das Unaussprechliche 사이의 동일성은 신비로운 것이 형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오래된 사고의 진술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스스로를 보여 준다. 10챕터의 섹션 8에서, 우리는 말해질 수 없는 사물의 두 종류 사이의 구분을 수행했다: 언어 안에서 보여지기는 하나 말해지지 않는 것과 언어 안에서 말해질 수도 보여질 수도 없는 것으로. 신비로운 것은, 내 생각에, 후자의 표현될 수 없는 사물들의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언어 속에서 스스로 반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나는 이것이 감정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신비로운 것을 감정적 경험-독일어로 경험을 표현하는 일상적인 사실 진술인 Erfahrung과 대비되는, Erlebnis라고 불리우는-의 형식으로 경험한다. 영원한 상 아래에서의 세계의 직관은 한계지어진 전체로서의 그것의 직관이다(6.45). 내 생각에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영원안 상 아래에서의 세계의 사색[응시]은 한계지어진 전체로서 그것을 직관한는 것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덧붙인다: 세계를 한계지어진 전체로서 경험하는 것은 신비로운 감정이다.' 누군가는 아마 이러한 감정을 신의 관점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세계를 감정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이것은 언어 속에서 묘사될 수 있는 사실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사실들은 모두 과제에만 속할 뿐, 해결에는 속하지 ㅇ낳는다'(6.4321).

 

이러한 논증은 우리를 초험적 물자체의 관념으로 이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원자론의 사물들은 세계 모사의 틀에 속하며, 따라서 초월적이라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칸트 자신의 관점의 한 측면에도 순응한다. 그러나 경험의 형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고인 물자체는 이러한 초월적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칸트주의에서 나타나며 부분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닿을 수 없는 초재적인 것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논고 속에 이러한 아이디어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p. 223).

 

두 번째 챕터에서 나는 스스로 왜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첫 번째 논제를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질문의 형식으로 논고에서 제시했는지 물었다. 나는 이러한 형식이 오래된 철학적 감정인 무엇What, 즉 그것이 답해질 수 잇다면, 우리를 세계의 신비로운 측면과 만나게 해줄 물음의 형식과 관계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어떻게How는 그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묘사의 형식을 취한 뿐이다. '논리는 모든 경험에-즉 어떤 것이 어떠하다는 것에-앞선다. 논리는 어떻게에는 앞서나, 무엇이에는 앞서지 않는다.'(5.552).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는 더 높은 존재에게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서 드러내지 않는다.'(6.432). '세계가 어떻게 있는 것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