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elqvist, Hanne (2016). On Wittgenstein's Kantian solution of the problem of philosophy.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 24 (4):697-719.
1. Introduction
1931년,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언어의 한계는 문장에 대응하는(그것의 번역이라 할 수 있는) 사실이 문장을 단순히 다시 반복하지 않고서는 기술될 수 없다는 점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한다."(CV: 13). 이 언급은 그의 논고에서 제시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에 잘 들어맞는다. 이 논문에서 나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보이겠다. 나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세계의 실체에 관한 설명에서, 논리에 대한 설명에서, 철학에 대한 그의 궁극적 관점 속에서 언어의 한계라는 관념과 표현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그를 제한하는지에 대해 보여주겠다. 따라서 나는 더 기술적인 논고의 디테일로부터 이 책의 소위 철학적 목표라 할 수 있는 '사고의 한계를 긋는 것'(TLP, 3)으로 휘감아 올라가고,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논리의 기초에서부터 세계의 본질로의 확장이라고 묘사한 부분들을 쫓고자 한다(NB: 791). (pp. 697-698) 언어의 한계에 대한 오해를 노출시키는 논고에 대한 독해와 대조적으로, 나는 이 관념이 전기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음을 논증한다.
In 1931 Wittgenstein wrote: ‘the limit of language manifests itself in the impossibility of describing the fact that corresponds to (is the translation of) a sentence without simply repeating the sentence’. Here, Wittgenstein claims, ‘we are involved … with the Kantian solution of the problem of philosophy’ (CV: 13). This remark fits well with Wittgenstein’s early account as it is presented in his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In this paper I will show how. I will show how the notions of the limit of language and of the impossibility of expressing that limit figure in Wittgenstein’s early account of the substance of the world, in his account of logic, and ultimately in his view of philosophy. I will thus spiral outwards from the more technical details of the Tractatus towards the self-proclaimed philosophical goal of that work, namely, to draw a limit to thought (TLP, 3), tracing a part of that path which Wittgenstein described as one that ‘has extended from the foundations of logic to the essence of the world’ (NB: 79).1 By contrast to those who read the Tractatus as exposing the notion of a limit of language as misguided, I argue that the notion lies at the very heart of Wittgenstein’s early view.
2. “Substance is … form and content” (TLP 2.024–2.025)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전기와 후기 모두, 철학의 문제는 의미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언어가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논고에서, 이 질문은 사실과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에 관한 그의 언급에서 끌어들인)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의 대응[일치]과 연관된다. 논고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의미 있는 명제는 가능한 사태들의 그림 혹은 모델로 취해진다(TLP 2.12). 각각의 그림 그리기의 가능성은 묘사된 사태들의 요소를 지지하는 그림의 구성요소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미니어쳐 집의 레고블록들은 -미니어처의 구성요소로서- 미니어쳐가 그림으로 여겨질 경우, 집의 벽돌들을 대리한다. 그림그리기에 있어 첫 번째 요구는, 그리고 그에 맞춰 의미의 가능성을 위한 첫번째 요구는, 묘사 관계로 불리운다(TLP 2.1514).
For Wittgenstein, both early and late, the problem of philosophy was that of the possibility of sense. How is it possible for language to be meaningful? In the Tractatus, this question concerns that correspondence between a fact and the sentence expressing that fact which Wittgenstein brings up in his 1931 remark on the limit of language. In the Tractarian account, every meaningful proposition is taken to be a picture or a model of a possible state of affairs (TLP 2.12). The possibility of such picturing requires that the constituent elements of the picture stand for the elements of the depicted state of affairs. They do so as, for example, the Lego bricks in a miniature house – as constituents of the miniature – stand for the bricks of the house the miniature is meant to picture. This first requirement for picturing, and accordingly for the possibility of sense, is called the pictorial relation (TLP 2.1514).
그러나 레고 미니어쳐의 예시가 드러내듯이, 그림 그리기의 가능성은 그림과 그려진 것의 구성요소들 간의 단순한 상관관계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이에 더해, 그림의 구성요소들은 묘사된 사태들의 구성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는 방식으로 상호간에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한다(TLP 2.14-2.151). 공간적 대상들로서, 레고 블록은 미니어쳐 집을 건설하기 위해 실제 블록들이 결합되어 있는 방식처럼 결합될 수 있다. 유사하게, 레코드는 음악적 연주를 포착하며, 그러나 이는 오직 음악적 연주와 그것의 레코드가 시간적 현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점묘화가는 현재의 풍경을 그릴 수 있지만, 그 까닭은 오직 그림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점들이 풍경의 색채 스펙트럼과 똑같은 색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림 그리기의 두 번째 요구 사항, 즉, 그림과 그려진 것이 그들의 동형론적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같은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림은 어떤 현실이든 간에 그것 [그림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모사한다. 공간적 그림은 공간적인 것을 그릴 수 있고, 색채 그림은 색채를 지닌 것을 그릴 수 있다(TLP 2.171).
But as the example of the Lego miniature reveals, the possibility of picturing requires more than mere correlations between the elements of the picture and the pictured. In addition, the constituent elements of the picture must be such that they are capable of combining with each other in the way in which the elements of the depicted state of affairs have been combined (TLP 2.14– 2.151). As spatial objects, the Lego bricks can be combined to build a miniature house just as the real bricks have been combined. Similarly, a recording can capture a musical performance, but only because both the performance and its recording are temporal phenomena. And a pointillist painting can present a landscape, but only because the countless points that make the painting have colours from the same colour spectrum as the landscape itself.2 This second requirement for picturing, namely, that the picture and the pictured share the same form that makes their structural isomorphism possible, Wittgenstein describes as follows: ‘A picture can depict any reality whose form it has. A spatial picture can picture anything spatial, a coloured one anything coloured, etc.’ (TLP 2.171).
비트겐슈타인은 사태들의 구성 요소들을 대상들이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대상들은 대체될 수 없는 세계의 실체이다. 그것들은 모든 상황들의 가능성을 포함한다(TLP 2.014). 이러한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후에 쓰고 있는 곳에서, 칸트주의적 표현과 함께 특징적으로 발견된다(pp. 698-699). "경험적 현실은 대상들의 총체에 의해 한계지어진다(TLP 5.5561). 비트겐슈타인은 대상들을 사슬의 연관과 비교한다. '사태 속에서 대상들은 상호 간에 사슬의 연관을 이루고 있다(TLP 2.03). 그들이 사슬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연관은, 레고 블록들이 미니어쳐 하우스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블록들에게 본질적인 것처럼 대상들에게 본질적이다. 그러나 중요하게도, 미니어쳐 하우스의 가능성을 위한 레고 블록들의 공간적 형식의 필연성과는 대조적으로, 미니어쳐 그 자신은 우연적이다. 특정한 모델 속에서 블록들이 함께 있는 특정한 방식에 관한 필연성은, 그것들이 다른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TLP 2.0271).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묘사하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다른 것일 수 있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사물의 선험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TLP 5.634)
Wittgenstein calls the constituent elements of states of affairs objects. According to him, the objects are the unalterable substance of the world. They ‘contain the possibility of all situations’ (TLP 2.014). This point finds a characteristically Kantian expression later in the text, where Wittgenstein writes: ‘Empirical reality is limited by the totality of objects’ (TLP 5.5561). Wittgenstein compares the objects to the links of a chain: ‘In a state of affairs objects fit into one another like the links of a chain’ (TLP 2.03). It is essential for the links that they are capable of forming the chain, just as it is essential for the Lego bricks that they are capable of forming a miniature house. But importantly, by contrast to the necessity of the spatial form of the Lego bricks for the possibility of the miniature house, the miniature itself is contingent. There is nothing necessary about the particular way in which the bricks have been put together in this particular model, as they could have been combined differently too (TLP 2.0271). This means that ‘Whatever we can describe at all could be other than it is’, and in this respect ‘There is no a priori order of things’ (TLP 5.634).
요소들의 본질적 형식과 그것들의 우연적 배열 사이의 구분은 논고 속에서, 대상들의 내적 속성과 외적 속성들 사이의 구분과 함께 조정된다. 내적 특징들에 의해, 비트겐슈타인은 물음 속의 대상의 조합적 가능성을, 다시 말해, 사태 속에서의 대상의 가능한 발생들을 의미한다(TLP 2.0123, 2.01231). 그에 따르면, '어떤 속성을 지닌 대상이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고는 생각될 수 없다면, 그 속성은 내적이다' (TLP 4.123). 그리하여, 음의 본질적이고 내적인 속성은 그것은 어떤 높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TLP 2.0131). 대상들의 외적 속성들에 의해, 비트겐슈타인은 대상들이 나타나는 실제적 조합을 뜻하고자 한다. 그러나 본질적 발생과 우연적 발생의 차이에 대한 다른 방식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칸트주의적 구분을 언급함으로서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의 실체, 다시 말해, 대상들은 형식이고 내용이다(TLP 2.023, cf. 2.021, 2.024). 형식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대상들의 본질적이고 내적인 속성들을 지시하며, 달리 말해, 그것들의 조합적 가능성을 지시한다. 그리고 내용에 의해 그는 주어진 대상의 특정한 것을 존스톤의 방법을 빌려서 지시한다.
This distinction between the essential form of the elements and the contingent configuration made thereof is aligned, in the Tractatus, with the distinction between internal and external properties of objects. By internal properties, Wittgenstein means the combinatorial potential of the object in question, that is, the object’s possible occurrences in states of affairs (TLP 2.0123, 2.01231). According to him, ‘a property is internal if it is unthinkable that its object should not possess it’ (TLP 4.123). Hence, it is an internal, essential property of a note that it has some pitch (TLP 2.0131). By the object’s external properties, Wittgenstein means the actual combination in which the object happens to be. Yet another way in which the difference between the essential and the contingent arises is by reference to the Kantian distinction between form and content. According to Wittgenstein, the substance of the world, that is, objects, ‘is form and content’ (TLP 2.023, cf. 2.021, 2.024). By ‘form’ Wittgenstein indicates the essential, internal properties of the objects, in other words, their combinatorial potential. And by content he indicates ‘that which is particular for a given object’, to borrow Johnston’s (‘Symbols in Wittgenstein’s Tractatus’, 371) way of putting it.
2.1. ‘What is thinkable is possible too’ (TLP 3.02)
흥미롭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위에 제시된 요점들을 사고 가능성과 연관짓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Interestingly, Wittgenstein connects the above points to thinkability. He writes:
우리가 공간적 대상들을 결코 공간 바깥에서, 시간적 대상들을 시간 바깥에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그것과 다른 대상들과의 결합 가능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대상을 사태라는 연합 속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러한 연합의 가능성 바깥에서 생각할 수 없다. (p. 699)
Just as we are quite unable to imagine spatial objects outside space or temporal objects outside time, so too there is no object that we can imagine excluded from the possibility of combining with others. If I can imagine objects combined in states of affairs, I cannot imagine them excluded from the possibility of such combinations. (TLP 2.0121, see 2.013)
유사하게, 우리가 대상의 결여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내적 속성에 대한 그의 언급의 연관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푸른 색과 저 푸른색은 마땅히 더 밝고 더 어둡다는 내적 관계에 있다. 이 두 대상이 이러한 관계에 있지 않으리라고는 생각될 수 없다' (TLP 4.123)
Similarly, in connection with his remark of an internal property as one which we could not think of the object lacking, Wittgenstein writes: ‘This shade of blue and that one stand, eo ipso, in the internal relation of lighter to darker. It is unthinkable that these two objects should not stand in this relation’ (TLP 4.123).
일반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있는 언어의 가능성을 의미있는 생각의 가능성과 동등한 것으로 다룬다.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그리고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이다' 그것의 완전히 발달된 의미에서, 논고적 언어는 사고의 언어이며, 다시 말해 현실에 기대고 있는 발화자에 의해 투사되어졌던 의미있는 명제의 언어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 사고(Gedanke)가 프레게적인 추상적 존재자로, 즉, 같은 뜻을 표현하고 있는 모든 명제적 상징과 공통된 것으로, 그러면서도 심리적 연관은 없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진행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러한 해석에 의심을 드리운다. 4.01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쓴다 '명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은 현실의 모형이다.' 유사하게,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을 그린다(TLP 2.01)와 '오직 우리 스스로 구성한 것만을 우리는 예견할 수 있다'와 같은 진술들은 언어의 주체에 그림 그리기 활동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상상하기, 그림그리기, 그리고 구성하기와 같은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서두에 언급했던 상상된 사태들의 가능한 구성들로서의 대상의 앎에 의존하고 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쓴다. '사고는 그것이 생각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또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TLP 3.02)
In general, Wittgenstein treats the possibility of meaningful language as equivalent to the possibility of meaningful thought: ‘A logical picture of facts is a thought’ (TLP 3.1) and ‘A thought is a proposition with sense’ (TLP 4). In its full-blown sense, the Tractarian language is the language of thoughts, that is, of meaningful propositions that have been projected by the speaker onto reality.4 It has been claimed that Wittgenstein’s term ‘thought’ (Gedanke) ought to be understood as designating a Fregean abstract entity, namely, that which is common to all propositional signs expressing the same sense, with no connection to the mental.5 However, the way in which Wittgenstein continues the story casts some doubt on this interpretation. In 4.01 Wittgenstein writes: ‘A proposition is a model of reality as we imagine it’ (emphasis added). Similarly, the statements ‘We picture facts to ourselves’ (TLP 2.1) and ‘We can foresee only what we ourselves construct’ (TLP 5.556) seem to assign a significant role for the subject of the language in the act of picturing. Presumably such imagining, picturing, or constructing relies on that knowledge of the objects as possible constituents of imagined states of affairs which Wittgenstein mentions at the beginning of the Tractatus (TLP 2.0123–2.01231). Indeed, Wittgenstein writes: ‘A thought contains the possibility of the situation of which it is the thought. What is thinkable is possible too’ (TLP 3.02).
형식과 내용으로서의 세계의 실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은 언어에 대한 그의 다룸 속에서 수면으로 올라온다. 표현(상징)을 그것의 뜻을 특징짓는 명제의 부분으로 정의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진술한다. '표현은 하나의 형식과 하나의 내용을 특징짓는다.' (TLP 3.31, see also 3.3– 3.314, 3.34–3.3411). Heikki Kannisto는 명제의 요소들이 묘사된 사태들의 구성요소의 대리로 이해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논증한다. 먼저, 명제의 요소들은 대상을 오직 그것의 논리적 형식들 덕분에 대리한다. 이러한 형식들은 존속되는 형식으로서 이미 대상들과 대응한다(TLP 2.024). 그리하여, 명제는 그것이 실제 사실과 심지어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뜻을 지니며, 발화자에 의해 상상된 가능한 상황의 형식을 통해서만 그러할 수 있다(pp. 700-701). 두 번째 경우, 명제는 발화자에 의해 현실에 투영된다. 발화자는 특정한 사실에 명제를 적용하려고 의도하는데, 이를테면, 그녀의 앞의 탁자에 놓여 있는 특정한 시계에 그것을 적용하며, 그리하여 규정된 의미를 그녀의 명제의 구성요소에 준다(TLP 5.4733, See NB p. 70). 두 번째 경우, 명제의 구성요소는 형식들 뿐만 아니라 대상들을 나타내며, 그러나 형식과 내용으로서 나타낸다 (Kannisto, Thoughts and Their Subject, 87–96, 138–43). 주장된 명제는 그렇기에 형식과 내용을 같이 가져오는 칸트적 판단들과 유사하다.
Wittgenstein’s account of the substance of the world as form and content surfaces in his treatment of language too. Defining ‘expression’ (symbol) as a part of a proposition that characterizes its sense, Wittgenstein states: ‘An expression is the mark of a form and a content’ (TLP 3.31, see also 3.3– 3.314, 3.34–3.3411). Heikki Kannisto has argued that the elements of a proposition can be understood to stand for the elements of the pictured state of affairs in two ways. In the first case, the elements of a proposition stand for the objects solely in virtue of their logical forms. These forms already correspond to objects as subsisting forms (TLP 2.024). Hence, the proposition has sense even when it does not correspond to any actual fact but only to a form of a possible situation imagined by the speaker (TLP 2.01231). In the second case, the proposition has been projected onto reality by the speaker. The speaker intends the proposition to apply to a particular fact, for example, to that particular watch which is lying on the table in front of her, thereby giving determinate meanings to the constituents of her proposition (TLP 5.4733, see NB p. 70). In this second case, the constituents of the proposition refer to objects not merely as forms, but as form and content (Kannisto, Thoughts and Their Subject, 87–96, 138–43). Asserted propositions thus resemble Kantian judgements by bringing together form and content (CPR B 75).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심리주의적인 해석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옳다. 비트겐슈타인의 다룸의 핵심은 사고의 형식에 있지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의 내적 속성들을 안다는 대상의 앎으로 충분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오그든에게 설명했듯이, 나는 그것을 알지만,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OL, 59). 나는 대상들의 외적 속성들을 알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명제 속에서 나는 오직 대상의 조합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는 실험의 방식을 통해 상황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TLP 4.031). 대상의 실제 조합들은 그것이 우리가 명제의 진리값과 연관되는 한에서만, 오직 관련될 수 있다-비트겐슈타인의 전체 작업을 위한 그보다 덜 관련있는 연관.
Nevertheless, the nonmentalistic interpretation gets things right in one important respect. The focus of Wittgenstein’s treatment is on the form, not the content, of thought. It is enough for knowledge of objects that I know their internal properties. As Wittgenstein explains to Ogden: ‘I know it but I needn’t know anything about it’ (OL, 59). I do not need to know the objects’ external properties, because in a proposition I can ‘construct [a situation] by way of experiment’ relying solely on the objects’ possibilities of combination (TLP 4.031). The objects’ actual combinations become relevant only insofar as we are concerned with the proposition’s truth value (TLP 4.024) – a concern less relevant for Wittgenstein’s overall project (TLP 4.11– 4.111, 4.113).
세계의 실체로서 대상에 부여된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대상들은 언제나 사실의 구성요소들로 주어지지, 독립된 존재자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세계에 대한 신조는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는 것이다(TLP 1.1).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물들은 그것들이 가능한 상황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에서 독립적이지만, 이러한 독립의 형식은 사태들의 연관 형식이며, 의존의 형식이다(2.0122). (사물은 그것이 모든 가능한 상황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한 자립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립의 형식은 사태와의 연관 형식, 즉 비자립의 형식이다.) 레고 비유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느슨한 레고 블록들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레고 미니어쳐로서의 세계를 마주하며, 심지어 우리가 그것이 미니어쳐 임을 안다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그러한 블록들로 해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라도 그러하다. 대상들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그것들의 상호간의 조합 가능성이다. 이제, 사실들은 구조를 지닌 대상들의 조합들로서 존재하며, 구조가 있는 곳은 단지 서로가 '사태 속에서 대상들이 연관되어 있는 방식을 의미한다(TLP 2.032). 그러한 구조는 대상들을 구성하는 형식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능성이다. 형식은 구조의 가능성이다(TLP 2.033) 그리하여, 우리가 세계를 사실들의 총체로 마주하는 반면,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은-명제들, 사태들, 언어, 세계도 마찬가지로- 형식을 갖으며, 이 형식은 대상들의 형식들 속에 기초로 서 있다(TLP 4.122-4.124).
Despite the important role assigned to objects as the substance of the world, objects are always given as constituents of facts, never as isolated entities. Hence, Wittgenstein’s doctrine of the world as the ‘totality of facts not of things’ (TLP 1.1). According to Wittgenstein, ‘things are independent in so far as they can occur in all possible situations, but this form of independence is a form of connection with states of affairs, a form of dependence’ (TLP 2.0122). To continue with the Lego analogy, we encounter the world as Lego miniatures rather than loose Lego bricks, even if we know that the miniatures could, in principle, be deconstructed into such bricks. What is essential for objects is their possibilities of combining with each other. Now, facts are existing combinations of objects that have structure, where ‘structure’ just means ‘the determinate way in which objects are connected’ with one another (TLP 2.032). Such structure is made possible by the forms of the constituent objects (TLP 2.033). Hence, while we encounter the world as the totality of facts, and while these facts – as well as propositions, states of affairs, language, and the world – have form, this form is grounded in the forms of the objects (TLP 4.122–4.124).
사실들의 총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정의는 언어를 포함한다. 명제들은, 어떤 종류의 그림들로서, 사실들이다(TLP 2.141, 3.14). 비트겐슈타인은 쓰기를, '명제는 낱말들의 혼합물이 아니다.-(음악적 테마가 음들의 혼합물이 아니듯이.) 명제는 분절되어 있다'(TLP 3.141)라고 하고 있다. 개개 스케일의 음조는 테마를 형성할 수 잇는 능력을 갖는데, 그 이유는 음조들이 상호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그러한 까닭에 특정한 조합적 가능성들을 갖기 때문이다(pp. 701-702). 논리적 공간을 갖는 논고의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테마는 음악적 공간을 갖는다(TLP 1.13, 2.11, 2.202).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음조 그 자신과 독립적인 공간은 없으며, 이것이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비유의 요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대상들이 도입되어지는 빈 논리적 공간은 없다. 대신에, 논리적 공간은 대상들 그 자신의 내적 속성들에 의해 구성된다. 논리적 공간의 장소는 '구성요소들만의 존재에 의해 [즉 뜻이 있는 명제의 존재에 의해서] 보증된다(TLP 3.4). 다시 한번, 대상들과 사태들 사이의 독립성은 그저 논고의 문맥 원칙의 형식 속에서 언어의 레벨로 나타나는 것으로 서술된다. 명제의 단순 요소들, 이름들은 묘사되는 사태들의 대상들을 대리하며, 오직 명제의 문맥 속에서만 대리한다(TLP 3.327). 명제의 그러한 문맥적 사용 없이는, 이름들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기호는 기호의 논리적, 구문론적 사용과 더불어서만 비로소 논리적 형식을 확정한다.' (TLP 3.327). 상징들의 사용을 명제들의 집합 속 그것들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는 이와 대조적으로, 나는 '상징의 논리적-구문론적 사용'을 그것이 서 있는 대상의 형식에 따르는 명제에서의 사용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Wittgenstein’s definition of the world as the totality of facts is meant to include language. Propositions, as any pictures, are facts (TLP 2.141, 3.14). Wittgenstein writes, ‘A proposition is not a blend of words. – (Just as a theme in music is not a blend of notes.) A proposition is articulate’ (TLP 3.141) The individual notes of a scale are capable of forming a theme because the notes are related to one another in certain ways and hence have certain combinatorial possibilities. Just like the Tractarian facts that belong to a logical space, the theme belongs to a musical space (TLP 1.13, 2.11, 2.202). But importantly, there is no space independent of the notes themselves, and this I take to be the point of Wittgenstein’s comparison. There is no empty logical space into which objects are introduced. Rather, logical space is constituted by the internal properties of the objects themselves: a place in the logical space is ‘guaranteed by the mere existence of the constituents’ (TLP 3.4). Again, the interdependence between objects and states of affairs just described emerges at the level of language in the form of the Tractarian context principle. The simple elements of a proposition, names, stand for the objects of the pictured state of affairs only in the context of that proposition (TLP 3.327). Without such contextual use in a proposition, names do not have meaning: ‘A sign does not determine a logical form unless it is taken together with its logico-syntactical employment’ (TLP 3.327). By contrast to those who understand the use of signs in a broad sense of their use in a set of propositions, I take the ‘logico-syntactic employment of the sign’ to be its employment in a proposition in accordance with the form of the object for which it stands.
묘사 형식들의 앞선 예시들을 떠올려보자: 레고 블록의 공간적 형식은 빌딩의 표상을 허용하며, 음악적 작업의 공유된 공간적 형식과 그것의 레코딩, 그리고 그림그리기의 매체와 그것의 주제에 의해 공유된 색채. 이러한 형식들-공간과 시간이 칸트의 직관의 필연적 형식들로서 초월적 미학과 유사한-은 논고에서 대상들의 형식들로 언급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과 색깔(채색성)은 대상들의 형식들이다'(TLP 2.0251). 이는 논고의 대상들이 색채를 갖고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장소를 점유하는 일반적인 보통-크기의 대상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논고의 대상들은 그저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고 그렇기에 파괴될 수 없는 것들(TLP 2.023)이 아니라, 그것들은 또한 완전히 단순하다(복합체가 아니며, 더 단순한 구성요소들로 분석될 수 없다). (TLP 2.02, 2.021). 비트겐슈타인이 스스로 대상들의 어떠한 예시도 주는 것을 거부한 반면(TLP 4.221, 5.55), 내가 사용하려는 예시들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내적 속성의 관념을 음과 그것의 높이를 언급함으로써 보여주었다. 이에 더해, 일기에서, 그리고 그의 유일한 전기 시절 설명에 대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적인 철저한 검토 속에서 노트와 색채는 논고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상들의 역할을 한다(pp. 702-703).
Recall the previous examples of pictorial forms: the spatial form of Lego bricks allowing the presentation of a building, the shared temporal form of a musical work and its recording, and colour as the shared medium of a painting and its motif. These forms – of which space and time are familiar from Kant’s transcendental aesthetic as the necessary forms of intuition7 – are mentioned in the Tractatus as forms of objects. According to Wittgenstein, ‘Space, time, and colour (being coloured) are forms of objects’ (TLP 2.0251). This does not mean that the Tractarian objects are ordinary mid-sized objects that are coloured and located in space and time. The Tractarian objects are not just ‘unalterable’ and hence indestructible (TLP 2.023), they are also absolutely simple (not composite, analysable into further constituents) (TLP 2.02, 2.021). While Wittgenstein himself refuses to give any examples of objects (TLP 4.221, 5.55), the examples I have used are not arbitrary. Wittgenstein himself illustrates the notion of an internal property by reference to a note and its pitch. Moreover, in the Notebooks and in Wittgenstein’s later critical scrutiny of his own earlier account notes and colours figure as examples of objects satisfying the Tractarian requirements.8
논고의 대상들의 본성은 차치하고, 얻을 수있는 핵심 요점은 그림 그리기의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공유된 묘사 형식의 아이디어와 이에 따른 의미의 [형식이다]. 모사된 사태들의 대상들을 구성 대상들을 대표하는 요소들에 더하여, 그림의 요소들은 반드시 결합된 것으로 상상되는 그려진 사태들의 요소들의 방식으로 함께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TLP 2.151). 모사 형식은 사물들이 그림의 요소들처럼 서로 관계 맺고 있을 가능성이다. (2.151) 이것은 묘사하는 것과 묘사된 것이 공유하는 형식에 의해 가능해진다. 우리가 한번 그저 리허설된 것(공간적인, 시간적인, 그리고 색채를 가진 것)과 같은 예시를 상상할 때 이러한 공유된 형식의 요구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러한 예시는 왜 비트겐슈인의 유명한 주장인 '그림은 그것의 묘사형식을 모사할 수 없다'(TLP 2.172)라는 주장이 나왔는지에 대해 동등하게 이해하게 쉽게 만든다. 뉴욕 전체의 미니어쳐 모델을 짓기 위해 충분한 양의 레고 블록들이 제공되는 것이 가능한 반면, 어떤 레고 블록의 양도 공간성의 표상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공간성은 오직 미니어처를 통해 보여진다(TLP 2.172)
Setting aside the nature of Tractarian objects, the main point to bring home is the idea of the shared pictorial form as a necessary condition of picturing and accordingly of sense. In addition to elements standing for the constituent objects of the depicted state of affairs, the elements of the picture must be capable of combining together in the way in which the elements of the pictured state of affairs are imagined to be combined (TLP 2.151). This is made possible by the form shared by the picture and the pictured. It is easy to understand this requirement of shared form when we think of examples such as the ones just rehearsed (the spatial, the temporal, and the coloured one). These examples make it equally easy to understand why Wittgenstein famously claims that ‘A picture cannot … depict its pictorial form’ (TLP 2.172). For while it is possible, provided there are enough Lego bricks, to build a miniature model of the whole of New York, say, no amount of Lego bricks will help in the representation of spatiality itself. Spatiality will only be displayed by the miniature (TLP 2.172).
3. ‘Logic is transcendental’ (TLP 6.13).
지금까지는,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주의가 이 이야기에 불가피하게 개입될만한 이유가 없다. 물론, 지금까지 언급된 특징들, 이를테면 사고와 현실 사이의 동형론, 형식과 내용 사이의 구분,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사이의 구분,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간헐적인 언급들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사태의 형식적 속성에 대한 통찰의 원천으로서의 사고 가능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심 등은 뚜렷하게 칸트주의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칸트주의적 작업의 암시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기반할 때 이러한 특징들을 단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을 초월적 관념론자로 해석하거나, 사고를 넘어서는 세계의 존재론의 선제성을 주장함으로써 실재론적 해석이 주어져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령 사고와 현실 사이의 동일성마저도, 초월론적 관념론자의 관점으로 선언되는 하오 탕에 의해 여겨지는, 실재론을 마찬가지로 지지하는 논증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Tang 2011, 598) 그러나 내 해석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분명하게 칸트주의로 만드는 것은 다음 스텝이다.
So far, I think, there has not been anything unavoidably Kantian about the story. To be sure, the features mentioned so far, such as the isomorphism between thought and reality, the distinction between form and content, between the necessary and the contingent, the intermittently surfacing references to space and time, and Wittgenstein’s appeal to thinkability as a source of insight into the formal properties of states of affairs have a distinctly Kantian ring and have indeed been read as indications of the Kantianism of the work. Yet, based on the text it is difficult to take these features alone as committing Wittgenstein to transcendental idealism, as they could be given a realistic interpretation by insisting on the priority of the world’s ontology over thought. 9 Even the identity of form between thought and reality, declared as a transcendental idealist insight by Hao Tang, may be used as an argument for realism as well (Tang 2011, 598). However, what in my reading makes Wittgenstein’s story distinctly Kantian is the next step.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떤 그림이든, 그것이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건 간에, -옳게 혹은 그르게- 모사하기 위해 현실과 반드시 공유해야만 하는 것은 논리적 형식, 즉 현실의 형식이다. (TLP 2.18) 모든 가능한 그림들과 이에 따라, 모든 가능한 문장들 혹은 사고들이 의미를 갖기 위해 현시해야만 하는 묘사형식은 논리적 형식이다(pp 703-704). 따라서 모든 그림들이 공간적인 것이 아닌 반면, 모든 공간적 그림은 논리적인 그림이어야만 한다 (TLP 2.182). 내가 색깔의 매체의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말 속에 그림을 묘사하는 반면, 나는 묘사형식이 현실의 형식일 경우 묘사형식의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현실은 명제들과 사고들을 포함하는 사실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Wittgenstein writes: ‘What any picture, of whatever form, must have in common with reality, in order to be able to depict it – correctly or incorrectly – in any way at all, is logical form, i.e. the form of reality’ (TLP 2.18). The pictorial form that any possible picture and, accordingly, any possible proposition or thought must manifest to have sense is logical form. So while not every picture is spatial, every spatial picture must also be a logical one (TLP 2.182). While I can step outside the medium of color, say, and describe a painting in words (perhaps by reference to a coordinate system and a color chart with codes assigned to each shade of each color, cf. PI § 48), I cannot step outside a pictorial form if this pictorial form is the form of reality itself. And here, again, reality means the totality of facts including propositions and thoughts.
따라서 나는 명제들을 수단으로 하여, 모든 가능한 사태들을 표현할 수 있다. 실제 사실 뿐 아니라 상상 가능한 모든 사태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모든 상상가능한, 우리의 모든 표현의 묘사적 형태가 묘사의 논리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TLP 4.015)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는 나의 의미있는 사고를 생각하는 능력 만큼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사태들과 그것을 그리는 명제들이 공유하는 형식이다. 이것이, 내가 보기에, 그가 칸트적 해결책을 말할 때의 비트겐슈타인의 의중이다. 나는 만일 그러한 형식이 맨 처음에 언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라면 언어의 형식을 묘사할 수 없다. 공간성이 공간적으로 표상되지 않고 대신에 공간적 구성물 속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언어와 현실에 의해 공유되는 형식은 언어 안에서 보여질 뿐 언어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로는, '명제는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 없다. 논리적 형식은 명제에서 반영된다. 명제는 현실의 논려적 형식을 보여 준다'(TLP 4.121.)
I can thus express, by means of propositions, every possible state of affairs. Not just the facts that do as a matter of fact obtain, but every imaginable state of affairs. This is because ‘[t]he possibility of all imagery, of all our pictorial modes of expression, is contained in the logic of depiction’ (TLP 4.015). In this respect language reaches as far as my very ability to think meaningful thoughts. But what I cannot do is to express the form shared by these states of affairs and the propositions that picture them. This, I take it, is Wittgenstein’s point when he writes that ‘the limit of language manifests itself in the impossibility of describing the fact that corresponds to […] a sentence without simply repeating the sentence’ and connects this point to the Kantian solution of the problem of philosophy (CV p. 13). I cannot describe the form of language if that form is a necessary condition for language to make sense in the first place. Just as spatiality cannot be represented spatially but is displayed in spatial constructions, the form shared by language and reality is displayed in language and not expressible by it. In Wittgenstein’s words, ‘Propositions cannot represent logical form: it is mirrored in them. […] Propositions show the logical form of reality.’ (TLP 4.121.)
이것이 말하는 바는 논리가,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이해된 바로는, 언어 혹은 사고의 규칙들을 다루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것의 구성요소로서 사태들의 근저를 이루는 가능한 사태들과 대상들을 다룬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사태와 그것의 구성요소인 대상들의 형식적, 본질적, 내적 속성들을 다룬다. 이러한 내적 속성들은 명제 혹은 사고의 구조적 속성 속에서, 다시 말해 아직까지 필연적으로 현실에 투영되지 않은 명제들 속에서 반사된다(반영된다, 보여진다, 현시된다)(TLP 4.122–4.125, 3.13). 이것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본질적 연관이며, 비트겐슈타인이 TLP 4.03에서 가져온 것이다. 논리의 명제 스스로는 경험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 논리적 항수는 서로 다른 문장의 구조들 사이의 진리함수적 관계의 개념 속에서 사용되며, 그 자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TLP 4.0312). 대신에, 논리의 명제는 동어반복이며, 그것은 어떤 경험적 사태도 그리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뜻이 없다. 그러나, 동어반복은 무의미하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 자신의 형식을 보여준다/드러낸다(pp. 704-705). 엄밀하게 동어반복으로서 경험적 내용으로부터 추상된 논리적 명제는 세계의 형식적-논리적-속성들을 보여준다(TLP 6.12, see 6.124).
This is to say that logic, as understood by the early Wittgenstein, does not only treat the rules of language or thought. It also treats possible states of affairs and the objects that ground those states of affairs as their constituents.10 More specifically, it treats the formal, essential, internal properties of the states of affairs and their constituent objects. These internal properties are mirrored (reflected, displayed, ‘made manifest’) in the structural properties of propositions or thoughts, that is, in propositions that have not yet necessarily been projected onto reality (TLP 4.122–4.125, 3.13). This is the essential connection between language and the world, brought up by Wittgenstein in TLP 4.03. Propositions of logic themselves are empty of empirical content. The logical constants that are used in the notation of the truth functional relations between different sentential structures, do not themselves refer to anything (TLP 4.0312). Instead, the propositions of logic are tautologies, they do not picture any empirical states of affairs. Accordingly, they do not have sense (they are ‘sinnlos’, ‘directionless’). Yet, tautologies are not nonsensical (‘unsinnig’), as they show or display their own form. (TLP 4.46– 4.462) Precisely as tautologies, abstracted away from empirical content, the propositions of logic ‘show the formal – logical – properties of the world’ (TLP 6.12, see 6.124).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예시는 다시 한번 음악의 영역에서 유래한다. 그는 음악적 아이디어과 그것의 녹음, 그리고 음파를언급함으로서 그러한 관념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이 네 가지는 '모두 서로에 대해 언어와 세계 사이에 있는 저 내적인 모사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하게도, 이 예시에서, 네 가지 현상 중 무엇이 그림이고 그려진 것인지에 관한 것은 분명하지도, 심지어 의미 있지도 않다. 의미 있는 것은 그저 '묘사 특징의 본성', 즉 네 가지 사이의 내적 연관이다(TLP 4.013). 비트겐슈타인이 설명하듯이, '그것들은 모두 공통적인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TLP 4.014) 실제로,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와 세계 사이에 유지되는 모사의 내적 관게를 언급할 때, 그는 오직 언어와 세계의 형식만을 언급하고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Wittgenstein’s example of the relation between language and the world is (again) from the realm of music. He illustrates the notion by referring to a musical idea, a recording of it, the score, and the sound waves. According to him, all four ‘stand to one another in the same internal relation of depicting that holds between language and the world’ (TLP 4.014). But importantly, in this example, it is not clear or even relevant which of the four phenomena are pictures and which the pictured. What is relevant is just the ‘essence of [the] pictorial character’, namely, the internal relations between the four (TLP 4.013). As Wittgenstein explains, ‘They are all constructed according to a common logical pattern’ (TLP 4.014).11 In fact, it seems that here, when Wittgenstein mentions the ‘inner relation of depicting that holds between language and the world’, he is only referring to the form and not the content of language and the world.12
사고가 논리적 형식을 보여 주어야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논리가 사고의 구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비논리적 사고의 불가능성이 따라나온다.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TLP 3.03) 이에 더해, '논리를 선험적으로 만드는 것은 비논리적 사고의 불가능성에 있다(TLP 5.4731). 프레게의 생각과 대조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가능한 명제가 합법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TLP 5.4733). 논리에서는 오류가 없다: 논리 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TLP 5.473). 이러한 언급은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논리적 형식이 세계의 형식에 앞서 있다고 가정했다면 이해할 수 있어진다. 사고와 세계의 형식 사이의 동일성이 다른 방식으로 보증되는 것을 알기란, 나의 사고의 능력으로는 알기 어렵다. 만약 세계의 형식이 사고의 형식보다 앞서 있고, 사고의 형식을 만들어 낸다면, 필연적인 것, 즉, 논리는 우연적이고 믿을 수 없는 과정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헌신들, 이를테면 인과 법칙에 대한 믿음은 다름이 아니라 미신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과 같은 것의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매우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TLP 5.1361) 다른 유일한 대안-전체 물음에 대한 회피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면-은 사고와 형식 사이의 공유된 형식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다(Kannisto, Thoughts and Their Subject, 125). 다른 설명은 논리적 형식의 암시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사고 가능성에 대한 어필과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에서, 심지어 상상적인 세계도 실제 세계와 공유된 형식을 갖는다: '현실 세계와 아무리 상이하게 생각된 세계조차도 현실 세계와 어떤 것-형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TLP 2.022). (pp. 705-706)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로서의 논리를 궁극적으로 세계의 한계와 동일시했다는 것은 따라서, 그다지 놀라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논리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기도 하다.'(TLP 5.6, 5.61)
That thoughts must exhibit logical form to have sense means that logic is constitutive of thought. From this it follows that it is impossible to think illogically: ‘Thought can never be of anything illogical, since, if it were, we should have to think illogically’ (TLP 3.03). Moreover, ‘What makes logic a priori is the impossibility of illogical thought’ (TLP 5.4731). Contrasting his view to that of Frege, Wittgenstein claims that every possible proposition is legitimately constructed (TLP 5.4733). There are no mistakes in logic: whatever is possible in logic is also allowed (TLP 5.473). These remarks become understandable if Wittgenstein assumed, like Kant, that the logical form of thought is prior to the form of the world. It is hard to see what else could guarantee the identity of the form of the world and thought, necessary for my very ability to think. If the form of the world were prior to and produced the form of thought, then that which is necessary, namely logic, would rest on a contingent and as such unreliable process. Such a view seems highly unsatisfactory in light of Wittgenstein’s other commitments, such as his claim about superstition being nothing other than belief in the causal nexus (TLP 5.1361). The only other alternative – unless we want to sidestep the entire question – is that the shared form between the world and thought is a mere coincidence (Kannisto, Thoughts and Their Subject, 125). Neither explanation seems compatible with Wittgenstein’s appeal to thinkability as an indication of logical form. In Wittgenstein’s account, even an imaginary world would have form in common with this world: ‘It is obvious that an imagined world, however different it may be from the real one, must have something – a form – in common with it’ (TLP 2.022). For this reason it is also impossible for me to step outside of this form. It should not come as a surprise, then, that Wittgenstein identifies logic as the limit of language and ultimately as the limit of the world. He writes: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And: ‘Logic pervades the world: the limits of the world are also its limits’ (TLP 5.6, 5.61).
칸트에게 있어, 우리의 경험과 세계에 의해 공유된 형식을 다루는 종류의 논리는 선험적인 것으로 알려지며 초월적이라 불린다. 초월적 논리학은 인지의 내용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지, 인지와 그것의 대상에 의해 공유된 형식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CPR A 55–57).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문제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논리는 학설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는 초월적이다(TLP 6.13). 그것은 의미의 가능성의 필연적 조건을 다룬다. 그것은 명제의 내적, 형식적 속성들을 다루며 그 명제가 묘사한 사태들을-그것들의 경험적 내용은 도외시하는 반면- 다룬다. 이러한 논리적 형식은 보편적이며, 모두를 아우른다.
For Kant, the kind of logic that treats the form shared by our experiences and the world and is known a priori is called transcendental. Transcendental logic abstracts from the content of cognition, but not from the form that is shared by the cognitions and their object (CPR A 55–57). This is how Wittgenstein puts the matter as well. He writes: ‘Logic is not a body of doctrine, but a mirror-image of the world. Logic is transcendental’ (TLP 6.13). It treats the necessary conditions for the possibility of sense. It treats the internal, formal properties of propositions and the states of affairs they depict while setting aside their empirical content. Such logical form is universal, ‘all-embracing’ (TLP 5.511).
4. ‘The subject … is a limit of the world’ (TLP 5.632)
이러한 문맥 아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또 다른 특징적인 칸트적 움직임을 내딛는다. 그는 세계의 한계를 앞서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 언어와 논리의 한계와 같은 것으로 여기고, 또한 주체의 한계로 여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의 한계이다'(TLP 5.632)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주체가 경험적 의미에서의 인간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재빨리 강조하고 있다. 물음 속의 주체는 우리가 세계 속의 사실들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는 심리적, 물리적 존재자가 아니다. 대신에, 주체는 형이상학적 주체이며, 연장을 갖지 않는 점이다. 그것은 경험되는 것으로서의 세계의 조건이며, 다른 사실들 사이의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노트북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주체를 '세계의 전제'라 칭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논리적 형식과 다시 한번 연관짓는다(TLP 5.632-5.641; NB, 73, 79-80). 따라서 초월적 주체를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중 하나라 말함으로써 지성의 필연적 범주들과 연결시켰던 칸트와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주체를 사고와 현실이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과 연관짓는다(CPR A346/B404, A 341/B399).
In this context, Wittgenstein makes another characteristically Kantian move: he equates the limit of the world, previously equated with the limit of language and of logic, with the subject. He writes: ‘The subject does not belong to the world: rather, it is a limit of the world’ (TLP 5.632). Wittgenstein is quick to stress that he is not referring to the human subject in an empirical sense. The subject in question is not the physical or psychological entity we find among the facts of the world. Instead, the subject is the metaphysical subject, a point without extension. It is a condition of the world as experienced, rather than a fact among other facts. Indeed, in the Notebooks, Wittgenstein calls the metaphysical subject a ‘presupposition of the world’ thereby associating it yet again with logical form. (TLP 5.632–5.641; NB, 73, 79–80). So just like Kant who connects the transcendental subject to the necessary categories of understanding, stating that in a sense it is one of them, Wittgenstein connects the metaphysical subject to logical form shared by thought and reality (CPR A346/B404, A 341/B399).
대다수의 논평자들은 논리적 형식과 형이상학적 주체 사이의 연관을 다루기를 주저해왔다. 피터 해커는, 그의 중대한 Insight and Illusion에서, 칸트와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이 내성 속에서 주체를 맞딱드릴 수 없다는 것을 취했으며, 이것이 본질적이며, 경험의 우연적 특성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반면에 모든 경험은 우연적이며 후험적이고, 그것이 나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선험적이다(cf. TLP 5.631, 5.634). 해커는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형이상학적 주체의 중심적 메타포를 매우 칸트주의적인 형이상학적 주체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던 쇼펜하우어로부터 어떻게 적용했는지(즉, 한계, 세계의 전제, 시야 속의 눈) 보여 준다(pp. 706-707). 그러나, 해커가 형이상학적 주체와 윤리의 연관을 윤리적으로 연관된 의지가 형이상학적 주체와 동일하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명백한 것으로 만드는 반면, 그는 논리적 형식과의 연관을 여전히 침묵속에 남겨 둔다. 이것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논리와 윤리가 같은 차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놀라운 일이다. 논고에서, 양자는 모두 초월적이다(TLP 5.6321, 6.13). 일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윤리, 그리고 형이상학적 주체를 세계의 조건들이라 서술한다(NB: 77, 79) 다른 관점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칸트주의적 독해와 쇼펜하우어의 명상의 독립적인 영향을 옹호하는 한스-요한 글록마저도,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과 ㅏㄴ트 사이의 대조를 강조한다. 글록의 설명에 따르면, 칸트가 형이상학적 주체를 현실의 형식의 근원으로 설정하는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사고 혹은 언어의 형식을 오직 인식적으로 현실의 형식에 앞선 것으로 여긴다. 무어는 언어의 한계와 주체 사이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연관을 초월적 관념론의 다른 버전을 표현한 것으로 다룬다. 그러나 그는 주체에 대해서는 그만치 말하지 않고 있다.
Most commentators have been reluctant to address this connection between logical form and the metaphysical subject. Peter Hacker, in his seminal Insight and Illusion, notes that like Kant Wittgenstein takes the nonencounterability of the self in introspection to be ‘an essential, not a contingent feature of experience’. While all my experiences are contingent and a posteriori, that they belong to me is a priori (cf. TLP 5.631, 5.634). Hacker also shows how Wittgenstein adopts his central metaphors for the metaphysical subject (i.e. the limit, the presupposition of the world, and the eye in its visual field) from Schopenhauer, whose account of the metaphysical subject was heavily Kantian. However, while Hacker (Insight and Illusion, 90) makes the connection between the metaphysical subject and ethics explicit, claiming that the ethically relevant will is identical with the metaphysical subject, he remains silent about the link to logical form. This is surprising given that, for the early Wittgenstein, ethics and logic seem to stand on an equal plane. In the Tractatus, both are called transcendental (TLP 5.6321, 6.13). In the Notebooks, Wittgenstein describes ethics, logic, and the metaphysical subject ‘conditions of the world’ (NB: 77 & 79). Even Hans-Johann Glock, who in other respects has defended the Kantian reading of Wittgenstein’s early philosophy and also independently of Schopenhauer’s mediation, here emphasizes the contrast between Wittgenstein and Kant. In Glock’s account, while Kant took the metaphysical subject to be the origin of the form of reality, Wittgenstein took the form of thought or language to be prior to the form of reality only epistemically (Glock, ‘Kant and Wittgenstein’, 296).13 Moore (‘Was the Author of the Tractatus a Transcendental Idealist?’, 241) mentions the connection between the limit of language and the subject and treats this connection as expressing a version of transcendental idealism. However, he does not say much more about the subject either.
Kannisto는 논리적 형식과 형이상학적 주체를 동치시킴으로써 이러한 규칙의 예외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논리와 주체 모두를 한계 개념으로 특징짓는 비트겐슈타인의 용법과 일치한다. 그것은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문제, 즉,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윤리와 논리 사이의 연결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간단 명료한 주장인 모든 상상가능한 세계의 형식이 우리 사고를 구성하는 논리적 형식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가능한 세계를 관통하는 논리적 형식의 불변성은 이러한 형식이 -선과 악과 마찬가지로- 주체를 관통해 지나간다에 대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순수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만약 모든 상상 가능한 세계의 불변하는 실체의 형식에 대해 제공하는 주체가 없다면, 쌍둥이 지구와 같은 곳의 대안적인 논리적 형식들을 발견할 가능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Kannisto (Thoughts and Their Subject, 150) makes an exception to the rule by equating the metaphysical subject with logical form. This is consistent with Wittgenstein’s usage of the notion of a limit to characterize both logic and the subject. It also serves to explain Wittgenstein’s otherwise perplexing bond between ethics and logic. Most importantly, it offers an explanation of Wittgenstein’s straightforward claim that the form of any imaginable world must be the very logical form that is constitutive of our thought. After all, the constancy of logical form across all possible worlds would remain a sheer mystery unless the reason for this is that this form – like good and evil – ‘enters through the subject’ (NB, 79). If there were no subject who provided the form of the unalterable substance of any imaginable world, there would be no reason to deny the possibility of finding alternative logical forms somewhere on some Twin Earth.
Peter Sullivan은 드라마틱하게 다른 독해를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논고는 실제로 형이상학적 주체의 개념을 언어의 한계와 연결지으며, 그리함으로써 초월적 관념론을 나타내는 방식을 따른다. 그러나, 관념론자의 관점을 지지하는 대신에, 비트겐슈타인의 목표는 형이상학적 주체의 관점에서 보이는 제한사항으로서의 언어의 한계에 관한 사고의 혼동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Sullivan의 관점에서, 초월적 관념론으로서의 논고의 독해는 우리를 대안적 인지로 초대하는 세계와 언어 사이의 조화에 대한 대상-근거적인 설명에서부터 기인한다(pp. 707-708). 그러나 Sullivan이 지적하듯이, 조화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은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논리의 자립성을 약화시킨다 대신에, 우리는 '형식적 총체성들에 대한 상호의조전인 관념들'로서 세계와 언어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언어가 초월적 관념론에 의해 전파되는 의미에서의 유일한 언어인가와 같은 물음을 차례차례 무마시킨다. 공허와 형식성은 같이 간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허는 형이상학적 주체와 논리적 형식를 붙잡는다.
Peter Sullivan offers a dramatically different reading. According to Sullivan, the Tractatus does indeed connect the notion of a metaphysical subject with the limit of language and does so in a way indicative of transcendental idealism. However, instead of endorsing the idealist view, Wittgenstein’s goal is to expose it as a confusion of thinking about the limits of language as limitations, seen as such from the viewpoint of the metaphysical subject. In Sullivan’s view, the reading of the Tractatus as a work of transcendental idealism stems from an object-based explanation of the coordination between language and the world, which ‘invites us to conceive of alternatives’ (‘The Truth in Solipsism’, 205). But as Sullivan points out, a metaphysical explanation of the coordination would undermine the independence of logic from experience (‘The Truth in Solipsism’, 207). Instead, we ought to see language and the world as ‘interdependent notions of formal totalities’, which in turn disarms the question, whether language is the only language in the sense propagated by transcendental idealism (‘The Truth in Solipsism’, 209). ‘Emptiness and formality go together’, he writes. And this emptiness holds for the metaphysical subject and logical form alike (‘The Truth in Solipsism’, 211).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 대상들의 상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Sullivan의 논지에 동의한다. 단순하고 대체될 수 없는 대상은 언어적 지반으로부터 드러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TLP 2.0211 and 3.23). 이에 더해, 나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조화에 지반을 놓는 일이 만일 그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의 설정에 기대고 있다면 형이상학적일 수 없으리라는 데 역시 동의한다. 왜 그렇지 않은 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설명을 철학과 윤리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통해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I agree with Sullivan that Wittgenstein’s argument does not begin with the postulation of objects. The need to evoke simple and unalterable objects arises from semantic grounds (TLP 2.0211 and 3.23). Moreover, I agree that the grounding of the coordination between language and the world cannot be metaphysical if that means appealing a set of independently existing objects. The connection between language and the world is formal. Yet, I do not think it follows that the limit of language is simply the target of Wittgenstein’s argument. To see why not, we need to broaden our exposition to Wittgenstein’s remarks about philosophy and ethics.
5. ‘Philosophy is not one of the natural sciences’ (TLP 4.111)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하게도 언어의 한계에 대한 관념을 철학의 활동과 연관짓는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작업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TLP 4.114, see also 4.113).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보아 왔듯이, 논리가 사고의 구성물이고 논리 속에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면, 요점은 무엇인가? 이곳에서 철학적 한계 설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 스스로도 이 긴장을 인정하고 있다.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Wittgenstein famously connects the notion of the limit of language to the practice of philosophy. According to him, the task of philosophy is to ‘set limits to what can be thought’ (TLP 4.114, see also 4.113). But if, as we have seen, logic is constitutive of thought and if there are no mistakes in logic, then what is the point? Whence does the need for the philosophical setting of limits arise? Wittgenstein himself acknowledges this tension. In the preface he writes:
이 책은 그러므로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또는 차라리, 생각이 아니라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면 우리는 이 한계의 양쪽 측면을 생각할 수 있어야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The aim of the book is to draw a limit to thought, or rather – not to thought, but to the expression of thoughts: for in order to draw a limit to thought, we should have to find both sides of the limit thinkable (i.e. we should have to think what cannot be thought). (TLP, 3)
사고할 수 없는 것을 사고하는 것이 명백하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러므로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 다시금:
Given that ‘thinking what cannot be thought’ is obviously impossible, Wittgenstein suggests the following: ‘It will therefore only be in language that the limit can be drawn, and what lies on the other side of the limit will simply be nonsense’ (TLP, 3). Again:
우리는 논리학에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즉 이것과 이것은 세계 내에 존재하고, 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외견상 그것은 우리가 어떤 가능성들을 배제한다고 전제하게 될 터인데, 이는 사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논리는 세계의 한계들을 넘어가야만 할체니까; 요컨대 만일 논리가 이 한계들을 다른쪽으로부터 고찰할 수 있다면 말이다(pp. 708-709).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 … ] we cannot say in logic, ‘The world has this in it, and this, but not that.’ For that would appear to presuppose that we were excluding certain possibilities, and this cannot be the case, since it would require that logic should go beyond the limits of the world; for only in that way could it view those limits from the other side as well. We cannot think what we cannot think; so we cannot think what we cannot say either. (TLP 5.61)
언어의 한계에 관한 해석과 연관된 여기서의 긴장은 논고 속에서 되돌아온다. 언어의 한계는 그저 언어의 본질적 특징들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특정한 가능성들을 배제하는 의미에서의 또 하나의 한계인가? 논고의 논리학은 비트겐슈타인이 요구했듯이 언제나 그것을 그대로 놓아둔 후에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저 구성요소인가, 아니면 논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부여했던 역할에 의해 규범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제시되는가? 일반적으로 구성적 규칙들을 위반 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이유는 만약 물음 속의 활동(사고나 체스 등)이 그것의 규칙에 의해 구성된다면,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그와 연관된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류를 범하는 것이 만약 불가능하다면, 처음부터 그 규칙들은 진실로 규범적이지 않다는 것만이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논고는 양자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논리는 구성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현대 언어 철학 속에서 발견되는 같은 책무의 조합들은 종종 전면적으로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칸트의 철학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The tension here concerns the interpretation of the limits of language evoked in the Tractatus. Are the limits of language merely the essential features of language, or are they also limitations in the sense of excluding certain possibilities (Sullivan ‘The Truth in Solipsism’; Moore, ‘Was the Author of the Tractatus a Transcendental Idealist?’, 241)? Is the Tractarian logic merely constitutive, always ‘looking after itself’ as Wittgenstein demands (TLP 5.473), or does logic have a normative function as suggested by the role Wittgenstein assigns to philosophy? Usually it is assumed that one cannot break constitutive rules, because if the activity in question (like thinking or chess) is constituted by its rules, then not following the rules simply means that one is not participating in the relevant activity. If it is impossible to make a mistake, then it only goes to show that the rules were not genuinely normative in the first place. However, at the outset, the Tractatus seems to assume both, namely that logic is both constitutive and normative. (Interestingly, the same combination of commitments, which in contemporary philosophy of language is often seen as outright contradictory, may be found in Kant’s philosophy as well.)14
5.1. The resolute reading of the limits
이러한 모순에 대한 한 가지 응답은 Sullivan이 그러했듯이 언어의 한계 개념을 오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그만이 그러한 오독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Sullivan처럼, 단호한 해석의 대표자들인 제임스 코난트, 코라 다이아몬드, 워렌 골드파브, 줄리엣 플로이드, 그리고 마이클 크레머 등은 해커와 데이비드 피어스에 의해 수행된 논고의 실재적 해석에 반대한다. 그러나 Sullivan이 의미의 그림이론의 핵심을 옹호하고자 하는 반면, 단호한 해석은 의미이론과 같은 것이 논고에 없다고 논증함으로써 관점을 더 멀리 이동시킨다: 대상이나 논리적 형식의 논고적 관념들과 함께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이 자기반박적이라는 것을 본다. 논고의 이해의 진짜 측면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껏해야 이해의 환상을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디자인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저자에 대한 이해를 그 책의 특정 문구들을 기반으로 성취하는 것이며, 그것의 틀 명제들과 틀 명제를 제외한 나머지 무의미한 파트들을 대조시켜 서술하는 것 뿐이다(pp. 709-710).
One way to respond to the paradox is to reject the notion of a limit of language as misguided, as Sullivan does. He is not alone either. Like Sullivan, such representatives of the resolute reading as James Conant, Cora Diamond, Warren Goldfarb, Juliet Floyd, and Michael Kremer, argue against the realist interpretation of the Tractatus epitomized by Hacker and David Pears (Goldfarb, ‘Metaphysics and Nonsense’, 64–5; see also Sullivan, ‘On Trying to Be Resolute’, Section 2.3). But while Sullivan wants to defend the core of the picture theory of meaning, the resolute reading takes the view further by arguing that there is no theory of meaning to be found in the work: once we start to work with the Tractarian notions of objects or logical form, we see them as imploding from within (Sullivan, ‘A Version of the Picture Theory’, 89; Goldfarb, ‘Metaphysics and Nonsense’, 65–70; Floyd, ‘The Uncaptive Eye’, 81). There is no genuine prospect of understanding the Tractatus, because it has been designed to create at best an illusion of understanding. All we can strive at is to understand its author based on certain passages of the book, described as its frame and contrasted with the nonsensical body of the rest of the book.15
제임스 코난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James Conant sums up the stance as follows:
논고의 독자로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그 작업이 그 목표를 따라간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관점의 특정 종류를 차지하는 환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우리가 사물을 존재자로서 표상해야만 하는지를 뒷받침하는 가능성들을 전달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며, 논리적 필연성인 것과 그저 우연적인 것을 고정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고의 논리적 구조를 그 자체로 생각하며, 우리 자신이 그것의 다른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우리가 언어의 논리적 구조의 옆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관점을 차지한다.
[W]hat happens to us as readers of the Tractatus – assuming the work succeeds at its aim – is that we are drawn into an illusion of occupying a certain sort of perspective. From this perspective, we take ourselves to be able to survey the possibilities that undergird how we must represent things as being, fixing what is ‘logically’ necessary and what is merely contingent. From this perspective, we contemplate the logical structure of thought as it is and imagine ourselves to be able to contemplate the possibility of its being otherwise. We take ourselves to be occupying a perspective from which we can view the logical structure of language ‘from sideways on’. (Conant, ‘The Method of the Tractatus’, 422; cf. TLP 6.54; see also Floyd, ‘The Uncaptive Eye’, 80; Goldfarb, ‘Metaphysics and Nonsense’, 67)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 목표는 사고와 현실의 필연적 구조의 관점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 그 자신이 쓰고 있듯이, '모든 가능한 명제는 정당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만일 그것이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는 단지 울가 그 명제의 몇몇 구성요소들에 아무 의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TLP 5.4733).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과 같은 것은 없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능력의 기저에 깔려 잇는 필연성의 영역에 관한 관념에 기대는 것은 논고의 자유주의적인 아젠다를 따르는 대담성을 포기하는 일이며, 현실의 특징들의 언어를 포착하는 일을 진지하게 시도하는 것을 던져버린다는 의미에서 겁에 질린 특징적 표시이다.
The main goal of the early Wittgenstein is to destroy the perspective on a necessary structure of thought and reality. Since, as Wittgenstein writes, ‘any possible proposition is legitimately constructed, and, if it has no sense, that can only be because we have failed to give a meaning to some of its constituents’ (TLP 5.4733), there is no such thing as transgressing the limits of sense. To hang on to the ‘idea of a realm of necessities underlying our capacity to make sense as we do’ is a characteristic sign of ‘chickening out’, of not daring to follow through with the liberating agenda of the Tractatus and throw away ‘the attempt to take seriously the language of “features of reality”’ (Diamond, The Realistic Spirit, 181, 194–5).
단호한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역설적 진술에 대한 정돈된 설명을 제시한다: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 하나의 주해 작업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TLP 6.54). 물론 논고의 명제의 무의미성은 부정할 수 없다. 전통적 독해는 논고의 명제가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단호한 해석에 따르면, 전통적 해석에 깔려 있는 오류는 그러한 기준이 일관된 방식으로 사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다. 단호하게 그 책을 읽는 것은 논고의 언급들이 논의되는 이 논문의 2-4절을 그저 더 큰 변증법 속의 과도적인 언어로 본다. 그 언어들은 결국 논고의 명제들을 극복하여야 한다(TLP 6.54) 그리하여, 전통적 해석이 다루는 '분명하게 하는 무의미'는 세계의 구조에 관한 관점을 표현하며, 의미의 필연적 조건들을 표현하며, 논리와 윤리를 표현한다(pp. 710-711). 단호한 해석은 평면적인 무의미를 받아들인다. 단호한 해석은 그리하여 아마 무의미한 명제들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 이론의 불안정한 기여를 피하려 한다. 합법적인 문장형성의 이론에 형이상학적으로 근거지워진것을 옹호하는 일에 대조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사고와 말의 부분들인 일상적인 논리적 능력에 그저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The resolute reading offers a neat explanation of Wittgenstein’s paradoxical statement: ‘my propositions serve as elucidations in the following way: anyone who understands me eventually recognizes them as nonsensical’ (TLP 6.54). To be sure, the nonsensicality of the propositions of the Tractatus has never been denied. The traditional reading grants that the propositions of the Tractatus are not meaningful by Wittgenstein’s own criteria of sense. However, according to the resolute reading, the mistake underlying the traditional view is to think that those criteria can be thought of in a coherent way. To read the book resolutely is to see that the Tractarian remarks discussed in Sections 2–4 of this paper are merely ‘transitional language’ in the greater dialectic that will lead us to overcome16 the propositions of the Tractatus (TLP 6.54). Hence, what the traditional interpretation has treated as ‘illuminating nonsense’ (Hacker, Insight and Illusion, 18), expressing views about the structure of the world, about the necessary conditions of sense, about logic, ethics, etc., the resolute reading takes to be ‘plain nonsense’ (Diamond, The Realistic Spirit, 181; ‘Ethics, Imagination and the Method’, 158–9). The resolute reading thus avoids the unstable attribution of a theory of meaning supposedly conveyed by nonsensical propositions. By contrast to advocating a metaphysically grounded theory of legitimate sentenceconstruction, Wittgenstein is simply relying on our ‘ordinary logical capacities’ that are part of thinking and speaking (Diamond and Conant, ‘On Reading the Tractatus Resolutely’, 64).
단호한 해석은 비논리적 명제의 불가능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옳다. 합법적 사고를 위한 규칙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이에 따라, 수많은 형식중 우리의 세계-형식의 형식을 보는 관점과 같은 것 역시 없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하듯이, 심지어 일상 언어조차 완벽하게 논리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의 구성요소에 의미를 준다 (TLP 5.5563, 5.4733).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언어가 의미의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논리적 형식을 다루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1에서 설명하였듯이, 단호한 해석과 달리 논고는 의미의 문맥적 사용을 다루며, 언어의 명제를 명제의 구성요소들이 그것의 의미를 얻는 방식으로 다룬다. 나는 사실들과 명제들의 으뜸에 관한 그의 설명으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사용의 관념을 받아들인다. 이에 더해, 명제의 구성요소들에 의미를 주는 것은-이를테면 동일성에 형용사적인 의미를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같은 명제에 특정한 사실을 투사하고 그럼으로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주는 것은 (TLP 5.4733) - 이미 명제와 가능한 사태들 사이의 형식적 연관을 전제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쓰고 있듯이 '오직 합법칙적인 연관들만이 생각 가능하다'(TLP 6.361). 이것이 말하는 바는 다이아몬드와 코난트에 의해 언급된 '일상적인 논리적 능력'이 경험적 의미에서의 일상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논리적 형식을 일차적으로 우리의 사고의 형식으로부터 아는 반면에, 이 형식은 이를테면 심리적인, 과정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주체 속의 초월적 닻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The resolute reading is right to emphasize the impossibility of illogical propositions. There is no need to fix regulations for what passes as a legitimate thought. Accordingly, there is no point of view from which we can look at the form of our world-form as one among many. Indeed, as Wittgenstein states, even everyday language is in ‘perfect logical order’ as long as we have given meanings to their constituents (TLP 5.5563, 5.4733). But this does not mean that our language has no limit in the Kantian sense of treating logical form as the necessary condition for sense. As explained in Section 2.1, unlike the resolute reading that treats the contextual use of words and propositions in language as the way in which the constituents of a proposition acquire their meaning, I take Wittgenstein’s notion of use to follow from his account of the primacy of facts and propositions over their constituents.17 Moreover, to give meaning to the constituents of a proposition – e.g. to give the word ‘identical’ an adjectival sense by projecting the proposition ‘Socrates is identical’ onto some fact and thereby render the meaningful (TLP 5.4733) – already presupposes the formal connection between the proposition and a possible state of affairs. As Wittgenstein writes, ‘only connexions that are subject to law are thinkable’ (TLP 6.361). This is to say that the ‘ordinary logical capacities’ mentioned by Diamond and Conant are not ordinary in the sense of being empirical. While we know logical form primarily from our form of thought, this form is not produced by, for example, psychological, processes, but has a transcendental anchor in the metaphysical subject.
논고에서 언어 속의 표현의 관념을 표시하는 언어의 한계는 무의미하며, 이것은 논리 뿐만 아니라 윤리를 포함한다(TLP 6.421) Sullivan에 따르면, 논고의 전체적인 논증의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윤리에 관한 언급을 읽는 것은 너무 많은 통합이다. 대조적으로, 다이아몬드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 속에서 윤리적 수입품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녀의 설명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윤리의 언급들에 관한 전통적 읽기는 그의 관점을 지나치게 윤리적 명제를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관점-감정이나 태도의 표현-에 연관시킨다(pp. 711-712).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적 명제의 특정한 계층을 전제하지도, 윤리적 담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제안하지도 않았음을 논증한다. 책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처럼, 논고의 마지막에서 윤리는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보다 더 많은 무언가가 있지 않다. 유사하게, 플로이드는 선험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거부는 윤리적 차원을 갖으며, 이 차원은 비트겐슈타인의 개인적인, 반-이론적인 윤리에 대한 접근에서 유래한다고 논증한다. 그녀의 관점에서, 논고는 우리에게 규정되지 않은(프레게적) 사고들 없이 사고와 지성이 논리 혹은 문법에 의해 고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삶의 가치의 고정된 측정 기준 없는 삶을 보여 준다.
In the Tractatus, the limit of language marks those notions whose expression in language would amount to nonsense, and these include not just logic but also ethics (TLP 6.421). According to Sullivan, to read Wittgenstein’s remarks on ethics in light of the overall argument of the Tractatus is ‘too much integration to hope for’ (Sullivan, ‘Idealism in Wittgenstein, 265). Diamond, by contrast, does find an ethical import in Wittgenstein’s early view. However, in her account, the traditional reading of Wittgenstein’s ethical remarks brings his view too close to the logical positivist view of ethical utterances as expressions of feelings or attitudes (Diamond, ‘Ethics, Imagination and the Method’, 153, 163). She argues that Wittgenstein neither presupposes a specific class of ethical sentences, nor offers a philosophical analysis of an ethical discourse. Just as there are no remarks about logic to understand in the book, the remarks at the end of the Tractatus ‘have no more to do with “ethics” than “piggly wiggly tiggle”’ (Diamond, ‘Ethics, Imagination and the Method’, 164). In a similar vein, Floyd argues that Wittgenstein’s rejection of the a priori has an ethical dimension, which stems from Wittgenstein’s personal, anti-theoretical approach to ethics. In her view, ‘just as the Tractatus shows us thinking and understanding without determinate (Fregean) thoughts fixed by grammar or logic, so it shows us living without any fixed measure of life’s value’ (Floyd, ‘The Uncaptive Eye’, 103).
흥미롭게도, 다이아몬드와 플로이드 모두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연관을 본다. 그러나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중심으로 보며, 선험 종합 판단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거부를 지적한다. 실제로, 초월적 관념론으로서의 논고의 칸트주의적 해석은 그것이 말함과 보여짐의 구분을 지지하고 그것을 책 속의 제시된 의미의 설명으로부터 끌어온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호한 관점에 대한 현실주의 대안만큼이나 반대된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칸트주의적 독해의 다른 버전을 제시하고, 언어와 현실 사이의 조화에 대한 설명을 위한 존재론에 기댈 필요가 없음을 논증한다. 이에 더해, 만약 현실의 특징들이 존재론적으로 근거지어지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우리의 사고의 일차적인 특징들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이라면, 윤리의 초월성은 다이아몬드와 플로이드에 의해 강조된 개윤리의 개인적 본성과 충돌하지 않은 채로 설명될 수 있다.
Interestingly, both Diamond and Floyd see a connection here between Kant and Wittgenstein, but take the differences to be greater than the similarity, marked by Wittgenstein’s rejection of the synthetic a priori (Diamond, ‘Ethics, Imagination and the Method’, 168; Floyd, ‘The Uncaptive Eye’, 101). Indeed, the Kantian interpretation of the Tractatus as a work of transcendental idealism seems as objectionable as the realist alternative from the resolute perspective, given that it endorses the distinction between saying and showing and takes it to arise from the account of meaning presented in the book (Diamond and Conant, ‘On Reading the Tractatus Resolutely’, 47; Floyd, ‘The Uncaptive Eye’, 100–2). In the following, I will take another look at the Kantian reading and argue that we do not have to appeal to ontology to account for the coordination between language and reality. Moreover, if the features of reality are not ontologically grounded, but are a priori because they are primarily features of our thought, then the transcendentality of ethics may also be explained without a conflict with the personal nature of ethics emphasized by Diamond and Floyd.
5.2. The Kantian alternative
논고의 칸트주의적 독해는 현실의 형식과 함께 언어의 형식을 비교하는 초재적 관점에 전념할 필요가 없다. 논고에는, 언어의 한계 반대편에 초재적 잔여물이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그리고 실제로 경험의 초월적 조건 너머에 있는 물자체에 대한 칸트의 독트린과 대조적으로-반대편은 없다(pp. 712-713).
The Kantian reading of the Tractatus does not have to commit itself to a transcendent perspective from which to compare the form of language with the form of reality. Nor is there, in the Tractatus, a residue of transcendent phenomena on the other side of the limit of language.18 In this sense, for Wittgenstein – and indeed by contrast to Kant’s doctrine about the thing in itself that lies beyond the transcendental conditions of experience – there is no ‘other side’.
처음으로 비트겐슈타인을 칸트주의 철학자로 소개했던 에릭 슈테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이론 이성에 대한 탐구가 보여 주는 것은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이다. [...]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것은 초재적인 것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한계를 넘어서는 것과. 슈테니우스는 한계에 이르는 칸트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에게 상상될 수 있는 것에 대한 탐구는 인식에 관하여 선험적 진리를 보여 준다'. 위에서 논증한 대로, 양자의 가정들 모두는 논고에서 확인될 수 있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문제라고 칭한 것은, 즉, 의미의 문제는, 칸트의 문제와 평행하며, 판단의 다른 타입들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칸트의 이론적 지식의 가능성의 개념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변형 속에서 차이는 의미 있는 언어 속의 묘사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다. 모든 가능한 명제들이 이미 논리적 형식을 내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형식은 그 자체로 명제의 의미에 의해서 표현될 수 없다. 내 생각이 내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사고의 대안적 매체로 나에게 가능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는 누군가 사고의 형식을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전체 요점은 모든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사변과 그리하여 이론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으로 명료하게 남아 있다. 언어의 한계에 닫기 이해, 누군가는 신의 눈에서의 관점을 가장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세계의 형식은 우리에게 사고의 형식으로 주어진다.
Erik Stenius, who first presented Wittgenstein as a Kantian philosopher, writes: ‘An investigation of our theoretical reason shows the limits of all possible experience. [ … ] And what is “transcendental” in this sense must be distinguished from what is transcendent, that is, what transcends this limit’ (Stenius, Wittgenstein’s Tractatus, 216).19 Stenius characterizes Kant’s method of arriving at the limits as follows: ‘an investigation of what is imaginable to us shows what is a priori true with regard to perception’ (Stenius, Wittgenstein’s Tractatus, 217). As argued above, both of these assumptions may be identified in the Tractatus. Hence, what Wittgenstein took to be the problem of philosophy, namely, the problem of sense, parallels Kant’s problem, the problem of the possibility of different types of judgement. The difference lies in Wittgenstein’s modification of Kant’s notion of ‘possible for theoretical knowledge’ into ‘describable in meaningful language’. Given that any meaningful proposition already exhibits logical form, this form itself cannot be expressed by means of propositions. There is no alternative medium of thought available to me besides the one my thoughts happen to exhibit. But it does not follow that one cannot reflect on the form of thought. On the contrary, the whole point is to stay clear of any ‘speculation over what transcends this limit and thus cannot be theoretically known’ (Stenius, Wittgenstein’s Tractatus, 217). To arrive at the limits of language, one does not have to pretend to entertain a God’s eye point of view, nor look at the world ‘from sideways on’, as the form of the world it is given to us in the form of our thoughts.20
슈테니우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논리적 분석은 언어의 한계를 규정하는 칸트적 작업을 의도하고 있다. 이 논문의 2섹션에서, 나는 사태들의 구성요소로서의 대상들의 내적 속성들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논의함으로써 논리적 분석의 관념에 다다랐으며, 이들은 차례차례 명제들의 형식적 속성 안에서 반사된다. 나는 이를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대상들에 간한 예시로서 색채, 음, 그리고 레고 블록에 적용하여 생각하였으며, 이것들을 우리가 분석의 종류로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했었지만 결코 말하지는 않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석을 통해 전달된 것은, 우리가 결국 이름들이 서 있는 대상들이 상호관에 연결되어 있다는 방식을 보여주는 즉각적인 조합들 속의 이름들을 가정한다는 것이다(p. 713).
According to Stenius, Wittgenstein’s logical analysis of language is intended for the Kantian task of determining the limits of language (Stenius, Wittgenstein’s Tractatus, 218). In Section 2 of this paper, I approached the notion of logical analysis by discussing Wittgenstein’s remarks on the internal properties of objects as the constituents of states of affairs that are, in turn, mirrored in the formal properties of propositions. I toyed with the idea of colours, notes, and Lego bricks as examples of objects we would find if we could perform the kind of an analysis Wittgenstein envisions but never delivers. When such analysis is carried through, we are supposed to end up with names in immediate combinations that present the way in which the objects, for which the names stand, are related to each other.
이에 더해, 그러한 분석된 명제들로부터 경험적 내용을 벗겨낼 경우, 그저 명제와 그것이 보여주는 사태 사이의 내적 관계가 남게 된다. 이 관계들은 멜로디, 악보, 레코딩, 음파와의 관계에 대응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로는,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밖에서 작업함으로써 언어의 한계에 도달한다' (TLP 4.114, see TLP 4.113–4.115).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될 때, 언어의 한계는 시간성이 음악의 조건인 것처럼 한계이며, 음악의 수단으로 현시되지만 표상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한계를 그리는 것은 매체 바깥은 관점을 전제하지 않는다. 대신에, 한계는 매체와 함께 그어진다.
Moreover, when we strip off empirical content from such analysed propositions, we are left with mere internal relations between the proposition and the state of affairs it presents, comparable to the relations between a melody, the score, the recording, and the sound waves (TLP 2.0231). In Wittgenstein’s words: ‘we arrive at the limit of language by working outwards through what can be thought’ (TLP 4.114, see TLP 4.113–4.115). Understood in this way, the limit of language is a limit like temporality is the condition of music, manifest but not representable by means of music. The drawing of such a limit does not presuppose a perspective external to the medium itself. Rather, the limits are drawn ‘from within’ that medium.
6. ‘If the good and bad exercise of the will does alter the world, it can alter only the limits of the world’ (TLP 6.43)
나는 이전 섹션의 시작점에서 물었던 물음으로 돌아감으로써 마치고자 한다. 만약 논리가 사고를 구성하는 요소라면, 비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고에서 언급된 한계는 우리가 우리 사고의 형식과 사실들의 형식을 비교할 수 있는 초재적 영역의 접근을 금지하는 의미에서의 한계가 아니며, 우리의 묘사형식의 더 나은 대안을 고려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언제부터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규범적 역할을 부여할 필요가 생기는가?
I will conclude by returning to the question which began the previous section. If logic is constitutive of thought, then it is impossible to think illogically. The limits mentioned in the Tractatus are not limitations in the sense of forbidding access to a transcendent realm from which we could compare the form of our thoughts with the form of the facts they picture and consider a better alternative for our pictorial form. If this is so, then whence does Wittgenstein’s need to assign a normative role to philosophy arise?
칸트에게 있어 이론 이성의 한계 설정을 위한 이유는 인간 마음 속의 위반하려는 경향성 때문이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러한 위반은 초월적 관점과 경험적 관점의 적절한 구분의 실패의 원인이다(CPR A 294-298). 위반은 논고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심 테마로 나타난다. 에이드리안 무어의 말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각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감수성은 감각 그 자체에 대한 감수성만큼이나 깊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혼란은 내적(형식적) 관계와 외적(적절한, 경험적) 관계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인식의 실패의 원인이다(TLP 4.122). 이 논문에서 제시된 독해는, 초월적이고 경험적인 관점 사이의 구분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초월적 논리와 경험적 사태 사이의 관계도 그에 상응한다. 후자가 언어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반면, 전자는 오직 그 자신을 분석된 명제들 속에서 보여 준다. 그리고 물론,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그가 올바른 방법이라 추천한 철학의 방법의 범위를 위반한다. 즉, '말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즉 자연과학의 명제들-철학과 아무 상관 없는 어떤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TLP 6.53) 그는 초월 철학에 종사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관점 위의 관점의 이중 사고의 종류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Sullivan, 단호한 해석의 종사자 중 하나는 그러한 일을 폭로한다(pp. 714-715).
For Kant, the reason for setting limits to theoretical reason was his view that the human mind is prone to transgression. In Kant’s account, such transgression results from a failure to properly distinguish between the transcendental and the empirical viewpoints (CPR A 294–8). Transgression appears as the main theme of the Tractatus as well. In Adrian Moore’s words, ‘for Wittgenstein, just as for Kant, our susceptibility to illusions of sense is as deep as our susceptibility to sense itself’ (Moore and Sullivan, ‘Ineffability and Nonsense’, 184). According to Wittgenstein, philosophical confusions result from our failure to appreciate the difference between internal (formal) relations and external (proper, empirical) relations (TLP 4.122). On the reading proposed in this paper, this amounts to a failure to distinguish between the transcendental and the empirical viewpoint, between transcendental logic and empirical states of affairs. While the latter can be expressed in language, the former only shows itself in analysed propositions. And sure, to have got us this far, Wittgenstein has himself transgressed the bounds of the method of philosophy he recommends as correct, namely, to ‘say nothing except what can be said, i.e. propositions of natural science – i.e. something that has nothing to do with philosophy’ (TLP 6.53). He has engaged in transcendental philosophy, and is in this respect guilty of the kind of ‘double-think’ of taking a standpoint on a standpoint Sullivan, along with some resolute readers, takes his work to expose (Sullivan, ‘What Is the Tractatus about?’, 31; ‘The Truth in Solipsism’, 205–6).
형이상학적이고 대상에 기초한 논고 독해를 세계의 다른 관점의 관념을 도입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Sullivan과 단호한 해석자들과 대조적으로, 나는 언어의 한계 개념을 자칭 그 작업의 윤리적 목표에 의해 동기부여된 것으로, 즉, 윤리적 형식의 한계와 함께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내적이고 외적인 명제들의 속성들의 구별의 실패에 더하여,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또 다른 종류의 위반이 존재한다. 초월적이고 경험적인 것 사이의 차이가 다시 한번 존재하는 반면, 이러한 종류의 위반은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그저 오류로 떨어지지 않는다(TLP 4.003). 대신에, 그것은 언어 비판 대신에 존경을 지시한다. 무어에 의해 쓰여졌듯이,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둘 다 담론저 사고에 의해 사물과 연계된 작업이 소진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관념은 사고의 영역 밖으로 떨어지며, 대상들의 앎 뿐만 아니라 논리적 추론과 철학의 활동을 포함한다. 저번 섹션에서 사색적으로 논의되었듯이, 그러나 칸트의 실천철학으로부터 유사한 관념은 미학과 신학이다. 이로부터 나는 그저 한가지를, 즉, 한계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감정을 언급하고자 한다. '세계를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은 세계를 전체-한계지어진 전체-로서 직관하는 것이다. 한계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다(TLP 6.45). 이러한 통합의 감정은 또다른 사실이 아니며,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표현될 수 없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통일의 감정 역시 전혀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끊임없이 상기시키듯, 어떤 이가 그러한 것을 표현하려는 경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By contrast to Sullivan and the resolute readers who identify the metaphysical, object-based reading of the Tractatus as inviting the idea of alternative perspectives on the world, I see the notion of a limit of language as motivated by the self-proclaimed ethical goal of the work, namely, to limit the ethical from within (LF 94–5). For in addition to the failure to distinguish between the internal and external properties of propositions, for the early Wittgenstein, there is also another type of transgression. While pertaining again to the difference between the transcendental and the empirical, this other type of transgression does not reduce to a mere failure to understand the logic of our language (TLP 4.003). Rather, it commands respect rather than ‘critique of language’ (E, 12, TLP 4.0031). As noted by Moore, neither Kant nor Wittgenstein takes our engagement with things to be exhausted by discursive thought. For Wittgenstein, notions falling outside the domain of thoughts include, not just knowledge of objects, logical inference, and the practice of philosophy, discussed in the previous sections respectively, but also notions familiar from Kant’s practical philosophy, aesthetics, and teleology (Moore, ‘Was the Author of the Tractatus a Transcendental Idealist?’, 253; see Stenius, Wittgenstein’s Tractatus, 222–3). Of these I would like to mention just one, namely, the feeling of the world as a limited, unified whole: ‘To view the world sub specie aeterni is to view it as a whole – a limited whole. Feeling the world as a limited whole – it is this that is mystical’ (TLP 6.45). This felt unity is not another fact, expressible by reference to a fact. Given that all we can express is facts, the felt unity is not expressible at all. But this does not mean that one cannot have an inclination to express it, as Wittgenstein constantly reminds us (E, 8–12).
칸트의 설명에서, 우리는 상호간에 배타적인, 그러나 동시에 중요한 관점들인 두 세계에 다다를 수 있다. 첫 번째 [세계]는 지성의 개념적 규칙들 안의 개별자들을 포함하는 규정된 판단으로부터 유래되며, 일반적인 경험적 인지를 선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부터, 세계와 그것의 기관은 그저 세계의 총합이다. 두 번째 관점은 판단의 힘의 사색적 사용으로부터 유래하며 똑같은 기관을 보여주며, 결국엔 목적으로서의 그리고 통합되고 조직화된 체계로서의 전체 자연을 보여준다. 사색적 판단이 판단의 힘이 그 자체로 그것의 사색적 사용 속에서 주는 형식적 목적인의 선험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것들은 자연의 목적인의 속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러한 속성을 만드는 것은 다시 한번 한계위반과 사색적 판단의 정당한 적용의 위반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주장하듯이, 우리는 사색적 관점으로부터 자연을 도울 수 없고 단지 바라볼 수만 있다.
In Kant’s account, we can approach the world from two mutually exclusive, but equally important viewpoints. The first stems from determining judgements that subsume particulars under conceptual rules of understanding and yields ordinary empirical cognition. From this viewpoint, the world and its organisms are ‘mere aggregates’ of facts (CPJ 20: 217). The second viewpoint arises from the reflective use of the power of judgement and shows the same organisms and eventually the entire nature as purposive and unified organized systems (CPJ 5: 373). Given that reflective judgements are grounded on an a priori principle of formal purposiveness that the power of judgement gives to itself in its reflective use, they do not warrant attribution of purposiveness to nature. To make such an attribution would again count as a transgression of the limits and legitimate application of reflective judgements. Nevertheless, Kant claims, we cannot help but look at nature from the reflective perspective (CPJ 5:417).
나의 독해해서, 사실들의 총체로서의 세계와 한계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의 대조는 칸트적 구분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논리적 형식은 우리에게 우연적이고 상호 독립적인 사실들의 세계를 주는 관점의 본질이다(pp. 715-716). 그리하여, 세계는 사실들과 같은 형식을 공유하는 명제들의 수단을 통하여 모사될 수 있으며, 자연 과학은 참된 명제의 총체가 된다(TLP 2.2, 4.11). 그러나 흥미롭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그 자체가 자연 과학의 일부가 아니라 주장하며, 그러함으로써 모든 참된 명제가 제시된다 할지라도 무언가 남아 있으리라고 암시한다(TLP 4.111-4.113). 명제들의 총체로서의 언어는 총체성으로서의 총체성의 반성적 관점을 표현하는 데 실패하며, 이는 그것이 한계지어지고 완결된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신비로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실패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TLP 4.001, 6.45, 6.522). 이 지점이 사실적 관점에서 사색적 관점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이 관점은 -Sullivan이 올바르게 지적하듯이 대상-중심의 사고 방식이 아니라- 논리적 형식을 사고의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주며, 그러나 우리 경험의 가치를 붙잡는데 여전히 불충분하다. 한계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의미 있는 명제의 의미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의 본질고과 동일시하는 사색적 관점은 한계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가 스스로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것으로 현시한다. 그것은 심지어 어떤 사실도 변화하지 않을지라도 세계의 한계의 변화의 경험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한다'(TLP 6.43).
In my reading, Wittgenstein’s contrast between the world as totality of facts and as a unified whole echoes this Kantian distinction. Logical form is the essence of the perspective which gives us the world as the totality of contingent and mutually independent facts (TLP 1.1, 3.411, 5.471–5.472). As such, the world may be depicted by means of propositions that have their form in common with the facts, natural science being ‘the totality of true propositions’ (TLP 2.2, 4.11). Interestingly, however, Wittgenstein claims that philosophy itself ‘is not one of the natural sciences’, thereby implying that even the totality of true propositions leaves out something (TLP 4.111–4.113). What language as a totality of propositions fails to express is the reflective perspective on that totality as a totality, just as it fails to express the mystical feeling of the world as a limited and complete whole (TLP 4.001, 6.45, 6.522). It is this shift from the factual perspective to the reflective perspective – not the ‘object-centered way of thinking’ Sullivan rightly criticizes – that shows logical form to be necessary for thought and yet inadequate for capturing the wealth of our experience. To view the world as a limited whole is not a thought in the sense of a meaningful proposition. Rather, the reflective perspective, which Wittgenstein identifies as the essence of ethics, manifests itself in the ‘waxing and waning’ of the world ‘as a whole’; it manifests itself in the experience of a change in the limits of the world even if no facts have changed (TLP 6.43).21
결론적으로 관점의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우리가 우리의 실제적 관점과 그에 대응하는 (한계지어진) 경험적 언어 사이의 대응을 보기 위해, 또 '실제로, 언어 속에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기 위해 우리 세계 바깥의 관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TLP 6.522). 이에 따라, 언어의 한계를 설정하는 철학의 규범적 작업이 어찌하여 우리의 사고를 구성하는 논리의 관념과 충돌하지 않는지를 보기 위하여, 우리는 그저 한계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In short, the possibility of such a change in perspective shows that we need no viewpoint from outside our world to see that our factual perspective and the corresponding empirical language is limited, to see that ‘[t]here are, indeed, things that cannot be put into words’ (TLP 6.522). Accordingly, one only need acknowledge the inclination to express the feeling of the world as a limited whole to see why the normative task of philosophy to set the limits of language is not in conflict with the notion of logic as constitutive of thought.
Acknowledgements
Earlier versions of this paper were presented at the workshop ‘Judgments, Ontology, and Ontological Judgments’, organized by Leila Haaparanta’s Academy of Finland project Judgment and Human Rationality in Berlin, 5–7 November 2013, and at the Helsinki Reading Group in Philosophy of Language. I wish to thank the participants of these events as well as Leila Haaparanta, Colin Johnston, Anssi Korhonen, Gabriel Sandu, and two anonymous referees for valuable feedback on previous versions of this paper.
Funding
I am indebted to the Academy of Finland as well as Alfred Kordelin Foundation for financial 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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