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Kant & German Idealism

『정신현상학』 서설 각주

Soyo_Kim 2020. 3. 8. 16:00

헤겔, 『정신현상학』, 서설에 달린 임석진 선생님의 각주 정리

 

1. 

사적인 관점에서 스스로의 경향이나 입장 또는 일반적인 내용이나 결론을 이끌어내고는 거기에 설왕설래하는 진리에 대한 주장이나 단언을 결부시키는 그런 방식으로 철학적 진리가 표현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근거가 희박한 일면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을 가리키는데, 이는 낭만주의자나 직접지unmittelbares Wissen[각주:1]에 의지해 있는 사상 또는 방법을 비판한 것이다.

 

2. 

그런데도 철학이란 그 본질상 특수적인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을 지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다른 어떤 학문의 경우보다도 목적이나 최종 결론 속에서 사태 자체가 완전무결하게 표현될 수 있으니, 실제적인 전개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잘못된 생각이 다른 어떤 학문에서보다 더 심하게 제기되곤 한다.

 

사유를 통한 대상의 인식으로는 크게 사변적인 철학적 학문과 개별적인 경험과학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경험과학이 도출해내는 법칙이나 유는 추상적 보편에 그침으로써 특수적인 것과의 연관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헤겔 변증법의 최고 개념에 해당하는 일련의 범주Kategorie, 즉 보편Allgemeinheit, 특수Besonderheit, 개별Einzelheit 가운데 특수성이야말로 구체적 보편의 성립을 위한 필수적 요소이며 계기임이 시사되고 있다.

 

본래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목적에는 그의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Ausführung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또한 결과로서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성Werden, 과정Prozess이 선행되어야만 하는데, 한 저서의 서설이나 서문의 경우 흔히 시작과 끝만 제시되고 중간 과정이 배제되거나 누락되어 있음을 논박한 부분이다. 

 

3.

예컨대 철학이 아닌 해부학의 경우라면 신체의 각 부분을 생명 없는 물체로 다루듯해서는 학문의 내용이 되는 문제의 핵심을 잡아냈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누구나가 이보다 더 나아가서 특수한 각 부분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물체의 원어는 Dasein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는 현존재라는 번역어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본래 헤겔의 『논리학』에서는 질을 갖는 한정적, 피규정적인 존재bestimmtes Sein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즉자적, 본원적 존재Ansichsein와 타자에 대해서 있는, 즉 대타존재Sein-für-Anderes로 분리되고 구분된다. 특히 Dasein의 da에는 '거기에 있는' 이라는 뜻이 있어서, 정재라거나 또는 단지 어떤 것, 어떤 물건이 생명 없는 물체와도 같이 거기에 있다는 의미에서 일상생활을 가리키는 넓은 일반적인 뜻으로도 사용된다. 

 

원어는 allgemeine Vorstellung으로서 감각 그리고 직관과 개념의 중간단계에 속하는 특수적이고 외면적인 표상, 상정, 상념의 뜻을 갖는데, 이 「서설」 속의 "표상을 사고로 전환하고 다시 사고를 개념으로 전환"한다는 대목에 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스피노자의 경우 intellectus에 대한 imaginatio에 해당하는 표상은 실체의 입장을, 그리고 개념은 주체의 입장을 나타낸다고 할 때, 진리는 '실체이면서 또한 주체'여야 한다고 한 헤겔 철학의 핵심적인 명제가 표상에 대한 규정을 둘러싸고 뚜렷이 떠오른다. 여기서는 표상작용의 3단계를 이루는 상기, 상상력, 기억을 총합한 의미의 일상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4.

어찌되었든 적법하게 학문이라는 이름을 걸칠 수 없는 해부학과 같은 잡다한 지식의 취합물일 경우에는 목적에 대해서와 같은 일반적인 논의와 신경이나 근육에 대해서와 같은 내용 자체에 관한 기술적이고 몰개념적인 논의가 서로 구별되어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기술하다, 기록하다는 의미의 원어 Historie는 사건이나 사태의 내면적인 상호연관성에 주목하기보다는 보고 들은 내용이나 관찰된 결과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res gestas, 즉 행위나 사건 그 자체라는 객관적 의미와 historiam rerum gestarum, 즉 행위나 사건의 기록이라는 주관적 의미도 함께 갖추고 있는 역사Geschichte와 구별된다.

 

5.

참다운 것과 그릇된 것은 서로 대립한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사람들은 기존의 철학체계를 놓고 찬, 반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침으로써 철학체계의 설명도 다만 참과 그릇됨 가운데 어느 한쪽을 가려내는 데 그치고 만다.

 

원어는 Meinung으로서 흔히 사념, 소견, 의견, 억견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를 동사화한 meinen은 여기서 지레짐작하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6.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결국 철학체계의 차이를 진리의 점진적인 발전으로 보지 않고 차이를 빚는 것이면 단지 서로가 모순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변증법적 운동을 근간으로 하는 헤겔 사유에서는 어떤 한 시대나 한 개인의 철학체계가 그와는 다른 철학체계에 대해서 갖는 차이Verschiedenheit나 대립Gegensatz, 모순Widerspruch은 궁극적인 철학체계의 완성을 향해서 가는 점진적이고 유기적인 발전적 통일의 일환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차이는 상호간의 비동일적인 차원을 넘어선 유동적이고 통일적인 생명력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의 뚜렷한 지론인데, 아무튼 지금의 이 「서설」이라는 압축된 형식 속에서 이 문제가 완벽하게 해명되고 서술될 수는 없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7.

교양을 쌓아가려는 출발단계에서 의식주와 같은 실생할을 벗어나려면 언제나 보편적인 원칙이나 관점에 따라 지식을 획득하고 우선 사태 전반을 사유할 수 있을 만큼의 훈련을 거듭하고 난 다음 근거를 제시하고 문제의 가부를 판정함으로써 구체적이고 내용이 충만한 대상의 성질을 명확히 파악하여 이를 제대로 터득했다고 할 만한 진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한다.

 

원어는 das substantielle Leben으로, 라틴어의 sub-stare(아래에 서다)에서 유래한 이 말은 개별과 보편, 주관과 객관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채로 직접 통일되어 있는 상태나 그런 상태의 생활을 뜻한다. 절대자 또는 신에 대한 인간의 소박한 믿음이나 신로, 즉 신앙 속에서의 분열 없는 실체적, 초보적인 생활태도를 나타낸다고 하겠으며, 아이가 부모에게 의존해 있는 그런 상태에 비길 수 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계발되어가는 인간의 의식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반성적 사유의 단계로 고양된다.

 

8.

진리가 현존하는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학문적 체계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이 학문의 형식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 말하자면 철학의 진의라고 할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떨쳐버리고 현실적인 지를 목표로 하여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지향하는 것이다.

 

절대자를 표상 또는 상념으로 포착하려는 종교적인 양식이나 지적 직관이라는 공교적이 아닌 비교적인 사유의 활동 양식과는 달리 헤겔은 오로지 사유Denken의 경지, 요소 또는 지반Element의 위에서 절대자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지에 대한 사랑 대신 정신의 자유를 근간으로 한 경험적인 개별 과학적 지식의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경험을 매개로 한 현실적인 지wirkliches Wissen의 체계를 수립하려는 것이 헤겔 철학의 기본구상이다. 헤겔은 직관을 배제하고 개념 전개의 내적 필연성을 추구하는 사변성, 통합성, 보편성, 순수성, 공교성을 학문적 인식의 기본 조건으로 삼는다. 특히 낭만주의자가 애용했던 지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헤겔의 최초의 저술로 꼽히는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라는 괄목할 만한 글에서도 라인홀트에 빗대어 이를 비판하고 있다.

 

9.

요는 철학이 학문으로까지 고양되어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는 바로 이 사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철학을 학문으로 정립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참으로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본래 Zeit, 즉 시간, 시대를 여기서는 시점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유명한 『법철학』 서문 속의 "철학은 사상으로 포착된 그의 시대이다. 철학은 그의 시대를 사상으로 파악한 것이다"(Philosophie ist ihre Zeit, in Gedanken erfasst)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10.

근래에 횡행하는 사조에 따르면 진리란 직관이나 절대자에 대한 직접지 또는 종교나 존재, 그것도 신적인 사랑의 중심에 있는 존재가 아닌 단지 존재 그자체라는 등으로 불리는 것에만, 아니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만 존재한다고 할진데, 그렇다면 철학의 서술과 관련해서 보더라도 실로 개념의 형식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것이 요구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직관, 직접지, 종교, 사랑은 각기 셸링, 야코비, 슐라이어마허, 노발리스의 기본사상의 특징을 가리킨다. 이런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 보면 헤겔이 오로지 낭만주의자에 반대하여 일침을 가하려 했던 것으로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이 헤겔의 사상 형성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데 대해서는 『기독교의 정신과 그의 운명』과 이 책의 6장 가운데 3. 도덕성, 그 중에서도 특히 3) 양심에 소상히 밝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1.

그러한 요구가 대두되게 된 이유를 전반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파악하고 자각적인 인간 정신이 이르러 있는 현단계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이제는 정신이 일찍이 사상의 경지에서 영위해왔던 신과의 일체화된 생활, 즉 소방한 신앙의 차원에서 의식이 신과의 화해를 확신하며 내외면에 두루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에 젖어 있던 안이한 차원을 초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또 정신이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 신에 접하지 못한 자기반성, 반조라는 반대의 극에 다다라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극단적인 상태마저도 초탈한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의 본질에 부합되는 생활이 상실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 상실과 더불어서 정신이 그 자신의 내용의 한계마저도 의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원어로 das substantielle Leben은 여기서 종교적 생활, 특히 중세 기독교에서의 종교 생활을 가리킨다. 전체적인 서양 정신사에 대한 반성적 회고에서 헤겔은 1)실체성, 2)반성지 또는 오성지, 3)직접지를 거친 이성지 또는 개념지라는 단계적인 궤적을 구도화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중세 기독교를 기점으로 하는 이유는 헤겔 사상의 내면적인 형성기에 그의 주요한 논쟁 상대였던 낭만주의자가 흔히 중세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데 기인한다. 이 책의 제4장에서 다루고 있는 중세 기독교의 문제를 놓고 헤겔이 신앙과 지식의 양면으로부터 신의 본질에 천착하기 위하여 얼마나 깊이 있는 통찰과 논리의 힘을 구사하고 있는지 역력히 드러나 보인다.

 

헤겔은 화해 또는 유화로도 번역되는 Versöhnung을 제 6장의 '악과 그의 용서'에서 다루어져 있듯이 언제나 아들Sohn의 문제와 연관시킨다. 실제로 이 Versöhnung은 어간을 형성하는 아들, 즉 Sohn이 가출했다가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고 반목했던 형제가 다시 마음을 다잡아 부모 슬하로 모여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성적 사유의 입장과 일치하는 면이 있지만, 내면을 향한 반성, 반사 Reflexion-in-sich, 즉 숙고에 의한 자기반성, 자체 내 반성 또는 자기복귀라는 뜻으로 보면 여기서는 오성보다 자아성이나 주관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사유 주체에 의한 자발적인 자기반성만이 아니라 예컨대 가치 있는 '사태 자체'로 인한 본질적인 자기반성은 곧 자기 내면으로의 복귀를 뜻한다는 점에서 이는 『대논리학』 2(본질론)에서 주요한 고구 대상이 된다.

 

 12. 

더욱이 학문을 포기하고 신앙에서 흡족함을 느끼는 나머지 그에 도취하여 혼미해진 가운데 이를 학문보다 더 차원 높은 것으로 지레짐작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겠다. 흥분상태에서 예언자풍의 말투를 일삼는 사람은 자신이야말로 온갖 것의 중심을 이루며 그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다면서 확연하고 명석한 것(빛의 신 호루스)을 경멸적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개념이나 필연성 쪽으로는 물론 유한한 세계만을 터전으로 반성 쪽으로도 아예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본래 그리스어인 호로스Horos는 사물의 의미를 한정하고 개념의 내용을 규정하는 것 이외에 소유지의 경계표를 뜻하기도 한다.

 

13.

결국 신을 에워싸고 무절제한 흥분상태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사람들은 자기의식에 덮개를 씌어놓고 오성은 방기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잠자는 동안에 신의 예언자가 곁으로 다가와주기라도 하는 듯이 여기곤 한다.

 

원어인 Verstand를 동사로 풀이하면 verständigen 또는 zum Stehen bringen이 되는데, 전체를 여러 측면이나 요소로 분해, 분할하여 그 요소를 제각기 고정시킨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 헤겔은 피히테의 『전지식론의 기초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에 논술되어 있는 선례를 따르고 있다.

 

14.

즉 갓 등장한 것은 큰 틀에서 개념만을 갖추고 있는 직접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한 건물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해서 옹근 건물 전체가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듯이 전체의 개념이 얻어졌다고 해서 참으로 실물 전체가 얻어진 것은 아니다.

 

본래 헤겔 고유의 변증법 '개념'은 한낱 추상물에 그치지 않는 구체적 보편성에 의지하여 자기 운동적 핵심을 전개해나가는데, 이에 대비하여 지금의 이 개념은 아직 실재성Realität이나 현실성Wirklichkeit을 띠지 않은 이념적 가능성을 내포했을 뿐이다.

 

15.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의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학문의 보편적인 이해란 불가능하며, 단지 그것은 소수의 개인에게만 비전된 재산에 그쳐버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 '비전된 재산'이라 한 이유는 학문이 이제 겨우 개념 속에 깃든 내면적인 요소로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며, 또한 '소수의 개인에게'라고 한 것은 학문의 등장과 동시에 그것이 확산되지 않고서는 다만 개인의 것이 되는 데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내용이 갖추어지고 그 성질이 밝혀진 것만이 공교적이고 개념적이며 또한 학습을 통하여 만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학문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해 가능한 형식을 갖추게 될 때라야만 비로소 그것은 만인에게 제공되고 누구나가 거기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이 닦여졌다고도 할 수 있다.

 

비교적esoterisch이라고 불리는 이 낱말은 공교적exoterisch이라는 말에 대비되는 용어이다. 『철학 비평지』 발간 시절까지만 해도 철학이란 비교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해왔던 헤겔이 여기서는 낭만주의자를 비판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헤겔은 수사학이나 정치학을 외향적이고 통속적인 분야로 봤으며, 자연학이나 형이상학은 독자적 전문성이 인정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16.

이렇듯 오성적인 이해를 거쳐서 이성적인 지에 다다르는 것이야말로 학문에 발을 들여놓은 의식 쪽에서 당연히 내놓을 수 있는 요구이다. 왜냐하면 오성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곧 사유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자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의상으로만 보면 이성, 즉 Vernunft는 듣는다, 엿듣는다, 청취하다vernehmen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신이 이야기하는 것, 즉 로고스Logos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오성은 "나는 사유한다"(Ich denke)의 나, 자아라는 점에서 오성은 자아 일반(Ich überhaupt)으로서의 사유이다.

 

17.

그런데 여기서도 또한 비현실적인 추상형식을 지닌 보편 이념에 온갖 가치가 부여되면서 내용상의 차이를 말소해버리거나 아니 그보다도 더 발전도 없고 정당성도 확인되지 않은 채 내용상의 차이를 공허한 심연으로 내전지는 것이 사변적인 것의 고찰양식이라도 되는 듯이 여겨지고 있다.

 

셸링의 '무차별적 동일성'을 일컫는 것으로서, 이 책의 마지막 제 8장, '절대지' 단계에서도 거론된다.

 

사변의 원어는 Spekulation인데, 헤겔은 이를 라틴어의 specto(보다)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거울 속에 비쳐진 자기는 일단은 자기 자신에 대립해 있으면서도 실은 자기가 자기를 보며 자기를 알아본다는 이 상태는 바로 상호인정gegenseitiges Anerkennen이라는 이중성 또는 이중의 이중작용verdoppelte Doppelbewegung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사변 개념 자체 내에는 논리의 자기 전개라는 요소와 가능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그 비쳐진 거울 속에서 단지 동일한 면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구별되는 측면도 파악된다는 점에서 사변적 사유는 이성지의 성격을 띠면서 신비주의와 구별된다. 사변적 고찰에서 구별의 측면이 배제되고 동일적인 면만 강조될 때 신비주의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엔치클로페디』 1, 82절 그리고 「증보」 참조.)

 

18.

물론 어떤 존재를 스피노자적으로 절대자의 양상 속에서 바라본다고 할 때 당연히 그것은 '어떤 것'으로서 다루어지고는 있다. 그러나 A=A의 형식을 띠는 절대의 상하에서는 '어떤 것인가'라는 등의 물음은 있을 수 없고 일체의 것이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절대의 상하에서는 일체가 동일하다는 이 한낱 형식적인 지를 구별과 내실을 갖춘, 아니 충실한 내용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인식에 대치시키면서 흔히 절대적인 것이란 캄캄한 밤중이며 모든 소가 검은색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는 투로 우겨대는 것은 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인식력의 결여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셸링의 『브루노 Bruno』와 『나의 철학체계 저술 Darstellung meines Systems der Philosophie』 제 4절 참조. 모일렌J. v. Meulen은 그의 저서 Hegel. Die gebrochene Mitte에서 개념과 실재를 단순히 일체화하는 접속사 und의 자기파괴적인 성격을 말끔히 씻어내는 것이 헤겔이 수립하려던 새로운 비판적 의식이론의 최대 쟁점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헤겔은 곳곳에서 이렇듯 직간접적으로 절대자를 A=A 또는 캄캄한 밤중이라 지칭하면서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셸링의 『브루노 Bruno』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19.

형식주의라는 것은 근대철학이 성토하고 매도하면서도 이런 가운데 다시 그 한가운데서 재생하게 된 것인데, 비록 그의 불충분함이 알려지고 느껴지더라도 이것만으로 형식주의를 학문에서 추방할 수는 없다. 실로 이를 추방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완벽한 해명이 이루어져야만 하겠다. 각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총론적인 입장을 밝혀두는 것은 각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의미도 있으므로 아래에 대략적인 생각을 미리 제시하는 것도 쓸모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적 인식에 장애가 되는 몇가지 형식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주의를 환기해두고자 한다.

 

여기서 헤겔은 특히 야코비의 오성철학과 헤르더의 언어철학 그리고 셸링의 자연철학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거론된 형식주의 이외에도 진위의 대립을 고착화하는 입장이나 수학을 인식의 전형으로 받아들이는 편향적인 태도 또는 진리를 실체론적으로 파악하는 관점 등이 같은 맥락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20.

물론 이것은 체계의 서술을 통해서만 제대로 판단이 내려질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이해하기로는 모든 철학적 진리의 탐구를 위한 선결문제는 진리를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실체의 파악을 위한 접근방식과 관련하여 셸링의 지적 직관에 내재하는 직접주의Immediatismus를 비판하는 헤겔 자신이 어떻게 『대논리학』 첫머리에 직접성Unmittelbarkeit을 존재 또는 지의 시원Anfang으로 삼을 수 있었는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이와 관련하여 헨리히D. Henrich는 헤겔 논리학의 존재 규정은 "말로 할 수 없는 것"(Unsagbarkeit)이면서 또한 "규정을 전제로 내세우는 것"(voraussetzende Bestimmtheit)이므로 이는 "절대 부정의 사상 안에서의 직접성과 매개성의 통일"(die Einheit von Unmittelbarkeit und Vermittlung im Gedanken der absoluten Negativität)이고 "불확정적 직접성과 오직 자기와의 동등성"(unbestimmte Unmittelbarkeit und Gleichheit nur mit sich)으로서, 결국은 "단순하고 내용이 채워지지 않은 직접성 속에 있는 (시원이라는) 분석될 수 없는 것"(in seiner einfachen, unerfüllten Unmittelbarkeit ein Nichtanalysierbares)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Dieter Henrich, "Anfang und Methode der Logik", in; Hegel im Kontext, Suhrkamp Verlag, 1975, pp.83-87 참조. 

 

21.

그리하여 세번째 입장으로는 사유와 실체의 존재가 통일되어 직접적인 직관이 곧 사유라는 생각이 등장하였다.

 

1) 스피노자, 2) 칸트와 피히테, 3) 셸링에 이르는 단계적 발전과 관련해서는 이 책의 제8장 「절대지」에서도 이와 동일한 해석이 내려져 있다. 다만 거기에는 스피노자와 칸트 사이에 계몽주의 하의 유용성 문제가 개제해 있다.

 

22.

실체가 곧 주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실체에 순수하고도 단순한 부정성이 작용하면서 바로 이로 인하여 단일한 것이 분열됨을 뜻한다.

 

부정(성) (Negativität) 개념은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여 사용된다. 하나는 『대논리학』 1 (존재론)의 「현존재」(Dasein) 대목에서와 같이 전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 질적으로 한정된 의미의 부정이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결과로서 부정적인 통일을 성취하는 주체, 자아 또는 운동성으로서의 부정이다. 첫번째 부정은 일체를 무로 돌려놓는 '공허한 추상적 무'로 귀착되지만, 이것이 다시 부정되는 이중 부정을 통하여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데에 헤겔의 부정 개념의 주체적인 역동성이 담겨 있다.

 

23.

그리하여 신의 생명과 신의 인식을 두고 사랑이 자기 자신과의 유희를 벌이는 것이라는 투로 표현하는 것까지는 무방하더라도, 만약 여기에 진지함과 고통과 인내와 부정의 작업이 결여되어 있다면 사랑의 유희라는 논지는 얄팍하게 치장된 설교에 그치고 말 것이다. 애당초(an sich) 신의 생명이란 필경 티없이 맑은 자기동일성 또는 자기통일성으로서, 여기에 타자존재가 섞여들어서 소외가 야기되거나 다시 이 소외가 극복되거나 하는 일이라곤 있을 수가 없다.

 

예컨대 노발리스의 『보편초안Das allgemeine Brouillon』에 실려 있는 생각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특히 스피노자의 "amor dei intellectualis" 개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원문의 an sich를 순수한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대체로 일본식으로는 '즉자적'이라고 번역된다. 자기에 즉해 있는, 밀착되어 있는 상태 또는 자기의 능력, 소질이 아직 발현, 전개되지 않고 잠재해 있는 무자각의 상태를 말한다. 헤겔이 즉자-대자-즉자대자, 정-반-합 또는 정립-반정립-종합이라는 3단계의 변증법적 발전양식을 서술하는 가운데 빈번히 사용하고 있는 그의 독창적인 용어이다. 여기에는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단독으로 유리되거나 고립되어 있을 수 없고 상호간에, 그것도 더욱이 이중성이나 이중의 이중성을 띠고 중층적이며 다면적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의미가 본원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이는 운동kinesis의 본질을 가능태dynamis로부터 현실태energeia로의 전개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보인다. 특히 이를 매개작용이 사상된, 추상적인 것 또는 매개가 지양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헤겔, 『철학사』 1 [독일어본], p.44-55 참조.),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 개념을 비판하는 데 원용될 수도 있는 함축적인 면이 있다.

 

24.

그러나 이러한 신의 원상은 추상적인 보편성에 그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생명에 기와 대결하는 성질이 있음으로 해서 형태가 자기 운동을 행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 있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인식은 원래 있는 그대로의 본질만을 다룰 뿐, 형식은 생략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절대적인 것에 관한 기본명제를 세우거나 이를 직관하는 데서는 형식의 구현과 본질의 전개 그 어느 쪽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기와 대결'의 원어는 für sich로서, 일반적으로 즉자나 대타에 반하는 의미에서 대자를 풀이한 말이다. 변증법적 발전의 두번째 단계인 대자는 외적인 타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무관심한 '즉자'의 경우와는 달리 '타자'에 대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거나 내면화하는 '부정적인 자기관계'(negative Selbstbeziehung, 『엔치클로페디』, 1, p.96 「보유」 참조)를 지닌다. 여기서는 발전, 분열이 없는 즉자의 상태와는 달리 구별, 분열, 모순, 부정, 소외와 같은 다양한 자기 변화와 생성의 계기를 지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를 행하는 고차원의 자각적인 행위를 전제로 한다. 이는 자기 자신 속에 구별을 갖지 않는 자아 또는 무한적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자기 관계로서의 일자(das Eins) 또는 자기(das Selbst)라고도 하겠다. 

 

셸링의 『나의 철학체계의 서술』 제 18, 19절에서 형식Form을 특수자 또는 인식으로, 본질Wesen을 보편자 또는 존재로 파악하여 양자를 동일시 또는 등식화했음을 지적한 것. 특히 헤겔은 그의 『철학사』(독일어본) 3(근대편), p.438에서 이 대목을 야유조로 비평하고 있다.

 

25.

진리는 곧 전체이다. 그러나 전체는 본질이 스스로 전개되어 완성된 것이다.

 

전체란 일반적으로 개별 또는 부분에 대치되는 개념이지만 궁극에서는 대립에 바탕을 둔 양자택일적 입장이 아니라 상호침투된 일체성을 획득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 철학에서 하나의 핵심적 명제라고 할 '전체', '전체성'은 오직 내적인 자기 전개를 통해서만 스스로 성취될 수 있는 본질적인 형상으로서 이렇게 전개되어나가는 독자적인 리듬이 논리적 필연성으로 나타나는바, 이를 순수한 형식으로 추출해놓은 것이 바로 방법이며 논리이다. 이와 관련하여 흔히 "전체는 진리가 아니다."(Das Ganz ist das Unwahre)라고 한 아도르노의 반론이 예시되곤 한다.(Aspekte der Hegelschen Philosophie, Suhrkamp, 1956, 서두 참조).

 

26.

그런 낱말로만 그치지 않는 이상의 것은 문자의 형식으로 나타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말로써 타자화된 것이 다시금 되돌아오는 매개작용이 따라야만 한다. 그런데 이 점이야말로 사람들이 기피해 마지않는 것인데, 그 이유는 매개라는 것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또 절대적인 것 속에는 전혀 있지도 않다는 그 이상의 것을 주장하려 한다면 결국 절대적 인식은 단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매개Vermittlung이란 변증법적 사유 전개를 위한 필수적인 용어로서 직접성 또는 무매개성Unmittelbarkeit에 대치되는 개념이다. 매개를 수행하는 것은 매체Medium라고 불리는데, 물질계에서는 물이, 정신계에서는 언어적인 기호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는바, 이는 곧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사이를 이어주고 소통시켜주는 전달작용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천상과 지상, 정신과 자연 그 어디에도 매개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확언하는 헤겔로서도 그러나 또한 "사유란 매개를 지양하고 난 또다른 매개이다."(Denken ist Vermittlung durch Aufhebung der Vermittlung,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 1, Suhrkamp Verlag, Frankfurt/M., 1980, p.189 참조)라고 함으로써 매개의 지양을 통한 직접성으로의 연결고리를 열어놓기도 했다. 이렇듯 직접성과 매개성의 일체화를 제시해놓았다는 점에서 여기에 각별한 의미가 주어져야만 하겠다. 

 

27.

따라서 만약 진리에는 반성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반성을 절대적인 것의 적극적인 요소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성이라는 것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성이란 진리를 결과로서 이루어내는 것ㅇ니 동시에 결과와 그의 생성과의 대립을 지양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기 『신학논집』(일명 Theologische Jugendschriften) 등에서는 '지양하다, 극복하다'라는 등으로 해석되는 독일어 동사 aufheben은 주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긍정의 뜻을 포함하는 헤겔 고유의, 그것도 헤겔 스스로 말하듯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정착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근본규정이 되었다. 라틴어의 tollere에 맞먹는 Aufheben이라는 낱말이 '보존하다'와 '폐기, 파기, 극복하다'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는 데에 이 낱말의 특이점이 있다. 어떤 하나의 개념을 놓고 그것이 갖는 한계나 결함으로 인하여 이를 폐기하면서 동시에 다시금 그 한계나 결함을 제거한 상태에서 보존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이기도 한 이 이중적, 양면적인 성격이야말로 "한낱 오성적인 차원에서의 양자택일을 뛰어넘는 독일어가 갖는 사변적 정신"의 발로라고 하여 흡족함을 나타내고 있다.("...der über das bloß verständige Entweder-Oder hinausschreitende spekulative Geist unserer Sprache....," 『엔치클로페디』 1, 96절 참조).

 

28.

이성을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데, 이때 그는 마땅히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성은 현실성을 띤다. 그러나 결과로서 있는 것은 직접적인 단순한 존재이다. 자유를 자각한 인간은 자기에 안주하여 이전의 자기는 어딘가에 방치해놓은 채 그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자기와 화해해 있는 것이다.

 

이성의 현실성과 관련해서는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이성과 현실의 관계에 언급한 대목을 참조하라.

 

29.

이상 얘기된 바로서 이성은 또한 합목적적인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자연과 사유 모두를 오해한 나머지 사유보다 자연이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먼저 자연의 외적 합목적성을 배제하려는 입장을 취한 탓에 목적이라는 형식이 아예 불신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연을 합목적적인 행위로 규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목적이란 직접 있는 그대로 정지해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움직이는 다름아닌 주체이다. 그 움직이는 힘은 추상적으로 파악한다면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수한 부정성이다.

 

외적 합목적성이란 계몽주의 시대의 유용성 사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적이 사물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물은 단지 인간이 지니는 목적을 위해 부수적으로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나타낸 것으로서, 칸트는 이를 내적 합목적성과 구별하였다. 여기서 외적 합목적성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주로 베이컨, 칸트, 스피노자를 염두해 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목적인, 동력인, 형상인은 모두가 결국은 하나로 귀착되므로 목적인은 동시에 동력인이며 특히 최고 목적으로서의 신은 '부동의 운동자'(『형이상학』 제9편 7장)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헤겔은 목적인을 곧 동력인으로 간주하여 이를 독자적인 의미에서 '주체'로 파악한다.

 

30.

오직 정신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본래 그 자체로 있는 본질이며, 갖가지 관계를 자아내는 가운데 스스로의 위치도 명확히 드러내는 외타적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존재로서, 결국은 자기를 벗어나 있는 상태에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명확히 하고 자기를 놓치는 일이 없는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존재이다. 

 

즉자대자적an und für sich이란 일반적으로 즉자와 대자의 종합어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의미심장하다. 즉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것을 뜻하는 낱말로 자리잡혀 있다. 

 

31.

그러나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우선은 그의 진상을 다루고 있는 우리에게 그렇게 비쳐질 뿐이고, 일단 그 첫 단계에서는 다만 정신적인 실체로서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우리에 대하여' 또는 '대아'(für uns)로도 번역된다. 만약 '우리'가 특정한 철학적 문제를 제3의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평가, 고찰하는 자각적인 주체의 입장에 있다고 할 경우, 목전에 제시되어 있는 어떤 특정한 문제나 사태 속에 무자각적으로 직접 매몰되어 있는 어떤 당사자와는 구별된다는 뜻이다.

 

정신적 실체 또는 정신적 실재(die geistige Substanz, das geistige Wesen)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신이면서도 아직 주체적이 아니고 실체적, 존재적, 대상적, 직접적인 성질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정신적인 것만이 오로지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할 때의 이 정신적인 것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상태가 되겠다.

 

32.

따라서 완전무결한 것이라면 당연히 정신에게도 자각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정신적인 것의 지와 자기가 정신이라는 것을 아는 지가 나타나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것이 정신 자신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야만 하고, 그것도 더욱이 직접 나타나 보이는 대로의 모습과 반성적으로 내면화된 모습을 함께 지닌 이중의 대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변증법적 사유 논리에서 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바로 이 '이중성' 문제이다. 헤겔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자기가 아닌 타자와의 매개, 다시 말하면 자타 사이의 이중화를 겪지 않는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물은 단지 직접적이고 일회적으로 있을 뿐이지만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스스로 이중화한다..."(Die Naturdinge sind nur unmittelbar und einmal, doch der Mensch als Geist verdoppelt sich, Hegel,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1, Suhrkamp Verlag, 1986, Frankfurt/M., p.51 참조).

 

33. 

절대적인 타자존재로 있으면서 순수하게 자기를 인식하는 이 에테르Äther 그 자체야말로 학문의 근본바탕이며 지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Äther는 그리스인에게서는 신들이 살고 있는 해맑은 천공을 뜻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인간의 이성을 북돋우는 영혼보다도 훨씬 뛰어난 천체의 영혼이 불어넣어진 원소이며, 스콜라 철학자에게는 제5원소에 해당한다. 헤겔은 이를 자기자신과 관계하는 절대정신이면서도 스스로가 절대정신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절대적 타재 속에서 순수한 직접적 자기 인식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34.

교양이 미비한 상태에 있는 개인에게 지를 갖추도록 해준다는 과제를 일반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자각적 정신과 함께 보편적인 안목을 지닌 개인의 형성과정을 고찰하는 것이 된다. 

 

원어는 Bildung이며 교양, 교육 또는 폭넓은 의미의 문화적인 형성, 도야를 뜻한다. 교양이나 문명을 세계사에 적용한 것은 레싱E. Lessing이 역사를 인륜의 교육과정으로 본 데서 비롯되며, 다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교양소설Bildungsroman이라는 개념으로 정초되었다. 그밖에 헤겔 『법철학』의 「시민사회론」 187절 참조.

 

보편적 개인이란 경과하는 시간에 편승해 있는 세계정신과 반드시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는 개인, 개체로서 세계정신을 철저하게 체현하고 있는, 독립 자존하는 개별적인 존재이다. 이렇듯 어떤 특정한 단계나 형태 속에서 세계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실제적인 원형을 헤겔은 문예작품에서 찾고 있는데, 이 책의 제5장 쾌락과 필연성 속의 『파우스트』, 인륜에서의 『안티고네』, 교양 단계에 나오는 『라모의 조카』 등이 그 예이다.

 

35.

이때 그는 분명히 옛적 지식을 기억 속에 되살려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대로 거기에 멈춰서려고 하지는 않는다.

 

원어는 Inter-esse로서 '함께 있다'(Dabeisein)라는 뜻이며, 『역사 속의 이성』(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04, 120쪽 참조)에 명확한 해석이 내려져 있다.

 

36.

이런 의미에서 교양, 교육의 과정이란 개인으로서는 눈앞에 현존하는 것을 획득하고 무기적인 자연을 영양소로 하여 이를 완전히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이다.

 

원어는 unorganische Natur이다. 개체적인 자기의 본성이긴 하면서도 자기화 되어 있지 ㅇ낳은 환경이나 또는 주체화되지 않고 소외를 벗어나 있지 못한 실체를 말한다.

 

37.

이미 사유의 결정체로 화한 내용은 세계사적인 시대의 한 가닥 소유물이 되어 있어서 이를 더 이상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전환할 필요는 없다. 또한 근원적인 형식을 유지하지 못한 채 갖추어져 있던 생경함도 탈각되어버린 상태에서는 차라리 기억 속에서나 더듬어볼 수 있는 본체를 명확히 의식화된 형식으로 바꾸어놓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사태의 전환은 3단계로 구분된다. 첫째는 거기 있는 대로의 것Dasein으로서, 외면적으로 주어진 상태에 그대로 매몰되어 있는 즉자적, 잠재적 단계이고, 둘째는 사유의 힘으로 자기das Selbst라는 정신적 존재성을 획득하는 단계이며, 셋째는 오성의 활동에서 출발해 이성에 의한 개념적 파악에 따른 자립적이고 자각적인 발전을 거쳐서 마침내 실체가 주체가 되는 단계이다.

 

38.

분열의 활동은 오성의 힘과 작업에 의한, 참으로 경이롭고도 더없이 위대한, 아니 절대적이라고도 할 힘의 발현이다. 자체 내에 흔들림 없이 결집되어 있는 실체로서 그의 요소를 끌어안고 있는 원환은 직접 드러나 있는 대로 거기에 있을 뿐, 전혀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관계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둘레를 벗어난 우연적인 요소가 이 원으로부터의 속박을 느끼면서 원을 벗어난 다른 현실과의 연관 아래 독자적인 존재로서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 여기에는 거대한 부정의 힘이 발동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사유의 에너지이며 순수자아의 에너지이다.

 

예나 시대 정신철학 가운데 특히 『실재철학』의 「예지 Intelligenz」 부분에서 직관-기억-표상-개념이라는 진행단계가 설정되어 있지만, 셸링의 직관철학과는 별도로 헤겔에게서도 역시 인식은 직관작용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원한이란 오성적 인식에 의해 분리, 분해 되기 이전의 직관이나 표상에 의해 포착된 구체적인 전체를 말한다.

 

39.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매개되고 실체의 내용이 동시에 그대로 자아의 소유물이 되면서 내용은 곧 자기 운동하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현상학이 다다르는 최종 지점이다.

 

헤겔의 '개념'이 그 얼마나 자기das Selbst 또는 자아와 일체화해 있는가가 여기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책 제8장의 '절대지'에도 "자아는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순수개념이다"라고 씌어 있다.

 

40.

마찬가지로 주관과 객관, 유한과 무한, 존재와 사유의 통일이라는 식의 표현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것이 일단은 통일의 장을 벗어나 있는 듯한 의미를 띤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통일이 되고 난 다음에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등의 의미도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거짓이라는 것도 그것만이 따로 진리의 한 요소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수학에서와 달리 철학적 진리에서는 대립하는 양자가 일단 종합과 통일에 이르고 나면 각기 대립하는 두 항은 통일 이전과는 다른 하나의 계기로 전화한다. 이에 관해서는 『차이 논문』의 피히테 철학에 대한 논술 부분에 잘 밝혀져 있다.

 

 

41.

수학의 증명이라는 운동은 대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겉도는 외면적인 행위이다. 이를테면 직각삼각형이라는 것이 스스로 해체되어 작도를 이루어내고 세제곱의 정리를 증명하는 데 필요한 도면이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 전체가 인식을 위한 절차와 수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 본질, 개념이라는 3부작으로 구성된 헤겔의 『대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은 존재하는 사태에 대한 직접적이고 외면적인 반성을 행하는 '존재'의 변증법과 개개의 사물을 직접 거기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태를 성립하게 하는 내적 근거로서의 본질이 드러나 있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본질'의 변증법을 합쳐서 이 두 가지의 생성양식을 고찰하는 '객관적 논리학'과 이에 대하여 '주관적 논리학'이라고도 불리는 '개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개념론'에서는 논리학 전체를 개념이 자기 운동하는 통일적인 과정으로 고찰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제가 되는 수학의 경우는 존재논리학에 속하는 양의 입장에 머무른 채 외면적인 반성을 행할 뿐이다.

 

42.

내재적이라는 이른바 순수수학은 시간 그 자체를 제2의 고찰재료로 하여 공간에 대치하지는 않는다. 응용수학의 경우는 운동이나 그밖의 현실적인 것을 취급하는 동시에 시간을 취급은 하면서도 개념에 의해 결정되는 갖가지 시간적 관계를 포함한 복합적인 명제를 경험에서 추출해냄으로써 전제가 되는 그러한 명제에 수학적인 공식을 적용하는 데 그치고 만다. 수학에서는 저울의 평형의 법칙이나 낙하운동에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의 법칙 등에 관한 이른바 증명이라는 것이 자주 행해지는데, 그것이 증명으로 내세워지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수학적 인식에서 증명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증명해준다. 수학적 인식에서는 아무런 증명도 하지 않으면서 증명이 된 듯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수학이 걸치고 있는 위장된 탈을 벗겨내 그의 한계와 더불어 이와는 별개의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에는 수학적 증명을 비판하는 것이 가장 유효하다고 하겠다. 시간과 관련해서 본다면 이는 공간에 대치되는 순수수학의 또 하나의 소재를 이룬다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개념이 실재하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개념 없는 차이로서의 크기의 원리와 추상적이고 생명 없는 통일에 지나지 않는 등식의 원리로는 끊임없이 동요하는 생명과 절대적인 차이를 포착할 수 없다. 따라서 수학에서는 생명의 부정적인 힘은 마비된 채 '1'을 통하여 인식의 제2의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사태를 외면적으로 취급하는 수학적 인식은 스스로 운동하는 것을 소재로 다루는 데 그칠 뿐이어서, 그로부터 아무렇거나 상관이 없는 외면적인 생명 없는 내용을 들추어낼 뿐이다.

 

헤겔에게서 시간은 공간과 함께 자연철학을 구성하는 기본골격을 이룬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자연은 정신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데 이르는 전(全) 단계, 곧 정신의 외면적인 형태에 해당하는바, 이를 역으로 보면 자연의 진실태는 정신이라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당연히 정신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진다. 이때 정신 또는 개념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한다면 시간은 지금의 부정의 부정이며, 따라서 시간은 거기 있는 대로 존재하는daseiend 개념, 즉 정신에 의하여 자연적인 의미의 시간형식이 지양되고 파기된 개념이다. 이에 관해서는 제8장 「절대지」에도 상술되어 있다.

 

43.

이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의한 '삼중성, 삼위일체'의 개념을 보면, 애초에는 그저 본능적으로 재발견되어 생명이 없는 몰개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데 새삼 여기에 절다적인 의미가 주어지면서 참다운 내용 속에 담긴 참된 형식이라고 치켜세워지고 이로부터 학문의 개념이 부상하게 되었다.

 

헤겔 자신으로서는 사용한 바가 없는, 그의 변증법을 특징짓는 정-반-합이라는 약칭은 즉자-대자-즉자대자 또는 긍정-부정-부정의 부정으로도 표현되는데, 그 종교적인 의미는 성부-성자-성신이라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Dreieinigkeit, Trinität에서 유래한다. 여기에 논의될 삼중성 원리는 Dreieinigkeit, Trichotomie, Triade라고도 표현된다. 일찍이 피타고라스 학파와 신플라톤 학파 그리고 기독교적 삼위일체론 등에 힘입은 이 사상이 칸트 범주론에 와서는 이를테면 질의 범주가 실재성-부정성-제한성이라는 정반합의 구조를 띠고, 다시 피히테에 와서는 정립-반정립-종합의 방법으로 나타나면서, 마지막으로 셸링에 와서는 양극성Polarität과 그의 동일성의 원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믿음과 지식Glauben und Wissen』에서 헤겔은 칸트의 범주론이 갖는 구조적 성격을 논하면서 오성적 사유형식의 삼중성에 착안했던 칸트에 의해 오성에서 이성으로의 발전 가능성과 함께 다시 사변적인 인식의 길마저도 깨우치게 되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44.

이러한 형식주의는 내적인 생명이나 생명력이 있는 존재의 자기 운동 대신 직관이나 감각적인 지에 의한 단순한 규정을 표면적인 유추를 통해 주논점으로 하여 도식을 이렇듯 외면적이고 공허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을 학문적인 구성으로 내세운다.

 

헤겔도 이미 예나 시대부터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요인으로 인력과 반발력이라는 두 개의 힘을 제시해왔다. 이것은 본래 칸트의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Metaphysische Anfangsründe der Naturwissenschaften』에서 밝혀진 이후로 셸링의 자연철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 개념이다.

 

45.

예컨대 자기(磁氣)라는 성질은 그 자체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데도 정작 그것이 자기와는 관계와는 술어가 될 뿐, 존재 자체에 내재하는 생명으로 인식되는 일도 없고 존재 그 자체를 산출하고 표현하는 고유한 힘으로 인식되는 일도 없으니 실제로는 죽은 성질로 격하되어버린다.

 

Prädikat(술어)를 동사화한 prädizieren은 본래 '덧붙이다, 부가하다'라는 뜻인데, 이에 따라서 보통 개체적 대상을 지시하는 주어가 부동의 실체일 때 여기에 술어를 부가하는 것을 헤겔은 beilegen으로도 표현한다.

 

46.

이런 점에서 학문은 교활한 면이 있다고도 하겠다. 즉 겉으로는 활동을 자제하는 듯하면서 실은 사태를 예의 주시하여 자기보존이나 특수한 이해 추구에 전념하는 듯한 존재가 정작 구체적인 생명활동을 벌일 때면 본래 마음먹었던 것과는 반대로 자기를 해체하여 전체 속에 맞물려들어가서 거기에 제자리를 차지하는 행위의 실상을 한결같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원어의 List, 즉 간교, 간계, 간지는 헤겔의 『역사 속의 이성』에서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로도 알려져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역사 속의 이성』 (한국어판) 154쪽 참조.

 

원어는 zusehen으로서, 이 표현은 이 책의 「서론」에서 '지와 진리'의 상관성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47.

바로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부정을 위주로 하는 사유에서는 논변적 사유 자체가 내용을 송두리째 병탄해버리는 자기로 나타난다. 이와는 달리 긍정적인 인식에 무게를 두는 사유에서는 자기가 주체(주어)로 상정되고 내용은 속성이나 술어로서 그와 관계하게 된다. 즉 주체가 토대를 이루고 내용이 거기에 결부되면서 여기에 끊임없이 왕래하는 운동이 펼쳐지는 것이다.

 

원어는 Subjekt인데, 이 한 마디 속에는 네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hyperkeimenon, 즉 기체라는 뜻으로 실체인 Substanz와 동일한 의미가 있다. 둘째로 판단 또는 명제의 형식에 따라 문법상의 주어가 된다. 셋째로 주관이라는 의미에서 실체와 속성, 주어와 술어를 결합하는 논변에서의 인식주관이 된다. 넷째로 개념적 인식에서 "실체는 주체이다" 또는 "진리는 주체이다"라고 할 때의 주체에 해당된다.

 

48.

따라서 철학적 표현에 접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내면에 감춰져 있는 의미를 찾아나서곤 하지만, 이때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 추구했던 명제의 변증법적 운동을 표현하는 일은 소홀히 하게 된다.

 

원어는 innere Anschauen, 즉 내면적 직관, 관조인데 흔히 신적 직관에 비유된다.

 

49.

명제란 도대체 진리가 무엇인가를 표현해야만 하지만, 진리는 본질적으로 주체이다. 또한 주체로서의 진리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여 전진을 거듭하고 난 뒤어야 마침내 자체 내로 복귀해가는 변증법적 운동에 다름아니다. 일상적인 인식에서는 이런 내면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은 증명이 떠맡을 일이지만 이렇듯 변증법과 증명이 서로 분리되어버린다면 사실상 철학적 증명이란 더 이상 성립될 수가 없게 된다.

 

이렇듯 증명과 변증론을 분리해놓은 철학자로는 우선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꼽을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변증법이 '진리의 논리학'인 분석론으로부터 추방되어 '가상의 논리학'인 변증론으로 대체되면서 결국 변증법이 증명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변증법이 단지 개연적인 명제에서 출발하여 엄밀한 증명과 구별되는 토피카(topos, Topika)로 이해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점을 헤겔은 비판한 것이다.

 

 

  1. 직역하면 "매개 없는 앎"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