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Epistemology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이론들

Soyo_Kim 2023. 12. 6. 09:34

2015-1 인식론 정리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이론들

 

1.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배경설명

K) 어떤 사람 S가 명제 P를 알기 위한 필요충분조건(IFF)는

1) P가 참이고
2) S가 P를 믿으며,
3) P에 대한 S의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하다.(=S가 P를 믿는 것에 인식적 정당성을 지닌다.)

게티어 반례에 대한 해결시도가 계속해서 실패로 돌아가면서, 인식론자들은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여러 이론들이 등장함.

인식적 정당성: 어떤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명제에 대한 한 사람의 믿음이 정당화 되는가?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 중에는 근거 있는 믿음도,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인 믿음도 존재한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에 대한 논의가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이다.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토대론, 정합론, 증거론, 신빙론등이 있다.

토대론(foundationalism)
정합론(coherentism)
증거론(evidentialism) ->토대+정합
----------------
내재론(internalism)
(정당성을 결정하는 요소가 전적으로 인식주체 내부에 있다는 입장)
신빙론(reliabilism)
------------------
외재론(externalism)
(정당성을 결정하는 요소의 일부가 인식주체 외부에 있다는 입장)
인식적 정당성(epistemic justification) → 어떤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s가 주어진 명제 P를 믿는 것이 적절한가(합리적인가)의 문제

첫째, 내가 어떤 믿음에 대해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 믿음을 갖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의 합리성은 인식적 합리성을 의미한다. 배가 난파되어 망망대해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선원들에게, 구조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희망과 실제 세계가 그러함이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가지지 않기에, 인식적으로 합리적이지는 못하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을 가지는 것은, 실제로는 세계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구조 전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기에(자신의 생존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주기에) 실천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인식적 정당성은 주어진 명제를 믿는 것이 삶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느냐로 인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원들이 구조되리라는 믿음은 실천적 합리성의 측면에서는 합리적일지 모르나, 주어진 근거가 믿음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기에 인식적으로는 비합리적이다.

둘째, 인식적 정당성은 규범적, 평가적 개념이다. 나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사실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에 대한 일종의 평가이며 옳은 행위란 일반적으로 내가 행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다. 이런 도덕적 정당성과 마찬가지로, 인식적 정당성은 있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평가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믿음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그 명제를 믿는 것이 우리의 인식적 의무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과 유사하다.

셋째, 거짓인 명제도 인식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이 거짓일 수 있는 이유는 경험적 귀납적 근거를 통해서도 믿음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존한 믿음이나, 귀납적 근거들을 토대로 한 믿음은 우연적으로 참이며 그 근거들의 믿음은 필연적인 참을 보장하지 못한다. 즉 그것을 믿는 것은 심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믿음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다 해도 믿음의 대상인 명제가 거짓일 수 있다.

넷째, 명제적 정당성과 사고적 정당성의 구분이 필요하다. 명제적 정당성이란 어떤 명제가 인식주체에게 정당한가의 문제로 여기서 정당성이란 속성을 갖게 되는 대상은 명제이다. 따라서 어떤 명제에 대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 내가 그 명제를 믿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이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을 직접 구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평가된 행위는 실제 행위가 아닌 가상의 행위이다. 실제로 행해지지 않더라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듯이 실제로 그 명제를 믿지 않더라도 그 명제에 대한 인식적 근거를 인식주체가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명제에 대한 명제적 정당성을 지닌다 해서 그 명제를 믿는 것이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믿을 때 그 명제적 정당성을 근거로 믿은 것이 아니라 엉뚱한 이유를 근거로 그 명제를 믿었다면 그 믿음은 정당하지 않다. 일기예보에서 태풍으로 인해 오늘 비가 내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면, 그것은 “오늘 비가 올 것이다”라는 명제의 명제적 정당성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어제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비가 올 것이다”라고 엉뚱한 근거를 통해 그 명제를 믿는다면 그 명제에 대한 나의 믿음은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여기서 정당성의 속성을 갖는 것은 명제가 아닌 믿음이다. 이렇듯 실제로 형성된 믿음에 대한 정당성여부를 사고적 정당성이라 한다. 사고적 정당성은 인식 주체가 그 명제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도 적절해야한다. 즉 사고적 정당성에서는 올바른 믿음 형성과정이, 인식적 정당성의 한 조건이 된다.

명제적 정당성 -그 명제에 대해 인식적으로 합리적이라 볼 수 있는 근거를 통해 확보된다.
사고적 정당성 -명제적 정당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인식 주체가 그 명제적 정당성을 근거로 하여 믿음을 형성해야 한다.

 

2. 토대론

(1)토대론의 도입배경- 무한후퇴

정당화된 믿음 -두가지 종류가 있다.

기초적 믿음(그 믿음의 정당화가 다른 정당화된 믿음에 의존치 않음)
비기초적 믿음(그 믿음의 정당화가 부분적으로는 다른 정당화된 믿음에 의존함)

인식적 정당성의 무한후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화된 믿음을 두가지로 분류

명제 A에 대한 믿음의 정당성 ->B라는 다른 명제에 의존 ->B를 믿는 것도 정당해야함

EX) 나는 오늘 은행에 갈 것이다 -> 정당화의 근거:
1)오늘은 세금을 내는 날이다
2)은행에 가지 않으면 세금을 낼 방법이 없다
3)세금을 내지 않으면 벌금이 나온다.
4) 나는 벌금을 내는 것을 싫어한다.
1)을 정당화할 근거: #1 국세청 홈페이지에 매달 15일이 세금 내는 날이라 적혀있다. / #2오늘은 15일이다.
#2를 정당화할 근거: 어제는 14일이었다./ 달력을 통해 오늘이 15일임을 확인했다

이렇게 한 명제에 대한 내 믿음의 정당화는 다른 정당화된 믿음에 의존하며 그것은 또 다른 정당화된 믿음에 의존한다.

A) 이러한 정당성의 근거를 찾아가면 계속해서 새로운 명제에 대한 믿음이 근거로 제시되며 이 과정이 무한히 계속

-> 그러나 이 경우 “내가 오늘 은행에 갈 것이다.”라는 명제는 정당화 될 수 없다. 이 믿음이 정당성의 근거가 다른 정당화된 믿음에 의존하고, 그 믿음이 계속해서 무한히 제시된다면, 이 믿음의 정당성을 궁극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종착역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B) 이러한 후퇴는 정당하지 않은 명제에 대한 믿음으로 종착

-> 그 종착역이 정당하지 않은 믿음으로 귀결된다면, 어떤 명제라도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믿음에 대한 정당화는 필요하지 않게된다.

C) 이러한 후퇴는 어느 지점에서 이미 앞에서 제시된 믿음으로 되돌아오는 순환

->정당성의 근거가 순환적이어서 믿음A가 B로인해 정당화되고 B가 C로인 해 정당화되며 C가 A로 인해 정당화된다면 결국 믿음 A는 믿음 A 그 자체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A가 다른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함을 역으로 보여주기에 문제가 생긴다.

D) 이러한 후퇴는 다른 믿음에 의존치 않는 정당한 믿음에서 종착

->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정당화될 수 있는 믿음이 존재하므로, 이 믿음으로부터 이 믿음을 베이스로 하는 정당화된 다른 믿음들을 이끌어낼 수 있고 이 믿음은 다른 믿음을 정당화시키는 궁극적 기초가 된다.

-> 이것이 토대론의 중심생각이다. / 무한후퇴 문제의 해결

“오늘 은행에 갈 것이다.”

A/ B/ C로부터 정당화된 믿음 D/ E

그로부터 정당화된 믿음 A/ B/ C (비기초적 믿음)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정당화될 수 있는 믿음들(기초적 믿음)

피라미드형 구조

 

(2) 토대론의 기본내용

그리하여 어떠한 믿음이 기초적 믿음(믿음의 정당성을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믿음)이 될 수 있는가? 또한 기초적 믿음은 다른 정당한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비기초적 믿음은 어떻게 기초적 믿음에 의하여 정당화되는가?

A) 정당화된 믿음 중 다른 믿음에 그 정당성을 의존하지 않는 기초적 믿음이 존재한다.
B) 비기초적 믿음의 정당성은 부분적으로 기초적 믿음에 의존한다.

 

Q1) 어떤 종류의 믿음이 기초적 믿음이 될 수 있는가?

기초적 믿음은 다른 정당화된 믿음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다른 비기초적 믿음이 정당화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기초적 믿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제 1원리를 제시하려했던 데카르트의 생각과 일치한다. 데카르트는 수학에서의 공리를 철학에서도 도입하려했으며, 방법적 회의를 통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할 수 없는 것, Cogito Ergo Sum 이라는 명제를 이끌어냈다.(다만 토대론에서 기초적 믿음을 찾아내는 과정은 경험적 명제를 바탕으로 하는 반면, 데카르트의 제 1원리는 경험적 명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기초적 믿음의 수는 많아야한다. 데카르트의 제1원리와 같은 확실성을 가진 명제의 수가 적다면, 피라미드의 구조는 역피라미드가 될 것이고, 기초적 믿음은 다른 믿음들의 정당성에 근거를 제공하는 믿음이므로 그 숫자가 풍부해야 다른 믿음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우리가 정당하게 믿는 비기초적믿음의 수가 매우 많으므로 피라미드 구조라면 기초적 믿음의 수는 더욱 많아야 할 것 이다.

 

기초적 믿음

1) 의심의 여지가 없는 틀림없고 확실한 속성
2) 수적으로 많이 확보될 수 있는 그런 것

 

기초적 믿음의 후보들

<1> 감각적 믿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대부분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것은 공간을 차지하는 대상에 대한 경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비기초적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공간적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야기되는 일반적인 감각적 믿음을 기초적 믿음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ex) 저기에 나무가 있다.

밖에 개가 짖는다.

이것은 2) 조건을 충족시키지만 1)을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문제가 있다. 감각적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믿음이 아니다. 나는 전봇대를 나무로 착각할 수도, 개 짖는 소리를 녹음한 것을 실제 개가 짖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형성한 믿음은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경험을 근거로 하여 믿게 된 명제의 참이 굳이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즉, 명제의 참은 경험으로 인해 보장받지 못한다.

 

<2> 현상적 믿음

감각적 믿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현상적 믿음이다. 현상적 믿음은 경험을 통해 믿음을 형성하였으면서, 동시에 경험을 통해 믿음이 보장되는, 확실성을 가진 믿음이라는 점에서 1),2)를 모두 만족시킨다. 버클리의 Esse est percipi는 오로지 경험되는 것만이 존재한다 주장하면서 인식에서의 확실성의 결여를 존재의 문제로까지 확장시켰다. 이에 영향을 받은 칸트 역시도 있는 그대로의 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물자체로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객관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지 않다면,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있어 지각되는 내용이라 하는 것이 옳다. “저기에 나무가 있다.”의 확실성은 경험을 통해 보장받지 못하지만, “저기에 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의 확실성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후자의 명제는 저기에 나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세계에 대한 판단이 아닌 나의 내면에 들어 있는 경험적 내용이다. 이처럼 ~처럼 보인다, 들린다, 느껴진다의 표현을 현상적 믿음(appearance belief)이라 하며 영어로는 it appears to me that P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현상적 믿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내게 그것이 붉게 보인다 해서 그것을 꼭 믿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게 붉게 보인다(는 것을 믿는다).”와 “붉은 것이 있음을 내가 믿는다.”는 의미가 다를뿐만 아니라 논리적 함축관계도 없다. 그 물체가 사실은 흰색인데 붉은색 조명을 받아 붉게 보이는 것이라면 내게 붉게 보인다 해서 후자를 믿어야 될 필요는 없다. 또한 이것은 감각적 믿음의 수만큼이나 많으므로, 2)조건도 만족시킨다. 따라서 현상적 믿음을 기초적 믿음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고전적 토대론, 데카르트적 토대론이라 부른다.

 

Q2)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적 믿음(기초적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기초적 믿음은 다른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정당화된다. 그 이유는 이러한 기초적 믿음이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BB) 어떤 명제 P가 S에게 기초적 믿음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P에 대한 S의 믿음이 스스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한 믿음이 스스로 정당화되기 위해선 그 믿음이

1)의심불가능

2)틀릴 수 없음

3)교정될 수 없음 - 감각적 믿음은 형성된 뒤에 다른 요소들로 인해 교정될 수 있지만 현상적 믿음은 다른 어떤 요소로도 교정이 불가능하다. 즉 그것은 남에 의해서 교정될 수 없다.

4)따라서 이러한 믿음을 믿을 경우 그것은 항상 참이다. -> 필연적

따라서 어떤 명제가 스스로 정당화 되려면 그 명제를 믿었을 경우에 그 명제가 거짓일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한다. 스스로 정당화됨

(SJ) 어떤 명제 P에 대한 S의 믿음이 스스로 정당화되는 필요충분조건(IFF)는 필연적으로, S가 P를 믿는다면 P는 참이다.
(SJ) “sBp가 스스로 정당화됨” iff ㅁ(sBp -> P)

 

필연성은 P에 대한 S의 믿음과 P의 진리치 관계에서 성립한다.

스스로 정당화됨의 조건이 (sBp -> P)일 뿐이라면 우연적으로 그것이 성립하는 경우에도 참이다.

이를테면, 감각적 믿음에서, 내가 “내 앞에 나무가 있다.”를 믿고 그것이 참이었을 경우 그 명제는 스스로 정당화될 것이다. 그러나 게티어 반례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그 믿음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가 거짓이면서, 한편으로는 믿고 있지 않았던 참인 근거 때문에 참인 정당화된 믿음이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내 앞에 있는 나무는 홀로그램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실제 나무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연적으로 참인 것만은 스스로 정당화됨의 조건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참이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믿으면서 그 명제가 거짓인 경우는 불가능하다.

감각적 경험을 근거로 내가 “저기에 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거짓인 경우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반면 일반적인 감각적 믿음은 거짓일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따라서 현상적 믿음이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렇다면 (BB)와 (SJ)를 통합하여 스스로 정당화됨을 매개로하는 기초적 믿음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제공할 수 있다.

(BBSJ) 어떤 명제 P가 S에게 기초적 믿음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필연적으로, S가 P를 믿는다면 P는 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례가 존재한다.

1)삼각형의 예(수학과 논리학의 경우)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BBSJ)에 따르면, 어떤 명제 P가 S에게 기초적 믿음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필연적으로, S가 P를 믿는다면 P는 참이다.

그렇다면 인식주체S가 수학이나 논리학의 명제를 믿는다면 그 명제는 S에게 기초적 믿음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를 믿는 것이 모두 정당화되는가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이다.”에서 S가 이것을 믿기만 한다면 그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에 S에게 기초적 믿음이 된다. 즉 스스로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그러나 초등학생이 그것을 벽에 써진 낙서를 보고 아무런 생각 없이 믿었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벽에 써진 낙서에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00도이다.”라고 써져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 명제를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초적 믿음은 아니면서 IFF의 오른쪽을 만족시켜 F iff) T가 된다.

따라서 (BBSJ)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반례가 나온 이유는 P에 대한 S의 믿음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채, 후건에 해당하는 명제 P가 필연적으로 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BBSJ*) 어떤 명제 P에 대한 S의 믿음이 스스로 정당화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1) 필연적으로, S가 P를 믿는다면 P는 참이다.
2) 필연적으로, S가 P의 부정을 믿는다면 P는 거짓이다.
(P의 부정이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닌 P자체가 거짓)

그 초등학생은 다른 어떤 근거도 없이 단순히 벽에 써져 있는 낙서를 근거로 하여 명제 P에 대한 믿음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초등학생이 명제 P의 부정을 믿는 경우는 어떠한가? 초등학생이 벽의 낙서를 보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다. - 이를테면 200도이다.”에 대한 믿음을 형성한다면, 그럼에도 믿음의 근거로부터 형성된 명제 P는 참이다. 따라서 S가 P의 부정을 믿지만, 명제 P는 참이기 때문에 F iff) F가 되어 더 이상 반례가 되지 않는다.

한편 현상적 믿음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저기에 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의 부정은 “저기에 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이다. S가 P를 믿는다면, P는 참이다. S가 P의 부정을 믿는다면, P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거짓이다. 현상적 명제의 진리치는 현실과 대조할 필요가 없고 나의 내면에 들어있는 경험적 내용의 참/거짓만을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적 믿음은 T iff) T가 되어 (BBSJ*)를 통과한다.

 

2) (BBSJ*)에 대한 반례 - 가려움증의 예

(BBSJ*)의 1번조건에 대한 반례로 현상적 믿음에 대한 반례이다.

내가 가려움증을 느껴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는 그것이 가벼운 통증임을 말해준다. 병원을 다녀온 나는 같은 증상이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믿음을 형성한다.

P 내게 가벼운 통증이 느껴진다.

이것은 현상적 믿음이지만, 의사는 사실 모종의 이유로 나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근거로 하여 형성한 나의 믿음은 현상적 믿음이면서도 거짓인 믿음이다. 이것은 T iff) F에 해당한다.

재반박

1. 그 예를 모두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기초적 믿음은 아니다. 이것을 위해 현상적 믿음의 정의에 대한 명료화가 필요하다.

“만일 이러이러하게 보인다, 들린다, 느껴진다.”가 현상적 믿음이라면, 모든 현상적 믿음이 다 기초적 믿음일 필요는 없다. 기초적 믿음이기 위해선 그것이 현상적 믿음이어야하지만, 현상적 믿음이라 해서 그것이 기초적 믿음일 필요는 없다.

<내게 가벼운 통증이 느껴진다.>가 기초적 믿음이기 위해선, 그것이 스스로 정당화되어야지, 다른 믿음에 의존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저 예에서 내가 믿음을 형성한 근거는 의사의 블러핑 때문이다. 즉 저 믿음의 정당성은 의사의 말로 인해 확보된 것이지, 스스로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명제 P는 현상적 믿음이나 기초적 믿음은 아니다. 현상적 믿음 중에는 다른 믿음에 근거하여 추론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으며 따라서 모든 현상적 믿음이 기초적 믿음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BBSJ*)의 F iff) F가 되기에 이는 적절한 반례가 되지 못한다.

2. 또 하나의 재반박은 P에 대한 믿음을 기초적 믿음이라 유지하되, 문장과 명제를 구분하는 것이다.

문장은 문법에 맞게 쓰인 일련의 기호인 반면, 명제는 그러한 문장에 의해 표현된 내용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호 차원의 문장이 아닌 그 기호에 의해 표현된 명제이다.

명제 P는 <내게 가벼운 통증이 느껴진다.>가 아니라, <“의사가 내 가려움증을 칭하는 방식으로 사용한 표현인 가벼운 통증”이 느껴진다.> 이다. 그렇다면 내가 믿은 명제는 P가 아니라 <내게 가려움증이 느껴진다.>이며 이는 거짓이 아니므로 T iff) T의 형태가 되어 반례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경우 1번과는 달리, P가 아닌 <내게 가려움증이 느껴진다.>가 현상적 믿음 -> 기초적 믿음이 된다.

 

3)(BBSJ*)에 대한 반례2 - 말벌의 예

내 방에 큰 괘종시계가 있는데 이 시계는 정각에 종이 칠 때 마다 붉은 빛이 번쩍 비추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종이 칠 때 마다 붉은 빛이 번쩍거린다고 믿는다. 어느 날, 내 방에 큰 말벌이 들어와서 코앞을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그것만 신경 쓰고 있는 사이에, 시계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관습적으로 <내게 붉게 보인다.>는 명제를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시계가 고장이 나서 종소리가 났음에도 빛이 번쩍거리지 않았다. 이 경우, 나는 현상적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붉은 빛이 실제로 난 것이 아니므로, 그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렇다면 그 명제는 현상적 믿음으로 기초적 믿음이 되지만 (BBSJ*)의 1조건을 만족 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 명제를 믿고 있지만 실제로 붉은 빛이 시계에서 번쩍거리지 않았으므로 <내게 붉게 보인다.>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T iff) F

재반박

1.실제로 붉게 보이지 않았더라도 일종의 조건 반사 비슷한 것에 의해서 내게 붉게 보이는 경우 - 단지 붉게 보이는 경험이 시계로부터 나오지 않았을 뿐 나는 그렇게 느꼈을 때는 그 현상적 믿음이 사실이다. 이 경우 (BBSJ*) T iff) T

2.그러나 이러한 조건반사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믿음은 형성할 수 있다. 이 경우엔, 가려움증의 1번 재반박과 해결책이 같다. 즉, 내가 붉게 보인다고 믿은 것이, 현상적 믿음이긴 하지만, 그 정당화의 근거는 지금까지의 내가 그것을 관습적으로 경험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다른 비기초적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었으므로 기초적 믿음이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BBSJ*) F iff) F

 

(3) 비기초적 믿음은 기초적 믿음으로부터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이제 기초적 믿음으로부터 어떻게 비기초적 믿음이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아무래도 믿음의 숫자로 보면 비기초적 믿음이 기초적 믿음보다 많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것이 연역적으로 도출 되어질 때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다. 즉 비기초적 믿음이 기초적 믿음을 근거로 정당화되기 위해선 기초적 믿음이 비기초적 믿음을 논리적으로 함축해야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붉게 보인다는 것으로부터 여기에 붉은 것이 있다가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 관계가 연역이라면 기초적 믿음으로부터 비기초적 믿음이 다른 보조전제 없이 직접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경우는 없으므로 비기초적 믿음 중 정당화된 믿음이 하나도 없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보조전제를 첨가한다.

논증1
P1 내게 붉게 보인다.
------------------------
C 내 앞에 붉은 것이 있다.

이것은 연역 논증이 아니므로 전제의 참이 결론을 보장하지 못한다.

논증2 -숨은 전제의 첨가
P1 내게 붉게 보인다.
P2 내 주위의 조건은 정상적이다.
P3 만일 내 주위 조건이 정상적이라면 내게 붉게 보일 때 내 앞에 붉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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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내 앞에 붉은 것이 있다.

논증 2는 전제의 참이 결론의 참을 보장한다. 전제가 모두 참이면 결론도 반드시 참인 타당한 논증으로 전제와 결론사이의 관계는 연역적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현상적 믿음으로부터 비기초적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P1,P2,P3로부터 C가 정당화되려면 P2와 P3도 정당한 믿음이어야한다. P1은 기초적 믿음이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P2나 P3의 경우 그것이 기초적 믿음이라는 것을 보이거나, 아니면 다른 기초적 믿음으로부터 정당화된 것임을 보여야한다. 그런데 이들은 기초적 믿음이 아니니, 결국 P2를 뒷받침할 근거는 “내 주위의 조건이 정상적으로 보인다.”이다. 하지만 이 근거는 P2가 정당화될 수 있는 연역논증을 함축하지 않는다.

논증3- P2의 수정
P1 내게 붉게 보인다.
P2 내 주위의 조건이 정상적으로 보인다.
P3 만일 내 주위 조건이 정상적으로 보인다면 내게 붉게 보일 때 내 앞에 붉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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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내 앞에 붉은 것이 있다.

그러나 논증3에서는 P3가 필연적으로 참이지 못하다. 게티어 반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우연적으로 참일 수 있을 뿐 확실성을 보장받는 기초적 믿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양의 탈을 쓴 늑대의 사례) 결국 비기초적 믿음이 기초적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는 과정은 연역만으로는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귀납과,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을 도입한다. 이들은 연역적 논증은 아니지만, 전제가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논증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논증1
P1 내게 붉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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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내 앞에 붉은 것이 있다.

이 논증은 연역적이지는 않지만, 전제가 결론을 상당히 뒷받침해주는 논증으로, 일상적으로는 P1을 근거로 하여 C를 받아들인다면, 많은 경우에 정당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귀납)

<내게 붉게 보인다.>

A) 내 앞에 붉은 것이 있다.
B) 내 앞에 푸른 것이 있다.
C) 내 앞에 아무 것도 없다.

A-C중 P1의 사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A)이다. 나머지는 왜 내게 붉게 보이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선택지들 중 가장 P1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추론을 하는 것이 비기초적 믿음의 정당성을 전달하는 방법이 된다. A라는 비기초적 믿음이 기초적 믿음으로부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A라는 가정이 가장 내게 붉게 보인다는 현상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D) 내 앞에 흰 것이 있고 그 위에 붉은 조명이 있다.
E) 신이 나로 하여금 붉게 보이게 만들었다.

A)는 B),C)에 비해서 분명히 P1을 설명하는 데에 우위에 있지만, D와 E보다도 P1을 잘 설명하는지는 그리 분명치 않다.

 

(4) 고전적 토대론의 문제점

현상적 믿음이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다.

현상적 믿음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형성하는 믿음이 아니다.

객관적 대상, 즉 외부세계에 대한 판단과 대비되는 내 안에 있는 내적 상태를 표시하기 위하여 혹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서술과 그러한 존재에 대한 인식을 구분하기 위하여 현상적 믿음을 철학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붉은 경험을 할 때 <저기에 붉은 것이 있다>고 말하지, <저기에 붉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F라는 경험에 대하여 F에 대한 현상적 믿음으로부터 감각적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바로 F에 대한 감각적 믿음을 형성한다.(물론 거의 무의식적으로 현상적 믿음을 형성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상적 믿음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기초적 믿음으로 적절치 않다.

그리하여 온건한 토대론이 등장한다. 그것은 일반적 감각적 믿음을 기초적 믿음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초적 믿음은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감각적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있는 믿음, 틀릴 수 있는 믿음이므로 그것 자체로 믿기만 하면 정당화된다는 식의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적 믿음은 경험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우리가 F라는 대상을 보았을 때, 아직 <저기에 F가 있다.> <저것은 F이다.>와 같은 판단을 하기 이전의 감각적 경험 상태가 일반적인 감각적 믿음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반론은 존재한다. 감각적 경험 자체가 감각적 믿음에 대한 근거가 되려면 그 감각적 경험 자체가 내용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믿음이던가, 내용이 없는 단순경험이어야 한다. 만일 그 경험이 내용을 가진 믿음이라면, 그 믿음도 정당성을 요구받아야 하므로 정당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반면에 경험은 내용을 가진 믿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의 정당성을 요구받지는 않지만 어떻게 내용도 없는 경험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고전적 토대론: 기초적 믿음- 현상적 믿음 /스스로 정당화/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해야함
온건한 토대론: 기초적 믿음- 감각적 믿음 /경험에 의해 정당화/ 확실하지 않아도 됨

연역을 통해 기초적 믿음으로부터 비기초적 믿음이 정당화됨

연역 뿐 아니라 귀납과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등에 의해서도 정당화됨

 

(7) 토대론에 대한 가장 큰 비판(정합론자들의 비판)

과연 다른 믿음에 정당성을 의존하지 않으면서, 정당화되는 기초적 믿음은 존재하는가?

토대론자들은 무한후퇴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기초적 믿음을 도입 기초적 믿음의 존재유무를 의심한 것이 아닌, 그러한 기초적 믿음을 가정할 때 어떤 믿음이 그러한 것에 가장 잘 맞을 것인가에 대해서 탐구함.

나와 친구 앞에 느릅나무가 존재
나 <내 앞에 느릅나무가 존재한다.>
친구<내 앞에 나무가 존재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나와 친구사이의 배경지식의 차이 때문이다.

A) 이러이러한 경험을 하면 그 경험의 대상은 나무이다.
B) 이러이러한 경험을 하면 그 경험의 대상은 느릅나무이다.

나는 A, B 배경지식을 모두 가지고 있고, 친구는 B 배경지식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A와 B는 모두 믿음의 대상인 명제이다. 그렇다면 기초적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저것은 나무이다.>는 다른 믿음에 정당성을 의존하지 않는 기초적 믿음이 아니라, A와 유사한 믿음에 정당성을 의존하는 비기초적 믿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는 믿음들은 A나 B와 같은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콜라병을 보고 나는 그것을 콜라병으로 인식하지만, 부시맨은 그렇지 못하다. 부시맨은 콜라병을 보고도 그것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콜라병이라는 것을 정당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정당하게 갖기 위해서는 로크가 말하는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배경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배경지식은 정당화된 믿음이므로 감각적 믿음도 스스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성을 다른 믿음에 의존하고 있다.

 

3. 정합론

정합론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그것은 무한후퇴의 문제에서 정당성의 의존이 궁극적으로 앞에 제시한 믿음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합론은 비기초적 믿음과 기초적 믿음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합론은 인식적 정당성의 구조를 뗏목이나 거미줄로 본다. 정합론에 따르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정당성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내의 다른 믿음들과 정합적인 관계에 있느냐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1) 긍정정 정합론과 부정적 정합론

1.긍정적 정합론 - 어떤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 내의 믿음이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관계에 있어야한다.

단선적 정합론: 믿음 체계내의 믿음들 중 특정한 믿음들이 한 믿음들을 정당화해준다.
총체적 정합론: 믿음 체계내의 전체 믿음이 한 믿음과 정합적 관계에 있어야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

단선적 정합론을 따르자면 A가 B를 정당화하고 B가 C를 정당화하며 C가 다시 A를 정당화하기에 그 어떤 믿음도 정당화되지 않는 믿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A는 B, C, D로 인해 정당화되고 B는 D, E, F에 의해 정당화되며, C는 G, H에 의해 정당화되고 D가 A, G에 의해 정당화된다면 A-B-D-A의 순환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게 된다. 이와 같이 정당성에 의존하는 믿음들이 서로 얽히고설킨다면 단선적 정합론과 총체적 정합론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총체적 정합론은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체계 전체가 정합적일 경우 그 믿음 체계 내에 있는 모든 믿음이 정당화된다. 이 경우 믿음들 간의 정당화의 정도는 차이가 없다. 그것은 한 번에 통째로 정당화되기에 모든 믿음들이 동등하게 정당화된다고 인정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하나보다 상대적으로 더 정당성을 가진 믿음인 경우가 많다. 내 집의 비밀번호가 1144라는 것은 근거가 많기에 확실히 정당한 믿음이다. 내가 그 비밀번호를 설정했고 매일 그 비밀번호를 눌러 집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의 집 비밀번호가 1478이라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확실한 믿음은 아니다. 나는 얼핏 친구가 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친구가 그 비밀번호를 말해주는 것을 들었다. 그 믿음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지만 내 집 비밀번호에 비하면 정당성의 정도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그러나 총체적 정합론은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2.부정적 정합론 - 한 믿음이 다른 체계내의 다른 믿음들에 의해서 뒷받침될 때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믿음들과 충돌하지 않는 한 정당화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 그것에 대한 긍정적 근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아야할 이유만 없다면 정당한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수립된 믿음체계를 수정하거나 보완할 때 주로 적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새로운 믿음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없을 때 문제가 된다. <서울의 현 인구수는 짝수인가?> 나는 이러한 믿음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믿음형성에 상충되지 않으므로, 부정적 정합론에 따르면 이것을 믿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믿은 후에는 <서울의 현 인구수는 홀수인가?>라는 명제 역시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믿을 수 없다. 이미 첫 번째 믿음을 형성해 그것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처음의 것을 믿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까닭은 단지 아무런 근거 없이 먼저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제에 대한 고려순서는 그 명제의 믿음의 정당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정합론의 기본적 입장

정합론은 스스로 정당화되는 기초적 믿음을 부정하고 다른 믿음에 의해 믿음이 정당화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정당화의 기준은 정합성이다.

(C) S가 P를 믿는 것에 인식적 정당성을 갖는 필요충분조건은 P가 S의 믿음 체계 내에 있는 다른 믿음들과 정합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Q1) S의 믿음 체계 안에 어떤 믿음들이 포함되는가?

Q2) 한 명제에 대한 믿음이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와 어떤 관계에 있을 때 정합적이라 할 수 있는가?

 

(3) 정합론의 문제점 : 고립의 문제

ex 1)모든 용은 입에서 불을 토해낸다.
2)존재 1은 입에서 불을 토해내는 용이다.
3)존재 2는 입에서 불을 토해내는 용이다.
4) 모든 것은 용이다.
5) 모든 것은 입에서 불을 토해낸다.

Q) 이렇게 이상한 믿음들만으로 구성된 믿음체계의 믿음들도 정합적이기만 하면 정당한가?

우리세계와 전혀 무관하면서도 정합적인 믿음들로 구성된 믿음체계가 있을 경우 그 믿음 체계내의 모든 믿음은 정당화되는가? 이를테면 내가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신실하게 믿고 그 믿음의 체계가 정합적이라면 그것은 정당한 믿음들인가? 우리의 믿음은 상당부분 경험을 통해 형성되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외적 세계와 관련된 내용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정합론에 따르면 외적 세계로부터 내용이 입력된 믿음체계의 믿음들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조건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무관한 명제들에 대해서 믿음을 형성하는 것(외적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믿음들)도 정합론의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다. 우리는 정합적인 두 믿음체계에서 두 믿음에 대해 어떤 것이 더 나은지 판단할 수 있다. 외적 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믿음체계가 더 나은 체계라 판단할 수 있다. 즉 정합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논증1)
전제 1)정합론은 우리 세계와 완전히 무관한 명제들에 대한 믿음도 정당화됨을 인정한다. if p than q
전제 2)어떤 정당화된 믿음도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무관해서는 안된다. not q
_____________
결론 정합론은 옳지 않다. not p

전제가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의 의미를 파악하여야 한다. 우리는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면 참이고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하므로(진리대응설),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거짓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논증2)
전제 1)정합론은 거짓인 명제에 대한 믿음도 정당화됨을 인정한다.
전제 2)어떤 거짓인 명제도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 -> 게티어 반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F인 전제
__________________
결론: 정합론은 옳지 않다.

따라서 논증2)로 해석한다면, 정합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의 의미를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상상에 의해서 형성한 믿음으로 볼 수 있다.

논증3)
전제1 정합론은 단순한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명제들에 대한 믿음도 정당화됨을 인정한다.
전제2 단순한 상상에 만들어진 명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___________________
결론: 정합론은 옳지 않다.

정합론자의 대답 - 관찰적 요구를 추가하자(observational regurement) -> 전제1을 부정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정보를 완전히 무시하고 믿음체계가 형성되었을 때 고립의 문제가 생겨나므로 한 믿음 체계 내에서 적어도 관찰을 통해서(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믿음이 상당수 포함되어야한다. 아포스테리오리에 대한 명제들이 들어가야 된다. a priori/ a posteriori

 

(4) 정합론에 대한 문제2

Q1 어떤 믿음이 믿음체계내의 믿음에 포함되는가?

믿음의 두 종류

현재적 믿음 - 지금 내가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는 믿음 occurrent belief 믿음의 범위가 좁음
경향적 믿음 - 지금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지는 않지만, 그 명제가 주어지면 체계적 믿음이 될 수 있는 것 dispositonal belief 믿음의 범위가 넓음

→ 간단한 자극에 의해서 쉽게 기억해낼 수 있는 믿음도 있지만, 상당한 배경지식이 주어져야 겨우 기억해낼 수 있는 믿음도 있다. 어떠한 것을 그 중에 믿음체계 안으로 포함해야 하는가?

<내가 동창회에서 친구를 보고 바로 이름을 떠올리는 경우> - 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경향적 믿음
<이름을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대화를 통해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경우> - 구분하기 어렵다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믿음체계내에 포함되어선 안되는가? 그러나 졸업사진을 보고 다시 기억해낸다면? 또한 기억해내기 어려운 경향적 믿음을 믿음 체계 내에 포함시킨다면, 의식하지 못하는 믿음들 사이에 모순이나 충돌이 생길 위험이 발생한다.

→ 가능한 한 현재적 믿음에 가까운 믿음들로만 믿음체계의 믿음을 구성하는 것이 안전한데,

1. 믿음들이 지나치게 배제될 위험

2. 믿음을 포함/배제 시키는 기준을 제공하기 어려움

 

(5)정합의 의미가 갖는 문제들

정합의 의미를 설명하기 쉽지 않음, 여러 믿음이 정합적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논리적 일관성을 지니며 모두 함께 참이 될 수 있다는 것 - 논리적 일관성/ 무모순성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 정합은 서로 아무런 관계없는 명제들이 모여 믿음체계가 구성되었을 때도 여전히 작동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어떤 조건이 첨가되어야 하는가?

1. 연역, 2. 귀납, 3.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S가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내의 믿음들 중에서 A와 B가 함께 C를 연역적으로 함축하거나 귀납적으로 뒷받침할 경우, 또 그 믿음들의 관계가 최선의 설명적 관계라면 ABC는 정합적 관계에 있다. 그러나 그 믿음체계의 복잡성과 체계내의 믿음들의 다양성을 고려해볼 때 저 세 가지로만은 설명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또한 정합에서 논리적 일관성이나 무모순성이 사실 정합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반례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P -> (P ->Q)]가 항진 명제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나는 “~[~P -> (P ->Q)]는 항진 명제이다”라는 믿음을 가졌다. 이 믿음은 정당한 믿음이라 볼 수 있지만, 사실 교수님이 착각해서 항위 명제를 항진 명제라 설명한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거짓이고, 따라서 그 어떤 명제와도 함께 참일 수 없다(정합불가능) 즉 이 믿음은 그 어떤 믿음하고도 논리적 일관성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믿음이므로, 이 반례가 성립한다면 논리적 일관성이나 무모순성도 정합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또한 정합론은 “모 아니면 도” 식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믿음체계내의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두 개별적 믿음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믿음을 포함하는 믿음 체계 전체의 믿음이 정당성을 잃게 된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이 그러한 비정합적 믿음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논리적 모순인 명제들을 모순인줄 모르고 믿는다면)그는 정당한 믿음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셈이다.

 

(6) 정합론에 대한 정리

정합론의 도입은 토대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기초적 믿음과 비기초적 믿음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정당화의 구조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뗏목이나 거미줄로 파악하는 것 이다.무한후퇴의 문제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믿음들의 순환적 요소가 단선적인 순환성을 띄지만 않는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합론이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정합의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연역, 귀납,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은 비기초적 믿음의 정당화에서도 논한 적 있으니 이것은 토대론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또한 고립의 문제를 통해 정합만을 가지고서는 고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고립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관찰적 요구인데, 이것은 믿음 체계를 구성하는 믿음들 사이의 계층적 차이를 인정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정합성 이외의 다른 요소, 관찰적 요구가 인식적 정당성을 결정하는데 작용하였다면, 어떤 믿음체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믿음이 반드시 포함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믿음이 거미줄같이 평등한 관계가 아닌 더 근원적이고 기초적 믿음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경험적 믿음이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토대론을 수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4.신빙론

토대론, 정합론이 한 사람이 믿고 있는 믿음의 정당성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인 반면에, 신빙론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거에 의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형성하는 믿음 형성과정이 신빙성 있느냐에 의해서 정당성 여부가 결정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정당성은 사고적 정당성을 의미한다. 명제적 정당성은 실제로 형성되지 않은 명제에 대해서도 정당성 여부를 판별할 수 있으나 신빙론은 이미 형성된 믿음을 전제로 하여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R) 어떤 믿음 B가 인식주체 S에게 인식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iff)는 B가 신빙성 있는 믿음 형성과정을 통해서 형성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각적으로 형성된 믿음은 일반적으로 참인 명제를 많이 산출하므로 신빙성있고 그러므로 이 믿음은 정당화된다.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 과정에는 감각적 경험과, 분명한 기억, 논리적 추론등을 들 수 있다. 반면에 단순한 추측을 통한 믿음은 일반적으로 신빙성이 없고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에는 희망사항을 통한 믿음형성, 감정적 판단, 성급한 일반화 등이 있다.

신빙성은 관련된 믿음형성과정이 참인 믿음을 많이 형성하면 신빙성 있는 과정이 되고 거짓인 믿음을 많이 형성하면 신빙성이 떨어지는 과정이 된다. 신빙성이 100%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신빙성 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은 감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용이하다. 토대론과 정합론의 차이는 경험적 믿음에 독자적인 권위를 부여할 것인가, “경험적 믿음의 정당성에는 다른 믿음의 도움이 필요 없는가?”의 차이인데 신빙론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 보다 정교한 형태의 신빙론

 

(R)의 문제점

 

1) 추론의 문제

논리적 추론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의 예이다. 논리적 추론이란 전제에 해당하는 다른 믿음에 의존하여 새로운 믿음을 도출하는 것이다. 연역 논증은 타당한 논증이라 하는데 전제가 참일 경우 결론이 거짓임을 상상할 수 없는 논증을 말한다. 그러나 타당한 논증을 통해 믿음을 형성하였더라도 전제가 참이지 않으면 결론을 믿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 이것은 논리적 추론이 전제의 참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영국인이다.
박지성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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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영국인이다.

이렇게 타당한 논증이라도 전제가 참이 아니라면 결론의 믿음은 정당화 되지 않는다. 논리적 추론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기 위해선 전제 믿음이 참이어야한다. 이렇게 다른 믿음에 의존하여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의 신빙성을 조건적 신빙성이라 한다. 따라서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믿음형성과정과 다른 믿음에 의존하는 믿음형성과정을 나눌 필요가 있다.

(R1) 어떤 믿음 B가 인식주체 S에게 인식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iff)는
1) B를 형성하는 믿음형성과정이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 ¹그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거나 또는,
2) B를 형성하는 믿음형성과정이 다른 믿음에 의존하는 경우, 그 믿음형성과정이 ²조건적으로 신빙성있고, 그 믿음형성과정이 의존하는 다른 믿음 자체도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일 경우(1+2)이다.

R1)의 피정의항이 인식적 정당성인데, 2) 조건에도 인식적 정당서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얼핏 순환적 분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순환은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분석을 재귀적 정의라한다.

(Z) S가 클럽 Z의 회원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iff)는
1) S가 클럽 Z의 발기인 이거나
2) S는 클럽 Z의 회원으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가입한 사람이다.

여기서 순환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2번 조건의 클럽 Z의 회원을 순환이 발생하지 않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2*) S는 클럽 Z의 발기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가입한 사람이거나, 클럽 Z의 발기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가입한 사람으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가입한 사람이다.

2*은 조작과 같이 계속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조건이 반복하여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재귀적이라고 한다.

 

2) 상쇄자가 있는 경우

명제 P에 대한 S의 믿음형성과정이 실제로는 신빙성이 있음에도, S가 그 믿음형성과정은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P에 대한 S의 믿음은 실제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지만 상식적으로 S가 P를 믿는 것에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철이가 기억상실증세로 신뢰할만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은 결과, 철이의 과거 기억은 신빙성 없으며, 의사가 이를 철이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의사의 오진이었고 그리하여 철이는 실제로 신빙성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과거에 믿음을 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철이의 믿음은 정당해야 할텐데) 철이가 기억을 통해 과거에 대한 믿음을 형성한다면, 신빙성있는 의사가 철이에게 과거의 기억은 신빙성 없다고 말했으므로 철이의 믿음은 정당하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1)조건을 수정해야한다.

(R2) 어떤 믿음 B가 인식주체 S에게 인식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iff)는
1) B를 형성하는 믿음형성과정이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 ¹그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으면서, S가 실제로 사용하면 B를 믿지 않게 할 신빙성 있는(혹은 조건적으로 신빙성 있는)믿음형성과정이 S에게는 없다. 혹은,
2) B를 형성하는 믿음형성과정이 다른 믿음에 의존하는 경우, 그 믿음형성과정이 ²조건적으로 신빙성 있고, 그 믿음형성과정이 의존하는 다른 믿음 자체도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일 경우(1+2)이다.

1번에 대한 부연설명: B에 대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어야할 뿐 아니라 그 신빙성을 방해하는 다른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 상쇄자의 역할을 하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없어야한다는 것이다. 철이의 믿음형성과정은 기억이었고 이것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었으나, 이 믿음이 신빙성 없다는 믿음을 갖게 할 만한 또 다른 믿음형성과정, 즉 의사의 진단이 상쇄자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의사의 진단 역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므로 1)조건은 충족되지 못한다. 따라서 철이의 믿음은 정당화될 수 없어 F iff) F가 된다.

 

(3) 신빙론의 문제점

1) 통속의 뇌 문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전능한 악마의 현대버전

우리가 외부세계로부터 얻는다고 생각하는 경험과 정확하게 동일한 경험을 실제세계가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음.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현상적 믿음)은 실제 외부세계가 그러한가(감각적 믿음)를 확증하지 않음.

인간의 뇌를 꺼내 통속에 넣어놓고 다양한 자극을 가한다. 그 속에 있는 인식주체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경험은 그가 실제 일상에서 경험하는 내용과 동일하다. 이것은 컴퓨터의 자극으로 야기된 것이다.

통속의 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그 실험실 외부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이며, 지각되는 내용만 존재한다는 입장과 유사하다. 두 번째는 그 실험실 외부는 일상과 같으나, 통속의 뇌의 경험은 그러한 외부세계의 대상으로부터 얻어진다는 것만을 부인하는 가정이다.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지각하는 경험은 컴퓨터로 인해 야기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자이다.

통속의 뇌의 감각적 경험은 외부세계에 대한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면, 내 앞에 나무가 있다는 믿음이 철이 에게 정당하다면, 통속의 뇌에게도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철이의 감각적 경험은 참인 명제를 많이 산출하므로 신빙성 있는 반면에, 통속의 뇌는 모두 거짓인 명제만을 믿게 되므로 신빙성이 없고 따라서 정당한 믿음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둘의 차이를 상식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 둘을 통해 형성된 믿음은 동일하게 정당하다.

외부세계의 실재로부터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그 믿음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예가 있다. 통속의 뇌가 혹여나 나무가 있다는 경험을 통해 내 앞에 건물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엉뚱한 믿음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통속의 뇌가 형성하는 모든 외부세계에 대한 믿음을 정당치 않다고 평가해버리면,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므로 직관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은 인식적 정당성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그의 믿음 형성과정이 신빙성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믿음은 정당할 수 있다. 인식적 정당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신빙성 조건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2) 천리안의 문제

통속의 뇌가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이 인식적 정당성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보여준다면, 천리안의 예는 충분조건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내가 갑자기 천리안을 가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갑작스레 나에게 청와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풍경은 실제 그 시간대의 풍경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시각적 경험은 참인 믿음들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신빙성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그 풍경들을 믿는 것은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나는 내게 그러한 능력이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며, 그 시각적 경험이 실제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보이는 풍경이 진짜라고 믿을 수 없다. 나에게는 그 사실을 믿을만한 어떠한 근거도 결여되어있다. 내가 그것을 묘사하여 나중에 대조해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내 믿음은 신빙성 있는 믿음 형성 과정을 통해 생겼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R2) 에 대한 반례가 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R2)는 상쇄되는 믿음형성과정이 없어야 정당한 믿음이다. 천리안의 경우, 나에게 갑자기 천리안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므로 갑자기 청와대가 시야에 들어온다면, 나는 내게 정신적 문제가 생겼는지를 고려해보게 될 것이다. 어떤 믿음형성과정에서 이러한 증거를 충분히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 증거는 시각적 경험에 상쇄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쇄자의 역할을 하는 증거가 과연 상쇄시키는 믿음형성과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기억상실의 예에서도 관련된 증거를 고려하는 것이 신빙성 있는 믿음 형성 과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갑자기 청와대의 모습이 보이는 상황을 증거로 고려하는 것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라면 (R2)는 천리안의 예를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성급한 일반화 역시 증거를 고려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신빙성 없는 믿음형성과정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어떤 믿음을 형성했을 때 그 믿음을 형성하게 한, 혹은 그 믿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믿음 형성과정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 신빙론자에게 필요하다.

 

3)일반화의 문제

유형 → 집합

사례 → 원소

하나의 개체가 여러 집합의 원소가 될 수 있듯 우리가 믿음을 형성하는 개별적 사례는 여러 가지 믿음 형성 과정의 유형에 속할 수 있다.

믿음형성과정(type: 유형, 여러 사례를 가짐) 의 신빙성

정당성: 개별적 사례에 해당하는 믿음에 적용

 

ex)이 분필은 흰색이다. (개별적 믿음)
Q 이것의 정당성은?
→  이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 , 시각적 경험의 신빙성에 의해서 결정
ex) 2015년 6월 10일 오후 7시
약간 어두운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조금 마시고 5m앞에 있는
어떤 대상을 보고 “저것은 붉다.”라고 믿은 경우
이 믿음의 형성과정은?
1)시각적 경험
2)감각적 경험
3)어두운 곳에서의 시각적 경험
4)5m 앞에 있는 물체에 대한 시각적 경험
5)맥주를 조금 마신후의 시각적 경험
6)2015년 6월 10일이 형성한 시각적 경험

<Q> case 2(개별 사례)는 1)-6) 믿음 형성과정 유형 중

어떤 유형에 귀속되어야 하는가?

1번-6번 믿음형성과정이 지니는 신빙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통 4번이나 5번보다는 1번이 더 신빙성 있을 것이고, 2번보다는 1번이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믿음이 속할 수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여럿이면서 각각의 유형이 갖는 신빙성이 서로 다르다면 위에서 형성된 믿음이 어떤 유형의 과정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당할 수도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신빙론자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상 신빙론은 미완성: 기준제시의 문제

시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으로 제한할 경우

일반적으로 신빙성 있음 그러나 그 유형을 통해 형성된 믿음 중 일부는 상식적으로 볼 때 정당하지 못함. 유형이 광범위하기 때문. 어두운 곳에서의 시각적 경험이나 만취상태의 시각적 경험도 1)유형에 속하기 때문.

1번- 가능한 한 넓은 범위의 믿음형성과정을 택한다.
문제점) 신빙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믿음형성과정에 속하는 사례 믿음 중에는 정당한 것도 있고 정당하지 않은 것도 포함되기 마련이다.
ex) 감각적 경험이 신빙성 있다고 가정 →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생긴 모든 믿음이 정당
하지만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형성한 믿음 중에서, 촉각이나 후각을 통해서 사람을 알아보는 것과 같은 정당하지 않은 믿음도 있는데, 1의 입장(+감각적 경험이 신빙성 있다는 가정)에 따르면 그 믿음도 정당하다고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
→ 1이 지니는 문제점 : 하나의 믿음형성과정에 정당한 믿음과 정당하지 않은 믿음이 섞이는 경우
시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처럼 그 유형안에 정당한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이 혼재될 수 있는 넓은 유형을 좁혀야 한다.
2, 가능한 한 좁은 범위의 믿음형성과정을 택한다.
case2에서는 2015년 6월10일 오후 7시 어두운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조금 마시고 5m앞의 대상을 보고 형성한 믿음형성과정이라고 하자.
→  이 형성과정에는 사례가 하나밖에 없으므로 적어도 1의 문제점을 벗어남
문제점) 이 믿음형성과정은 사례가 하나 밖에 없으므로 그 믿음이 참이면 신빙성이 있고 거짓이면 신빙성이 없게 된다.
→  참이면 정당, 거짓이면 정당하지 않음
→  모든 참인 믿음은 정당화되고 모든 거짓인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참인 명제도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거짓인 명제도 정당할 수 있음
거짓임에도 정당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참인 명제라도 근거가 없이 무작정 믿는다면 정당하지 않은 믿음이다.
이렇게 믿음형성과정의 유형을 지나치게 넓게 잡으면 그 유형에 속하는 믿음 중 정당하지 않은 믿음도 포함되고, 지나치게 좁게 잡으면, 모든 참인 믿음은 정당하고 모든 거짓인 믿음들은 정당하지 않게된다.
신빙론의 핵심은 S가 가지는 믿음사례의 정당성 판별을 위해 그 사례와 관련된 믿음형성과정의 유형이 지니는 신빙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 사례와 믿음형성과정의 유형을 연결시키는 이론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그 믿음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에 연결시키려 할 것이요, 그 믿음을 정당치 못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신빙성 없는 믿음형성과정에 연결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리멘더링의 허용은 신빙론을 무너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