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Epistemology

Clark (1963) Knowledge and Grounds: A Comment on Mr. Gettier’s Paper

Soyo_Kim 2021. 5. 6. 12:33

Clark, M. (1963). Knowledge and Grounds: A Comment on Mr. Gettier’s Paper. Analysis, 24(2), 46–48. https://doi.org/10.2307/3327068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앎인가?"라는 그의 논문에서, 게티어 씨는 그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두 개의 반례를 제시한다. 각각의 사례에서, 실제로 참인 명제는 실제로 거짓인 근거들에 기반하여 믿어진다. 각각의 사례에서 기반이 되는 근거가 (결론을) 정당화하는 명제를 함축하기 때문에, 그리고 기반이 되는 근거는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정당하게 믿어지기 때문에, 결론 역시 정당화된 믿음이 된다.

게티어의 예시들은 그의 요점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보다 더 강력하다. 기반들은 당연히도 좋은 근거가 되기 위하여 그들의 결론들을 함축할 필요가 없다. 사례들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 앎이 되는 것에 실패하도록 고안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비 연역적인non-deductive 근거들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게티어의 두 번째 사례에 적용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명제를 취해 보자.

(1) 존스는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

스미스는 이 명제를 그가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한 것으로 알고 있는 그의 친구 브라운이 그에게 존스가 언제나 포드 차를 가지고 있었으며 등등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믿고 있다. 이제 때마침 우연히도(as it happens) 브라운이, 그의 일반적인 신뢰도에도 불구하고, 흔치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보자. 그는 존스와 다른 사람을 헷갈렸다. 존스는 단 한번도 포드 차를 소유한 적이 없다. 그러나 존스는 마침 포드 차를 구매하였다. 따라서 스미스는 진실되게 존스가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만, 그가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잘못된 근거에 기반하여 이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근거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존스의 과거 소유권 등을 현재의 소유권에 대한 (비-연역적) 추론을 위한 근거로 받아들이는 것 모두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명제를 아는 것에 대한 추가적인 필요조건으로서, 게티어가 비판했던 앎의 정의에 근거들의 참을 추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래에 제시되는 앎의 조건은 여전히 공동으로 충분한 조건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S가 P를 안다는 것은 IFF) (1) P는 참이며,
                                          (2) S는 P를 믿고,
                                          (3) S는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며,
                                          (4) P에 대한 S의 믿음은 참인 근거에 기반해야 한다.

사례의 추가적인 적용을 고려해 보자. 존스는 언제나 포드 차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가지고 있는 것이 참이다. 스미스가 일반적으로 신뢰할만한, 그리고 정직하다고 믿을만한 브라운은 스미스에게 존스가 언제나 포드 차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브라운은 존스나 그의 포드 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브라운은 스미스에게 (그의 평소 성격과 달리) 그냥 지어낸 얘기를 하였으며, 브라운은 그저 우연히 옳았을 뿐이다. 이제 스미스의 믿음은 참되고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의 근거들 역시 참이다. 그러나 브라운의 거친 추측은 스미스에게 앎을 제공한 것으로 간주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그저 [그 추측이]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례에서, 스미스가 (1)을 믿게 된 근거들은 참이지만, 그가 이 근거들을 받아들이게 된 근거들, 즉, 브라운이 그러한 근거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브라운의 일반적인 신뢰성과 정직함은 그것을 참이라 믿는 스미스의 믿음을 정당화한다. 

매우 자주, 우리는 계속해서 오랜 시간동안 '왜?'라고 물을 수 있으며, 근거들의 근거들을 물을 수 있고, 이러한 2차적 근거들의 근거들을 물을 수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물음은 논리적으로 이상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2) 존스가 포드 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너의 근거는 무엇이니?
(3) 브라운이 나에게 그가 항상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었어.
(4) 브라운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너의 근거는 무엇이니?
(5) 그는 일반적으로 신뢰할만하고 정직해.
(6) 브라운이 신뢰할만하고 정직하다는 것에 대한 너의 근거는 무엇이니?
(7) 나는 그의 옆에서 항상 같이 있었고, 그가 믿음을 깰 만한 행동이나 부정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어.

명백하게도, 그가 그렇게 믿는 것에 대한 스미스의 근거를 물어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그의 기억의 신뢰성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례에서 나는 그의 기억을 신뢰할만하다고 가정하며, 그러함으로써 근거의 사슬들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이 사슬의 어떤 근거들 간에, 즉 (3)이나 (5)나 (7) 중 어떤 것이든 간에 거짓이라면, 우리는 적절하게도 스미스가 '존스는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라는 명제를 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슬의 모든 근거들이 참이라면, 나는 이 믿음이 완전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완전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fully grounded)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4)를 변경함으로써 고려 중인 정의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4)' P에 대한 S의 믿음은 완전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1)-(4)'는 P를 아는 것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줄 수 있다.

혹자는 (4)'의 추가가 우리로 하여금 (3)을 포기해도 되도록 허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확실하게도, 만약 P가 그 구체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면, S는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근거들을 믿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 근거들은 그가 그 근거들이 좋은 근거라는 것을 보지 못해도 좋은 근거들일 수 있다. 그는 믿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이 그의 믿음을 어떻게 진실로 정당화할 수 있었는지에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Cf. Cohen, “Claims to Knowledge”, I’roc. Arist. Soc., Siippl. Vol. 1962, p. 3.5 ff.). 각각의 사례에서, 우리는 S가 그의 믿음에 대한 완전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에 대해 거부하기를 원할 수도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3)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 수정된 정의는 소위 구제불능의 지식이 앎으로 간주될 수 있는 지에 관한 문제에 대해 빛을 준다. 예컨대, 만약 내가 내가 고통을 가지고 있는 지 여부에 대해 (논리적으로) 틀릴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주장된 것이고, 앎의 적절한 물음이 아니다. 아는 것은 발견하는 것을 함축하며, 발견하는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나는 고통에 빠져있다라고 말하고, 당신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냐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명백하게도 멍청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제 이 논증은 앎이 발견하는 것을 함축한다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충족되어진다고 생각될 지 모른다. 내가 특정한 개념들을 가지지 않은 채로, 또 특정한 진리들을 알지 못한 채로 태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앎의 어떤 정의 안에서도, 조건 (4)'에 대한 요구는 "너가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니"라는 물음이 부적절한 곳에서는 "앎"이라는 용어 또한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일반적으로 "너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무엇이니?"라는 물음은 이상하게 들린다. 근거를 가지는 것 덕분에 누군가 무엇을 아는 곳에서는, 그것이 발견하는 것의 한 사례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앎에 대한 통합된 정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물음의 사례에서 앎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4)' 조건을 이 사례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특히, "내가 P를 안다면 그것은 '내가 P를 아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으로 이어지는가?" 라는 물음은, 만약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앎의 개념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면 이상해 보인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내가 P를 안다는 나의 믿음이 완전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 지의 여부에 관해 묻는다. 또 다른 무엇보다도, 믿음이 완전한 기반을 가지고 있음이 스스로 충족된 것인지에 관해, 다시 말해, P에 관한 근거의 사슬들의 완전성이 실제로 P를 위한 근거들을 구성한다고 말하는 근거들이 참인지에 관해 묻는다. 그리하여, 만약 P가 "그는 뛰어가고 있다"이고 내가 P를 믿는 것에 대한 근거가 "내가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사례에서 사슬을 오직 하나의 연결고리만을 갖는다)이라면, "너가 그를 보고 있는 것이 어째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니?"라는 물음이 될 것이다. 이제 이 물음은 매우 이상하다; 매우 특별한 상황만이 이러한 물음에 의미를 줄 수 있도록 고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보같거나 매우 특별한 상황이 필요하지 않은, 혹은 철학적 물음이 되지 않는, 좋은 근거들이 되기 위한 근거에 관한 질문 같은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