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Meyers and Kenneth Stern, “Knowledge Without Paradox”, in : The Journal of Philosophy. vol. 70(1973), pp. 147-160
게티어 유형의 반례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원칙에 근거한다 : 설령 p가 거짓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이 특정 명제 h를 증거 p를 토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하여, 만약 h가 참이라면, 그는 h라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h를 알지는 못할텐데, 그 이유는, 말하자면, 그가 h를 받아들이는 것이 오직 우연적(accidental)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존스가 들판 위에 있는 여우를 개로 착각하였으며, 그러나 이 특정한 여우는 존스에게 있어 개에 훨씬 가깝게 보이고,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개를 보았다는 믿음은 정당화된다. 존스의 믿음이 들판 안에 개가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들판 안에 개가 있다는 믿음 또한 존스는 정당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만약 존스가 들판 안에 개가 있다고 믿으며, 실제로, 개가 들판 안에 있다면, 들판 안에 개가 있다는 것은 존스가 실제로 개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우리는 존스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거부하며, 그 까닭은 존스의 믿음이 우연히 거기 도달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지식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도식적으로, 이 논증은 다음과 같다.
COUNTEREXAMPLES of the Gettier sort all turn on the principle that someone can be justified in accepting a cer- tain proposition h on evidence p even though p is false. Hence, if h is true, he would have justified true belief that h, yet still not know that h, since it is, as it were, only accidental that he accepted h. Suppose, for instance, that Jones mistakes a fox in the field for a dog, but that this particular fox looks so much like a dog that Jones, although mistaken,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e saw a dog. Since Jones's belief entails that there is a dog in the field, it seems that Jones is also justified in believing that there is a dog in the field. Now, if Jones believes there is a dog in the field, and, in fact, there is, it would follow that Jones has justified true belief that there is a dog in the field even though he did not see the dog. But clearly, we would deny that Jones knows there is, for Jones's belief has been arrived at by accident; he did not see a dog at all. Thus, it seems that justified true belief is not knowledge.1 Schematically, the argument is this:
(1) S는 P를 믿는 것에 대한 인식적 정당성을 갖는다.
(2) S는 P를 믿으며, P로부터 h를 연역한다.
(3) 따라서 S는 P를 믿는 것에 근거하여, h를 믿는 것에 대한 인식적 정당성을 갖는다.
(4) P는 거짓이다.
(5) h는 참이며, S는 h를 믿는다.
(6) 따라서 S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인 h를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h를 알지 못한다.
(1) S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2) S believes that p and deduces h from p.
(3) Thus, p justifies h for S.
(4) p is false.
(5) h is true, and S believes that h.
(6) Thus, S has justified true belief that h but S does not know that h.
이러한 반례에 맞서 여러 시도들이 만들어졌다. 하나의 방식이든 다른 방식이든,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특정한 인식적 윈칙들에 근거한 변형이다. S에게 있어 p가 h를 정당화하는 것이 s가 h를 믿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을 함축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하의 원칙들은 다음에 연루되는 것처럼 보인다.
Various attempts have been made to meet this counterexample. In one way or another, however, they are all variations on certain epistemic principles. Given that p justifies h for S entails that S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the following principles seem to be involved:
(A) 만약 S가 P를 믿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면, P이다.
(B) 만약 S에게 있어 p가 h를 정당화한다면, p이다.
(C) 만약 S가 p를 믿으며,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올바르게 p로부터 h를 연역적 혹은 귀납적으로 추론한다면 S에게 있어 p는 h를 정당화한다(p가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A)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then p.
(B) If p justifies h for S, then p.
(C) If S believes that p,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and correctly infers h from p either deductively or inductively, then p justifies h for S (whether or not p is true)
조사는 게티어의 논증이 (a)와 (b)가 거짓이라는 가정하며, c가 참이라는 것을 가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만약 (a)가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4)는 (1)과 모순되며, 논증은 거짓이다. 그리고 만약 (B)가 참이라면, (3)과 (4)는 모두 참일 수 없고, 논증은 거짓이다. 다른 한편으로, (c)는 만약 (3)이 (1)과 (2)로부터 다라나온다면 반드시 참이어야만 한다.
Examination shows that Gettier's argument assumes that (A) and (B) are false, but that (C) is true.4 For, if (A) is assumed true, (4) contradicts (1), and the argument fails; and, if (B) is true, (3) and (4) cannot both be true, and the argument fails. On the other hand, (C) must be true if (3) is to follow from (1) and (2).
이에 더해, 이러한 원칙들은 하나와 다른 하나의 특정한 관계로 기운다. 따라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보이는, s가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p가 s에게 h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유지한다면, 원칙 (A)는 (B)를 함축한다. 그러나 (B)는 (A)를 함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테면, S가 잘못된 것을 믿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 즉, (A)를 거부하는 것을 고수할 수 있고, 그리고 여전히 P가 참인 경우에만 S에 대해 P가 H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에 더해, (A)와 (B)는 (C)와 일관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C)는 P가 정당화되기 위해 참일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P가 S에게 있어 H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P가 참일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In addition, these principles bear certain relations to one another. Thus, if we hold, as seems reasonable, that p cannot justify h for S unless-S is also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principle (A) entails principle (B). But (B) does not entail (A). We can hold, for instance, that S can be justified in believing what is false-that is, deny (A)-and still require that p can justify h for S only if p is true. Furthermore, (A) and (B) are both inconsistent with (C), for (C) does not require that p be true to be justified; nor does it require that p be true in order for p to justify h for S.
게티어에 대한 코멘터들 중에, 그들은 모두 (A)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므로 그것을 만장일치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논증은 비기초적 진술을 귀납적으로 정당화하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P에 대한 귀납적 증거를 극복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P가 거짓인 경우를 가정하자. 우리가 원칙 A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P를 받아들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증거가 명백하게 P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올수 밖에 없다. (B)는 그러나, 더 논쟁적이다. 몇몇의 사람들만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이것이 대처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들어낸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B)를 옹호하며 (C)가 거짓임을 논증한다. 우리는 최근에 B에 제기되었던 반례들이 정당화의 본성에 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으며 (B)에 대한 실제 반례가 아님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2장에서, 우리는 B가 회의주의로 이끌린다는 반박을 반박하려 시도하며, 3장에서, 우리는 C가 납득할만한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게티어 문제가 어떤 간단한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인식론의 얽히고 섥힌 문제를 고려하여 정당성의 문제를 고려함으로써만 도달될 수밖에 없다고 논증한다.
Among the commentators on Gettier, there seems to be unanimity in rejecting (A) as too restrictive. The argument is that it rules out the possibility of justifying nonbasic statements inductively. Suppose, for instance, that we have overwhelming inductive evidence for p, but that p is false. If we accept principle (A), it must follow that we are not justified in accepting p despite the fact that our evidence clearly points toward p. Principle (B), how- ever, is more controversial. Although a few writers have accepted it, most seem to feel that it creates insurmountable problems.5 In the present paper, we defend (B) and argue that (C) is false.e We hope to show that the counterexamples recently offered to (B) rest on a misunderstanding about the nature of justification and are really not counterexamples to (B) at all. In section II, we try to refute the objection that principle (B) leads to skepticism, and, in section iii, we give one reason that (C) has appeared plausible. Throughout, we argue that the Gettier problem cannot be re- solved in any simple straightforward way, but rather must be ap- proached by considering the problem of justification in the light of other knotty problems of epistemology.
1
B에 대해 소위 반례라고 주장된 몇몇 사례들을 고려함으로써 시작하고자 하는데, 이 원칙 B는 만약 P가 S가 H를 믿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P는 참이라는 원칙이다. 먼저, 만약 P의 참이 P가 H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몇몇의 명백한 앎의 사례들은 반드시 거부되어야만 한다는 논증이 제기되었었다. 그러므로, P가 Q와 R의 연언이라고 가정하고, 그 중 한 연언지인 Q가 참이며, H를 함축한다고, 반면에 다른 한 연언지인 R은 거짓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H를 함축한다고 가정하자. 이 사례에서 P는 거짓일 것이며, 그러므로 B에 따른다면 S가 H를 믿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B는 너무나 강해 보인다. 이어지는 사례는 레러가 제시한 것이다. 브라운은 그의 사무실에 있는 차소유씨가 포드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Q)를 믿으며 정당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안가짐씨가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R)을 믿고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Q와 R에 근거하여, 브라운이 그의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가 포드차를 가지고 있다(H)를 믿는다고 가정하자. 이제 우리가 Q가 참이고 R이 거짓이라 가정한다면, 원칙 B는 만족되지 못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은 여전히 H가 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원칙 B는 명백하게 앎인 사례를 배제하며 거부되어야만 한다.
Let us begin by considering some alleged counterexamples to (B), i.e., the principle that, if p justifies S in believing h, then p is true. In the first place, it has been argued that, if the truth of p is re- quired for p to justify h, certain clear cases of knowledge must be rejected. Thus, suppose that p is the conjunction of q and r, and one conjunct, q, is true and entails h whereas the other, r, is false but entails h. In this case, p would be false and, hence, by (B) would fail to justify S in believing h. Thus, it would seem that principle (B) is too strong. The following example is given by Lehrer.7 Brown believes and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Mr. Havit, who is in Brown's office, owns a Ford (q) and also that Mr. Nogot, who is in Brown's office, owns a Ford (r). Suppose further that, on the basis of q and r, Brown believes that someone in his office owns a Ford (h). If we now assume that q is true and r false, principle (B) will fail to be satisfied, yet Brown will still know that h is true. Thus, principle (B) seems to rule out clear cases of knowledge and must be rejected.
이러한 유형의 사례가 B를 반박하는 것으로 종종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제대로 분석된다면 반례로 성립되지 않는다. 먼저, 우리가 브라운에게 R이 거짓임을 지적하고, 브라운이 Q가 그자체로 그의 믿음 H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브라운이 보지 못했다고 가정하자. 브라운은 여전히 그의 사무실 안에 있는 누군가가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고, 심지어 그가 R이 거짓임을 보여줌에 관한 지식을 주장하는 것을 철회함에도 불구하고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기에 그는 그렇지 않다. 브라운이 H를 안다고 이 사례에서 말하기 위해서는, 브라운 Q가 단독적으로 H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하고, 따라서, 우리가 R이 거짓이라는 것을 지적할 때, 그는 R을 H에 대한 그의 정당화의 부분에서 떨어뜨릴 준비를 한후 Q에만 단독으로 의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브라운이 이 사례에서 오직 그가 R이 H를 정당화하기에 필요하지 않고, Q가 단독적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고 있을 때만 H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그러하다면, 더 중요한 요점이 따라나올 수 있다: 즉, 우리는 브라운이 H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하는지의 여부를, 만약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브라운이 Q와 R을 믿고 그것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브라운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 지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필요로 한다.
Although this sort of case is often taken to refute principle (B), it does not appear to be a counterexample at all when it is ex- amined closely. In the first place, suppose we point out to Brown that r is false, and Brown does not see that q by itself is sufficient to justify his belief that h. Does Brown still know that someone in his office owns a Ford even though he withdraws his claim to knowledge on being shown that r is false? It seems to us that he does not. For Brown to know that h in this case, Brown must realize that q alone is sufficient to justify h, and, thus, when we point out that r is false, he must be prepared to drop r as part of his justification for h and rely on q alone. That is, Brown will know that h in this case only if he sees that r is not needed to justify h but that q alone is sufficient. But if this is so, an even more important point emerges: namely, that we cannot decide whether Brown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if all we know is that Brown believes q and r and is justified in so believing. We need further information about how Brown views the situation.
이제, 실천 속에서, 브라운에게 그가 Q가 단독적으로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지 믿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모호한 상황의 논리를 그대로 내비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Q가 H를 단독적으로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가 그렇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설령 브라운이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안한다고: Q ^ R, 따라서 H, H에 대한 정당화 속에서, 그는 여전히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R이 설령 거짓이라 할지라도, 브라운은 여전히 H에 관한 새로운 논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H를 실제로 보여주는 Q, 따라서 H. 따라서, 설령 유효한 논증인 Q ^ R, 따라서 H가 거짓인 전제이고, 그러므로 브라운이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주는 데 실패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브라운이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브라운이 만약 상황에 대해 명료하다면, 그는 Q이며 따라서 H라는 논증을 제시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가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브라운은 H로 가정된 것을 물론 알고 있고, 그리고 그는 R이 결여된 Q가 H를 정당화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브라운이 H를 알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B가 거짓이라는 것을 결론짓는 것은 실수이다. 오히려 문제는 브라운의 논증이 브라운이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H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나치는 데 있다.
Now, in practice it would be inappropriate to ask Brown whether he believes that q alone is sufficient to justify belief in h. But we must not let this obscure the logic of the situation. If he is not asked whether he thinks that q alone is sufficient to justify h, this is because it is assumed that he sees that it does. In other words, even though Brown offers the argument: q & r, thus h, in justifying h, he is still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because, even though r is false, Brown could still give a new argument for h, namely: q, thus h, which would in fact show h.8 Thus, even though the valid argu- ment: q & r, thus h, has a false premise and, hence, fails to justify Brown in believing that h, it does not follow, because of this, that Brown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If Brown is clear about the situation, he could give the argument: q, thus h, which is sound, and thus show us that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Thus, it seems that Brown knows that h-assuming, of course, that he believes that q without r is sufficient to justify h. But it is a mistake to conclude, from the fact that Brown knows h, that prin- ciple (B) is false; rather the trouble lies in passing from the fact that Brown's argument does not show that h to the erroneous con- clusion that Brown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따라서, 이 사례가 B에 대한 진실한 반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종 간과되곤 하는 정당성의 중요한 특징을 강조한다. 즉, S에 의해 정당성이 주어진 것과 S의 실제 정당성의 구별을. 전통적으로, 이러한 구별은 어려움을 만들어냈다. 한 사람은 오직 그가 정당성을 가질 때에만 앎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된대로, 어떤 의미에서 그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제,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 사람의 정당성은 단순하게도 그가 말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의 당혹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실제로, 그에게 주어진 이유가 약하기 때문에, 개인의 믿음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빨리 결정하지 않는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우리는 종종 그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발견하기 위해 개인의 첫 번째 언급을 넘어서곤 하는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종종 이 사람의 믿음이 정당하지 않다는 잘못된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리도록 만드는 심리학적이고 대화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S는 H를 믿는 것에 대한 몇몇 독립된 이유들을 가지고 있고, 그러나 오직 그가 우리를 납득시키기에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제시한다고 가정해 보자. S가 H를 믿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실수인데, 왜냐하면 단순하게도 그는 다른 이유에 비해 나쁜 이유를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좋은 이유가 아닌 제공했던 이유를 제안한 것은 순전히 심리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의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당성으로서 처음으로 제공한 이유를 확인하려는 경향을 우리는 거부해야만 한다.
Thus, although this case is not a bona fide counterexample to (B), it does underscore an important feature of justification that is often overlooked, namely, that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the justification given by S and S's actual justification. Traditionally, this distinction has created difficulties. A person can have knowl- edge only if he has a justification, but, as has been pointed out, it is not clear in what sense he must have it.10 Now, the easiest way to meet this problem is to say that one's justification is simply what one says it is. This helps to resolve the perplexity about the sense in which one possesses a justification, and, indeed, is quite right provided we are not too quick in deciding that an individual's belief is unjustified because the reason he has given is weak. We often have to go beyond an individual's initial remarks to discover whether he has a justification or not, since there are often psycho- logical and conversational factors that make it wrong to decide too quickly that a person's belief is unjustified. Suppose, for instance, that S has several independent reasons for believing that h, but offers only the reason he thinks will be most convincing to us. It would be a mistake to conclude that S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h simply because he gave us the poor reason rather than one of the others. For it is a psychological matter that S offered the reason he did and not some other, good reason. Thus, despite its appeal, we must resist the temptation to identify someone's reasons with that which he offers initially as justification.
정당성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방식은 우리가 다른 이유중 일부를 통해 앎의 표준적 관점에 대해 주장된 반론들을 보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그 중 하나를 고려할 것이다. 레러는 다음과 같은 예시를 준다. 안가진씨가 스미스에게 그가 포드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증명서를 심지어 보여 주었다고 가정하자. 이에 더해, 안가진씨는 스미스를 대할 때 지금까지 언제나 믿을만하고 정직했다고 가정하자. 이 모든 증거들의 연언을 M이라 해보자. 스미스는 따라서 그의 사무실에 있는 안가진씨가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R)을 정당하게 믿으며, 이에 따라 그의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가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H)을 정당하게 믿는다. 이제, 레러는 우리에게 R이 거짓임을 가정하고, 그러나 M가 H가 모두 참이라고 가정하도록 요구한다. 명백하게도, 스미스는 H를 모른다. 이에 더해, 레러는 논증하기를, 그가 H를 거짓인 근거인 R에 근거하여 알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M은 H에 대한 좋은 귀납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논증은, M, 그러므로 H는 참된 전제들에 근거한 좋은 귀납적 논증이다. 따라서, 레러는 그것들이 참일 경우에만 한 사람의 이유가 H를 정당화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고 결론 내린다. 즉, B는 여전히 반례를 인정한다.
This way of looking at justification helps us to see through some of the other alleged counterexamples to the standard view of knowledge. We will consider just one of these. Lehrer gives the following example." Suppose Mr. Nogot tells Smith that he owns a Ford and even shows him a certificate to that effect. Suppose, further, that up till now Nogot has always been reliable and honest in his dealings with Smith. Let us call the conjunction of all of this evidence m. Smith is thu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Mr. Nogot who is in his office owns a Ford (r) and, consequently, is jus- tified in believing that someone in his office owns a Ford (h). Now, Lehrer asks us to assume that r is false, but that m and h are both true. Clearly, Smith does not know that h. Furthermore, Lehrer argues, we cannot claim that he does not know that h on the ground that r is false, for m provides good inductive ground for h. That is, the argument: m, thus h, is a good inductive argument with true premises. Thus, Lehrer concludes that it is not enough to require that one's reasons can justify h only if they are true; that is, principle (B) still admits of counterexamples.
이제, 우리가 말했던 것에 근거하여, 이것이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는 것은 쉽다. 그가 준 근거가 형편없다는 이유로 h에 대한 그의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m, 그러므로 h라는 논증을 주었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실수이다. 브라운의 사례에서, 우리는 그의 증거에 대한 스미스의 관점이 어떠한지를 더 알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스미스가 r을 근거로 하여 h를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가정하자. 즉, '내 사무실에 있는 안가진씨는 포드 차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h에 대한 그의 믿음이 정당하다는 것을 고수하는 것은 여전히 납득할만한가? 명백하게도 아니다. 그리고 스미스도 동의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미스가 r을 근거로 하여 h를 옹호하기로 준비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례에서 h를 믿는 것은 정당화되는가? r이 거짓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스미스가 그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h에 대한 좋은 근거를 r은 제공하지 못한다. 짧게 말해, 사슬의 논증: m, 따라서 r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h는 다시 고쳐 말해질 수 있다. m, 그러므로 h는 원칙 B를 고려할 때 스미스가 h를 믿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Now, on the basis of what we have said, it is easy to see that this will not do. Just -as it is incorrect to conclude that someone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because the reason he gives is poor, so it is a mistake to conclude that he is justified from the fact that he gives such an argument as: m, thus h. As in the case of Brown, we need to know more about how Smith views his evidence. Suppose, for instance, that Smith is not prepared to defend h on the basis of r, i.e., 'Mr. Nogot who is in my office owns a Ford'. Is it then plausible to hold that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Clearly not; and most likely Smith would agree. Suppose, on the other hand, that Smith is prepared to defend h on the basis of r. Is h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in this case? We think not, for if r is false, r cannot provide a good reason for h even though Smith might think it does. In short, the fact that the chain argument: m, thus r, thus h can be restated as: m, thus h, does not show that Smith is justified in believing h, given principle (B).
2.
원칙 (B)와 연관된 다른 문제는 (B)가 만약 추정상의 증거들이 h를 받아들이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누군가 추정상의 증거들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원칙 (B)가 호응을 얻는다면 다음과 같은 것은 명백하다.
The other problem connected with principle (B) is that it leads to the principle that one must know the putative evidence to be true if it is to justify one in accepting h. For it is clear that principle (B), when taken with:
(D) 만약 P가 S가 H를 믿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라면, S는 P를 믿으며, P를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D) If p justifies h for S, then S believes that p and is justified in so believing.
그리고 지식의 전통적인 개념은 다음의 원리를 함축한다.
and the traditional conception of knowledge, entails the following principle:
(E) 만약 P가 S가 H를 믿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라면, S는 그것을 안다.
(E) If p justifies h for S, then S knows that
이 원리를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제라 부르자. 문제는, 수학에서의 증명에 관한 논제가 이 원리를 정당화할 수 있다 할지라도, 비기초적 경험적 진술들을 정당화하는 조건들로서 이것이 납득할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E)에 따르면, S는 P를 알지 못하는 한 H를 P에 근거해서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S가 P를 믿는 것에서, P가 그 자체로 비기초적 진술일 때,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S는 심지어 그거 H를 믿는 것을 정당화한다고 할지라도 H가 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B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보인다.
Let us call this principle the Aristotelian thesis.12 The problem is that, although this principle might be supported as a thesis about demonstration in mathematics, it seems quite implausible as a con- dition of justifying nonbasic empirical statements. For, according to (E), S cannot justify h on the grounds of p unless he knows that p. Yet it seems that S could easily be mistaken in believing that p, where p is itself a nonbasic statement, and, hence, not know that p is true even though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Thus, it seems that (B) severely limits what we can know empirically.
이러한 반박에 대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기에, D는 예상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E는 실제로 B로부터 따라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제로부터 회의적 의심이 따라나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먼저, 앎이 참을 함축한다 할지라도, 앎은 실수를 범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함축하지는 않으며, 다시 말해, S가 P를 안다는 것이 S가 P를 확신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S가 P를 믿는 것에서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은 S가 P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E에 진술된 요구조건은 설령 P가 비기초적 경험 진술이라 할지라도 만족스러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을 확증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S가 P를 알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만약 앎이 우리가 주장한대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면, 그리고 S가 P라는 믿음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만약 P가 참이라면, S가 P를 안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다시 말해, P를 안다는 것이 P라는 정당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만족된다면, 그렇다면 S는 P를 안다. 따라서 S는 P를 알 뿐만 아니라, 그는 매우 자주 그러하고, 그렇기 때문에 매우 자주 P로부터 추론한 H와 같은 명제들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B와 E는 비기초적 경험 지식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What are we to make of this objection? It seems to us that (D) is unexceptionable and, thus, that (E) does indeed follow from (B). We believe, however, that no such skeptical doubts follow from the Aristotelian principle. In the first place, although knowledge entails truth, knowledge does not entail the impossibility of being mistaken; that is, that S knows that p does not entail that S is cer- tain that p. Thus, the fact that S could have been mistaken in believing p does not imply that S cannot know that p. Hence, it seems to us that the requirement stated in (E) can be satisfied even when p is a nonbasic empirical statement.'4 But, even grant- ing this, how can S know that p? The answer is quite simple: if knowledge is true justified belief, as we claim, and if S has justi- fied belief that p, then, if p is true, it follows that S knows that p. That is, if knowing that p is having true justified belief that p and if these conditions are satisfied, then S knows that p. Thus, not only can S know that p; he very often does and, hence, very often is justified in believing propositions such as h which he infers from p. Therefore, neither (B) nor (E) rules out the possibility of non- basic empirical knowledge.
이러한 명백한 지점은 자주 간과되어왔다. 그러나, 어떤 인식론이든 간에 A 원칙을 거부하고 지식의 표준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원칙 A는 오직 참된 진술들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진술로 다시 불려질 수 있다. A를 받아들이는 데카르트와 같은 사람에 따르면, 믿음의 정당성은 그것의 참을 보증한다. 따라서, 정당화된 진술을 인식하는 것은 그것의 참을 인식하는 것이고, 정당한 과정은 진리의 실패할 수 없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상황은 이런식으로 깔끔하지 않다. 누군가 비연역적 지식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다면, 이에 따라, A를 거부할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증거는 지식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만약 개인이 거짓인 것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면, 좋은 근거를 가지는 것은 그 근거가 최고의 지표임에도 불구하고 참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비가 온다는 것을 믿고 그 근거로 라디오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인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지금 비가 온다는 그의 믿음의 좋은 근거라고 가정할 때, 다른 시간에 그가 비가 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쉬운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시간에서는 비가 온다는 것을 알 수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참이기 때문에며, 다른 시간에는 그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A를 거부하고 지식의 표준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누군가는 반드시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몇몇 경우에는 오직 주장된 것의 참과 거짓의 차이임에 동의해야 한다.
This obvious point has often been overlooked.15 It is, however, implicit in any epistemology that denies principle (A) and accepts the standard view of knowledge. Principle (A), it will be recalled, states that only true statements can be justified. According to some- one like Descartes who accepts (A), the justification of a belief guarantees its truth. Thus, to recognize a statement as justified is to recognize its truth, and the justificatory procedure becomes an infallible indicator of the truth. The situation is not so neat as this, however, if one admits nondeductive knowledge as genuine and, consequently, rejects principle (A); for then, the very same evidence can sometimes result in knowledge and sometimes not. If an individual can be justified in believing what is false, having good reasons is no guiarantee of truth, although it is the best in- dicator. For example, suppose someone believes that it is raining and cites as a ground the fact that the radio says it is. Assuming that this is a good reason for his belief that it is raining, it is easy to see that at different times he can believe and be justified in believ- ing that it is raining, and yet at one time know that it is raining because it is true that it is and at another time not know because it is false that it is. That is, one who denies (A) and accepts the standard view of knowledge must agree that the difference between knowing and not knowing is in some cases only the difference be- tween the truth or falsity of what is claimed.
그러나 앞서 말한 것에도 불구하고, B가 정당성에 대한 불합리하게 높은 기준을 제기하고 있다고 논증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만약 S가 H를 정당화하는 것을 시도하면서 P를 사용한다는 것을 고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만약 B가 참이라면, S는 그가 P를 믿는다는 것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닌다. 그는 또한 P가 실제로 참이라는 것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합리한 요건으로 보인다. S는 P에 대한 정당성을 지닐 수 있고, 그러나 P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이며 그렇기 때문에 H에 대한 S의 믿음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형의 반대 뒤에 있는 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Despite the foregoing, however, it is still possible to argue that (B) poses implausibly high standards on justification. It seems quite natural to hold that, if S is to use p in an attempt to justify h, he must also determine that p does justify h. Yet, if (B) is true, S must not only determine that he believes p and is justified in so believ- ing; he must also determine that p is indeed true. But this seems an unreasonable requirement. S may have a justification for p, and yet p may nevertheless be false and hence not justify S in believing h. The principle behind this sort of objection might be stated as follows:
(F) 만약 그가 그렇게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을 결정할 수 없다면, S는 비기초적 진술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닐 수 없다.
(F) S can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a nonbasic statement unless he can determine that he is justified in so believing.
결정하다의 뜻은 직접적으로 안다이다. 우리는 이것을 결정성 요건으로 부르기로 한다.
where 'determine' means "directly know." We might call this the determinability requirement.17
이제 게티어 문제가 근거하고 있는 C원칙이 이 요건을 만족시키는 반면 B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기는 쉽다.
Now, it is easy to see that principle (C), on which the Gettier problem rests, satisfies this requirement, but principle (B) does not.
S가 P를 근거로 하여 H를 믿으며 Q를 근거로 하여 P를 믿고 Q라는 기초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S는 따라서 Q를 직접적으로 알며, 그가 P와 H를 믿는다는 것을 P가 P가 Q로부터 올바르게 추론되고, 또 H가 P로부터 올바르게 추론되는지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C를 고려할 때, S가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안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C는 따라서 결정성 요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만약 C가 오류가 있다면, 그리고 B가 참이라면, 요건은 만족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S는 P가 참이란 것을 P가 H를 정당화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알거나 결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P가 기초적 지식이라면 가능하다 할지라도, S는 만약 P가 그 자체로 비기초적이라면 P를 직접적으로 알지 못한다. 따라서 B는 결정성 요건과 충돌한다. 이에 따라, F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C를 받아들이고 B를 멀리할 것이 분명하다.
Suppose S believes h on the basis of p and p on the basis of q and has basic knowledge that q. S thus directly knows that q, and, since he can determine that he believes p and h, as well as whether p can be correctly inferred from q, and h from p, it follows, given (C), that S can determine that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C) thus satisfies the determinability requirement. If (C) is mistaken, how- ever, and (B) is true, the requirement cannot be met, since S would then have to determine or to know directly that p is true in order to determine that p justifies h. Although this is possible if p is basic knowledge, S cannot directly know that p if p is itself nonbasic. Thus, (B) conflicts with the determinability requirement. Conse- quently, it is easy to see how anyone who accepts (F) is drawn to (C) and away from (B).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이 질문은 결정성 요건이 그 자체로 앎에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답은, 우리가 보기에, 이 요건을 유지해야 하는 좋은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F가 다른 것, 더 전통적인 앎의 관점과 유사하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즉,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드시 결정하거나 직접적으로 그가 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전통적 요건이 비-기초적 지식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제한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철학자들이 이 요건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누군가 H를 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면, 그는 H를 믿는 것에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 요건이 만족된다면, H를 아는 것은 H에 대한 확실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확실성을 요구하는 합리주의적-회의주의적 관점을 만족시킬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F는 우리가 귀납적 지식을 인정한다면 참이나 확실성을 보증하지 못한다. 우리가 귀납적 추론이 정당성을 제공한다고 인정하면, 우리는 A를 거부해야만 하며, 거짓인 것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갖는 것을 허용해야 하고 따라서 그것이 참인지를 모르는 것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짧게 말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알 수 없다는 오래된 요건이, 만약 참이라면, 확실성을 보증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성 요건 F는 A가 거짓이라면 합리주의적 견해를 만족시키지도, 회의주의적 견해를 달래지도 못한다.
The question to be asked, however, is whether the determinabil- ity requirement is itself necessary for knowledge. The answer, it seems to us, is that there is no good reason for holding the require- ment. It should be noticed that (F) resembles another, more tradi- tional view of knowledge, namely, the view that, in order to know, one must be able to determine or to know immediately that one knows. Although this more traditional requirement is generally regarded as too restrictive since it rules out the possibility of non- basic knowledge, it is easy to see why some philosophers believed that it was needed. If one could know immediately that one knew that h, one would then know that one could not be mistaken in believing that h. Thus, if the requirement could be satisfied, know- ing that h would involve being certain that h, and would satisfy the rationalist-skeptical view that knowledge requires certainty. On the other hand, (F) provides no such guarantee of truth or certainty, once we admit that there is inductive knowledge. Once we allow that inductive inference can provide justification, we must reject principle (A) and allow that one can be justified in be- lieving what is false and, hence, can be justified in believing what one does not know to be true. In short, although the older re- quirement that one cannot know unless one knows directly that one knows would, if correct, guarantee certainty, the determina- bility requirement (F) will neither satisfy the rationalist nor ap- pease the skeptic, if (A) is false.
또한 우리가 믿는 것에 있어서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따라서 그것은 그 사실과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B)가 거짓이라는 요구조건에 호소하지 않고 논쟁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 따르면, (B)가 사실이기 때문에, S는 그의 이유인 p가 기초적이지 않은 경험적 진술일 때 h를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S가 그가 비기본적인 진술들을 믿을 때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 없이는 간단히 가정할 수 없다
Nor will it do to argue without appeal to the requirement that we simply can determine when we are justified in believing and, thus, that (B) is false, since it is inconsistent with that fact; for that is just what is at issue, namely, whether or not we can determine when we are justified. According to us, since (B) is true, S cannot determine that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when his reason, p, is a nonbasic empirical statement. One cannot simply assume without argument that S can determine when he is justified in be- lieving nonbasic statements.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F에 대한 좋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F에 근거하는 E나 B를 거부할 좋은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What we suspect is that there is no good reason for (F) and, hence, no good reason for objecting to (B) or (E) on the basis of (F).
3.
지금까지 우리는 그의 근거가 참이라는 비기초적 진술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갖는 필요조건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S가 P가 거짓인 곳에서 P로부터 H를 추론해낸다면, S는 H가 설령 실제로 P로부터 따라나온다고 할지라도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는 정당성과 우리가 충분한 올바름이라 부르고자하는 다른 관념을 구분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게티어 사례가 근거하는 C는 그것의 설득력을 이러한 두 관념의 융합에서 가지기 때문이다.
So far we have argued that it is a necessary condition for being justified in believing a nonbasic statement that one's reasons be true. Thus, if S derives h from p where p is false, S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even though he believes that p and is justified in so believing and even though h does indeed follow from p. We wish now to distinguish between justification and a different notion which we shall call "well-takenness," for it seems to us that prin- ciple (C) on which the Gettier problem rests gains much of its plausibility from the conflation of these two ideas
우리는 이러한 구분을 다른 예시로부터 그려내고자 한다. 미스 인포메이션씨가 스피노자가 1732년에 태어났다는 명제 p를 믿으며, 실제 정보인 1632년에 태어났다를 믿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녀가 이런 잘못된 정보를 믿게 된 근거는 그의 철학책에 1732년이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p에 근거하여, 그녀는 스피노자가 18세기에 태어났다는 명제 h를 믿는다면,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통해 이 명제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지 않는데, 왜냐하면 정당성에 관한 우리의 설명을 따를 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증거 h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미스 인포메이션씨가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는 h를 비합리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그는 믿을만한 소스에 근거하여 그 날짜를 찾아본 것이며, 우리는 그 책을 올바르게 읽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설령 p가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사례는 다른 학생인 펜씨풀 씨와 사례와는 현저히 다르다. 미스 인포메이션씨처럼, 그는 p를 믿기 때문에 h를 믿으며, 그러나 미스인포메이션씨와 달리, p를 믿는데, 그것은 그가 꾸었던 특정한 꿈에서 스피노자가 1732년에 태어났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없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했던 것처럼, 미스 인포메이션씨는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당성을 얻기 위한 그녀의 시도가 h에 대한 그녀의 전제인 p가 거짓이기 때문에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녀는 비합리적으로 진행했던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녀는 p를 정당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미스 인포메이션씨나 페씨풀 씨 모두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이 두 사례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h에 대한 미스 인포메이션씨의 믿음이 충분한 올바름을 지니고 있고, 페씨풀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 차이를 구별하고자 한다.
We may illustrate this distinction by means of yet another ex- ample. Suppose that a student, Miss Information, believes that Spinoza was born in 1732 (p) and not 1632, the actual date, be- cause 1732 is the date given in her philosophy book. If, on the basis of p, she were to believe that Spinoza was born in the eighteenth century (h), she would not, on our account of justification, be justi- fied in so believing, for the evidence she has for h is false. Notice, however, that even though Miss Information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she has not acted irrationally in believing that h. After all, she looked up the date in an acceptable source and, we may assume, correctly read the book. That is, even though p is false, s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In this respect, her case differs markedly from that of another student, Mr. Fanciful, who, like Miss Information, believes h because he believes p, but who, unlike Miss Information, believes p-i.e., that Spinoza was born in 1732-simply because of a certain dream he has had. There is no question that Mr. Fanciful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Not only is p false, but Mr. Fanciful is not even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As we have noted, however, Miss Information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Thus, even though her attempt at justification is a failure because her premise for h, namely p, is false, she was not proceeding irrationally, since s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It seems, in other words, that even though neither Miss Information nor Mr. Fanciful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there is an im- portant difference between the two cases. Let us mark off this diff- erence by saying that Miss Information's belief that h is well taken and Mr. Fanciful's belief that h is not well taken.
이제 충분한 올바름은 정당성으로부터 어떻게 구분되는가? 개인에게 있어 h가 충분한 올바름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위의 사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미스 인포메이션의 믿음 h가 인식적으로 승인받은 방법에 의해, 페씨풀씨와는 달리 h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 다 p에 근거하여 h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미스 인포메이션씨는 p와 h를 정당화하려 시도하였으며 합리적인 진행과정에 의해 이러한 시도를 페씨풀 씨와 달리 하였다. 따라서, 양자 모두 우리의 설명에 따르면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지 않는데, 왜냐하면 p는 두 사례에서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주목할만한 차이가 있다: h는 미스 인포메이션씨에게 있어 충분한 올바름을 지니고 있지만, 페씨풀 씨에게는 그렇지 않다.
Now, how is well-takenness to be distinguished from justifica- tion? What conditions must be met for h to be well-taken for an individual? What seems to stand out in the above example is that Miss Information's belief that h was arrived at by an epistemically accredited method, whereas Mr. Fanciful's was not. Thus, although both believe h on the basis of p, Miss Information has attempted to justify p and h by a rational procedure whereas Mr. Fanciful has not. Thus, even though neither is justified (on our account) in be- lieving that h, since p is in both cases false, there is still a marked difference between the cases: h is well-taken for Miss Information, but not for Mr. Fanciful.
충분한 올바름과 정당성 사이에는 더 큰 대조가 있다. 우리의 설명에 따르면, h를 믿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갖는 사람은, p로부터 h를 올바르게 추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h를 믿는 것에 대한 인식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 p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p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믿음 p는 h를 믿는 것에 대한 그의 정당화를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정당성이 세습적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충분한 올바름은 그러나, 세습적이다. S가 p에 대한 충분한 올바름을 가지고 있고 s가 p로부터 h를 올바르게 추론한다면, h는 s에게 있어서도 충분한 올바름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만약 p가 충분한 올바름을 가진다면, s는 승인받은 과정을 수단으로 하여 이를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p로부터 h를 추론한다면, h역시 승인된 정책에 따라 지지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p가 충분한 올바름을 지니고 있고 h가 p로부터 올바르게 추론된다면 h는 충분한 올바름을 지닌다.
There is a further contrast between well-takenness and justifica- tion. On our account, a person can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correctly infer h from p, and yet 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Since he can be justified in accepting p even though p is false, his belief that p can fail to justify him in believing that h; for principle (B) requires that unless p is true he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We might say that justification in this sense is not a hereditary property. Well-takenness, however, is hereditary. If p is well-taken for S and S correctly infers h from p, it follows that h is also well-taken for S, for, if p is well-taken, S has supported it by means of an accredited procedure, and, if he then correctly infers h from p, it must follow that h is supported by an accredited policy as well. It must follow, that is, that if p is well-taken and h is correctly inferred from p, then h is well-taken.
마지막으로 정당성과 근거가 확실함은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관념들이 아니라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만약 한 진술이 누군가에게 있어 근거가 확실하다면, 이로부터 그가 이것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 진술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잇다면, 이 진술은 그에게 있어 근거가 확실하다. 다시 말해, 만약 P를 믿는 것에 대해 S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P로부터 H를 올바르게 추론한다면, H는 S에게 있어 확실한 근거이고 설령 S에 근거 H의 정당성이 따라나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정당성이 근거가 확실함을 함의하는 이유는 승인된 방법들과 충분한 올바름 사이의 연관에 달려 있다. 만약 S가 H를 정당화하는 것을 승인된 방법에 의해 그 스스로 얻지 않은 전제에 대해 어필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다면, S는 그 전제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만약 P가 H를 위한 S의 근거라면, 그리고 S가 그가 꿈꾸었던 무언가로부터 P를 끌어낸다면, S는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지도 않는다. 짧게 말해, 비기초적 지식을 갖기 위하여, 누군가는 승인된 절차들을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승인된 절차를 따르는 것이 스스로 정당성을 위해 충분한 조건인 것은 아니다.
Finally, it should be noted that justification and well-takenness are not logically independent notions. If a statement is well-taken for someone, it does not follow that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it. However, if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a statement, then that statement is well-taken for him. That is,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and correctly infers h from p, then h is well-taken for S even though it does not follow that h is justified for S. The reason justification implies well-takenness turns on the relation between well-takenness and accredited methods. If S attempts to justify h by appeal to premises that are not themselves derived by an ac- credited method, S will 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the premises. For instance, if p is S's reason for h and S derived p from some- thing he dreamed, S would 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and, hence, would 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either. In short, to have nonbasic knowledge, one must follow accredited proce- dures; but following accredited procedures is not by itself sufficient for justification.
여기에서 고려된 근거가 확실함은 (i) 개인에게 있어 한 진술이 근거가 확실한지의 여부는 그가 그 진술을 어떻게 정당화하려 시도하는가에 달려 있다. 구체적으로, 그가 정당성의 승인된 방법에 호소하였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다. (ii) 정당성이 세습적인 소유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근거가 확실함은 세습적 소유물이다. (iii) 근거가 확실함이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정당성은 근거가 확실함을 의미한다.
The things to note here about well-takenness are: (i) whether a statement is well-taken for an individual depends on how he attempts to justify the statement; specifically, on whether he appeals to accredited methods of justification or not; (ii) although justifi- cation is not a hereditary property, well-takenness is; and (iii) al- though well-takenness does not imply justification, justification does imply well-takenness.
이제 우리가 그려냈던 최초의 게티어 문제 사례에 이러한 구별을 적용해 보도록 하자, 즉, 존스가 개를 여우로 착각한 사례를 보도록 하자. 존스가 믿을만한 관찰자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들판에 개가 있다"라는 진술 h는 그에게 근거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믿음 h를 지각에 근거할 때 그는 h와 같은 성립된 진술을 위한 승인된 절차 따라갔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존스의 사례는 정확히 같은 장소에 대한 꿈을 꾸고, 그 장소에서 개를 본 사람이 그 꿈에 근거하여 h를 믿은 사례와 날카롭게 대조된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그가 h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의 믿음 h가 근거가 확실하다는 것 역시 거부한다. 왜냐하면 꿈은 진리에 대한 믿을만한 가이드가 아닌 반면, 지각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h가 존스에게 있어 화길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가 들판 위에 개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근거한 전제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유들을 포드 차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사무실에 있다는 브라운의 믿음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들을만한 논증으로 재구성한다고 해도 따라서, 존스는 개가 들판 위에 있다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의 믿음이 설령 근거가 확실하다고 해도 그러하다.
Let us now apply this distinction to the example we used to illustrate the initial Gettier problem, namely, the case where Jones mistakes a fox for a dog. Assuming that Jones is a reliable observer, the statement 'There is a dog in the field' (h) is well-taken for him; for, when he based his belief that h on perception, he was follow- ing an accredited procedure for establishing statements like h. In other words, Jones's case contrasts sharply with the case of a man who believes that h on the ground that he dreamed he was in this exact spot and, in his dream, there was a dog in the field. In this case, we would not only deny that the man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we would also deny that his belief that h is well-taken; for dreams are not reliable guides to the truth, and perception is. But that h is well-taken for Jones does not imply that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ere is a dog in the field, for the premise on which his belief is based is false. Nor is it possible to reconstruct his reasons to make a sound argument out of them as it is in the case of Brown's belief that someone in his office owns a Ford. Thus, Jones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there is a dog in the field, although his belief that there is is well-taken.
이것은 게티어 논증이 가정하고 있는 c원리의 설득력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정당성을 근거가 충분함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리 c는 다음과 같이 다시 쓰여질 수 있다.
This suggests that the plausibility of principle (C), which the Gettier arguments assume, derives at least in part from a failure to distinguish justification from well-takenness. Principle (C), it will be recalled, is the following:
(C) 만약 S가 p를 믿으며, p를 믿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p로부터 h를 귀납적, 혹은 연역적으로 올바르게 추론한다면, p는 h를 정당화하기 위한 S의 근거가 된다(p가 참이든 아니든 간에.)
(C) If S believes that p,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and correctly infers h from p either deductively or inductively, then p justifies h for S (whether or not p is true).
우리가 논의했던 것처럼, 이 원리는 거짓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정당성을 세습적 소유물로서 잘못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원리가 있는데, 이 원리는 c와 혼동되기 쉽다. 즉,
As we have argued, this principle is false, since it mistakenly treats justification as a hereditary property. There is another principle, however, which is easily confused with (C), namely:
(C') 만약 S가 p를 믿고, p는 S에게 있어 근거가 확실하며, S가 P로부터 H를 귀납적이거나 연역적으로 올바르게 추론한다면 H는 S에게 있어 근거가 확실하다.
(C') If S believes that p, p is well-taken for S, and S correctly infers h from p either deductively or inductively, then h is well-taken for S.
우리가 보기에 이 원리는 참인데, 왜냐하면 근거가 확실함은 정당성과 달리 유전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C가 설득력 있게 보이는 이유를 보는 것은 쉽다: 근거가 확실함으로부터 정당성을 구분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거짓인 C를 믿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왜냐하면 C는 참인 (C')와 융합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이러한 경향성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C의 선행자로 언급된 조건들은 S에게 있어 H가 근거가 확실하게 하는 충분조건이다. 왜냐하면, 만약 S가 P를 믿는 것에 대한 인식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P가 S에게 있어 근거가 확실하다는 것이 따라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C)의 조건들이 충족되면-즉, 만약 S가 P를 믿고, P를 믿는 것이 정당하며, P로부터 H를 올바르게 추론한다면-(C')의 조건들 또한 충족되면 H는 S에게 있어 근거가 확실하다는 점 또한 충족된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그러나 (C)의 선행자가 H의 근거가 충분함을 위한 충분조건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C)가 정당화의 충분조건을 말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주장했듯이, 믿음의 정당화의 필요조건은 믿음의 이유들이 참이고,
It seems to us that this principle is true, since well-takenness, unlike justification, is hereditary. Thus, it is easy to see why (C) looks plausible: failure to distinguish well-takenness from justification results in believing (C) which is false, because (C) is conflated with (C') which is true. Furthermore, to make the temptation even greater, the conditions stated in the antecedent of (C) are sufficient for h to be well-taken for S. For,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it follows that p is well-taken for S. Thus, if the conditions of (C) are met-that is, if S believes that p, is justified in believing p, and correctly infers h from p,- it follows that the conditions of (C') are also satisfied and h is well-taken for S. But to say that the antecendent of (C) states a sufficient condition for the well- takenness of h does not imply that (C) states a sufficient condition for justification. Since, as we have maintained, it is a necessary condition for the justification of a belief that the reasons for that belief be true, S need 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h even though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p, believes that p, and cor- rectly infers h from p. In short, it is a mistake, although an under- standable one, to think that (C) provides a sufficient condition for justification. Even though Jones's belief that he saw a dog is justi- fied, it does not follow that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ere is a dog in the field despite the apparent plausibility of (C). His belief that there is a dog in the field is well-taken but not justified, and well-takenness when accompanied by true belief does not result in knowledge.
To sum up: the issue posed by Gettier seems to us to center on the two contrary principles, (B) and (C). We have advocated the first as an account of the justification of nonbasic statements, and have defended it against certain objections. At the same time, we have held that (C) gives an inadequate account of justification, since it leaves the traditional account of knowledge open to Gettier-type counterexamples.
Let us bring some of these strands together by considering a final objection. It might be argued that denying (C) has the coun- terintuitive consequence that someone might be justified in believ- ing Fa and yet 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3 x)Fx, even though Fa clearly entails (3x)Fx. Thus, to make it more concrete: Jones might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Columbus discovered America and yet, if it turns out that the Vikings and not Columbus made the discovery, not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someone discov- ered America.19 We admit that our theory of justification has this implication, since principle (B) denies that justification is pre- served through entailment; according to (B), justification, unlike entailment, is not hereditary. But is this consequence counter- intuitive? We think not. If Jones's only reason for believing that someone discovered America is that Columbus did and it is false that he did, then it seems to us quite clear that Jones is not justified in believing that someone discovered America. On the other hand, if Jones has other reasons for believing that someone discovered America (e.g., that at one time America's existence was unknown to the European world and we are now in America) and these reasons are true, then he is justified in believing that someone discovered America. Far from being counterintuitive, this way of looking at the matter seems to us to be correct and, for what it is worth, intuitive.
Despite this, however, we do not think the issue rests on what seems intuitive or counterintuitive. To begin with, at this level of theoreticity, one man's intuition might be another man's dogma. For it is hard to see how one would have intuitions uncorrupted by previous philosophical commitments at such a rarified level of argument. Furthermore, and more importantly, we must avoid the temptation of considering principles such as (B) and (C) in isola- tion from other problems. What is at issue is whether a theory of knowledge into which principle (B) fits is a better theory than one which contains (C) as an account of justification. If, as we have argued, principle (B) is acceptable, there is good reason to con- strue the Gettier counterexamples as refuting (C) instead of the traditional view of knowledge and, hence, good reason to override the feeling that (C) is intuitive.
ROBERT G. MEYERS KENNETH STER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Analytic > Epistemolog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티어 문제의 새로운 해결 시도에 관한 비판적 고찰 -‘수정된 거짓믿음배제 접근방식’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0) | 2023.12.06 |
---|---|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이론들 (0) | 2023.12.06 |
Sosa (1964) The Analysis of ‘Knowledge that P’ (0) | 2021.05.12 |
Clark (1963) Knowledge and Grounds: A Comment on Mr. Gettier’s Paper (0) | 2021.05.06 |
인식론 중간고사 (0) | 2019.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