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인 (2004).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 후썰과 현상학의 이념
1.4 형식적 존재론과 영역적 존재론
경험과학의 조건
① 대상에 대한 경험: 우리는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다양한 유형의 현상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유형의 과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 대상에 대한 경험은 이러한 여러가지 과학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과학은 모두 나름대로의 고유한 경험에 기초해 있는 것이며, 바로 이처럼 이러한 과학들이 대상에 대한 나름의 경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경험과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48]
② 본질적인 가정들: 비록 어떤 대상에 대한 경험이 존재할 경우에도 그에 대한 합리적인 진술체계로서의 과학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님.
Ex. 뉴튼(Newton)의 고전물리학
목표: 물리적 대상영역에 대한 합리적인 진술체계이자 여러 가지 자연법칙의 발견
본질적인 가정들: 뉴튼의 물리학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 전체에 걸쳐 타당한 가정
2-1 뉴튼 물리학에서만 고유한 가정들: 시간 개념 (일의적이고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객관적인 것이란 가정)
→ 모든 여타의 학문에 대해서 타당성을 요구할 수는 없음, 일상적 시간 (주관적 심리 상태에 따라 변하는 주관적인 것)
공간, 거리, 속도 등에도 동일하게 고유한 가정들이 적용됨.
2-2 모든 여타의 학문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타당한 가정
→ "A와 B가 같으면 A와 C의 합과 B와 C의 합은 같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모든 A가 B이고 모든 B가 C이면, 모든 A는 C이다." 등
만일 그 무엇이 이러한 가정에 위배될 경우 그것은 바로 학적으로 탐구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기본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학적 탐구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Husserl의 존재론(Ontologie)
①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가정들을 주제적으로 탐구하는 학문
② 존재론이란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다루는 학문, 다시 말해 본질학(Wesenswissenschaft)
③ 두 가지 유형의 존재론-형식적 존재론과 영역적 존재론-이 가능함. [50]
형식적 존재론 (formale Ontologie)
① 형식적 존재론의 탐구대상인 본질적인 가정들은 학적 대상 일반에 두루두루 적용되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학문이든 학문을 학문으로서 가능하게 해 주는 형식적 조건과 관련되는 가정.
② 형식적 존재론은 고전 물리학이 모든 유형의 여타의 학문과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존재론이며, 이러한 점에서 형식적 존재론은 그 근본이념에 있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근본구조를 탐구함을 목표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이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③ 「논리연구」 제3권: 전체와 부분에 관한 이론. 후썰은 전체와 부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분석하면서 전체와 부분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본질적인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거기서 후썰이 "전체와 부분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면서 맨 처음에 제시하는 본질적인 법칙은 "모든 대상은 그것을 포함하는 전체의 한 부분이다"라는 법칙이다. [51]
영역적 존재론 (regionale Ontologie) 혹은 내용적 존재론 (materiale Ontologie)
① 영역적 존재론은 앞서 살펴본 형식적 존재론과 달리 모든 대상영역에 대해 타당한 본질적인 가정이 아니라, 다만 물리적 대상 영역과 같은 특정한 대상영역에만 타당한 본질적인 가정을 다루는 학이다.
② 더 나아가 후썰이 영역적 존재론을 내용적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러한 존재론이 대상 영역 일반에 두루두루 적용되는 본질적 가정과는 구별되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특정한 대상영역의 본질구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③ 영역적 존재론의 구체적인 모습은 개별 경험과학마다 달라진다. 예를 들어 물리학의 영역적 존재론은 역사학의 영역적 존재론과 다르며, 역사학의 영역적 존재론은 경제학의 영역적 존재론과 다르다. 후썰은 각각의 대상영역에 고유한 본질적인 가정을 탐구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유형의 영역적 존재론을 발전시키는 일을 자신의 현상학에 부과된 중요한 과제로 간주하였다.
④ 「이념들」 2권은 물질적 자연(materielle Natur), 생명적 자연(animalische Natur), 정신 세계(geistige Welt)의 본질적 구조를 해명하면서 물질적 자연, 생명적 자연, 그리고 정신세계의 영역적 존재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52-53]
1.5 본질직관 혹은 형상적 환원
본질의 개념
① 물리학, 심리학, 역사학 등을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이 경험적 사실을 다루는 일종의 사실학(Tatsachenwissenschaft) 혹은 경험과학인 데 반해 영역적 존재론과 형식적 존재론은 본질학이다.
② 후썰을 본질직관(Wesenanschauung) 혹은 형상적 환원(eidetische Reduktion)을 본질학으로서의 영역적 존재론과 형식적 존재론이 성립할 수 있는 방법적 토대로 간주하고 있다.
③ 본질Wesen 혹은 형상Eidos의 존재론적 위치: 후썰의 경우 본질 혹은 형상은 그 어떤 대상들을 바로 그러그러한 의미를 지닌 대상들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그 무엇이다. 예컨대 '인간임'이라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대상들은 인간이라는 의미를 지닌 대상들로 존재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의미를 지닌 대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후썰의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사물들과 엄밀히 구별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들의 존재근거 및 인식근거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후썰도 개별적 대상들의 인식근거이며 동시에 존재근거라 할 수 있는 보편자로서의 본질이실재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본질 실재론
① 심리학주의Psychologismus 비판: 심리학주의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보편자로서의 본질과 유사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논리적 대상, 수학적 대상 등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이 모든 대상의 존재를 그를 사유하는 주체의 사유작용 안에서 정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② 그러나 후썰에 의하면 논리학적, 수학적 대상 및 진리 그리고 본질은 인식주체의 사유작용과 무관하게 자체적이며 객관적으로 실재한다. 예를 들어 2, 3, 5 등의 수학적 대상, '2 더하기 3은 5다'라는 수학적 진리, '인간임'이라는 보편자로서의 본질 등은 인식 주체가 그에 대해 사유하느냐 사유하지 않느냐라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게 자체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후썰의 근본 입장이다.
③ 본질은 비록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나무, 돌, 인간 등의 경험적 사물들과 같은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경험적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사유작용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개별적 직관individuelle Anschauung과 본질직관Wesensanschauung
① 이처럼 자체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인 본질은 우리의 인식작용을 완전히 벗어나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 즉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다. 인식주체의 밖에 실재하는 감각경험의 대상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하여 경험되듯이 객관적인 실재인 본질 역시 우리에게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다. 후썰은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경험을 개별적 직관individuelle Anschauung이라 부르고, 바로 이러한 개별적 직관과 구별하여 보편자로서의 본질에 대한 경험을 본질직관Wesensanschauung이라고 부른다. [55]
② 이 두 유형의 직관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이 개별적인 경험적 대상에 대한 개별적 직관을 수행하고 있을 경우에도 우리의 의식은 비록 막연한 양상에서나마 비주제적으로 본질을 향하면서 본질직관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본질에 대한 선행적인 직관이 이루어져야만 개별적 대상에 대한 직관도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1
"이것은 갈색의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나는 일차적으로 감각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갈색의 것'을 감각적으로 직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 필요한 것이 [...] 감각적 직관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감각적 직관을 통하여 '갈색의 것'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나는 이미 암묵적이나마 갈색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갈색의 본질을 선행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썰은 이처럼 암묵적인 양상에서 이해되는 본질을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 속에서 일차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반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실은 동일한 감각적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에게 경험된 이 동일한 대상이 '갈색의 것'이 아니라 '책상'으로 경험될 수도 있음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56-57]
이 동일한 대상이 '갈색의 것'이 아닌 '책상'으로 경험되는 이유는 내가 '갈색의 본질'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가 아니라 '책상의 본질'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를 가지고 이 대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그 어떤 대상을 어떤 의미를 지닌 대상으로 경험하기 위하여 언제나 암묵적인 양상에서나마 그 어떤 본질에 대한 이해를 선행적으로 가지고 있다.
형상적 환원
형상적 환원eidetische Reduktion: 후썰이 상정한 본래적인 의미의 본질직관. 막연하며 비주제적인 양상에서 벗어나 명료하며 주제적인 양상에서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적 절차.
형상적 환원을 통해 어떤 본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개별적 대상을 고찰하면서 그 대상 속에 있는 어떤 요소가 그러한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지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적인 시선이 여기에 있는 개별적인 대상인 이 책상만을 향해 있을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책상임이라는 본질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57]
① 여기에 있는 개별적인 대상으로서의 책상 속에는 '책상'이라는 본질 뿐 아니라 다른 유형의 본질들, 예를 들면 '촉감을 가지고 있음,' '연장을 가지고 있음' 등도 함께 구현되어 있으며, 따라서 바로 이 개별적인 대상에만 우리의 주제적 시선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책상임'이라는 본질을 이러한 다른 유형의 본질들과 혼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② '책상임'이라는 본질은 무수히 많은 다른 책상들 속에서도 구현되어 있으므로, 만일 우리의 주제적 시선이 내 앞에 있는 이 책상만을 향해 있을 경우 그를 통해 파악된 본질이 과연 무수히 많은 모든 책상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책상임'의 본질과 동일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책상임이라는 본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이 책상뿐만 아니라 현실적이든 상상적이든 모든 다른 책상들에게도 우리의 주제적 시선이 향하도록 하여 이 모든 대상들에 공통적인 본질을 밝혀내야 한다.
후썰은 이것이 가능한 방법적 절차를 자유 변경freie Variation이라고 부른다. 자유 변경은 어떤 본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어떤 개별적 대상으로부터 시작해 그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이 개별적 대상과 유사한 무수히 많은 개별적 대상들을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산출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바로 이처럼 자유변경을 통하여 어떤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개별적 대상을 상상 속에서 산출해 나가면서 저 모든 개별적 대상들에 공통적인 보편적인 속성으로서의 본질을 파악하는 과정이 다름 아닌 형상적 환원의 과정이다.
「경험과 판단」
1) 다양한 변경체를 만들어 가면서 그것들을 모두 살펴나가는 과정
2) 지속적인 일치 속에서 이 모든 변경체에 공통적인 요소를 통일적으로 연결하는 과정
3) 차이점들을 배제하면서 공통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면서 직관하는 과정
(영역적 존재론의 대상인) 영역적 본질과 (형식적 존재론의 대상인) 형식적 본질 모두 형상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파악될 수 있음. 실제로 후설은 그의 저술 곳곳에서 형상적 환원의 방법을 토대로 자양한 유형의 형식적 존재론과 내용적 존재론을 정립하고자 시도. [59-60]
후썰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개하고자 시도한 것은 영역적 존재론의 한 유형인 현상학적 심리학phänomenologische Psychologie이었다.
- 후썰의 본질직관은 흔히 형상적 환원, 즉 주제적인 양상에서 수행되는 본질에 대한 직관을 의미하나 이남인은 형상적 환원뿐만 아니라 비주제적으로 본질을 향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작용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질직관을 사용한다. [본문으로]
'Continental > Phenomenolog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남인 (2004) 현상학과 해석학 (1) (0) | 2024.07.16 |
---|---|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 시(時)와 사유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0) | 2019.11.01 |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3) (0) | 2019.10.05 |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2) (0) | 2019.10.05 |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1) (0) | 2019.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