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1 - [Research/Publications] -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2022 석사논문 제3장 제2절
“철학의 문제들에 관한 칸트적 해결책”
많은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이 기존의 철학사에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철학사를 배우는 것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겼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이 언제나 강단 철학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지닌다 (몽크 (2012), 706-707쪽 참조). 그러나 이로부터 곧장 그가 대륙철학의 전통에 무지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여러 문헌적 근거는 그가 『논고』를 저술하기 이전부터 칸트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첫째, 1914년 10월 19일의 『일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순수 수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칸트의 질문을 동어 반복 이론으로 조명하기!”(NB, 15/95쪽)라 적고 있다. 이후, 그는 『철학적 소견들』(Philosophische Bemerkungen)에서 『논고』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전에 산수의 등식(Gleichung)의 본질에 관하여 말했던 것과 등식이 동어 반복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하여 말했던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가 5+7=12는 분석적 명제가 아니며 선험종합적이라는 것을 관철하려 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을 설명한다. Wittgenstein (2019a), S. 129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그 구성 표현의 의미를 몰라도 그 명제의 참을 알 수 있는 (분석적인) 논리적 명제들과 등식의 양변을 구성하는 두 표현의 의미를 알아야 그 명제의 참을 알 수 있는 (선험종합적인) 수학의 사이비 명제들은 대조된다 (TLP, 6.2; 이영철 (2016), 122쪽 참조). 또한 『일기』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이미 『논고』 이전 시기부터, 논리적 명제와 수학적 명제의 차이를 해명하면서 칸트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둘째, 칸트철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이해는 순수 수학의 가능성을 해명하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맥기니스(McGuinness)는 비트겐슈타인이 1916년 올로모츠(Olmütz)에서 그의 친구와 칸트철학에 대해 논의했다고 보고한다 (Brian McGuinness, Wittgenstein: A Life-Young Ludwig (1889–1921), London: Duckworth, 1988, p. 252: Appelqvist (2013), p. 41에서 재인용). 『논고』를 출판하기 전, 그는 이탈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루트비히 헨젤(Ludwig Hänsel)과 함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 (몽크 (2012), 237쪽 참조). 『논고』에서는 서로 겹치게 만들 수 없는 왼손과 오른손에 관한 칸트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TLP, 6.36111). 특히, 프룹스는 이 마지막 근거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의 『형이상학 서설』을 읽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Proops (2004), p. 109 및 13번 각주 참조).
셋째,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의 작업에 친숙했다는 증거는 그와 다른 칸트주의자들 사이의 연관 속에서도 발견된다. 비트겐슈타인은 1931년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들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칸트철학에 영향을 받았던 볼츠만, 헤르츠, 쇼펜하우어, 그리고 바이닝거의 이름을 포함시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가 단 하나의 사유 운동(Gedankenbewegung)도 고안해낸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다른 이로부터 나에게 주어졌다고 믿는다. 나는 이내 그것을 열정적으로 나의 명료화 작업(Klärungswerk)의 대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볼츠만, 헤르츠, 쇼펜하우어, 프레게, 러셀, 크라우스(Kraus), 로스(Loos), 바이닝거, 슈펭글러(Spengler), 스라파(Sraffa)는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Wittgenstein (2019c), S. 476.
우리는 이 중 앞서 글록이 지적했던 헤르츠와 쇼펜하우어의 영감만을 간략히 일별(一瞥)하고자 한다 1. 첫째, 재닉과 툴민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던 헤르츠의 철학으로부터 그림 이론의 칸트적 성격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논고』의 그림(Bild) 개념은 통상적인 뜻에서의 그림(picture)과 수학적 개념으로서의 그림(model)이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이 중 후자의 직접적인 연원은 헤르츠의 그림 개념이다 (박정일 (2019), 286쪽 및 33번 각주 참조). 헤르츠는 모델로서의 그림이 논리적으로 허용 가능해야(logically permissible) 하고, 모든 경험적 자료와 양립 가능해야(compatible with all empirical information) 하며,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세계의 모든 본질적 관계들을 표현할 수 있어야, 즉, 가장 적절해야(most appropriate) 한다고 주장한다 (Graßhoff (1998), p. 247 참조). 또한, 헤르츠에 따르면, 논리적 허용 가능성 및 표현의 적절성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1권에서 도입되는 물리적 개념들과 공리들에 관한 모든 진술은 선험적이다 (Graßhoff (1998), p. 248 참조). “경험은 1권의 고찰들과 완전히 무관하다. 개진된 모든 진술은 칸트의 뜻에서의 선험적 판단이다. 그것들은 내적 직관의 법칙들과 자체적인 논리의 형식들에 근거한다” (Hertz (1894), S. 53). 이러한 이유로, 재닉과 툴민은 헤르츠의 모델들이 선험적인 연역 체계로서 경험과 관계 맺는 인지적 도식들(cognitive schemes)이며, 『논고』의 그림 개념 역시 이러한 모델로 해석될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Janik and Toulmin (1996), pp. 139-145, 181-187 참조).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헤르츠의 철학을 경유하여 ‘앎을 위해 의식적으로 구성된 도식들(consciously constructed schemes for knowing)’이라는 칸트적 개념을 사용한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방대한 논증을 필요로 하며 본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이 헤르츠의 철학으로부터 여러 개념을 차용하고 변형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 과정에서 논리적 공간(der logische Raum)과 같은, 경험적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선험적 체계를 도입하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Pârvu (2001), pp. 262-263; 박정일 (2016a), 36-37쪽 참조).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윤리적인 것의 운반자로서의 의지(der Wille als Träger des Ethischen)’ 개념을 서술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TLP, 6.423). 그는 1916년 8월 2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쇼펜하우어식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표상의 세계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하고 악한 것은 의지하는 주체이다” (NB, 79/411쪽). 이러한 단상은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현상(Phänomen)과 물자체(Ding an sich)의 구분을 비트겐슈타인이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유의 재료로 활용했음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이 통념과 달리 칸트철학의 체계와 개념들, 그리고 방법론에 무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위의 논의가 비트겐슈타인의 전체 사유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해커의 말마따나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단상들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주의자였다거나, 『논고』를 쓰면서 칸트철학을 쇄신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등의 결론을 추론해내기는 어렵다. 달리 말해, 위의 단상들은 모두 다음 장에서 살펴볼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을 정당화하는 최소한의 배경적 근거들일 뿐이며,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칸트철학의 체계와 개념들, 그리고 방법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으리라는 개연적 추론만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형언 불가능성 해석의 이론적 근거로서 칸트적 해석을 활용하는 학자들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단상을 단초로 앞의 절에서 제시된 네 가지 유사성 중 일부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한다. 실로, 형언 불가능성 해석과 칸트적 해석을 동시에 지지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양자의 유사성은 첫 번째와 세 번째 것으로, 칸트와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모두 경험적 인식 또는 의미 있는 언어가 성립하기 위한 선험적 가능 조건들의 체계를 제시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의 특징으로부터 이론적 인식 또는 의미 있는 언어의 한계가 그어진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1931년에 쓴 단상에서 언어의 한계 개념을 철학의 문제들에 관한 칸트적 해결책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 단상은 비트겐슈타인 스스로도 그의 철학과 칸트철학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는 이 단상을 단초로 『논고』와 『순수이성비판』에 근거하여 양자의 철학에 첫 번째와 세 번째 유사성이 존재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먼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의 한계(Die Grenze der Sprache)는 한 명제에 대응하는(그것의 번역인)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바로 그 명제를 반복하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 안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에서 철학의 문제들에 관한 칸트적 해결책과 연관을 맺는다.) Wittgenstein (2019c) S. 463-464.
아펠크비스트는 이 단상이 『논고』에 제시된 언어의 한계 개념과 그것의 표현 불가능성에 관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Appelqvist (2016), p. 697 참조). 내가 보기에, 그 근거는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1914년부터 품고 있었던 생각과 이 단상에 표현된 생각이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앞서 『논고』의 근본 사상이 사실들의 논리(die Logik der Tatsachen)는 대표될 수 없다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에서 G. E. 무어에게 구술한 노트」(“Notes dictated to G. E. Moore in Norway”)에서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속성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까닭은 비논리적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비논리적 언어의 구성 불가능성이 인용문에 제시된 불가능성에 상응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논고』에 따르면 한 명제에 대응하는 사실은 양자가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공유할 경우에만 그 명제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 이때,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TLP, 4.01). 또한, 그림은 하나의 사실이다 (TLP, 2.141). 그런데 명제는 모사 관계(die abbildende Beziehung)를 통해 현실의 그림이 될 수 있으며 모사 관계는 그림의 요소들과 실물들 간의 짝짓기들로 이루어진다 (TLP, 2.1513-2.1514). 즉, 모사 관계는 사실로서의 그림과 그림의 대상으로서의 사실이 그 요소들 간에 짝짓기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러한 짝짓기는 두 사실의 논리적 형식(현실의 형식)이 동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박정일 (2019), 263-264쪽 참조). 그리하여 두 사실이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은 명제에서 반영되며 명제는 현실의 논리적 형식을 보여 준다 (TLP, 4.121).
이러한 방식으로 명제가 그것에 대응하는 사실을 기술할 수 있다면, 명제들의 총체인 언어는 그것에 대응하는 사실들의 총체인 세계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TLP, 1.1, 4.001). 요컨대, 명제는 전체 현실인 세계를 묘사할 수 있다 (TLP, 2.063, 4.12). 그러나 언어는 언어 안에서 반영되는 것인 논리적 형식들을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묘사할 수 없다 (TLP, 4.121). 왜냐하면, 논리적 형식은 모사 관계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사실로서의 그림이 무언가를 모사하기 위해 이미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즉, “만약 그러한 형식이 맨 처음에 언어가 뜻을 갖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라면, 나는 [바로 그 이유에서] 언어의 형식을 기술할 수 없다” (Appelqvist (2016), p. 704).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1914년 10월 18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진술이든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den logischen Bau der Welt) 겨냥하기란 불가능하다. 명제가 가능하려면, 즉 어떤 명제가 뜻을 지니는 게 가능하려면, 세계는 이미 그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논리는 모든 진리와 거짓에 선행한다. NB 14/93쪽
따라서 어떤 명제가 사실의 논리적 형식을 묘사하기 위해 그 사실과 상이한 논리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면, 양자 사이에는 모사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 명제는 사실을 묘사할 수 없다. 반대로, 어떤 명제가 사실의 논리적 형식을 묘사하기 위해 그 사실과 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면, 이 논리적 형식은 이미 명제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므로 명제는 자신의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 없다. 요컨대,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명제들을 가지고 논리의 밖에, 즉, 세계의 밖에 서 있을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TLP, 4.12). 그러나 우리가 세계의 밖에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비-논리적 언어를 구성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따라서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형식 및 논리적 속성을 말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어떤 명제에 대응하는 사실은 바로 그 명제를 반복함으로써만 기술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기술의 조건인 논리적 형식은 말해질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다. 그리하여 명제와 사실의 논리적 형식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안에서 언어의 한계는 드러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의미 있는 언어가 성립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논리적 형식, 그러한 조건이 말해질 수 없다는 점 안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한계, 그리고 그 조건을 말하려 시도할 때 생기는 무의미한 명제와 같은 칸트적 테마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김영건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칸트의 선험적[초월적] 자아의 역할은 바로 현상계와 본체계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 논리적 형식과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다. 논리적 형식은 언어가 세계를 그릴 수 있게 해 주는 가능 근거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제(presupposition)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의 선험적[초월적] 자아는 현상계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논리적 근거이며 우리가 세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나 인지를 갖고 있는 한, 그것을 선제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유 주체는 칸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형식적 조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김영건 (2007), 10쪽.
칸트에게 있어 초월적 통각(die 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란 경험의 모든 대상들의 종합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조건이다 (KrV, A 106-107). 그것은 나의 모든 표상에 동반할 수 있어야 하는 ‘나는 사고한다(Ich denke)’라는 표상을 산출하는 자기의식 (KrV, B 132-133), 즉, “대상의 표상에로 나아가 활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활동”(최소인 (2012), 444쪽)이다. 또한, 자기의식은 ‘자기(Selbst)’라는 대상에 대한 인식인 자기 인식과 다르다 (백종현 (2017), 107쪽 참조). 왜냐하면, 칸트는 감성의 제약 아래에서 사고된 것만을 인식(Erkenntnis)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성학 (1998), 95쪽 참조). 달리 말해, 칸트에게 있어 인식이란 언제나 개념을 통해 대상이 사고되고, 그에 상응하는 직관을 통해 대상이 주어질 때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KrV, B 146-147). 이러한 이유로, 자기의식이란 ‘자기’라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의식이 아니며, 오히려 모든 대상에 대한 의식을 가능케 하는 논리적 전제, 형식적 조건일 뿐이다 (백종현 (2017), 106-107쪽 참조). 칸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한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내가 전제해야만 하는 것을 그 자체로는 대상으로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식이 대상과 구별되는 것처럼 규정하는 자기(사고)가 규정된 자기(사고하는 주관)와 구별된다는 것은 참으로 매우 명백하다.” (KrV, A 402-403)
따라서 초월적 자아는 대상들에 관한 우리의 인식방식이며, 오직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과 관계 맺는 한에서만 선험적으로, 또 초월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3 반면, 이론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조건에 불과한 초월적 자아를 데카르트(Descartes)처럼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로 간주하는 것은 이성의 오류추리이다. 4 요컨대, 언어의 한계가 그것의 전제 조건인 논리적 형식이 말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드러난다면, 이론적 인식의 한계는 그것의 전제 조건인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과 관계 맺는 한에서만 객관적 실재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규명된다. 5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도출한 아래의 두 가지 전제를 토대로 지금부터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을 상세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가 자신의 철학을 독자적으로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칸트철학의 체계와 개념들, 그리고 방법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둘째,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칸트철학 사이에 성립하는 네 가지 유사성 중 일부를 『논고』와 『순수이성비판』에 근거하여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유사성 중 하나는 의미 있는 언어 또는 경험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선험적 가능 조건들의 체계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조건들의 특징으로부터 도출되는 의미 있는 언어 또는 이론적 인식의 한계 개념이다.
반면, 나는 스테니우스가 제시했던 두 번째와 네 번째 유사성을 그에 관한 비판적 검토 없이 자명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두 번째 유사성의 정당성을 4장 1절에서 다루며, 이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초월적 논증과 칸트의 초월적 논증 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차이를 밝히고, 양자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약한 의미의 초월적 논증’을 제시할 것이다. 또한, 나는 네 번째 유사성의 정당성을 4장 2절에서 다루며, 이로부터 그러한 유사성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달리 말해,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적인 것을 언어의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스테니우스의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체계에서 윤리적인 것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드러날 수 있는데,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논고』의 의미를 해명하는 일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해명과 연관된 형이상학적 주체의 문제를 4장 3절에 다루며, 유아론의 주체가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유사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즉, 유아론의 주체는 의미 있는 언어의 선험적 가능 조건이라는 점에서 첫 번째 유사성과, 약한 의미의 초월적 논증을 통해 도출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 유사성과, 그 자체로 말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세 번째 유사성과 연관을 맺고 있다. 이에 더해, 네 번째 유사성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규명되는 윤리의 초월성은 유아론의 주체에 관한 약한 의미의 초월적 논증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그리하여 칸트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철학이 지닌 근본적 차이는 이러한 고찰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 글록은 『비트겐슈타인 사전』(A Wittgenstein Dictionary)에서도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칸트는 앎의 대상들로부터 추출한 ‘형식 논리학’과 대상들에 대한 사고의 전제 조건들을 탐구하는 ‘초월 논리학’을 구별한다. […]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을 우리가 대상들을 표상하는 방식의 구조적 특징들(structural features)을 말함으로써 [자연] 과학의 선험적 요소들을 설명했던 쇼펜하우어와 헤르츠로부터 얻었다.”(Glock (1996b), p. 199.) [본문으로]
- “모사 형식이 논리적 형식이면, 그 그림은 논리적 그림이라 불린다. […] 모든 그림은 또한 논리적 그림이다. […]”(TLP, 2.181-2.182.) [본문으로]
- ‘초월적’이라는 개념에 관한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초월적 통각에 관한 인식은 대상들에 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이것이 선험적으로 가능한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인식이라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또한, 그러한 인식은 어떠한 경험적 기원도 갖지 않는 순수한 통각에 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이다. [본문으로]
-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에 대한 칸트의 비판으로는 : 정낙림 (2006) 참조. [본문으로]
- KrV, A 96. 물론 페어스의 지적처럼, 의미 있는 언어의 선험적 가능 조건들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이에 대응하는) 경험적 인식의 선험적 가능 조건들에 관한 칸트의 생각과 차별화된다.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오직 사실적 언어의 존재로부터 연역된, 그러나 그 안에서 표현될 수는 없는 경험의 형이상학만을 제시한다. […]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의 현실성(the actuality)에 근거하여 어떤 것들을 말하는 것의 가능성(the possibility)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 사실적 담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논제는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칸트적이다: 과학은 과학의 확장이 아닌 근본적 형이상학에 기초한다. […] 하나의 차이점은 칸트가 그의 철학을 사실적 언어 안에서 나타내는 것에 관하여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던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보다 엄격했다는 점이다: 만약 철학이 단순히 과학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발전을 넘어선다면, 그것의 결과는 사실적 언어 안에서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Pears (1987), pp. 6-7.) 실제로, 칸트는 (213번 각주에서 지적한 것처럼) 경험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선험적 조건들에 관한 인식이 (그것들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과 관계 맺고 있는 한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의미 있는 언어의 조건들이 어떤 언어에 의해서도 말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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