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2023). 여성탈북기의 ‘미국화’ 장치들. 여성문학연구, 60, 297-328.
Lee, Jieun. (2023). The ‘Americanization’ devices of the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Texts. Feminism and Korean Literature, 60, 297-328.
1. 탈북 의제의 국제화와 여성탈북기가 놓인 자리
2010년대 중반부터 탈북자의 ‘수기(memoir)’ 형태를 띤 텍스트가 영어권에서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빠르게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출판되었다. ‘탈북기’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북한이탈주민의 문제가 더 이상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 의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전향을 의미하 는 ‘귀순(歸順)’이나 월경의 방향을 표시하는 ‘월남(越南)’과 달리, ‘탈북(脫北)’이 라는 개념에는 이데올로기적·지리적 귀착지가 전제되지 않는다. 이는 탈북자 가운데 대한민국 이외의 국가를 선호하거나, 남한에 도착한 후에 또다시 국경을 넘 어 난민이 되는 이들이 증가하는 데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사실 2000년대 초 반부터 미국, 영국, 캐나다와 같은 서구 국가에 난민 신청자로 임시 거주하거나 난민 지위를 획득하여 살아가는 북한이탈주민이 급격히 증가해왔다. 탈북자 텍 스트가 세계적 주목을 받은 또 하나의 배경은 2000년대 이후 북한이 서방세계에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위협적 존재로 부상한 데 있다. 영미권에서 본격화 된 탈북기 출판은 “국제정치적 상황 및 국제인권 레짐과 긴밀하게 연동”된 현상 이었다. [298-299]
탈북기의 생산·소비는 국제정치적 이슈와 밀접하게 연동되지만, 탈북기가 체제 고발과 인권 수호를 목적으로 한 증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는 일차적으로 북한 사회의 실상이나 탈북자의 취약성, 월경 과정의 고난 등 텍스트 내적 층위를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탈북자의 증언에 대한 충실한 독해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 텍스트 안팎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식민주의 권력을 소거한 채 서사 그 자체만을 분석함으로써 텍스트가 기반하고 있는 헤게모니를 강화·재생산할 수 있다. 특히 영미권 출판 시장에서 생산된 텍스트를 곧바로 북한 사회에 대한 ‘진실’로 이해하는 방식은 일견 탈북자의 증언에 대한 신뢰로 보이지만, 텍스트의 진실성 논란이 발생할 때 그 책임을 오롯이 탈북자에게만 전가하는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한편, 기존 연구 가운데는 탈북기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북한 사회의 특수성에 주목한 논의도 있지만, 그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하고 있어 문제적이다. [300]
여성 탈북기가 “‘증언’의 성격이 짙은 탈북 남성의 수기”와는 달리,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표지 전면에 내세우면서, ‘무고한’ 여성의 고난을 집중적으로 서사화하고 그녀들의 역경에 맞선 용기를 가시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탈북 여성의 고난과 역경이 ‘고통의 문화산업’ 속에서 서구 자유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이야기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301]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고발, 혹은 북한 주민 인권 문제로 의제화되고 있는 여성 탈북기는 기실 미국의 인권 담론을 특권화하는 방식으로 생산·소비됨으로써 보편 인권 의제의 ‘미국화(Americanization)’, 혹은 정의의 ‘미국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크다. [301]
2 탈북여성의 ‘소녀화’와 종착지로서 미국
물론 이와 같은 ‘소녀화’는 때로 탈북 여성 스스로가 취하는 행위성(agency)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호주의 저널리스트 매리 앤 졸리(Mary Ann Jolley)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높은 허리와 풍성한 치마가 돋보이는 분홍색 한복을 입고” “눈물을 닦으며” “세뇌당했던 일, 처형 장면을 목격했던 일”,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것” 등을 말하는 박연미에게 공감하지 않기란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박연미의 증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다.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 박연미가 동양적이고 소녀적인 연출을 통해 진실하지 못한 증언을 서구 청중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매리 앤 졸리가 지적하는 이 장면은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서 박연미가 했던 연설을 말하는데, 실제로 박연미는 이 연설을 통해 “일약 ‘북한 인권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탈북 여성, 즉 비-서구인, 비-남성, (‘탈북자’로서) 비-국민이라는 중층적으로 취약한 조건에 있는 박연미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전략을 취했고, 모순적이게도 그 전략은 자신을 취약하게 만든 그 권력—이를테면 여성 섹슈얼리티를 소비하고 착취하는 구조—에 의지하거나, 혹은 그것을 재생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박연미 혹은 탈북 여성만의 문제라기보다 서발턴의 말하기가 갖는 구조적인 난점이다. [307]
흥미롭게도 여러 판본으로 존재하는 여성 탈북 텍스트의 제목 가운데 유독 영어판의 제목들이 ‘자유 세계=미국’의 표상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박연미의 In Order to Live: A North Korean Girl’s Journey to Freedom (살기 위해: 자유를 향한 북한 소녀의 여정, Penguin Press, 2015)이나 김은선의 A Thousand Miles to Freedom: My Escape from North Korea (자유를 향한 천 마일: 북한으로부터 나의 탈출)은 공통적으로 ‘자유를 향한 여정’이라는 의미를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이들 텍스트는 공히 주인공이 ‘미국’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런데 박연미 탈북기의 한국어판 제목은 내가 본 것을 당신이 알게 됐으면이며, 일본어판은 살기 위한 선택(生きるための選択)이다. 일본어판 제목은 영어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지만, ‘자유를 향한 북한 소녀의 여정’이라는 영어판 부제는 ‘소녀는 13세 때 탈북할 것을 결심하고 강을 건넜다(小女は13歲のとき、脫北することを決意して川を渡った)’로 바뀌었다. 김은선의 탈북기 또한 프랑스에서 발간될 때 제목은 북한 지옥에서 탈출하기까지 9년(Corée du nord. 9 ans pour fuir l’enfer)이었고,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열한 살의 유서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308].
유독 영어로 출판된 여성 탈북기들이 ‘탈북=자유를 향한 여정’이라는 등식을 반복하면서, 그 여정의 종착지로서 ‘자유 세계=미국’을 부각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탈북 여성이 무고하고 연약한 소녀로 표상되는 것과 함께 그녀들이 찾아가는 미국은 이상적인 세계로 표상된다 [308-309].
3 독자 욕망의 반영 장치로서 ‘유령작가'
영어권에서 출간된 여성 탈북기의 또 하나의 공통된 특징은 전문 전기 작가, 즉 ‘유령작가(ghost writer)’에 의해 쓰였다는 점이다. 탈북기가 고통의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소비되는 출판 상품인 만큼, 이는 해당 언어 독자의 기대 지평이나 문화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기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한에서 온 탈북자는 미국 혹은 서구 사회의 정치적·문화적 맥락을 고려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때 증언자와 서구 사회 사이를 매개해 주는 이가 바로 ‘유령작가’로, 그는 단순히 언어적 장벽이나 글쓰기 능력을 보완하여 대필하는 게 아니라, 출판 기획에서부터 참여하기도 한다. 곧, 유령작가는 탈북자의 증언을 서구 독자에게 읽힐 수 있는 텍스트로 생산하는 역할을 하는데, 중요한 점은 ‘읽힐 수 있음’이 단지 언어적 층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309-310]
곧, 탈북자의 ‘성공 서사’는 미국 독자 들에게 친숙한 문화적 기호들을 차용하여 이루어지고, 이는 동시에 미국의 표상 을 조작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박연미의 텍스트에서 미국은 자유가 무엇인지 엿보게 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동경을 품게 하는, ‘악의 축’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자유세계로만 표상된다. [314]
4 (신)냉전 세계지도의 재생산과 여성들의 ‘입국의례'
반면, 중국은 북한과 매우 대조적인 곳이다. 박연미의 가족은 북한에서 궁핍으로 인한 배고픔, 당국의 감시와 고문, 수용소 감금과 같은 고초를 겪었다. 이는 폭력을 독점한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전체주의 독재국가로서 북한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박연미와 엄마가 겪는 일들, 이를테면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팔려 나가며, 사업 파트너가 되어 다른 여자들을 파는 데 일조하는 일, 그리고 마약과 도박이 횡행하고 여자 문제로 폭력배 두목 간에 전쟁이 벌어지려 하는 일 등은 ‘자연상태’를 방불케 한다. 북한이 독재 체제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는 곳, 곧 권력이 과잉 작동하는 지대라면, 중국은 폭력과 자본만이 실효적 힘을 가진 무법지대처럼 그려진다. 물론 이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탈북자의 취약한 지위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중국은 야만적인 곳으로 그려지게 된다. [316]
반면, 미국은 북한, 중국과 확연히 대조되는 곳이다. 탈북자는 한국에서 국민 지위를 얻음으로써 이전보다는 안정된 지위를 얻지만, 여전히 남한 사회의 차별과 멸시에 노출된다. 따라서 한국은 완전한 자유세계로 표상되기보다, 그 자유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경유지로 보인다. 탈북기에는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경험한 부당한 대우나 차별 등이 서술되어 있지만, 남한 독자를 대상으로 한 텍스트에서는 이를 토로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김은선 탈북기의 영어판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 한국어판보다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것이 결과적으로 ‘자유 세계를 향한 여정’의 서사에서 남한을 경유지로, 미국을 종착지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은 분명하다. [317]
5 결론
본고는 유령작가의 도움으로 서구권에서 출간된 여성 탈북기와 그 번역본을 분석하여 이와 같은 담론 구조를 강화하는 서사적 장치를 분석하였다.
첫째, 탈북 여성의 ‘소녀화’이다. 탈북 여성은 가족 내에서 실질적 가장 역할을 담당하고, 온갖 고초 끝에 국경 넘기에 성공하는 강인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곁텍스트 및 서술 층위에서 ‘소녀(girl)’로 재현된다. ‘무고한 소녀’의 이미지는 북한의 전체주의와 대조되어 현실의 참상을 더욱 실감나게 전달하지만, 그만큼 탈북 여성들을 미성년화하고, 그 여성들이 향하는 자유세계 미국을 이상적이고 관대한 세계로 그려낸다.
둘째, 내포 독자의 욕망을 반영하는 ‘유령작가’이다. 탈북기가 출판 상품인 만큼 이는 서구 독자의 욕망과 인식 지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온 증언작가는 이 책을 읽으리라 예상되는 서구 독자들의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에 유령작가는 증언의 내용을 서구 독자에게 읽힐 수 있는 텍스트로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읽힐 수 있는’ 텍스트란 단지 언어적 번역만이 아니라, 서구 독자에게 익숙한 문화적·이데올로기적 번안까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본고는 여성 탈북기에 등장하는, 북한 여성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미국적 문화 코드나 이데올로기를 유령작가의 번안의 결과로 보았다.
셋째, (신)냉전 세계 지도의 재생산이다. 탈북기는 증언자의 이동 경로에 따라 ‘북한 → 중국(→ 몽골) → 남한 → 미국’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각 나라의 재현은 냉전 체제를 (재)생산한다. 단적으로 북한이 ‘권력 과잉’의 전체주의 국가라면, 중국은 치안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자연 상태’로 그려진다. 이들의 반대편에 자유세계 미국이 그려지며, 남한은 자유세계를 가기 위한 경유지로 나타난다.
이때 여성들은 국경을 넘을 때마다 국가 권력에 의한 검문(신체검사, 검진)뿐 아니라, ‘훼손된 정조’에 대해 회개를 강요받기도 한다. 이처럼 여성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여성들에게 폭력적으로 강요되는 입국 의례는 서사 구조 속에서 탈북 여성들을 안전한 이주민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전제로 이주민을 인정하는 인식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처럼 여성 탈북기의 ‘미국화’ 장치들을 규명하는 일은 서발턴의 말하기가 언제나 지배 담론에 포획될 위험에 놓여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자, 탈북 텍스트 진실성에 대한 책임이 오직 탈북자에게만 귀속되는 담론 구조를 해체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32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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