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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금상 (2018) 성 서비스 영역에 참여한 탈북여성의 경합과 생존전략

Soyo_Kim 2024. 11. 28. 19:25

 

권금상. (2018). 성 서비스 영역에 참여한 탈북여성의 경합과 생존전략. 현대북한연구, 21(3), 162-203.

Kwon,Keum Sang (2018). Competition and Survival Strategy of North Korean Defectors Participating in Sex Service Area. Review of North Korean Studies, 21(3), 162-203.

1. 들어가며

여성들이 성매매를 직업으로 선택하게 되는 일반적 이유는 가난한 여성들이 성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최저임금조차도 보장되지 않는 직업 밖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1) 탈북여성들의 성 서비 스 영역으로 활동하게 되는 이유 역시 가난이라는 근본적인 토대 문제 에서 출발할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탈북인들의 경우 입국 초기에 정착금과 주택 등의 정착을 위한 지원이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볼 때 성 서비스를 삶의 방편으로 선택한 취약계층 한국여성들 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혹은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63]

분단체제의 이념 경쟁에서 탈북인들의 증가는 한국 체제의 승리를 상징해 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은 통일의 역군이란 상징성에 부합되기보다는 주변화되어 있고 주류화를 이루는 탈북여성들 중 다수는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인신매 매나 성 서비스 관련 노동 경험이 한국의 삶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실 정이다. 그러한 사례는 한국 언론에서 탈북여성들의 성매매 관련 사건 보도들로 나타난다. 예컨대, 농촌 지역사회에 등장한 탈북여성들이 중 심이 된 이른바 티켓다방에 관한 이슈들이다. 과거, 중국동포 여성들 이 성매매 행위를 벌이다 단속대상이 되었던 농촌지역 다방이 최근 탈북여성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165]

탈북여성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더 불안한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 서비스에 참여하는 것은 비법의 영역에서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일탈 노동적 특성과 한국 내에 서 생존조건이 어려운 현실로 인해 다양한 성 서비스 시장과 쉽게 결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65-166]

 

2. 연구방법 및 과정

연구 참여자들은 일 자체에 대한 수치심뿐 아니라 자신 관련 한 정보가 한국뿐 아니라 탈북인들 그리고 북한 사회에도 밝혀지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특수한 정체성임을 감안했다 [167]

 

3. ‘고난의 행군’과 경계 넘기

북한 여성들은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들었고, 북한의 전 지역으로 장사를 다녔을 뿐 아니라 접경지역 주민들은 중국을 건너다니는 월경(越境)을 수행했다. ‘고난의 행군’을 통해 중국을 건너간 북한사람들이 한국으로 들어와 북한이탈주민이 된 것이다. [169-170]

어려운 시기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국가의 근간을 이루던 통제 시스 템도 무너졌다. 국가가 금지해 온 ‘사경제 활동’이 형성되면서 여성 들의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활동은 밀수, 국경 넘기, 탈북 등 그 이전에 볼 수 없던 사회적 일탈 행위들이 일상화되었다. 북한주민들은 생존 전략으로 장마당에 모여들었고 이렇게 생겨난 농민시장이 성행하게 되어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시장화가 전개되었다. 북한이 겪은 과정 이 초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으나 인민들은 급 격한 사회변동에서 새로운 생활세계를 구축하며 국가에 대한 집단주 의의식보다는 개인이 우선이라는 인식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한 주민 중에는 탈북을 하는 경우 중국으로 건너와 숨어 경제생활을 영위하거나 밀수 등으로 자본을 마련해서 북한으로 돌아 가거나 한국이나 제3국으로 떠나는 여러 가지 경로를 선택한다. 다수 의 탈북여성들은 북중 접경에 사는 조선족 친척집을 방문하거나, 밀수 를 위해 혹은 중국에 가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조중 접경의 월경(越境)을 하면서 공간경험을 넓힌다. [170]

중국에서 중국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도 공안에게 적발되어 북송되거나(김지나, 최신 혜), 호구조사 등으로 생존이 어려워지면 남한 행을 계획하게 된다는 것이다(김필순, 홍경숙, 김지나, 최신혜와의 인터뷰 중). 이들에게 경계 넘 기는 중국으로 건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안으로부터 적발 되지 않기 위한 은신의 삶이 지속된다. 월경 과정에서는 이미 브로커 와 접선지역을 정해 놓고 한밤중에 강 건너 일정한 장소로 가는 경우 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하는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약속 과 다르게 인신매매를 당한다고 경험자들은 말한다. [170-171]

새 브로커는 이튿날 북으로 가기 위해 하룻밤 자야 한다며 그녀를 농촌의 한 농가로 데려갔는데 그녀는 자신이 팔아넘겨진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한족 남성의 가족들로부터 감시를 당하면서 일꾼 겸 아내로 살다가 두 달 후 도망을 쳐서 중국의 어느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였다. 중국에서 호구(주민등록) 없이 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 하는 경우는 노출이 잘 안 되므로 일 정 기간 동안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국의 선교 사들이 탈북인들을 한국으로 데려가 준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렇게 만난 선교사는 브로커를 연결시켜 주었다. 브로커를 만나러 가는 경로 는 혼자서 베트남 국경까지 가야 했으므로 버스 노선을 묻는 중국어 메모를 준비해 사람들에게 보이며 두려운 경계 넘기를 감행했다. [172]

‘고난의 행군’은 배고픔뿐 아니라 일상에서 두렵고 지 난한 시간들로 지속되었다. 엄마들이 없는 동네에서 어린이들은 무방 비로 노출되어 본인도 이웃의 아저씨로부터 성폭력의 위험을 피하면 서 긴장을 해야 했다. 집에서는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고 아버지에게 매를 맞기 일쑤이며 이웃으로부터 성폭력 위험이 있어 되도록 장삿길 에 나서는 엄마를 따라다녔다. [174]

그녀는 제3국까지 안전하게 이동시켜 줄 브로커를 찾아 2012년 조중 접경을 건넜다. 그 브로커는 연변 근처 농촌의 어느 집으 로 데려다 놓고 며칠 후 올 거라며 떠났으나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집에는 노인 둘과 나이 든 남성이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신부로 팔려 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중국말도 모르고 빠져 나갈 방법이 없었으므로 3년간 그 남성의 아내로 살면서 딸 하나를 낳았다. 어느 날 공안들이 집으로 호구 조사를 와서 단속에 걸렸을 때 남편은 벌금 을 내면서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그러나 이미 탈북 인이라는 신분이 알려져 버렸으므로 더 이상 그곳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그녀는 한국의 사촌 여동생과 계속 연락하면서 중국 남편에게 한국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한국에 가면 남편도 일자리도 얻을 수 있어 중국에서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지만 강하게 반대 하였다. 그녀는 남편 몰래 브로커와 연결해 도망치다시피 했고 한국에 온 후에는 중국 남편을 설득해 중국의 딸과 북한의 아들 모두 한국으 로 데려왔다. [174-175]

밀수를 업으로 하는 북한사람들은 조직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때로는 국경경비대에 근무하는 초소경비대원들과 친밀성을 담보로 하 는 의례적인 관계들을 이용한다. 그러나 대부분 가난한 탈북여성들은 중국접경에서 일거리를 찾기 위해 월경한다. 이 과정에서 인신매매를 당하게 되는 위험을 알면서도 북한에서 살아갈 환경이 너무 어려우므로 인신매매의 위험상황을 감내하고 있었다.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 남성의 아내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이미 북한에 자녀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조중 접경 지역은 장백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대부분이 산촌과 농촌이므로 여성이 귀한 농촌, 산촌의 현실은 탈북여성들을 중국인의 신붓감으로 매매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75]

최신혜(40대 중반)의 경우 결혼한 지 4년 만에 ‘고난의 행군’을 경험 하고 몸이 아프고 살기 어려워 남편과 헤어졌는데 당시 시댁에서 아들 을 데려 갔다. 그녀는 혼자 살아가다 보니 곤궁함을 해결하기 어려워 동네 아줌마들처럼 중국으로 건너가 일을 구하고 돈을 벌기로 마음먹 고 2005년에 동네사람이 연결해 준 브로커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접경지역에서 만나 일을 할 수 있는 집이라며 데려다준 곳은 연변의 농촌이었다. 한족 남성에게 팔려 간 것을 알고 기분은 나빴지 만 첫날부터 대접은 괜찮았다. 그녀는 한족 남성의 아내로 2년 차에 아들을 낳았고 10년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자신이 탈북인이므로 그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식으로 호구를 올려야 했다. 그녀는 주변의 조선족이나 탈북여성들을 통해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탈북인들을 모아 한국으로 데려다준다는 정보를 듣고 선교사들을 찾아다녔으나 만나지를 못해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다 2008년 자신이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찾아온 중국 공안들에게 붙잡혀 북송되 었다. 북한의 단련소에서 나오자마자 중국 남편에게 돌아와 살았지만 그 이듬해 다시 공안 단속으로 북송되었다. 북송 과정에서 호되게 매를 맞았고 다리를 다쳤다. 이번에는 풀려나자마자 중국으로 돌아가 비싼 돈을 들여 가짜 호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동네와 공안에서 는 자신이 북한에서 온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남편도 아내가 한국으로 가서 한국 국민 신분을 취득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한국으로 보내 주었다. 그녀는 비록 자신이 인신매매의 거래 대 상이었으나 남편에게는 고마운 마음으로 10년간 살았고 현재까지 좋은 사이를 유지한다. 중국의 딸을 한국으로 데려왔고 아이는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리워해서 매일 영상통화를 한다. 그 남편은 가끔 농한기에 한국 방문을 하지만 이주하지 않은 이유는 일손이 필요한 농가에서 장남인 자신이 노부모를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176]

그녀는 결혼 6년 후 남편 이 세상을 떠나고 곧바로 장마당에서 장사를 했는데 중국 물건과 담배 등을 팔았다. 그녀는 아는 사람들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북한 약초나 명태 등을 팔기도 하고 중국의 먹을거리를 사다가 북한에서 팔기도 했다. 이때 법관 부인이 함께 장사를 해서 북한국경 초소 경비원들은 담배와 같은 물건을 떼어 주는 것으로 통행을 눈감아 주었지만 들고 온 물건을 다 빼앗긴 일이 발생했다. 집으로 조사 오는 일이 자주 발생 하여 더 이상 중국행 밀수는 어려워졌다. 그녀는 2008년에 중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는데 그녀가 간곳은 연변 부근 노래방 도우미였다. 그곳의 젊은 탈북아가씨들을 찾아오는 중국 남성들이 주요 손님이었 다. 그녀는 노래와 춤, 악기 연주에다 중국어를 잘해 어느 노래방을 가도 인기가 있어 수입도 많았다. 처음에는 노래방 주인이 마련해 준 숙소에서 북한에서 온 아가씨들이 함께 살았는데 나중에는 노래방 주 인과 함께 살면서 탈북여성 관리자가 되었다. 그곳의 젊은 북한 여성 들은 남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모두 한국으로 떠나기 위해 브로커 를 알아본다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그녀도 남한 사회를 동경하며 2015 년에 고향 친구와 함께 한국행을 선택하였다. [177]

 

4. 성 서비스 영역 진입과 가족 규범

참여자들은 성 서비스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러려고 내가 그 고생을 하면서 남한에 왔나?’ 하는 자괴한 질문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에 오면 정착금으로 브로커 비용 과 한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북한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세 가지가 다 해결될 줄 알았다. 남한 땅으로 성공적인 유입은 브로커와의 지불 약 속 이행, 북한과 중국에 있는 가족과의 송금 약속을 지켜야 하는 현실 적인 문제로 연결되었다. [179]

전반적으로 탈북여성들은 가족구성원의 불안정성과 함께 사회 경제 적으로 취약한 지형을 나타낸다. 한국 사회에 정착한 탈북인에게 생기 는 젠더 문제는 원거리 가족 관계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전통적인 가 족규범도 한몫을 한다. 대북송금 조사결과에 의하면 58.5%가 북의 가족에게 송금한 경험이 있었다. 평균 송금액은 1백만 원에서 2백만 원 사이가 37.5%였으며 50만 원에서 1백만 원 송금이 27.9%를 차지한다. 이 금액은 일을 해서 번 돈의 61.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탈북인 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신체적 질병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비경제 활동을 하는 탈북인의 44.8%는 질병 등 육체적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179]

한국 사회에서 성 서비스 영역으로 진입하는 데는 위에 열거된 저임금 문제, 초기 정착금에서 브로커 비용 채무 문제, 북이나 중국에 남겨놓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개인적 의무 문제, 장기적 노동이 어려운 신체적 문제 등이 중첩적으로 작용한다. [180]

언론에서 밝혀진 탈북 여성들의 성매매 이유는 한국에서 받은 정착금 대부분을 브로커에게 넘겨야 하고,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경제적인 문 제 때문이다. [180]

이들이 경계를 넘어 온 한국 사회에서 정착금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 유입을 도와준 브로커 비용 지급이었다. 경제적 어려움 이 시작되는 이유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해야 했지만 이들 이게 주어진 일은 대부분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북한에서 경험하지 않은 미숙련으로 인한 어려움도 있고, 장기간의 영양 부족, 탈북과정과 수용소 생활로 몸과 마음이 허약해진 탈북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강도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탈북인들의 가 난이란 악순환이 재생산되는 것은 바로 브로커 비용 지급에서 출발하 는 구조적인 문제였다 [182]

그녀가 회사를 몇 번 옮기다 식당일을 그만둔 후 연락이 되어 간 곳은 북한에서 알았던 언니가 몇 해 전에 한국에 정착하여 일하는 경상북도의 시골 동네 티 켓다방이었다. 그 업소에는 본인을 포함해서 7명 정도의 탈북여성들이 일하고 있었다 [182-183]. 그곳은 경상북도 도청이 설립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미 탈북여성들이 운영하는 티켓다방이 대여섯 개 만들어져 성매매 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도청공사장 인부들인데 오랜 기간 공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성황리에 영업을 하고 있었다. 언니로부터 이곳에서는 숙식비로 무조건 하루에 3만 원씩 입 금과 업소 내에서 커피값은 주인의 몫이다. 그러다 보니 무조건 밖으 로 나가야 아가씨 몫의 돈이 된다. 일하는 언니들은 내게 손님들과 밥을 먹거나 노래방을 가도 시간당 3만 원씩이므로 선불을 받아야 한 다고 귀띔해 주었다. 성매매를 하지 않아도 시간당 3만 원씩 벌 수 있지만 단골을 만들려면 성관계를 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성 서비스 영역은 남자들을 상대로 하면서 여성끼리 경쟁관계에 놓이지만 이곳 북한 여성들끼리는 손님을 서로 나누어 돈을 골고루 벌도록 한다. 모 두 북한에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티켓다 방에서 일하는 아가씨 중에는 20대 초반부터 자신처럼 40대뿐 아니라 50대 여성도 한 사람 있었다. 연령에 따른 차등적 벌이는 어쩔 수 없으 므로 나이를 속여야 했다. [183]

북한에서 했던 기기수(수술실 간호원) 경력이 한국에서 는 소용이 없었고, 무거운 것조차 들 수 없는 자신의 체력과 신체 상태 에서 요양보호사 자격의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 대신 이곳에서 한국 남자가 아닌 외국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이 북에서부터 지속된 자신의 힘든 운명으로부터 탈출할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다. 그러다 하게 된 노래방의 일은 어렵지 않았고, 외로운 처지에 여러 남성들을 만나는 것은 결혼을 위한 전략으로 여겨졌다. [187]

성 서비스 영역에 참여한 여성들은 모두 북한에서 성을 매개로 한 직업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또한 이들 중 북한 땅을 벗어나 중국으로 건너갈 때 한국행을 계획한 사람은 단 한 명(김지나)뿐이었다. 첫 정착 금을 브로커에게 지급한 여성들은(홍경숙, 최신혜, 김지나, 김동희) 생활 이 너무도 어려웠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하나 원 동기들과 공유하였고,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이 알선해 주는 성 서비스 영역의 일탈노동시장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 로 조중 접경, 제3국에서 한국이라는 물리적 사선을 넘어와서 금기 영역인 일탈노동의 참여로 심리적 사선을 넘은 것이다. 성 서비스 영 역이 연령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이 나타난다. 50대 경우는 전면 적 성 서비스 대신 ‘일 영역’ 안에서 주방일이나 기타 돌봄의 역할을 맡았다. 40대 여성들은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각종 축제를 활용한 티켓다방에 참여했다. 30대는 활동 시점이 20대에 성 서비스 영역에서 시작을 하여 애인대행이나 마사지 등으로 수도권에서 활동했다. [189]

 

5. 성 서비스에서의 경합과 생존 전략

전반적으로 이들이 참여한 업종의 특징은 사창가나 집창촌을 이루 는 전형적인 성매매 형식과 다르게 업소가 법적 규제를 피할 수 있는 티켓다방, 노래방 등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또한 각종 지역사회 축제 장, 대규모 공사장, 항구, 농촌의 오일장 부근 등에서 성업하고 있었다 [191]

서울에서는 유사 성행위를 내건 자유 업종으로서 성 상품화 시장인 노래방, 인터넷 애인대행, 스포츠 마사지 등의 유형을 보였으며 이들 이 탈북인이라는 정체성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 반해 지역사회에서 는 탈북여성의 정체성을 앞장세워 전략화하는 티켓다방을 중심으로 성행하며 기존 성매매 고용주와 성 판매자와의 관계로부터 차별 점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일반 성매매의 시장에서와 달리 여성들을 관리하 는 포주와 보호해 주는 남성들이 없으며, 고용주에게 하루 3만 원을 입금하는 계약으로 ‘빚’이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를 띤다. 또한 자신의 나이, 이름, 고향 등 개인정보는 감추면서도 탈북인이란 정체 성은 강조하였다. 하지만 성 구매 남성들을 고객으로 유치하는 과정에 서 지역 주민들과 혹은 근처의 동종 업종에서 일하는 중국 여성 혹은 조선족들과도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192]

30대 여성들은 마사지와 애인대행으로 일과 주거를 서울에서 하며 자신의 ‘일’ 건수에 따라 돈을 벌고 있다. 40대 초반의 여성들은 지역의 티켓다방으로 옮겨 고객을 유치하며 다방주인에게 하루 3만 원을 입금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40대 후반 의 여성들은 성 서비스 영역에 활동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업소주인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그렇지 만 이들 역시 성매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일을 하기는 어려웠고 현장 에서 인력이 모자랄 때 아가씨 대신 충원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5]

 

6. 나가며

북한에서 성 매매에 관한 인식이나 경험이 없던 이들이 성 서비스 영역에 참여할 때는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겠다는 목표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이들은 물리적 경계를 넘어 한국에 왔으며, 집안을 책임질 딸로서, 아이의 엄마로서 역할을 수행하 기 위해 규범적 경계 또한 넘었다. 북한이나 중국에 남은 원거리 가족들 의 기대가 있는 경우 자신의 노동을 통해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 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탈북여성들의 경제적 어려움에는 절대적 빈곤뿐 아니라 가족을 위해 희생하려는 규범화된 가부장문화가 결합되어 있었다. 이들은 목숨 건 탈북과정에서 인신매매와 도주, 탈 중국의 사선을 넘는 경험과 한국 사회에서 금기 영역인 성 서비스 활동 은 자신의 몸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생존 방식 그 자체였다. 참여자들은 일상에서 우선순위를 매김에 있어 그 보람과 의미는 가족을 위한 희생 적 실천이었다 [197]

전반적으로 북에 남은 가족과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희생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전략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 이후 변화한 북한은 자본화가 진행 중이며 사적 이익을 앞세운 개인들이 출현하게 되었지만 여성희생으로 남성을 떠받 드는 가부장적 질서가 해체되지 않고 가족규범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 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 한국이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보였던 가부장 질서하에서 요구되고 실천된 여성 희생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8]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북여성들에게 나타난 가족 속에서의 규범에 따른 희생적 수행은 북한 여성이라는 특수성보다는 한국 사회가 경험한 과거의 가족문화와 겹쳐진다. 산업 사회로 진행 과정에서 딸이기에 아들을 위해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던 남성 중심 한국 사회의 과거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