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도덕형이상학에서 순수실천이성비판으로 이행
자유 개념은 의지의 자율을 설명하는 열쇠
의지는 생명체들이 이성적인 한에서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원인성이다.(따라서 1. 이성적인 생명체들의, 2. 속성이며, 3. 원인성이다.) 자유는 이 원인성이(즉 의지가) 생명체들을 규정하는 외부 원인들(자연적 경향성)에 얽매이지 않고 작용할 수 있을 때 갖는 속성일 것이다.(따라서 자유로운 의지와 자유롭지 않은 의지가 존재할 것임.) 마찬가지로 자연필연성은 외부의 낯선 원인의 영향으로 활동하게 되어 있는 존재자들, 즉 이성이 없는 모든 존재자가 지닌 원인성의 속성이다.(자연 법칙이자,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연적 경향성으로 작용하는 것, 또한 자연의 여러 원리들, 물리 법칙, 생물학적, 심리학적 원리 등.)
자유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소극적이이서(의지라는 생명체의 원인성이 외부 원인에 의해 얽매이는가? 아니면 얽매이지 않는가?) 자유의 본질을 통찰하기에는 비생산적이다. 그렇지만 이 설명에서 자유의 적극적 개념, , 즉 한 층 더 풍성하고도 생산력 있는 개념이 뒤따라 나온다. 원인성 개념은 법칙(인과관계)에 관한 개념을 수반하며, 바로 이 법칙에 따라서 우리가 원인이라고 명명하는 것으로 다른 어떤 것, 즉 결과가 정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비록 그것이 자연법칙에 따르는 의지의 속성은 아니더라도, 전혀 무법칙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것이긴 하지만 불변적 법칙에 따르는 원인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자유의지는 불합리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필연성은 작용하는 원인이 지닌 타율성이었다.(자연에 일어나는 것 모두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작동하며, 각각의 결과는 계속해서 앞서 있는 다른 원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일어남을 의미한다. 즉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스스로가 자기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다른 원인에 영향을 받아 일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작용하는 원인 자체가 이미 자기 외부의 또 다른 원인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작용 결과는 모두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는 원인을 원인성이 되도록 규정한다'는 법칙에 따라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의지의 자유는 자율, 즉 스스로에게 법칙이 되는 의지의 속성 외에 다른 무엇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의지는 모든 행위에서 스스로에게 법칙이 된다'는 명제는 곧 '스스로를 또한 보편적 법칙으로서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준칙에 따라서도 결코 행위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나타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정언명령의 정식이고 도덕성의 원리다. 따라서 자유의지와 도덕법칙 아래 놓여 있는 의지는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의 자유가 전제된다면, 도덕성과 그 원리는 이 개념을 단순히 분석만 하면 뒤따라 나온다. 그런데도 이 원리, 즉 '단적으로 선한 의지란 그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으로 여겨지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자기 안에 포함할 수 있는 의지다'(단적으로 선한 의지가 있다면, 이런 의지는 자신이 세운 준칙이 이미 그 자체로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하는 경우에 관계하는 의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라는 것은 항시 종합명제다.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개념을 분석한다고 해서 준칙의 저 속성이 발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종합명제는 이들 두 인식이 모두 관련될 수 있는 제3자와 연결되어 서로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유의 적극적 개념이 바로 이 제3자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자연적 원인들의 경우에서처럼 감성계의 성질일 수는 없다. (이 개념 안에서는 원인으로서 어떤 것에 관한 개념이 결과로서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 서로 만난다) 자유가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우리가 그것에 관해 이념을 아프리오리하게 갖고 있는 이와 같은 제3자, 이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여기서 곧바로 제시할 수 없다. 또 순수실천이성에서 자유 개념의 연역도 그리고 이와 함께 정언명령이 가능성도 이해되도록 할 수 없다. 여전히 조금 준비가 필요하다.
칸트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도덕법칙의 연역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역’은 최상위 도덕성의 원리를 불완전하게 이성적인 존재자들에 대해 정당화하고자 한다.14) 여기서 연역은 도덕성의 원리 – 정언명령 – 가 선험적 종합명제이기 때문에 요구된다. 이 종합명제는 그것의 “두 인식이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는 세 번째 인식과 연결되어 서로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정초 4:447). 칸트는 더 나아가 세 번째 인식의 확인과 함께 우리는 우리 안의 자유의 증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고, 그와 함께 정언명령의 가능성이 연역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정초 같은 곳). 1-3절 에서 그는 “상호성 논제”(Reciprocity Thesis) 라고 부를 수 있는 것 , 즉 “자유의지와 도덕법칙 아래에서의 의지는 동일하다”에 대한 간략한 논증을 제공한다(정초 같은 곳).15)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어떤 더 나아간 “준비 작업”이 그 논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4절에서 자유가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속성으로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예비적” 논증을 제공한다. 최소한 도덕형이상학에 의해 실행된 것으로서 이 초반부에서의 연역은 두 단계로 진행하며, 각 단계는 다음 원리들을 상호적으로 설립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준비 논제(PT): 이성적 존재자는 자유롭다. (자유로의 논증)
(1) 만약 한 존재자가 이성적이라면, 그 존재자는 오직 자유의 이념 아래에서만 행위할 수 있다.
(2) 만약 한 존재자가 오직 자유의 이념 아래에서만 행위할 수 있다면, 그 존재자는 실제로 자유롭다(실천적 측면에서).
(3) 만약 한 존재자가 이성적이라면, 그 존재자는 실제로 자유롭다(PT[자유로의 논증]).
(4) 만약 한 존재자가 실제로 자유롭다면, 그 존재자는 도덕법칙에 종속 된다(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 (RT [자유로부터의 논증]).
(5) 만약 한 존재자가 이성적이라면, 그 존재자는 도덕법칙에 종속된다.
(6)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성적인 존재자들이다.
(7)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도덕법칙에 종속된다.
(8) 우리는 불완전하게 이성적인 존재자들이므로, 우리는 정언명령에 종속된다.
명제 (1)과 (2)는 4절에서(정초 4:448) 강력하게 옹호되고, 그것들이 결합되어 PT를 표현하는 (3)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entail). (4)는 가정상 1-3절 에서 설립된 RT이다. (5)는 (3)과 (4)로부터 도출된다. (6)은 꽤 직관적으로 참인 것 같고, 칸트는 (6)을 우리에 관한 사실적 전제로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7)은 (5)와 (6)으로부터 나온다(정초 4:449). (8)은 (7)로부터 도출된다. 왜냐하면 칸트에게서 도덕적 “당위”(ought)(즉 정언명령)는 특별히 불완전하게 이성적인 존재자들에게 제출된, 도덕성에 대한 선험적이고 종합적이며 이성적인 원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정초 4:447, 449, 454이하). 우리 인간들은 도덕성의 원리에 복종하기 위한 우리의 훌륭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를 따르는 것에 실패할 수 있다. 2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 지닌 속성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또한 이성적 존재자 모두에게 바로 이 자유를 부여할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우리 의지에 자유를 귀속시키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든 충분하지 못하다. 도덕성은 오직 이성적 존재자를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만 법칙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도 타당해야만 하고, 오로지 자유의 속성에서만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도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지닌 속성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인간 본성에 관한 경험으로 추정되는 어떤 것에서 자유를 밝혀내려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비록 이와 같은 것은 또한 단적으로 불가능하며, 오로지 아프리오리하게 밝혀질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자유가 이성적이면서 의지를 부여받은 존재자 일반의 활동에 속하는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제야말로 말하는데 자유의 이념 아래서만 행위를 할 수 있는 각 존재자는 바로 그 때문에 실천적 견지에서 볼 때 정말로 자유롭다. 다시 말해서 그런 존재자에게는 자유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모든 법칙이 타당하다. 마치 이러한 존재자의 의지가 그 자체로 뿐만 아니라 이론철학에서도 타당하게 자유롭다고 선언되기라도 한듯이 말이다. 이제야말로 주장하는 데 우리는 의지를 지닌 각 이성적 존재자에게 자유의 이념을 반드시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이 이념 아래서만 이성적 존재자는 행위를 한다. <우리는 바로 그와 같은 존재자에게 실천적 이성을, 즉 자기 객관에 관여해 원인성을 갖는 이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판단과 관련해 다른 곳에서 지도를 받는 이성을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주체는 판단력의 규정을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어떤 충돌에 돌리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기 자신을 낯선 외부의 영향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원리를 창시하는 자로 <간주해야 한다.> 이성은 실천적 이성 내지는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로서, 자기 자신이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즉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자유의 이념 아래서만 자신의 의지일 수 있다.> 따라서 <실천적 견지에서 볼 때, 그 의지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동반되어야 한다.> 3
도덕성의 이념에 따라다니는 관심에 대해
우리는 도덕성의 확정적 개념에 이르고자 결국 자유의 이념까지 소급해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자유 이념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인간 본성 안에서도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도무지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우리가 알게 된 것이라곤 다음과 같은 것뿐이다. 즉 우리가 어떤 존재자를 이성적인 것으로 그리고 행위와 관련하여 자기 원인성의 의식을 지닌, 이른바 의지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자유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이성과 의지를 지닌 존재자 모두에게는 자기 자유라는 이념 아래서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속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음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이 이념을 전제하는 것에서 또한 행위의 법칙에 대한 의식도 뒤따라 나왔다. 그것은 행위의 주관적 원칙, 즉 준칙이 언제나 객관적으로도, 다시 말해서 보편적으로도 원칙으로서 타당하며, 따라서 우리 자신이 보편적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채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도대체 내가 왜 이 원리에 따라야 하며, 더욱이 이성적 존재자 일반으로서, 따라서 또한 이성을 부여받은 다른 모든 존재자도 그래야만 하는가? 인정하건대, 나를 이렇게 하도록 내모는 것은 결코 그 어떤 이해관심이 아니다. 이해관심은 그 어떤 정언명령도 제공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필히 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같은 당위는 원래 이성이 이성적 존재자에게서 방해를 받지 않고 실천적일 경우, 그런 조건 아래서 이들 존재자 모두에게 타당한 의욕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다른 종류의 동기인 감성에 자극받게 되어 이성이 자기 혼자만으로 활동하는 상황이 줄곧 일어나지 않는 존재자에게는 행위가 지닌 이와 같은 필연성이라는 것은 단지 당위라고 할 뿐이며 그리고 이 주관적 필연성은 객관적 필연성과 구별된다.
따라서 우리는 원래 자유의 이념에서 도덕법칙을, 즉 의지의 자율 원리 자체를 단지 전제할 뿐, 그것의 실재성이나 객관적 필연성을 자체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설혹 우리가 최소한 그 진정한 원리를 다른 어딘가에서 행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게 규정하여 이를 통해 아주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원리에 따라야 할 타당성 및 실천적 필연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더 이상 진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묻는 사람에게 결코 어떤 만족스러운 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물음이란 다름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도대체 왜 법칙으로서 우리의 준칙이 지니는 보편타당성이 우리 행위를 제한하는 조건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부여하는 가치를, 즉 너무나 대단해서, 어디에도 더 이상 높은 관심이 있을 수 없는 이 가치를 우리는 어디에 근거 지어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이 오로지 이런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인격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믿고, 그에 반해서 유쾌한 상태나 불쾌한 상태가 지니는 가치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데, 이 같은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말인가? [실상 우리는 이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어떤 만족스러운 답도 줄 수 없다]
인격적 특성이 [쾌나 불쾌와 같은] 상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전혀 없는데, 혹시 이성이 관여하여 이 상태를 나누는 일이 있을 경우, 이에 대비하여 다만 이 인격적 특성이 우리에게 이 상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우리는 이 인격적 특성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행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비록 이 행복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어떤 동인이 없더라도, 그것이 그 자체로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사실상 이 판단은 (우리가 자유의 이념을 통해 모든 경험적 관심을 분리해낼 때) 이미 전제된 도덕법칙의 중요성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태에 가치를 창출해주는 것을 모두 잃어버리더라도 이를 보상해줄 수 있는 가치를 오직 우리 인격 안에서만 찾아내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경험적 관심에서 분리시켜내야 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을 행위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여기면서도 어떤 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따라서 도덕법칙이 어디에서 구속력을 가져오는지에 관해서는 우리는 아직 이와 같은 방식으로 통찰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일종의 순환이 존재함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1)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목적의 질서에서 도덕법칙 아래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작용하는 원인들의 질서에서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자로 여기고, 바로 그다음 우리에게 2) 의지의 자유를 부여했기에 이 법칙에 예속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의지의 자유와 자기 법칙 수립은 둘 다 자율이라서 상호 교환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4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바로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을 설명하거나 근거를 제공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개념은 동일 대상에 관한 서로 차이 나는 표상들을 기껏해야 그저 논리적인 의도에서 단 하나의 개념에 (마치 값이 같은 여러 분수를 기약분수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이르게 할 때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5
도덕형이상학에 내재하는 이러한 교조적 절차는 즉시 정초 3장 초반에 그 내적인 결점과 한계를 드러낸다. 모든 이성적이고 육체를 가진 존재자들에 대해 타당한 순수한 이성법칙에 대한 직접적인 증명의 형식으로 (즉, 두터운 연역으로) 정언명령을 근거지우려한 그 정교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형식에서 도덕형이상학은 그것이 발생시키는 “일종의 순환” (정초 4:450)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19) 비록 이러한 순환의 정확한 본성과 위치에 대해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칸트는 이를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petitio principii)와 동일시하는 것 같다. 이것은 “증명되어야 할 명제의 사실상의 생략”이 있을 때 발생하는 순환이다.20) 칸트는, 이러한 경우에 나는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걸해”(peto)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만약 우리가 “우연적인 모든 것은 시초를 갖는다” 21)는 명제에 근거하여 하나의 필연적 존재자가 현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앞의 명제를 “그것이 여전히 하나의 증명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확실한 명제인 것처럼 하나의 증명 근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22) 그 경우에 우리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명제를, 그것이 “아직 증명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23) 칸트가 도덕성의 연역의 문맥에서 이러한 의미의 순환을 말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거기서 지금까지 설립된 모든 것은, 한 행위자는, 오직 그가 도덕법칙에 종속되는 그 경우에만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쌍조건적(biconditional) 주장이다), 우리는 그 순환의 구조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다음처럼 주장한다면 정초 3장의 도덕형이상학 부분에서 수행된 두터운 연역에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가 발생한다:
M ↔ F
F
-------------
∴ M
여기서 M ↔ F가 설립되었다 할지라도, F는 ‘직접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며, 설립되지 않았다(‘F’는 하나의 행위자가 자유의지를 갖는다는 명제를 나타내는 것이고, ‘M’은 그 행위자가 도덕법칙에 종속한다는 명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자). 특별히, 도덕형이상학이 선결문제 없이 도덕성을 필함할 만큼 충분히 강한 우리 안의 자유의 실재성을 제공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칸트의 명백한 판정은 제공할 수 없다는 것, 즉 그 시도는 어떤 특단의 조치(물론 순수이성 능력의 비판적 검토의 한계 내에서)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일 거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 불행한 결과는 도덕형이상학에서 오직 분석의 방법과 그와 연관된 분석적 통찰들에만 배타적으로 의존한 기획의 한계에 기인한다. 초월적 탐구만이 제공할 수 있는 핵심적인 수단(resource)을 결여함으로써, 분석과 분석적 절차의 작동에 관해서만 강조하는 도덕형이상학은 불행히도 인간 존재자들에게, 즉 이성만이 아니라 특정한 감성 방식 또한 가지고 있는 존재자들에게 정언명령이 적용된다는 정언명령의 가능성 문제를 푸는 것에 실패한다. 6
아마도 이러한 우울한 상황을 예상하고서, 칸트는 분명히 오직 순수실천이성비판으로의 이행에 의해서만 우리가 도덕법칙의 타당성을 안전하게 설립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서 적절하게 도덕성의 근거를 세우려는 목적과 관련한 교조적 접근 –그리고 또 회의적 접근 역시– 에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이것은 칸트의 종합적 방법이 그것의 가장 실질적인(substantial) 표현을 얻는 경기장이다. 이리하여 ‘경험’에 대항하여 지속된 칸트의 싸움은 이 이행에서 최고조에 이른다.24) 경험에 대한 거부(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의 오용에 대한 거부)는, 칸트가 순수실천이성 안에서 도덕성에 대한 주장들을 그것의 선험적 원천으로 거슬러 추적함으로써 마침내 완성된다. 우리가 3장 두 번째 부분에서 발견하는 자유를 통한 도덕법칙의 연역은, 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 순수이성이 어떠한 경험적인 것에도 의존함 없이 완전히 선험적인 방식으로 도덕성을 설립할 수 있게 할 증명(Beweis)을 제공하고자 한다. 칸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자유의 연역이 그것의 선험적 원천에 대한, 즉 순수실천이성이라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순수실천이성비판’이라는 명칭이 붙는다.25) (...) 엄격한 의미에서 자유는 그것이 무엇이든 어떠한 감성적 조건과도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것과 관련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적 실천들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조건 짓는 방식에서만 그렇다. 환언하면 자유는 초월적인 것이어야 한다. 자유의 개념 그리고 도덕성의 개념 또한 완전히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성 내부의 원천으로 거슬러 추적되어야 한다.27) 문제의 핵심적 수단-순수실천이성의 능력과 그에 따른 현상과 물자체 사이의 구분-은 오직 순수실천이성비판에 의해서만 제공된다. 7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출구가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자유를 통해서 자신을 아프리오리하게 작용하는 원인으로 생각할 때, 우리 행위들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을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Anwesenheit 결과로서 표상Vorstellung할 때와는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은 아닌지, 바로 이 점을 탐구해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순수실천이성비판에서 순환을 제거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자유를 위한 독립적 논증, 어떤 선결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논증을 제공하는 것에 놓여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그런 논증은 감성계와 지성계 사이의 칸트의 구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정초 4:452-3).30) (...) 연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어쨌든 우리는 비순환적인 방식으로, 즉 도덕성으로부터 혹은 그 상호 개념인 자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이성적 본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 까다로운 요구이다. 여기에 포함된 이성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발생시킬 만큼 충분히 강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종속을 발생시킬 만큼 충분히 강해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선결문제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필연적으로 함축할 만큼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8
물론 여기서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 사이의 구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은 이제 우리가 정초 3장에서와 같은 도덕형이상학이라는 좁은 영역을 넘어서서 제대로 자격을 갖춘 순수실천이성비판으로 이행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과 지성을 가진 존재자들로서 우리는 현상계에 속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성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히 선험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념들”(Ideas)을 형성하는 능력이다. 순수한 자기-활동성이라는 이러한 능력은 우리 외부의 사물들에 의한 규정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가정된 우리의 이성 소유는, 우리가 어떤 중요한 측면에서 활동적인(active) 존재자들이므로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성계에 속한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제안한다.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 활동적인 존재자들인가? 우리는 이성을 위해서 믿으며, 이성에 근거하여 행위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활동적이라고 생각한다. 사고와 행위들은 단지 우연적으로 우리에게 발생한다기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 모두에서 우리 이성의 활동성들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우리 안의 이성은 우리를 한낱 촉발된 존재자들의 영역 너머로 보내는 것이다. 활동적인 사유자들이자 행위자들로서 우리는 자연의 수동적이고 규정된 질서와는 전적으로 다른 사물들의 질서에 속해있다 – 우리는 지성계에 속해있다. 그러나 지성계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자유의 이념 아래에서가 아니라면 우리 의지의 인과성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이성적 존재자들로서 우리 자신을 자유롭다고 간주한다. 9
여기에 알아차려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물론 이를 위해 어떤 섬세한 숙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평범한 지성도 자기 방식대로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감정이라고 부르는 판단력의 막연한 구분으로 알아차릴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감관의 표상처럼) 우리의 자의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출현하는 모든 표상은 대상들을 그것들이 우리에게 촉발하는 그대로 인식하도록 제공하며, 이때 대상들 자체가 어떤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표상들과 관련해서는 지성이 이들 표상에 줄곧 덧보탤 수 있는 최대한의 애쓰는 주의와 명료성으로도 현상Erfahrung을 인식하는 데만 이를 뿐 결코 물자체Ding an sich를 인식하는 데는 이를 수 없다. 이 구별이 (아마도 단지 다른 어딘가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래서 동시에 우리가 수동적이게 되는 표상들과 오로지 우리 자신으로부터만 산출해내는, 그래서 동시에 우리의 활동성을 입증하는 표상들, 이들 양자의 주목할 만한 차이를 통해서) 일단 한번 이루어지면, 이내 그로부터 저절로 다음과 같은 것이 귀결된다. 즉 우리는 현상 뒤에 여전히 현상이 아닌 다른 어떤 것, 곧 물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앎은 판단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언어화될 수 있는 것을 뜻하고, 물자체는 판단으로서는 결코 정식화될 수 없는 것이다. '물자체는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는 명제는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자체가 아니다'와 대우명제로 같다. 그리고 이 명제는 결국 '알려질 수 있는 것은 현상이다.'라는 선험적 명제를 뜻한다.) 비록 이런 물자체가 결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고, 언제나 단지 그것들이 우리에게 촉발하는 대로만 알 수 있을 뿐이어서, 우리가 그것들에 더는 가까이 다다갈 수도 없고 그래서 그것들 자체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도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그러나 여기서 칸트는 인식 체계의 '구성'과 '상정'을 다시금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언급으로부터 '물자체는 우리의 감성을 촉발시키는 원인이다.'는 명제가 남는다. 칸트는 이 명제가 논리적 상정을 통해 추론될 수는 있으나 결코 구성될 수는 없기에 물자체에 대한 다른 명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알 수 없음은 '판단으로서 정식화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 '경험을 통해 알려질 수 없음'을 뜻하고 있다. 고로 칸트는 여기서 앎의 기준을 상이한 두 가지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우리는 감성Sinnlichkeit계와 지성Verstand계 사이의 구별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들 가운데 전자는 이러저러한 많은 세계관찰자가 지닌 감성의 상이함에 따라 아주 다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감성계 근저에 놓여 있는 후자는 언제나 동일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조차 인간이 내적 감각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인식에 따라서일지라도, 그것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감히 인식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창조하지 않으며 자신에 대한 개념을 아프리오리하게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얻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내감을 통해서만, 따라서 자기 본성이 드러난 현상이나 자기의식이 촉발되는 방식을 통해서만 정보를 모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여기서 칸트는 의식의 구성가능한 체계로서의 앎을 가리키고 있으며, 따라서 경험할 수 없는 것, 즉 구성할 수 없되 상정할 수만 있는 것은 앎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순수이성비판의 첫 구절과도 잘 조응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 단순한 현상들이 모여 이루어진 자기 자신의 주체가 지닌 이런 성질을 넘어 다른 무언가가 근저에 놓여 있다는 것, 즉 자아를 그 자체가 어떠한 성질의 것이든 필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따라서 단순한 지각과 감각의 수용성 관점에서 볼 때 자아는 감성계에 속해 있지만, 자신 안에서 순수한 활동성일 수 있는 그 점(감관의 촉발에 따라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의식에 이른 것)에서 보면 지성계에 속하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이 지성계에 대해 인간이 더는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출현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결론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측건대, 이 결론은 지극히 평범한 지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 지성도 감관의 대상들 뒤에 언제나 여전히 볼 수 없는 어떤 것이, 즉 스스로 활동하는 어떤 것을 아주 많이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성도 볼 수 없는 이것을 금방 또다시 감성적이게 함으로써, 즉 직관의 대상이 되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그 성질을 변질시켜버린다. 따라서 이로써 이 지성은 조금도 더 현명해지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하나의 능력을 발견한다. 인간은 바로 이 능력으로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하며, 심지어 대상에 따라 촉발되는 한에서 자기 자신과도 구별한다. 이 능력이 바로 이성Vernunft이다. 이 이성은 순수한 자기 활동성으로서 심지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지성조차도 넘어선다. 비록 지성 또한 자기 활동성이어서 감관처럼 사물에서 촉발될 (따라서 수동적일) 때만 생겨나는 단순한 표상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지성은 자기 활동성에서 감성적 표상들을 규칙 아래 가져와 이를 통해 이것들을 그저 하나의 의식 안에 통일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만 창출할 수 있다. 지성은 감성의 이러한 사용 없이는 아무것도 전혀 사유할 수 없다.(따라서 감성의 도움 없이는 지성은 그 무엇도 홀로 사유할 수 없다.) 그에 반해서 이성은 이념Idee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나 순수한 자발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성은 감성이 단지 자신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너머 멀리까지 나아간다.(감성으로부터의 도약, 형이상학을 하나의 운명Geschick으로 보는 관점) 이성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감성계와 지성계를 서로 구별해주고, 이로써 지성 자체에 자신을 제한하도록 미리 확정해주는 것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 때문에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지성적 존재자로서 (따라서 자신의 하위 능력 측면에서가 아니라) 감성계에 속한 자로서가 아니라 지성계에 속한 자로서 여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자는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고찰하고 자기 능력의 사용 법칙을, 결국 모든 자기 행동과 관련된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자는 한 번은 그가 감성계에 속하는 한에서 자연법칙(타율) 아래 놓여 있고, 다른 한 번은 예지계에 속하는 한에서 자연에서 독립되어 경험적이지 않고 단지 이성에만 기초를 두는 법칙 아래 놓여 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따라서 예지계에 속하는 존재자로서 자기 의지의 원인성을 자유 이념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감성계의 규정 원인에서 독립하는 것(이성은 언제나 이와 같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부여해야 한다)이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율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 자유라는 이념과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도덕성의 보편적 원리도 바로 이 자율과 마찬가지로 결합되어 있다. 이 원리가 이념 안에서, 마치 모든 현상의 뒤에 자연법칙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성적 존재자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 기초로 놓여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적 본성, 그리고 또한 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기-이해를 통해, 즉 우리 자신을 지성계의 일원으로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칸트가 앞서 주장했던 바와 같이, 적극적 자유 개념에 의해 제공되었던 세 번째 인식이다. 도덕성의 원리는 종합적이므로, 그 원리의 두 인식들은, 그것들이 모두 발견될 수 있는 세 번째 인식과 결합에 의해 함께 묶여 있어야 한다(정초4:447). 10
초월적 관념론 논제 : 현상들로서의 사물들을 포함하는 감각세계는(왜냐하면 현상들은 단 지 외적 원인들에 의해 촉발되기 때문에), 물자체가 본래 속해 있는 지성계와 다르다.32)
그 학설에 따르면, 감각세계의 일원들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지성계의 일원들은 시간적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 작용인(self-efficient causes)으로서 어떠한 자연적 원인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행위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각을 통해 현상으로 의식한다(정초 4:457).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완전히 시간적으로 규정된 것으로 의식한다. 그러나 초월적 관념론에서는, 현상으로서의 우리 자신 근저에 물자체, 즉 “자기 자체”(self in itself)가 있어야만 하고, 우리는 이 자기자체를 어떠한 감각에도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의식한다(정초 4:451, 457). 더 나아가 이 자기자체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모든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하는” 지성 존재자(혹은 이성)이다(정초 4:452).
핵심적인 이행에서, 칸트는, 내가 나 자신을 이성적 존재로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어떤 다른 원인들에 대해서도 독립된 채, 활동적으로 사유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 때에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자유로운 지성 존재자로 간주해야 한다. 더 나아가 나는 또한 나 자신을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스스로를 어떤 다른 원인들에 대해서도 독립된 채, 자발적으로 행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원인성, 즉 자유의지로 간주해야 한다.
위에서 논의된 것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를 이론적으로 활동적이면서 또한 실천적으로는 자발적인 것으로, 즉 순수한 지성 존재자이자 순수 의지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를 탁월한 이성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천적인 능력에서 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능력에서도 자연세계라는 좁은 영역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자로 간주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지성 존재자이자 순수한 의지로서 나는 지성계에 속한다(정초 4:452, A 682/ B 710 참고). 다시 한 번, 우리는 칸트의 논증이 단지 우리가 예지계의 일원이므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칸트는 우리를 지성 존재자이면서 동시에 자유롭다고 간주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전제 (6)을 지지하기 위한 근거를 구성한다 11
이제 우리가 위에서 제기했던 의혹, 즉 자유에서 자율로, 자율에서 도덕법칙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추론 안에 마치 어떤 은밀한 순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은 제거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마도 단지 도덕법칙을 위하여 자유의 이념을 기초로 삼았지만, 나중에는 다시 자유에서 도덕법칙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따라서 전자의 도덕법칙에 관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이 법칙을 심성이 선한 사람들이 아마도 기꺼이 받아들일, 그렇지만 결코 증명 가능한 명제로 내세울 수 없는 원리를 간청하는 것으로만[정도에서만]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은 제거되었다.(즉 자유의 이념은 단순히 도덕법칙을 위하여 전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자로 생각하면, 우리는 자신을 지성계에 속한 구성원으로 자리하도록 하며(이것은 이성의 역할이다), 의지의 자율성을 그에 뒤따르는 도덕성과 더불어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자유의 이념은 지성계에 속한 실천이성으로부터 산출된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우리를 의무를 부여받은 존재자로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성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지성계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사실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정언명령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을 예지적 존재로서 지성계에 속하는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이 지성계에 속하여 작용하는 원인으로만 생각하며, 자신의 이 원인성을 의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성적 존재자는 또한 자신을 감성계의 일부로 의식하며, 이 감성계 안에서 그의 행위는 저 원인성의 단순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이 원인성에서 나온 가능성을 통찰할 수 없다. 그 대신 감성계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저 행위를 다른 현상, 즉 욕구와 경향성을 통해 규정되는 것으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순전히 지성계의 구성원일 경우에 나의 모든 행위도 순수의지의 자율성 원리에 완전히 합치할 것이다. 순전히 감성세계의 부분으로서 이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와 경향성의 자연법칙에, 따라서 자연의 타율성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전자는 도덕성의 최상 원리에 의거하며, 후자는 행복의 원리에 의거한다) 그러나 지성계는 감성계의 근거를 포함하고, 따라서 감성계 법칙의 근거도 포함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지성계에 속하는) 내 의지와 관련해서 볼 때 직접 법칙을 수립하고, 또 그런 존재로 생각해야만 한다. 바로 이 떄문에 나는 나 자신을 지성적 존재자로서-비록 다른 한편에서는 감성계에 속한 존재자인 것처럼 인식하기도 하지만-지성계의 법칙에 따르는 자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나 자신을 자유의 이념 안에서 법칙 자체를 포함하는 이성의 버칙에 따르는 자로서, 따라서 의지의 자율에 따르는 자로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지성계의 법칙을 나에 대한 명령으로, 이 원리에 합치하는 행위들을 의무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정언명령이 가능해지는데, 이는 자유의 이념이 나를 지성계의 일원이 되게 하며, 내가 그러한 세계의 일원이기만 하다면 내 행위는 모두 언제나 의지의 자율에 합치하겠지만,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을 감성계의 일원으로 보기에 의지의 자율에 합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정언적 당위가 아프리오리한 종합명제를 제시한다. 이는 감성적 욕구에 따라 촉발되는 내 의지를 넘어 거기에 같은 의지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성계에 속해서 순수하고도 그 자체로 실천적인 의지의 이념이 보태져, 바로 이 의지가 감성적 욕구에 따라 촉발되는 의지를 이성에 따르게 하는 데 최상의 조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체적으로는 법칙적인 형식 일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지성 개념이 감성계의 직관에 덧붙여짐으로써 자연의 모든 인식이 근거하는 아프리오리한 종합명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과 대체로 유사하다.
이중 시민권 논제: 우리 인간 존재자들은 지성계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감각 세계의 일 원이기도 하다. 12
평범한 인간이성의 실천적 사용으로도 이 연역이 정당하다는 것이 확실히 보장된다.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가장 지독하게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평소와 달리 이성 사용에 익숙하기만 하다면, 우리가 그에게 의도에서의 정직함이나 선한 준칙의 준수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함과 같은 사례를 보여주면 그리고 동정과 보편적 호의(여기에는 여전히 이익과 안락함에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하다)와 같은 사례로 보여주면, 그 역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악한은 자신의 경향성과 충동 때문에 그와 같은 것을 자신 안에서 잘 실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동시에 자기를 힘들게 하는 이런 경향성들에서 벗어나 자유롭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이를 통해 감성의 충동에서 자유로운 의지로 감성 영역에서 갖는 자신의 욕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물들의 질서 안으로 자신을 옮겨 놓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저 바람에서는 어떤 욕구 만족도, 자신의 실제적 경향성이나 아니면 상상적 경향성이 흡족해할 만한 어떤 만족스러운 상태도 기대할 수 없고, (그럴 경우 자신에게 이런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이념조차 탁월성을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단지 자기 인격의 더 큰 내면적 가치만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성계의 구성원이란 처지로 옮겨가게 되면 그는 자신이 더 선한 인격이 된다고 믿는다. 자유의 이념, 즉 감성계의 규정하는 원인들에서 독립한다는 이 이념이 자신을 그와 같은 곳으로 어쩔 수 없이 옮겨가도록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런 처지에서 인간은 자신의 선의지를 의식한다. 이 선의지는 자신이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감성계의 구성원인 자신의 악한 의지에 법칙을 형성해주는 것으로, 그는 이 법칙을 위반하면서도 그것의 위엄은 인식한다. 따라서 도덕적 당위는 지성계의 일원으로서 그 자신이 갖는 필연적 의욕작용이며, 이는 그가 스스로를 동시에 단지 감성계 구성원으로 간주하는 한에서는 자신에게 당위로 생각된다.
모든 실천철학의 궁극적 한계에 대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거해서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판단은 비록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났어야 할 행위 자체에 대해 내려지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자유는 결코 경험적 개념이 아니며 또한 경험적 개념일 수도 없다. 비록 경험이 자유를 전제하는 것 아래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도록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이 자유 개념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일어나는 것 모두는 자연법칙에 따라 불가피하게 규정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필연적인데, 이 자연필연성 역시 결코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이 개념은 필연성 개념, 즉 아프리오리한 인식 개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 관한 이 개념은 경험으로 확증된다. 경험이, 즉 보편적 법칙에 따라 함께 연결된 감관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야 한다면,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불가피하게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는 단지 이성의 이념일 뿐이며, 이것의 객관적 실재성 자체가 의심스러운 데 반해, 자연은 지성 개념으로서 경험의 실례들에서 자신의 실재성을 증명하고, 또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
이로부터 이성의 변증론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의지와 관련해서 보면, 의지에 부가된 자유는 자연필연성과 모순 관계인 것처럼 보이고, 이 갈림길에서 이성은 사변적 의도에서는 자연필연성의 길을 자유의 길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고 쓸모 있는 것으로 발견한다.(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결론은 '이성의 이율배반'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실천적 의도에서는 자유의 좁은 길이야말로 우리 행위에서 자기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어서, 자유를 부정하려는 궤변은 아주 평범한 인간 이성에서도, 가장 치밀한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철학은 동일한 인간의 행위에서 자유와 자연필연성 사이에 참된 의미에서 모순이라고는 아예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은 자유 개념과 마찬가지로 자연 개념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비록 우리가 결코 파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외관상의 모순만큼은 최소한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제거해야 한다. 심지어 자유에 관한 생각이 그 자체로 모순된다면, 또는 그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자연에 모순된다면, 자유는 자연필연성에 부딪혀 철저하게 포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주체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말할 때, 이때 이 행위를 두고 자기 자신이 자연법칙에 예속되어 있다고 간주할 때와 동일한 의미에서나 정확히 동일한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하는 것은 사변철학의 불가피한 과제다. 즉 사변철학은 바로 이 모순 때문에 비롯되는 자신의 혼동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인함을, 즉 인간을 자유롭다고 할 때, 그것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다고 여길 때와는 다른 의미와 다른 관계에서 인간을 생각한다는 사실에 기인함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철학은 이들 양자가 동일한 주체 안에서 너무나 잘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한 이념을 가지고 이성에 부담을 지워야 하는지에 관해서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이 이념이 충분히 입증된 다른 이념과 모순 없이 통일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이성이 자신의 이론적 사용에서 몹시 어려운 지경에 처하도록 만드는 일거리로 우리를 밀어넣게 될 것이다.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는 오로지 사변철학에만 부과되는데, 이는 실천철학에 자유로운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따라서 외관상 충돌을 제거할지, 아니면 무관심한 채 내버려둘지, 그것은 철학자의 임의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관심한 채 내버려두면 그에 관한 이론은 무주물bonum vacans(텅 빈 재산, '어느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은 일종의 재산')이 될 터이며, 운명론자는 이를 당연하게 점유할 수 있게 되어 모든 도덕을 그것이 자격도 없이 차지해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서 몰아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실천철학의 한계가 시작된다고 우리는 아직 말할 수는 없다. 이 분쟁을 조정하는 것은 실천철학의 몫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실천철학은 사변이성에 그가 이론적 문제에서 스스로 말려든 불일치를 끝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천철학이 이렇게 하는 것은 실천이성이 그 자신이 경작하려고 한 땅을 분쟁의 땅으로 만들 수도 있을 외부 공격에 평온함과 안전함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평범한 인간 이성조차 의지의 자유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단순히 주관적으로 규정하는 원인에서 이성이 독립해 있음을 의식하고 이를 승인함을 전제하는 데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이 경우 이들 원인(즉 단순히 주관적으로 규정하는 원인)은 단지 감각에만 속하고, 따라서 일반적으로 감성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 명칭 아래에 속하는 것들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예지적 존재로 여기는 인간은 이로써 자신을 사물들의 다른 질서에 옮겨놓으며, 그래서 완전히 다른 종류인 규정근거와 관계를 맺는다. 물론 이는 인간이 자신을 감성계 안의 현상처럼 (실제로 그가 그렇기도 하지만) 지각해서 자신의 원인성을 자연 법칙에 따른 외부 규정에 종속시키는 경우와 달리, 그가 자기 의지를 간직하는 예지적 존재, 즉 원인성을 갖춘 예지적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다. 그런데 곧 그는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고, 아니 심지어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상 안의 사물(감성계에 속하는 사물)이 어떤 법칙 아래 있고, 바로 그와 동일한 것이 사물 자체 또는 존재자 자체일 경우, 이 법칙에서 독립해 있다는 것이 조금도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이렇게 이중적 방식으로 표상하고 사유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전자와 관련해서는 자기 자신을 감관을 통해서 촉발되는 대상으로 의식한다는 점에, 후자와 관련해서는 자기 자신을 예지적 존재, 즉 이성 사용에서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으로 (따라서 지성계에 속하는 것으로) 의식한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초월적 관념론 학설은, 잘 알려진 바대로, 현상들이 단순히 물자체와 다르다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의 현시라는 점 또한 주장한다.33) 현상계(감각 세계)는 시공간적이고 인과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면 사물들을 지각할 수 없는 존재자들에게 예지계(지성계)가 표현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초월적 관념론 논제는 부가적으로, 지성계는 감각 세계의 법칙의 근거를 포함한다는 점을 주장한다(정초 4:453). 칸트 자신이 쓰고 있듯이, “이성은 단순히 현상에만 속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사물 그 자체의 성질에 종속시킨다”(정초 4:461). 비록 우리가 ‘온전한 인격’ 으로서 두 세계에 동시에 거주할 수 있다할지라도, 감성계와 지성계 사이의 영향에는 어떤 종류의 비대칭성이 있다. 즉, “감성계는 초감성계를 규정 할 수 없”지만 초감성계는 감성계를 규정할 수 있다(판단력비판 5:195). 그러므로 우리의 감성적 본성은, 초감성계가 “자연 세계에 흔적들을(즉, 결과들을) 남길 수 있”는 것처럼, 자유의 인과성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같은 곳). 이성의 법칙은 바로 지성계를 지배하는 저 자유의 인과성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성의 법칙, 즉 순수 의지의 법칙은 감각들에 의해 촉발된 의지 (즉, 감성적 의지)의 법칙의 근거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상호성 논제가 면밀히 보여준 바와 같이, 순수 의지들로서 우리는 세계 내에서의 우리의 행위들을 지도할 수 있는 법칙들을 제정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
비대칭성 논제: 순수 의지에 의해 제정된 이성 법칙은 감성적 의지의 근거이다
이성 법칙은, 그 법칙이 감성적 의지가 따르는 규범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감성적 의지의 근거여야 한다. 이성 법칙은 감성적 의지에게, 그 법칙, 즉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법칙에 근거하여 행위할 이유, 모든 다른 이유들보다 중요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고 지시규정한다. 그 때에, 순수 의지는 촉발된 의지를 위해 순수실천이성으로 봉사해야 한다. 14
여기에서 다음의 상황이 나타난다. 즉 인간은 자신을 단지 욕구나 경향성에 속하는 것은 아예 고려하지 않는 의지를 지닌 존재로 자부하며, 또한 이들에 맞서 모든 욕망이나 감각적 자극을 뒤로 밀쳐놓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 행위를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심지어 필연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러한 행위의 원인성은 예지적 존재로서 인간 안에 놓여 있으며, 예지계의 원리에 따르는 작용과 행위의 법칙 안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예지계에 관해서 인간은 그곳에서는 오로지 이성이, 더군다나 감성에서 독립되어 있는 순수이성만이 법칙을 부과한다는 것 외에 더는 아는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인간 자신은 단지 예지적 존재로서만 본래적 자기이므로 (그에 반해 [단순한] 인간은 본래적 자기 자신이 나타나 있는 그저 현상에 불과하므로) 저 법칙은 그에게 직접적이고 정언적으로 관계한다. 그래서 경향성과 충동이 (따라서 감성계의 전체 본성이) 자극하는 것이 무엇이든, 예지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닌 의욕작용의 법칙에 어떤 훼손도 일으킬 수 없다. 심지어 [예지적 존재로서] 그는 이런 경향성이나 충동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며, 이것들을 자신의 본래적 자기, 즉 자기의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아마도 이들 경향성과 충동이 자신의 준칙에 영향을 미쳐 의지의 이성 법칙에 손실을 주는 것을 용인하게 되면, 그는 이들에 대해 보여준 관대함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실천이성이 지성계 안으로 사유해 들어간다고 해서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전혀 없겠지만, 안으로 직관해 들어가려고 하거나 감각해 들어가려고 한다면 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전자는 의지를 규정하는 데 이성에 어떤 법칙도 제공하지 않는 감성계와 관련해서는 소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일 뿐이다. 다만 이것이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되는 경우는 소극적 규정에 해당하는 저 자유가 동시에 (적극적인) 능력과 결합되는, 심지어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이성의 원인성과도 결합되는 점에서뿐이다. 물론 이 능력은 행위의 원리가 이성의 원인성이 지닌 본질적 속성에, 즉 준칙이 법칙으로서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조건에 합치하도록 행위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실천이성이 의지의 객관, 즉 지성계에서 동인을 가져오면 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되며,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무엇에 대해 월권을 행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성계라는 개념은 이성이 자신을 실천적인 것으로 사유하기 위해 스스로를 현상들 바깥에서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일 뿐이다. 만약 감성의 영향이 인간에게 결정적이라면, 이성이 자기 자신을 실천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예지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의식함이, 따라서 이성적이면서도 이성을 통해 활동하는 원인으로, 즉 자유롭게 작용하는 원인으로 의식함이 부인되어서는 안 된다면, 이성이 실천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물론 이 생각은 감성계에 적용되는 자연 메커니즘과는 다른 질서와 입법의 이념을 가져오고 예지계(즉 물자체로서 이성적 존재자 전체)의 개념을 필연적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 최소한의 월권행위도, 즉 오직 이념의 형식적 조건에 따른다는, 다시 말해서 의지의 준칙이 법칙으로 [지녀야 할] 보편성에 따른다는, 따라서 오로지 의지의 자유와만 성립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율에 합치하도록 생각하는 것, 그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월권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객관에 규정을 받는 법칙들은 모두 자연법칙들에만 해당되고 또 감성계에만 적용될 수 있는 타율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므로 감각 세계와 지성계 양자 모두의 일원으로서, 즉 부분적으로는 감각적이고 부분적으로 지성적인 존재자로서 우리는 정언명령에 종속된다.
모든 조건이 그대로라면(동일하다면), 이것은 (8)이 실제로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주 간결하게 말해서, 이것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한 칸트의 답변이다: 어떻게 정언명령이 가능한가? 우리 인간은, 우리 각자가 부분적으로 순수한 존재자이고(순수 의지의 관점에서) 부분적으로는 감각적 존재자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정언명령에 종속된다. 우리 안의 순수 의지의 현존 때문에 우리는 항상 도덕법칙의 통치 아래에 있으며, 도덕법칙은 다름 아닌 우리 안의 순수 의지의 산물이다. 반대로, 촉발된 의지의 현존 때문에, 우리는 도덕법칙에 의해 제공된 동기들(incentives)에 따라 행위하는 것에 실 패할 수 있다.34) 비록 한 사람이 아무리 비도덕적일 수 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도덕법칙의 원천을, 즉 그 안에 있는 순수 의지를 파괴할 수는 없다(정초 4:454, 종교 6:31-32). 우리 안의 이러한 이중적 본성 때문에, 이성적인 동기들과 감각적인 동기들은 항상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덕성 또는 그것의 결여는, “하나를 다른 하나의 조건으로 만드는” 문제이다(종교 6:31). 우리가 감각적 동기들을 이성적인 동기들에 복종시킬 때, 그 때 우리는 도덕적이다. 역으로, 우리는 우리가 이성적 동기들과 감각적 동기들 사이의 종속의 질서를 역전시킬 때 비도덕적이다(같은 곳). 이 극적인 이행에서 칸트는, 가장 사악한 악당조차도 결코 도덕법칙의 권위를 반박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연역의 정당성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제시한다(정초 4:454, 종교 같은 곳). 그 악당은, 비록 도덕법칙이 감각적 동기들의 대항에 의해 압도되었다 할지라도, 정확히 그의 순수 의지 안에 도덕 법칙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법칙의 힘을 쉽게 인정한다. 15
선험적 종합명제로서 정언명령의 가능성은, 한편으로는 도덕법칙의 지성적 기원을,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에 대한 우리의 종속을 결합시킴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선험적 종합 인식을 위해 지성의 범주들과 감성 적 직관을 결합시켜야 하고, 그것을 위해 초월적 도식이 요구되었던 것처 럼, 여기서 칸트는 어떤 제 삼의 것(tertium quid), 즉 전적으로 이종적인 지성적 의지와 감성적 의지를 결합시킬 수 있는 어떤 중간물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자기에 대해 적용되는 감성계와 지성계의 구분이 그런 매개물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지성계의 일원이라는 점. 나는 하나의 온전한 인격이며, 이성과 감각들의 완전한, 이음매가 없는 결합이지만, 오로지 하나의 순수 의지로서 나는 오직 지성계만의 일원일 것이다. 환언하면, 순수 의지로서 나는 지성계와 동질적(homogeneous)이지만, 감성을 가진 한 인격으로서 나는 감성계와 동질적이다. 만약 한 인간 인격이 오직 지성계의 일원이기만 하다면, 그의 의지는 도덕법칙과 완전히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성계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감성계의 일원이기도 하므로, 그의 의지는 감각적 조건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온전한 인격의 원천으로서 그에게 적용되는 ‘당위’인 정언명령에 종속될 것이다.35) 16
그러나 순수이성이 어떻게 실천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감행한다면, 이는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와 완전히 동일한 경우로서, 이성은 그러자마자 곧 자신의 모든 한계를 넘어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가능한 경험 안에서 해당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는 단순한 이념으로 자연법칙에 따라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것의 객관적 실재성을 제시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가능한 경험 안에서 제시할 수 없다. 자유는 하나의 의지를, 즉 단순한 욕구의 능력과는 여전히 다른 능력(이른바 예지적 존재로서, 따라서 자연적 본능에서 독립해 이성의 버칙에 따라 행하도록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의식한다고 믿는 존재자 안에서 이성이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것으로만 타당할 뿐이다. 그런데 <자연법칙에 따른 규정이 멈추는 곳에서는 모든 설명도 멈추게 된다. 오직 남아 있는 일이라곤 변호하는 것 뿐이다.> 즉 거기에는 사물들의 본질 안으로 들어가 더 깊이 꿰둟어보기라도 한 듯 주장하는, 그래서 자유는 불가능하다고 감히 천명하는 사람들의 반론을 물리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이 거기에서 자칭 발견했다고 하는 모순이 다름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놓여 있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법칙을 인간 행위와 관련하여 타당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인간을 어쩔 수 없이 현상으로 고찰해야만 했던 곳에서, 이제 인간을 예지적 존재로, 또한 물자체로 그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을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곳에서조차 여전히 그들이 인간을 현상으로만 고찰해야 했다는 점에 바로 이 같은 모순이 놓여 있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하나의 동일한 주체 안에서, 즉 감성계의 모든 자연법칙에서 자기 원인성을 (즉 자기 의지를) 분리해낸다면 그것은 모순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현상의 배후에 사태 자체가 (비록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기초로 놓여 있어야 하고, 사태 자체의 작용법칙과 관련해 이 법칙이 사태 자체의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과 동일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요구할 수 없음을 그들이 숙고하고 정당하게 시인한다면, 그와 같은 모순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의지의 자유를 설명함이 주관적으로 불가능하듯, 인간이 도덕법칙에 대해 보일 수 있는 관심을 찾아내 파악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인간은 실제로 도덕법칙에 관심을 두며, 이 관심과 관련하여 우리 안에 기초로 놓여 있는 것을 도덕감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를 우리의 도덕적 평가에서 올바른 척도라고 잘못 주장하기도 했다. 오히려 도덕감정은 법칙이 의지에 미치는 주관적 결과로 여겨져야 하므로, 이 감정에 객관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이성뿐이다. 17
감성적으로 촉발되는 이성적 존재자에게 이성 단독으로 당위를 훈계하는 것을 바라려면, 거기에는 물론 이성의 [또 다른] 능력이, 즉 의무의 이행에 쾌나 만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따라서 이성이 자신의 원리에 합치하도록 감성을 규정하는 원인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자신 안에 감성적인 것을 전혀 포함하지 않은 순수한 사유가 어떻게 쾌 혹은 불쾌의 감각[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그것을 통찰하는 것, 즉 아프리오리하게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원인성이어서,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모든 원인성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전혀 아프리오리하게 규정할 수 없으며, 그런 연유로 오로지 경험에 물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경험의 두 대상 사이가 아니고는 결과에 대한 원인의 그 어떤 관계도 제공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순수이성이 (경험에 어떤 대상도 주어지지 않는) 단순한 이념을 통해서 당연히 경험 안에 놓여 있는 결과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칙으로서 준칙이 지니는 보편성, 즉 도덕성이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지 설명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단지 다음 만큼은 확실하다. 즉 법칙이 우리에게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타율성이 되고, 실천이성이 감성, 즉 토대에 놓여 있는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며, 이 경우 실천이성이 도덕적으로 법칙을 수립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칙이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타당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법칙이 타당한 이유는 그것이 예지적 존재인 우리의 의지에서, 따라서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현상에 속하는 것은 이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사태 자체의 성질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정언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이 명령을 오로지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전제, 즉 자유라는 이념을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만큼만, 또 우리가 이 전제의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만큼만, 대답할 수 있다.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려면, 즉 이 명령의 타당성을 확신하고, 따라서 또한 도덕법칙의 타당성도 확신하려면 전제의 필연성을 통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이 전제가 어떻게 가능한지는 인간의 그 어떤 이성으로도 통찰할 수 없다. 그러나 예지적 존재가 지닌 의지의 자유를 전제하는 것 아래서는 의지를 유일하게 규정할 수 있는 형식적 조건인 의지의 자율이 필연적으로 뒤따라 나오게 된다. 의지의 이런 자유를 전제하는 것은 또한 (감성계의 현상과 연결할 때 자연필연성의 원리와 모순에 빠지지 않고) 아주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변철학이 보여줄 수 있듯이) 이 자유를 실천적으로, 즉 이념 가운데 모든 자의적 행위의 조건으로 삼는 것 역시 더는 조건 없이 필연적이다. 이성에 의한 자신의 원인성, 따라서 (욕구와는 구별되는) 의지의 원인성을 의식하는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그러하다. 그러나 순수이성이 다른 동인 없이-이것들이 다른 어딘가에서 가져오게 된 것이든-어떻게 독자적으로 실천적일 수 있는지, 즉 법칙으로서 이성 준칙 모두가 가지는 보편타당성이라는 단순한 원리가 (물론 이것은 순수실천이성의 형식이 되겠지만) 사람들이 미리 관심을 둘 법하기도 한 의지의 모든 내용(대상) 없이도 어떻게 그 자신이 하나의 동기를 제공할 수 있으며 또 순수하게 도덕적이라고 하는 관심을 불러올 수 있는지, 달리 말해서 순수이성이 어떻게 실천적일 수 있는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모든 인간 이성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관해서 설명해보려는 모든 애씀과 노력은 헛수고가 될 뿐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의지의 원인성으로서 자유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근거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것과도 같은 경우다. 나는 거기에서는 철학적 설명근거를 포기하게 되며, 달리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는 예지계 안에서, 즉 예지적 존재들의 세계 안에서 떠돌아다닐 수는 있다. 비록 내가 그 세계와 관련해 근거가 충분한 이념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에 관해 지식이 조금도 없으며, 또한 자연적 이성능력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이러한 지식에 결코 이를 수 없다. 그 세계는 감성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내 의지의 규정근거에서 배제하고 났을 때에도 거기에 단지 여분으로 남아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렇게 배제하는 것은 단지 감성 영역에서 유래하는 작용원인들의 원리를 제한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감성의 영역에 한계를 지음으로써 바로 이 영역이 모두를 자신 안에 포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 바깥에도 여전히 더 많은 것이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한계지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더 많은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러한 이상을 생각하는 순수이성에서 모든 내용을, 즉 대상의 인식을 분리해버리고 나면 나에게는 형식, 준칙의 보편타당성이라는 실천법칙만 남게 된다. 그리고 이 법칙에 맞추어 이성을 순수한 지성계와 관련해 가능적 작용원인으로, 즉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으로 생각하는 일만 남게 된다. 여기서 동기는 완전히 빠져 있어야 한다. 동기가 있다면 예지계라는 이 이념 자체가 동기여야 하거나 이성이 근원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과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여기가 모든 도덕적 탐구의 가장 높은 한계다. 그렇지만 이 한계를 정하는 것 또한 정말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성이 감성계 안에서 도덕에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최상의 동인이나 개념적이지만 경험적인 관심을 찾아 헤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성이 예지계라는 이름 아래서 자기에게는 공허한 초험적 개념들의 공간 안에서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자신의 날개를 힘없이 젓거나 환상 아래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모든 예지적 존재의 전체인 순수지성계라는 이념은 남아 있다. 우리 자신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비록 우리는 다른 한편에서 동시에 감성계의 구성원일지라도) 그 세계에 속해 있다. 이 이념은-비록 그것의 한계에서 모든 지식이 종말을 고하지만-이성적 신앙을 위해 언제나 이용 가능한 이념이자 허용된 이념이다. 그것은 목적들 자체(이성적 존재자들)의 보편적 나라라는 고귀한 이상을 통해서 도덕법칙에 대한 생생한 관심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자유의 준칙에 따라, 마치 그 준칙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할 때뿐이다.
칸트는 연역에 대한 확고한 개념 하에서 우리가 도덕성에 종속되는 근거로서 지성계 내에서 우리의 자유롭고 이성적인 본성을 주장하는 대신, 이 ‘공격’(offensive)에서 즉시 후퇴하는 것 같고, 도덕성에 대한 전면적 옹호에 몰두한다. 우리의 도덕성에의 종속에 대해 제대로 자격을 갖춘 증명으로 연역을 제공하지 않고, 그는 상당히 뜻밖에 그러한 연역의 제공을 포기하고 오히려 단지 회의론자의 공격에 대항하는 것에만 전념한다. (...) 도덕형이상학에 의해 시작되고 지지되었던 두터운 연역 개념은 하나의 순환에 이르게 되고, 이 순환은 순수실천이성의 주장들에 대해 회의론을 다시 불러올 위험이 있다. 이제 칸트는 우리가 그 순환을 해결하도록 해준 바로 그 이행 – 즉 지성계와 감성계 의 구분 – 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교한 철학적 반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가장 평범한 믿음에 의해서도 보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실천적으로 고려된 경우에만 후자(가장 평범한 믿음)가 이용할 수 있는 구분이다. 이론적 인식이 관계된 한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성계의 일원임을 온전히 옹호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적 견지에 의해 고무된 이 얇은 연역 개념은 초월적 관점 자체를 완전히 포기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18
칸트는 자연과 자유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변철학의 과제”라고 주장한다(정초 4:456).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 “사변철학에 부과”된 “의무”이며, 그것은 “사변철학이 실천철학을 위한 길을 열어줄 수 있”도록 (같은 곳), 즉, “실천이성이 안주하기를 원하는 땅을 분쟁거리로 만들 수도 있는 외적 공격들에 대해 평온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초 4:456-457). 이 사변철학의 과제는 자유와 자연이 “아주 잘 공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관 안에서 필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정초 4:456). 따라서 사변적인 초월적 관념론 학설은 이와 같이 여전히 실천적 영역에서 채택할 가치가 있다. 달리 말하면, 이성이 자기 자신과 겪는 갈등의 해결은 정확히, 우리에 관해 특정한 관점들을 취하는 것에, 즉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렇게 이중적인 방식으로 표상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정초 4:457). 가령, 지성계라는 개념은 단지 “이성이 자기 자신을 실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현상들 외부에서 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관점일 뿐이다(정초 4:458).
확실히 우리가 이러한 세계(지성계)에 대한 인식적 접근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실천이성은 자기 자신을 그러한 세계 안에서 단지 생각 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실천이성은 “그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직관 또는 감각으로 꿰뚫을” 수 없다(같은 곳). 그리고 이것이, “지성계의 이념”이 어 떻게 그 자체 본성적으로 우리의 행위를 위한 동기일 수 있는지를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이유이다(정초 4:462)
도덕법칙은 어떤 근거에서 구속력을 갖는가?(정초 4:450)) 이것이 바로, 초월적 가상(illusion)이 따르리라는 위협 때문에 실천철학이 넘어설 수 없는 “궁극적 경계” 혹은 “최상의 한계”이다(정초 4:462). 19
결론
자연에 관해서 이성을 사변적으로 사용하면, 우리는 세계의 어떤 최상 원인이 지닌 절대적 필연성에 이르게 된다. 또한 자유와 관련하여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해도 우리는 절대적 필연성에 이르게 된다. 다만 이때의 필연성은 이성적 존재자 자체의 행위 법칙이 지니는 필연성이다. 그런데 이성이 자신의 인식을 그 필연성을 의식하는 데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우리의 이성 사용 모두의 본질적 원리다. (이러한 필연성이 없으면 그 인식은 이성의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이나 일어나거나 일어나야 할 것, 이들 모두를 제약하는 조건이 그 아래에 기초로 깔려 있지 않으면, 이성은 존재하는 것이나 일어나는 것의 필연성도, 일어나야 할 것의 필연성도 통찰할 수 없다. 이 또한 바로 그 이성을 똑같이 본질적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이렇게 조건에 관해서 끊임없이 거듭하여 물어도 이성의 만족은 줄곧 뒤로 밀려날 뿐이다. 그래서 이성은 무조건적인 필연적인 것을 쉬지 않고 찾으며, 그것을 파악할 수단이 전혀 없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차린다. 만일 이성이 이런 전제와 어울리는 개념을 찾아낼 수만 있어도 이성은 충분히 다행스러워할 것이다. 따라서 이성이 무조건적인 실천법칙(정언명령일 수밖에 없는 법칙)을 자신의 절대적 필연성에 따라 파악할 수 없다고 하는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도덕성의 최상 원리를 연역하는 데 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인간 이성 일반에게 가해야 할 비난이다. 이성이 어떤 조건에 따라서, 즉 근저에 있는 어떤 관심을 매개로 하여 이것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성에게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그것은 도덕법칙, 즉 자유의 최상 법칙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도덕적 명령이 지닌 실천적인 무조건적 필연성을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의 파악 불가능성은 파악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까지 원리적으로 매진하는 철학에 우리가 합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 전부다.
아마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다. 도덕성은 도덕적 용어들로 설명(혹은 정당화)될 수 있거나 아니면 비도덕적 용어들로 설명(혹은 정당화)될 수 있다. 전자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도덕성은 설명(혹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환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후자라고 가정해보자. 그 때에도 역시 도덕성은 실제로 설명(혹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도덕성이 아닌 것, 가령 사려분별(prudence), 효용 또는 자기 이익 같은 것에 의해서는 설명(혹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39) 이것은 칸트의 자율주의적 프로그램을 쉽게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칸트에게 특히 나쁜 소식일 것이다.
이것이 칸트가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옹호하는 일뿐이”고, 즉 “사물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본 체하면서, 대담하게도 자유를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의 반론들을 몰아내는 일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정초 4:459). 우리는 자유의 현실성을 직접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곳에서,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실천적 도식(그림) 내에서 자유의 자리를 옹호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의 자유에 대한 권리주장(Rechtsanspruch)”을 입증할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정초 4:457), 그것을 포기할 어떠한 이유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칸트의 기획 내에서 ‘얇은 연역 개념’에 의해 의미하는 바이다.
‘얇은’ 연역은 우리가 정언적으로(categorically) 이성적이고 자유롭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얇은 연역은 우리의 자유에 대한 믿음이 내적으로 어떤 모순도 없다는 확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더 나아가 두 세계의 구분 – 그리고 그와 함께 지성적 존재자로서의 우리의 본성 – 이 우리의 자유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비판자들의 입장(자연주의적 양립론자 및 숙명론자들)을 고찰하고 그러한 입장 자체의 약점들을 공격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또한 우리가 자유롭다는 감각(Empfindung 느낌)은 언제나 있다(정초 4:457). 물론 우리의 ‘두터운’ 자유 개념은 단순한 심리학적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그것은 으레 강한 느 낌(감정)의 형태로 우리 안에 일정한 흔적을 남긴다. 이것들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자유로운 본성을 입증할 만큼 단독으로 자기 충족적(self-sufficient)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확실히 누적적인 효과(cumulative effect)를 갖는다. 함께 결합되었을 때,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은밀하게(그리고 선결문제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도덕성에 호소하지 않고, 칸트의 연역처럼 정당화하는 절차를 통해 안전하게 닻을 내린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도덕성은 절대 강하게 정당화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칸트가 도덕법칙의 타당성에 대해 강한 증명을 제시할 수 없었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단지 약한 증명만이 그것을 위해 실행가능한 하나의 모험(enterprise)이다. 20
이제 도덕형이상학과 순수실천이성비판을 구별하는 것은 그것들 각각이 단언하는 바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이 단언하는 바를 단언하는 그 방식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순수실천이성비판은 도덕형이상학이 단언한 모든 것을 단언한다. 그러나 비판은 그에 더하여, 이성의 힘이라는 능력 – 그리고 또한 그것의 한계 –을 검토함으로써 도덕형이상학을 넘어선다. 그리고 이것이 초월적인 종류의 연역에 의해 본질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그런 자기비판이 없다면, 연역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순환”에 빠진다(정초 4:450). 21
- 김한라.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 3장에서의 연역 구조.” 철학논집, no. 34, 2013, p. 92-93. [본문으로]
- op. cit. p.94 [본문으로]
- 나는 이성적 존재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수행할 때 자유를 오로지 이념[차원]으로만 근거로 삼도록 하는 길을 택한다. 이는 우리 의도에 충분히 맞게 취한 방법으로,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자유를 이론적 의도에서 증명해야 할 부담을 덜기 위함이다. 비록 이 자유를 이론적 의도에서 증명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고 하더라도, 이 법칙은 그 자신의 자유 이념 아래서가 아니고는 달리 행할 수 없는 존재자에게는 실제로 자유로운 존재자가 구속받게 될 법칙과 동일하게 타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이론이 안겨주는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다. [본문으로]
- 즉 도덕법칙의 근거는 자유의 이념이고, 자유의 이념(의지의 자유)으로부터 법칙의 필연성을 연역해낼 수 있다. [본문으로]
- 자율의 영역 아래 의지의 자유와 더불어 자기 법칙 수립이 들어 있다. [본문으로]
- op. cit. p.96-97 [본문으로]
- op. cit. p.99 [본문으로]
- op. cit. p.100-101 [본문으로]
- op. cit. p.101-102 [본문으로]
- op. cit. p.103 [본문으로]
- op. cit. p.103-104 [본문으로]
- op. cit. p.105 [본문으로]
- op. cit. p.106 [본문으로]
- op. cit. p.107 [본문으로]
- op. cit. p.107-108 [본문으로]
- op. cit. p.109 [본문으로]
- 관심은 이성이 실천적이도록 해주는 것, 즉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적 존재자에 관해서만 그 존재자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성이 없는 피조물은 단지 감성적 충동만 느낀다고 말한다. 이성은 자기 준칙의 보편타당성이 의지를 규정하는 충분한 근거가 될 때에만 행위에 직접적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오로지 순수한 관심이다. 그러나 이성을 욕구의 다른 대상을 매개로 해서만 혹은 주체의 특별한 감정을 전제하는 것 아래에서만 규정할 수 있다면, 이성은 단지 행위에 대해 간접적 관심만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성은 독자적으로는, 즉 경험 없이는 의지의 객관들, 특히 의지에 기초로 놓여 있는 감정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간접적 관심은 경험적 관심일 뿐 결코 순수한 이성의 관심일 수 없다. (이성의 통찰을 촉진하도록 하는) 이성의 논리적 관심은 결코 직접적이지 않으며, 이성 사용의 의도를 전제한다. [본문으로]
- op. cit. p.112-113 [본문으로]
- op. cit. p.114-115 [본문으로]
- op. cit. p.116-117 [본문으로]
- op. cit. p. 1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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