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Kant & German Idealism

칸트 번역어 논쟁 : 초월철학 대 선험철학

Soyo_Kim 2019. 1. 14. 00:47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김상봉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50905.html 

한겨레에 기고된 김상봉 교수의 글을 요약 정리한 글이다.

 

초월의 유래

김상봉에 따르면, ‘트란스첸덴탈’이라는 단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했던 낱말'이라는 통념과 달리 실제로는 쓰이지 않았던 낱말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근대인들이 transcendentalia라고 표기했던 것을 transcendentia라고 표기했던 것이다.

"

‘트란스첸덴탈리스’(transcendentalis)라는 형용사가 학술 용어로 광범위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의 철학자 프란치스코 수아레즈가 1600년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상지로 유명한 독일 마인츠에서 <형이상학 토론> 제2판을 출판한 뒤부터였다.(Jan A. Aertsen, Medieval Philosophy as Transcendental Thought, 13쪽 아래 참고). 그 후 다른 나라가 아니라 유독 독일에서 ‘트란스첸덴탈리스’란 용어는 철학의 핵심 용어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칸트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이 그 중심이었다. (M. Sgarbi, “The Historical Genesis of the Kantian Concept of >>Transcendental<<” II절과 “At the Origin of the Connection between Logic and Ontology. The Impact of Suarez’s Metaphysics in Koenigsberg” 참고) 

수아레즈는 트란스첸덴탈리스(transcendentalis)를 스콜라 철학자들의 트란스첸덴스(transcendens)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했다.(Aertsen, 같은 책 참고) 따라서 수아레즈의 경우, 이 낱말은 ‘초월적’이라고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맞다. 백여 년이 지난 뒤에 ‘필로소피아 트란스첸덴탈리스’(philosophia transcendentalis)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까운 로스토크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아에피누스(F. A. Aepinus)였는데, 그는 1714년 출판한 모두 4부로 이루어진 <철학입문>(Introductio in philosophiam) 시리즈의 제2부에 해당하는 책의 제목을 “초월 철학 또는 형이상학”(philosophia transcendentalis sive metaphysica)이라고 붙였다.

그런데 칸트에게 큰 영향을 끼친 테텐스(J. N. Tetens)는 ‘필로소피아 트란스첸덴탈리스’라는 라틴어 이름에서 트란스첸덴탈리스(transcendentalis)라는 형용사가 트란스첸덴스(transcendens)와 딱히 의미가 다르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뜻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용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원래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돌아가되 그것을 다만 독일어로 바꾸어 자신의 철학을 ‘트란스첸덴테 필로조피’(Transcendente Philosophie)라고 표현했다. (독일어 트란스첸덴트transzendent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범주를 초월하는 초월자를 가리킬 때 썼던 라틴어 트란스첸덴스transcendens, -ntis에 대응하는 독일어 표현이다.) 이 말 역시 초월철학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2006년 <칸트연구> 제18집에 발표한 ‘선험론적 철학의 탄생: 볼프와 테텐스 그리고 칸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테텐스의 초월철학을 국내 처음으로 소개했다.)

1756년 <물리적 단자론>(Monadologia Physica)에서 아에피누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로 ‘필로소피아 트란스첸덴탈리스’(philosophia transcendentalis)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칸트는 테텐스에게 영향을 받아서인지, 1781년 <순수이성비판>에서 테텐스의 초월 철학과 구별하여 처음으로 ‘트란스첸덴탈-필로조피’(Transscendental-Philosophie)라는 독일어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독일어에서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이란 형용사는 칸트의 이름과 함께 기억된다.

수아레즈가 <형이상학 토론>에서 “초월적 진리”(veritas transcendentalis)를 논한 1600년에서 시작해 1714년 아에피누스가 <형이상학 입문>에서 “초월적 철학”(philosophia transcendentalis)을 말한 다음 테텐스가 <보편적 사변 철학에 대하여>(Ueber die allgemeine speculative Philosophie)라는 책에서 새로운 “보편적 초월 철학”(allgemeine transcendente Philosophie)을 말했던 1775년까지, 이른바 초월적 진리 또는 초월 철학은 독일의 강단 철학계를 지배한 주요한 형이상학적 화두였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저작들은 대부분 라틴어로 씌어졌다.

 

칸트의 선험적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

수십 년 전 백 교수가 ‘트란스첸덴탈’을 선험적이 아니라 초월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 주관적인 해석에만 의지하여 그 때까지 선험철학이라고 부르던 것을 초월철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6년 <칸트연구> 제17집에서 칸트 학자라면 모두가 아는 노르베르트 힌스케(Norbert Hinske)의 제자 김창원 박사가 ‘볼프의 ‘트란스첸덴탈’ 개념’이라는 탁월한 논문을 발표해 칸트 이해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에 뒤이어 나 역시 앞서 말한 대로, 같은 해 <칸트연구> 제18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테텐스의 초월 철학을 소개했는데, 이는 테텐스의 초월 철학과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칸트 철학을 초월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백 교수는 그런 논문들이 나온 뒤 2010년에 쓴 ‘칸트철학에서 ‘선험적’과 ‘초월적’의 개념 그리고 번역어 문제’라는 논문에서 그리고 같은 글을 여기 저기 비슷하게 옮겨 실으면서 태연하게 동일한 주장을 반복한다. 그러고서는 지금 와서 학문적인 반론이 없었다고 불평한다.

 

그럼 독자들은 트란스첸덴탈의 표준적 의미가 뭐냐고 물을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수 백 번 넘게 이 낱말을 쓰면서도 단정하게 이 용어의 뜻을 정의하는 형식으로 규정한 것은 몇 번 없다. 그리고 그 외의 수백 번의 경우에 언제나 같은 뜻으로 그 낱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자신이 정의한 의미와는 다른, 낡은 방식으로 그 낱말을 사용했다.(이것 역시 당대 독일 강단 철학의 흔적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용어의 상이한 적용 사례들을 세심하게 분류하고 그로부터 이 용어의 다양한 의미의 갈래들을 정돈하여 상이한 의미들의 같고 다름을 엄격한 문헌학적 근거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성실한 칸트 학자의 임무이다.

김상봉은 백종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백종현은 ‘아 프리오리’를 선험적으로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데, 그는 '아 프리오리'를 선험적으로 번역하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으로 번역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 까닭은 첫째, 백종현이 칸트 철학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초월적이라는 용어는 칸트를 해석했던 후대 철학자들이 썼던 의미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a priori) 개념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선험론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이런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론-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라 부를 수 있겠다.”(<순수이성비판>, A 11 아래)

칸트는 먼저 “대상들이 아니라”라는 말로 대상들에 대한 탐구가 자기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대상 자체 또는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ens qua ens)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은 모두 과거 초월적 형이상학의 관심사이다. 그 대신 칸트는 내재적 형이상학의 길 또는 내면적 형이상학의 길을 걷는다. 그것을 그는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 개념들”을 탐구하겠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것도 아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와 로크에게서부터 근대 철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관념이나 개념의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고유한 면모는 그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선험적 개념들”을 탐구하려 했다는 데 있다. (이 선험적 개념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서 김상봉은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 제1장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현재는 절판되어 있다.)

'선험적’이란 경험에 앞선다는 말이므로 한국인이 이해 못할 말은 아닌데,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개념의 구체적 내용은 열 두 개의 범주 같은 것 또는 개념은 아니지만 시간이나 공간 표상 같은 것이다. 시간이나 공간의 표상 또는 범주는 경험에서 유래한 개념이나 표상이 아니고 선험적인 것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선험적인 개념이나 표상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선험론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칸트의 설명이다.

 

이런 인식은 이름이 어떻든 자동적으로 철학적 인식일 수밖에 없다. 개념이 경험적이냐 선험적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철학적 탐구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험론적’이라는 형용사가 처음으로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결합되는 명사가 철학이다. 같은 인용문 둘째 문장에서 칸트는 “이런 <선험적>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론-철학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로크나 흄처럼 특정한 개념의 경험적 기원과 생성을 탐구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론적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가능한 모든 대상 일반에 대한 순수 개념이나 표상의 선험적 기원 및 생성을 탐구하는 체계적 인식이 바로 선험론-철학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문장에서 독자들이 선험적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적 개념들의 총합’ 또는 ‘모든 선험적 개념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칸트를 오해하게 된다. 그 때는 한데 모인 선험적 개념들 자신이 선험론적인 철학 자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가 고착되면 특정한 선험적 개념이나 표상들이 선험론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경고한 것이 바로 그런 오해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앞으로의 모든 고찰에 대하여 그 효력이 미치고 또 사람들이 염두에 잘 새겨두어야만 할 주의사항을 제시하거니와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낱낱의 선험적 인식을 가리켜 선험론적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오로지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개념이나 직관) 표상이 순전히 선험적으로 적용되거나 또는 선험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과 어떻게 해서 그러한지를 인식하게 해주는 그런 인식만을 선험론적이라고 (…) 불러야 한다. 그러므로 공간 <자체>도, 그리고 공간의 어떤 기하학적인 선험적 규정도 하나의 선험론적 표상이라 부르면 안 된다. 도리어 이런 <선험적> 표상들이 경험적 기원을 갖지 않는다는 인식, 또한 그러면서도 그런 표상들이 경험의 대상들과 어떻게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지, 그 가능성만을 선험론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A56=B80 아래.)

 

 

김상봉은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백종현의 칸트 이해를 비판한다.

“그러니까 초월적[=선험론적] 인식은 그 자체가 대상 인식이 아니라,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정초적 인식, 곧 표상이나 개념 또는 원리를 말한다.”(백종현, 같은 논문, 12쪽)

 

“그러니까 당초에 인간 의식의 요소들인, 다시 말해 주관적인 것들인 공간·시간 표상이, 순수 지성개념들이, 생산적 상상력이, 의식 일반으로서의 통각이 그 주관성을 넘어 객관으로 초월하며, 그런 의미에서 ‘초월성’을 갖고 ‘초월적’이다.”(백종현, 같은 논문, 13쪽)

 

여기서 그는 공간 표상이 ‘초월적[=선험론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여기서 우연히 한 번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고 같은 논문에서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이는 위에서 우리가 인용했던 대로 공간을 선험론적 표상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칸트의 경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이다.

 

또한 백종현이 사용하는 표현들, ‘객관으로 초월한다’거나 ‘초월성’ 같은 표현은 칸트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표현이다.(궁금한 사람은 하이데거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이선일 옮김)를 보라.) 칸트는 ‘주관이 객관으로 초월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백종현이 애호하는 ‘초월하다’(transzendieren)는 동사나 ‘초월’(Transzendenz)이라는 명사는 칸트가 쓴 적이 없는 낱말들이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언어이지 칸트의 언어가 아니다. 

 

a priori와 transzendental의 번역 문제

그렇다면 이제 a priori와 transzendental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a priori'의 경우 문제가 단순한 편이다. 아 프리오리는 기본적으로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와 쌍을 이루는 개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proteron의 라틴어 번역이다. 그것은 원인 또는 전제로부터의 인식을 가리키며, 결과 또는 결론으로부터의 인식과 구별하는 징표이다."[각주:1]

이 단어는 라이프니츠에 이르러 경험에 앞서, 그것으로부터 독립적인 인식이라는 의미를 갖게된다. 한 때 '아 프리오리'를 '선천적'으로 번역하였으나, '선천적'은 '본유관념' 내지 '생득관념'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칸트적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 고로 a priori는 기본적으로 '선험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알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 학회에서 이 단어를 그대로 음차하여 사용한 까닭은, 이 단어가 독일어에서 역시 외래어이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시되는 transzendental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트란스첸덴탈’을 초월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 번역어가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은 백 교수도 인정하는 것 같다.

 

“독일어 트란첸덴탈의 이러한 의미 전환 내지 확장은 사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표현되는 칸트적 세계인식으로 인한 것인 만큼, 우리가 칸트철학을 한국어로 옮기고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한국어 ‘초월(적)’이 재래의 관용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경우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칸트 철학을 철학사적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 할 것이다. 기실 한국어 ‘초월(적)’의 일상적 의미는 철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는 상식 실재론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초월철학은 바로 그 상식 실재론을 전복시키는 것이니, 무엇보다도 용어 ‘초월’부터 전복시켜 읽고 사용하지 않으면 ‘초월철학’은 제대로 표현될 수도 없다.”(백종현, 같은 논문, 21쪽 아래)

 

여기서 백 교수는 “칸트철학을 한국어로 옮기고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한국어 ‘초월.(적)’이 재래의 관용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경우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 칸트 철학을 철학사적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사적 맥락을 위해서라면 멀쩡한 한국어의 관용적 의미를 건드리기보다는 라틴어를 보다 열심히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 ‘초월(적)’의 일상적 의미가 상식 실재론에 기반했다는 학설도 기발하지만, 일상어가 상식 실재론에 기초하고 있으니 그 의미를 좀 바꾸어야겠다는 것도 상식을 초월하는 만용이다. 내가 아는 한 ‘트란스첸덴탈’이란 낱말은 독일어에서는 일상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 순수 학술 용어이다. 그러니까 칸트는 자기 방식대로 의미를 부여해 쓸 수 있었다. 그건 학자들끼리 사용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초월(적)’이란 낱말은 한국어에서는 학술 용어이기 이전에 아주 일상적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그의 무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말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Seine Unwissenheit transzendiert unsere Vorstellungskraft.라고 표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므로 한국어에서는 백 교수가 생각하듯이 이 낱말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초월이나 초월적이라는 낱말을 학술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내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독일관념론을 개관하면서, ‘내재적 형이상학에서 애써 머물렀던 칸트와 달리 셸링은 다시 초월적 형이상학의 길로 나아갔다’고 말한다면, 아무리 초보자라도 두 철학자의 차이를 직감적으로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 교수처럼 칸트의 “초월철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한국어 ‘초월’부터 전복시켜 다른 뜻으로 읽어야 한다면 초월 말고 다른 낱말을 번역어로 쓰는 것이 옳지, ‘초월(적)’이라는 한국어를 전복시켜 다른 뜻으로 읽으라는 것은 합당한 요구가 아니다. 

칸트 철학은 그 의미에 있어 내재적 형이상학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초월'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김상봉과 백종현이 모두 동의하는 점이다. 김상봉의 경우, 초월이라는 단어가 기본적으로 한국 내에서 (독일어와 달리) 일상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내재적 형이상학과 초월적 형이상학의 구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선험적' 내지는 '선험론적'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김상봉은 선험론적을 선호하고, 칸트 학회에서는 선험적으로 번역한다.)

반면 백종현의 경우, 칸트가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표현하면서 종래에 사용되던 '초월적'이라는 단어를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대로 사용하였으므로, 이 점에서 칸트의 철학을 초월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철학사적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칸트의 입장에서 봐도, 그가 이 단어가 지닌 애매성을 인식하지 못했을거라 보기는 어렵다. 칸트가 초월적이라는 단어가 가져올 오해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를 그의 철학을 일컫는 말로 사용했다면, 이 역시 번역에 있어 존중받아야될 기준이라 할 수 있다.(나는 공부하는 입장이므로 따로 내 입장을 개진하지는 않겠다.)

 

  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17710&cid=41908&categoryId=4197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