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Feminist Philosophy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16) 정당화

Soyo_Kim 2025. 1. 15. 04:06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6. 정당화

정신분석학자들은 보통 여자가 애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릴 적 아버지가 아이의 경탄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가 남성이었기 때문이지 아버지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남자는 이러한 마법에 동참하고 있다. 여자는 한 개인을 다른 개인에 환생시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그녀가 어른들의 보호 아래 경험했던 상황을 되살리기를 바란다. 그녀는 가정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고, 거기서 거의 수동적인 평화를 맛보았다. 사랑은 그녀에게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돌려줄 것이고, 어린 시절도 돌려줄 것이다. 그녀는 자기 머리 위에 천장 하나와, 세상 한가운데에 버려진 자기를 숨겨 주는 네 벽과, 자기의 자유에 반해서 자기를 지켜주는 법을 되찾기를 희망한다. 이런 어린애 같은 꿈은 많은 여자의 사랑에 어른거린다. 애인이 “나의 귀여운 소녀, 나의 사랑하는 아이”라고 부르는 것에 여자는 행복을 느낀다. “당신은 정말 아주 어린 소녀 같다”라는 말이 여자들의 마음에 가장 확실하게 와닿는다는 것을 남자들은 잘 알고 있다. 여자들 가운데 어른이 되는 것을 괴로워한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어린애처럼 굴며 태도나 옷치장에서 유년기를 한없이 연장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자들이 많다. 남자의 품에서 다시 어린애가 되는 것은 그녀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준다. 큰 인기를 얻은 아래 유행가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최고의 행복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 자신의 일부분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가 “우리”라고 말할 때 그녀는 그와 결합해 일심동체가 되며, 그의 위엄을 공유하고 그와 함께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군림한다. 그녀는 “우리”라는 이 달콤한 말을 – 지나치다고 할 만큼 –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한다. 필요한 목적을 향해 세계 속에 뛰어들고 이 세계를 필연성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는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에게 필요한 사람이 됨으로써, 사랑하는 여자는 자기 포기 속에서 절대에 대한 멋진 소유를 경험한다. 이런 확신은 그녀에게 그토록 고귀한 기쁨을 준다. 그녀는 신의 오른편에서 빛나는 것처럼 느낀다. 훌륭하게 질서가 잡힌 세계에서 영원히 자기 자리를 차지한 이상, 그녀에게는 제2의 지위밖에 갖지 못한다 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랑받고 애인에게 필요한 존재인 한 그녀는 완전히 정당화된 것처럼 느낀다. 그녀는 평화와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 포로인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를 진정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고통스러운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은 포로가 되면 자기의 신성을 빼앗긴다. 여자는 자기의 초월성을 남자에게 위탁하면서 그것을 구해 내려고 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 초월성을 온 세계로 가져가야만 한다. 만일 연인이 정열의 절대 속에 함께 삼켜져 버리면 자유는 모두 내재 속에 떨어지고, 그때에는 오직 죽음만이 그들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그것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가 갖는 의미 중 하나다. 오로지 서로 상대만을 목표로 하는 연인은 이미 죽은 것이다. 그들은 권태로 인해 죽는다.

진정한 사랑은 두 자유의 상호 인정 위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때 연인들 각자는 자기를 자기 자신처럼 그리고 타자처럼 느낄 것이다. 둘 가운데 누구도 자기의 초월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자기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속에서 함께 가치와 목적을 찾아낼 것이다. 양편 모두에게서 사랑은 자기를 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며,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이 여자에게 최고의 성취라고 남자들은 앞다퉈 주장했다. “여자답게 사랑함으로써 더욱더 여자다운 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니체는 말한다. 발자크는 이런 말을 한다. “높은 차원에서 남자의 삶은 명예이며, 여자의 삶은 사랑이다. 남자의 삶이 영속적 행동이듯이, 여자는 오직 자기 삶을 부단히 줌으로써만 남자와 동등해진다.” 이 또한 잔인한 속임수다. 왜냐하면 그녀가 제공하는 것을 남자들은 전혀 받으려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기가 요구하는 조건 없는 헌신도 필요하지 않고, 자기의 허영심을 맞춰 주는 우상 숭배적인 사랑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를 서로에게 전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남자는 그런 헌신이나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는 여자에게 주라고 권유한다. 그러면서도 여자가 주면 그것을 귀찮아한다. 여자는 자기가 한 선물의 무용함이나 자기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해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여자가 자기의 연약함이 아닌 강함 속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 포기가 아닌 자기 확립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날이 오면, 그때야말로 사랑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죽음과 같은 위험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사랑은 여성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여자, 훼손되어 자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여자를 짓누르는 저주를 가장 비장한 모습으로 집약하고 있다. 여자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으로서 불모不毛의 지옥을 제시한 운명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랑의 순교자들이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