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Feminist Philosophy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17) 해방을 향해

Soyo_Kim 2025. 1. 16. 03:27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7. 해방을 향해

오직 노동만이 여자에게 구체적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다. 여자가 기생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멈추는 즉시, 여자의 종속을 토대로 세워진 체계는 붕괴한다. 여자와 세계 사이에 더는 남자의 매개가 필요하지 않다. 가신인 여자를 짓누르는 저주는 여자가 무엇을 하도록 허용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나르시시즘이나 사랑이나 종교를 통해서 존재에 대한 불가능한 추구에 몰두하는 것이다.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여자는 자기의 초월성을 회복한다. 자기 계획 속에서 그녀는 자기를 주체로서 구체적으로 확립한다. 그녀가 추구하는 목표나 자기 것으로 만드는 돈과 권리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녀는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있다. 많은 여자가 이런 유리한 점에 대해 의식하고 있고, 가장 소박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들까지도 그러하다. 나는 일용직 여자가 호텔의 홀 바닥을 닦으면서 이렇게 언명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오직 나 혼자 힘으로 살아 왔다.” 그녀는 록펠러 같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립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투표권과 직업을 아울러 갖는다고 해서 완전한 해방이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노동은 자유가 아니다. 여자가 노동함으로써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주의 세계에서뿐이다. 노동자의 대다수는 오늘날 착취당하고 있다. 한편, 사회 구조는 여성 조건의 진보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항상 속해 있던 이 세계는 아직도 그들이 각인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성 노동의 문제가 복잡성을 띠는 원인은 실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기 직업에서 경제적·사회적 자율성을 발견하고 특권을 누리는 꽤 많은 수의 여자들이 존재한다. 여자의 가능성과 그 미래에 관해 질문을 제기할 때 문제 삼는 것이 그런 여자들이다. 비록 그런 여자들이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녀들의 상황을 가까이서 연구하는 것은 특히 흥미로운 일이다. 페미니스트들과 안티페미니스트들 사이에 끊임없이 논쟁이 전개되는 것도 그런 여성들에 관해서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은 오늘날 해방된 여성들이 세계에서 중요한 일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데다가 자신의 내적인 균형도 거의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그동안 획득한 결과를 과장하면서 그녀들이 겪는 혼란에 대해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녀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적 신분에 편안하게 안착해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그녀들은 아직 도중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경제적으로 해방된다고 해서 남자의 상황과 같은 정신적·사회적·심리적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직업에 종사하고 또 거기에 매진하는 방식은 그녀 삶의 전체적 형태를 통해 구성된 상황에 달려 있다. 그런데 성인의 삶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그녀 뒤에는 소년과 같은 과거가 없다. 사회는 남자를 보는 눈과 같은 눈으로 여자를 보지 않는다. 그녀에게 세계는 남자들과 다른 전망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여자라는 사실은 자주적인 인간에게 특수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사실 남자들은 여자의 새로운 사회적 신분을 감수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자기의 운명을 더 이상 타고난 것이라고 느끼지 않으므로 마음이 훨씬 더 편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일하는 여자가 여성성을 소홀히 하거나 성적 매력을 잃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 그것만으로도 벌써 안정을 향한 진일보이지만 – 아직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아직은 이성과 원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훨씬 더 어렵다. 그녀의 성생활과 애정 생활은 많은 난관에 봉착한다. 이 점에 관한 한 남자에게 예속된 여자는 어떤 권리도 없다. 대다수의 결혼한 여자와 창녀들은 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철저하게 불만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독립적인 여자는 체념보다는 투쟁을 택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명백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제는 죽음 속에서 침묵의 해결책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살려고 애쓰는 여자는 자기의 의욕과 욕망을 땅에 묻어 버린 여자보다 더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에게 후자를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남자와 비교함으로써만 자기가 불리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완전히 자유롭게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여성의 기능이 하나 있다. 바로 모성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여자가 산아제한 실시 덕분에 자기 마음대로 임신과 출산을 거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는 여자가 종종 고통스럽고 비용이 드는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몰리곤 한다. 또한 원하지 않는 아이의 부담을 져야 하고, 그로 인해 직장 생활을 포기하기도 한다. 아이에 대한 부담이 무거운 것은 반대로 여자가 원할 때 아이를 낳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혼모는 추문이 되고, 아이에게도 혼외 출생은 결함이 된다. 결혼의 속박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몸을 망가뜨리지 않고 어머니가 되기란 드문 일이다. 인공수정이 그토록 많은 여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여자들이 남자의 포옹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모성이 마침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합당하게 체계를 갖춘 탁아소나 유치원이 없기 때문에, 여자의 활동을 완전히 마비시키기에는 아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여자는 아이를 부모나 친구 혹은 하녀들에게 맡기지 않으면 일을 계속할 수 없다. 여자는 고통스러운 상실감으로 느껴지는 불임을 선택하든지, 직업 활동과 양립하기 어려운 부담을 받아들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여자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세워야 할 것은 그녀의 상황이지 신비스러운 본질이 아니다. 미래는 활짝 열린 상태에 있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창조적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앞다퉈 주장했다. 이는 최근 안티페미니스트인 마르트 보렐리 부인Mme Marthe Borély(1880~1955)21이 주장한 바이기도 하다. 그녀는더욱이 선천적인 창조적 ‘본능’이라는 관념은 본질의 낡은 벽장 속에 있는 ‘영원한 여성’이라는 관념처럼 내던져 버려야만 한다. 어떤 여성 혐오자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여자가 신경쇠약 환자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대개는 같은 사람들이 천재는 신경증 환자라고 언명하고 있다. 아무튼 프루스트의 예는 심리적·생리적 불균형이 무능력도 평범함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여자의 성질을 규정하는 논거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방금 살펴보았다. 역사적 사실이 영원한 진리를 명확하게 규정한다고 간주할 수 없다. 상황은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도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천재적인 작품 – 혹은 그저 작품 하나 - 을 완성할 모든 가능성이 여자들에게 거부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여자들 가운데 천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은 예술가나 작가를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한 미국인들을 야만적이라고 한껏 경멸했다. 이에 대해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22은 요컨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리가 존재하도록 놔 두어라.” 단 한 명의 휘트먼도 멜빌도 낳지 못했다고 흑인을 비난하는 인종주의자들에게 흑인들도 같은 답변을 하고 있다.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도 라신이나 말라르메의 이름에 대적할 수 있는 어떤 이름도 내세우지 못한다. 자유로운 여자는 이제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가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날에 아마도 랭보의 예언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시인들이 생겨날 것이다! 여자의 끝없는 노예 상태가 무너질 때, 여자가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게 될 때, 남자 – 지금까지는 가증스러운 – 가 여자를 해방하게 되므로 여자도 역시 시인이 될 것이다! 여자는 미지의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자의 ‘정신세계’가 우리 남자의 정신세계와 다를 것인가? 여자는 기이한, 불가해한, 혐오감을 일으키는, 감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취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자의 ‘정신세계’가 남자의 그것과 다를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의 정신세계에 동화함으로써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어느 정도로 독특하게 남아 있을지, 이러한 독특함이 어느 정도로 중요성을 간직하게 될지 알기 위해서는 매우 담대한 예견을 시도해야만 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여자의 가능성이 억압되어 인류에 손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여자가 마침내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할 때라는 것이다.

 

남녀 양성 간의 투쟁은 여자와 남자의 해부학에 직접 내포되어 있지 않다. 남녀의 투쟁은 시간을 초월한 관념의 세계에서 영원한 여성이나 영원한 남성이라는 이러한 불확실한 본질 간에 싸움이 전개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거대한 싸움이 지상에서 역사적으로 다른 시기에 전혀 다른 두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

내재 속에 갇혀 있는 여자는 이 감옥에 남자도 붙잡아 두려고 애쓴다. 그렇게 하면 감옥은 세계와 혼동되어 그녀는 거기에 갇힌 것을 더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아내, 여자 애인은 여간수가 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체계화한 사회는 여자가 열등하다고 공포한다. 여자는 남자의 우월성을 파괴함으로써만 자기의 열등함을 없앨 수가 있다. 여자는 남자를 불구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애쓴다. 남자의 의견에 반대하고, 남자의 진리와 가치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여자는 자기방어만을 할 뿐이다. 여자를 내재에 가두고 열등하게 만든 것은 불변의 본질도, 비난받아 마땅한 선택도 아니다. 내재와 열등은 여자에게 강요된 것이다. 모든 억압은 전쟁 상태를 초래한다. 이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로부터 비본질로서 취급되면 실존자는 반드시 자기의 주권을 회복하려고 한다.

오늘날 싸움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여자는 남자를 지하 독방에 가두려는 대신에 거기에서 탈출하려고 애쓴다. 여자는 더 이상 남자를 내재의 지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초월의 빛 속으로 떠오르려고 한다. 그때 남자들의 태도가 새로운 충돌을 일으킨다. 남자는 마지못해 여자를 ‘놓아 주는 것이다.’ 남자는 어디까지나 최고의 주체,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로, 본질적 존재로 머물러 있으려 한다. 남자는 반려자인 여자를 실질적으로 자기와 대등한 사람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여자는 남자의 불신에 공격적인 태도로 응수한다. 이제 더는 각자 자기의 영역 속에 갇혀 있는 개인들 간의 전쟁이 아니다.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계급이 진격하지만, 특권 계급에 의해 궁지에 몰린다. 두 초월성은 맞대결을 펼친다. 두 자유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대신에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려 한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동류로 인정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여성성이라는 것이 현 상태대로 영속되는 한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여성성을 유지하는 데 여자와 남자 중 어느 쪽이 더 필사적인가? 여성성에서 해방되는 여자도 역시 여성성의 특전만은 보존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남자는 여자가 그 특전의 제한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다른 쪽 성을 두둔하기보다 한 쪽 성을 비난하기가 더 쉽다”고 몽테뉴는 말한다. 비난과 칭찬을 분배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사실 여기서 악순환을 끊기가 그토록 힘든 것은 남녀 양성이 저마다 상대의 희생자인 동시에 자기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자유에서 대결하는 두 적수 사이에는 화합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복잡성은 각 진영이 적의 공범이기도 하다는 데서 온다. 여자는 포기의 꿈을 추구하고 있고, 남자는 자기소외의 꿈을 뒤쫓고 있다. 거짓된 삶은 아무 이익이 안 된다. 저마다 안이함에 유혹되어 스스로 초래한 불행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린다. 여자와 남자가 저마다 상대방에게 증오하는 것은 자신의 기만과 비겁함의 생생한 실패다.

사실 남자들은 여자 동료에게서 억압자가 통상 피억압자에게서 발견하는 것 이상의 암묵적인 동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 삼아 악의적으로 여자에게 강요한 운명을 여자가 원했다고 선언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실상 여자가 받는 모든 교육은 반항과 모험의 길을 차단하도록 그녀를 획책하고 있다. 사회 전체 – 존경받는 부모를 위시하여 – 가 여자에게 사랑, 헌신, 자기희생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하고, 애인도 남편도 아이들도 그런 거추장스러운 짐을 지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숨기면서 거짓말을 한다. 그녀는 이런 거짓말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여자에게 안이함을 따르도록 권유하기 때문이다. 이는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르는 가장 해로운 죄악이다. 사람들은 유년기부터 평생에 걸쳐 여자에게 자기 자유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모든 실존자를 유혹하는 자기 포기를 여자의 소명으로 지정하면서 여자를 타락시키고 망가뜨린다. 아이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공부하는 것에 대한 유용성도 보여 주지 않은 채 온종일 놀게만 하여 게으름으로 유도해 놓고는 성인이 되었을 때, 그가 무능하고 무지하게 되기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여자에게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할 필요성을 한 번도 가르치지 않은 채 여자를 양육하고 있다. 그녀는 타인의 보호나 사랑이나 도움이나 지도에 의지하는 데 선뜻 빠져 버린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힌다. 유혹에 지는 것은 여자의 잘못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를 유혹한 것은 남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각자는 그 상황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할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을 비난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치를 따지고,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리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 여자를 비난할 것이다. “너는 (…) 아무것도 모르고, 무능한 여자야…….” 저마다 공세를 취함으로써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쪽의 잘못이 다른 쪽을 무죄로 만들지는 않는다.

 

여자와 남자가 평등하게 될 세계는 상상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확히 소비에트 혁명이 약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남자들과 똑같이 양육되고 교육받은 여자들은 같은 조건에서 같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할 것이다. 연애의 자유는 풍습에 의해 받아들여지겠지만 성적 행위는 더 이상 보수를 받는 ‘봉사’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다른 생계 수단을 확보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당사자들이 원하는 때에 즉시 해약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계약 위에 성립될 것이다. 모성은 자유로울 것이다. 즉, 산아제한과 낙태는 허용될 것이고, 그 대신 여자들이 기혼이든 미혼이든 모든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정확히 똑같은 권리가 부여될 것이다. 임신 휴가의 비용은 아이들을 책임지는 공동체가 지급할 것인데, 이는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부모들에게만 내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가 진정으로 평등해지기 위해 법, 제도, 풍습, 여론, 그리고 모든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회의주의자들은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예언가들은 여성성을 걷어내 버린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로 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여자들은 괴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는 오늘날의 여성이 자연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해야 할 것은, 인간 집단에는 아무것도 자연적인 것이 없으며, 특히 여자는 문명이 공들여 만들어 낸 산물이다. 여자의 운명에 타인의 개입은 근원적이다. 만약 이런 개입 행위가 다르게 계획되었다면, 여자는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렀을 것이다. 여자는 호르몬이나 신비한 본능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와 세계와 맺는 관계를 외부의 다른 의식들을 통해 파악하는 방법에 따라 규정된다.

여자는 어떤 신비스러운 숙명의 희생자가 아니다. 여자를 명시하는 특수성은 그 특수성이 담고 있는 의미에서 중요성을 끌어낸다. 그 특수성은 새로운 전망에서 파악하게 되는 즉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여자는 자기의 에로틱한 경험을 통해 남성의 지배를 – 흔히 아주 싫어하고 –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난소가 그녀에게 영원히 무릎 꿇고 살도록 한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남자의 공격성은 남자의 지배력을 전적으로 긍정하려 획책하는 체제의 한가운데서만 비로소 영주의 특권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자가 사랑의 행위에서 스스로 심히 수동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이미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인간적 존엄성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많은 현대적인 여성은 에로틱한 생활을 아직도 노예 상태의 전통에 따라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남자 아래 누워 삽입되는 게 굴욕적으로 보이고, 그녀들의 몸은 불감증으로 오므라든다. 그러나 현실이 다르다면 사랑의 몸짓과 체위가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면, 애인에게 돈을 지급하고 그를 지배하는 여자는 자기의 당당한 무위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가 활발하게 힘을 소모하는 남자를 예속시키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승리와 패배의 개념이 교류의 관념에 자리를 내 준, 성적으로 균형 잡힌 커플이 벌써 많이 존재하고 있다. 사실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육체다. 따라서 수동성이고, 호르몬과 종의 장난감이며, 자기 욕망의 불안한 먹이다. 그리고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육체적 정열의 한가운데서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증여를 하는 활력이기도 하다. 남자와 여자는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육체화한 실존의 기이한 모호성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서로 맞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각자 자기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즉, 자기가 거부하는 자기 자신의 일부분을 파트너에게 투사해서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자기가 처한 조건의 모호성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대신에 저마다 그 비천함을 상대방에게 짊어지게 하려고 하며, 그 명예는 자신을 위해 남겨 두려고 애쓴다. 하지만 양자가 모두 진정한 자존심과 상관적인 명석한 겸손함으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들은 서로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할 것이고 우애 속에서 에로틱한 생활을 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은 인간들을 구별시키는 그 모든 특이성보다도 한없이 더 중요한 것이다. 주어진 조건이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대인들이 ‘덕’이라고 불렀던 것은 ‘우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의 수준에서 규정된다. 남녀 양성 속에서는 육체와 정신, 유한과 초월이라는 똑같은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다. 남녀는 모두 시간에 잠식되고 죽음에 위협받고 있으며, 타자에 대해 똑같이 본질적인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자유에서 똑같은 영광을 끌어낼 수 있다. 그들이 그 영광을 맛볼 줄 안다면 사이비 특권에 대해 더는 다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우애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