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9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4)

18. 프라하의 마르치온주의자들 뵈멘의 체코인과 독일인들 간의 분쇄 전쟁 1848-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두 개의 역사 과정이 충돌한다. 뵈멘(체코)과 빈(오스트리아), 부다페스트(헝가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업 경제에서 산업 경제로의 이행과, 종속 민족의 각성이 그것이다. 뵈멘에서 전개된 체코 민족주의의 대두는 참정권 요구로 이어졌는데, 이로 인해 뵈멘에서는 라이프니츠 식 철학을 통해 체코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독일 철학자들의 움직임을 포착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체코인들의 행동주의와 뵈멘 내에서 소수 민족에 속하는 독일 지식인들의 탈정치철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뵈멘의 민족 갈등은 극에 달해 연방제 정부에 대한 요구가 가장 강했다. 체코인들은 1860년..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3)

2. 황제와 그의 궁정 "흔히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소모되어) 무너지게 돼있었다고 한다. (...) 제국을 단결시켰던 바로 그 힘, 즉 황제의 완강함과 관리들의 전통주의가 결국은 제국을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비극이었다."[각주:1] 크라우스나 트라클의 비관주의와는 반대로, 몰나르Franz Molnár아 헤르만 바르Hermann Bahr같은 낙관주의자들은 안전사회를 주장했다. 빈 태생의 유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어제의 세계: 한 유럽인의 회고』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1890년 전후에 성장기를 보내며 그는 유복한 가정이 미래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사회에 도취됐다." "안전이 우선"이라는 구호가 사회에 자리잡았으며, 중산층은 새로운 문물들(전깃불, ..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2)

1부 합스부르크 관료 체계_타성 대 개혁 "죽지도 않고 고칠 수도 없는 병, 그것이 가장 나쁜 병이다." - 에브너-에센바흐 1. 바로크에서 비더마이어로 "1867년부터 1914년 사이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렇다 할 목표나 국호가 없는 이상한 왕조 국가였다. 1800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중동부에서 적어도 세 가지 과업을 수행했다. 남부 독일인들을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했으며,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물리쳤고, 서구 문명을 반(半) 동양적인 나라에 전파했던 것이다."[각주:1] 합스부르크 왕조는 1800년 즈음 되어 그들 스스로를 합스부르크 왕조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임하였다. 이들은 1806-1867년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1867-1918년엔 오스트..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1)

이 글은 William Johnston, The Austrian Mind : An Intellectual and Social History 1848-1938을 번역한 윌리엄 존스턴,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번역 고원, 김래현, 변학수, 사순옥, 신혜양, 오용록, 이기식, 채연숙, 문학동네, 2008을 요약, 정리한 글이다. 서론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의 재정립은 오늘날 현대 철학에서 가장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오스트리아 제국(1804-1867)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의 존속 기간 동안 빈에서는 고대 그리스, 18-19세기 독일, 20세기 프랑스에 비견될만한 일련의 사유 운동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야말로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의 분기와 혼합이 동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정리 (6) 헤라클레이토스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6장 헤라클레이토스 1절 개괄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스 출신이며 69번째 올림피아기인 기원전 504년-501년에 전성기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블로손의 아들이거나, 또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헤라콘의 아들이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오만하고 방자했다. 끝내 그는 사람들을 싫어하여 산 속에 은둔하였고 풀과 나뭇잎을 먹으며 살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수조에 걸리자 도시로 내려왔고 의사들에게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고 수수께끼처럼 물었다. 그런데 의사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외양간으로 가서 자신을 쇠똥에 묻고 쇠똥의 열기로 몸이 마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 효험도 얻을 수 없었으니 이렇게 해서 60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정리 (5) 크세노파네스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5장 이오니아의 철학- 크세노파네스 1절 개괄 크세노파네스는 대략 B.C. 570에 태어나 460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승이 없다고 전해지나 아낙시만드로스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그는 엘레아 학파의 설립자라는 추정도 있다. 또한 플라톤은 그의 책 소피스트에서 엘레아 학파와 크세노파네스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타나며 그 이후로 고대의 저술가들의 책에 반복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크세노파네스가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라는 견해는 고대에는 정설이었다. 이후 버넷으로 인해 그 실체가 의심받기도 하였지만 시를 통해 사유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크세노파네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유사한 점이 있고, 크세노파네스의 사상엔 파르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정리 (4) 피타고라스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4장 피타고라스 1절 개괄 철학자로서의 피타고라스는 하나의 철학적 섬이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철학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일뿐더러 기원전 B. C. 5세기에 활동했던 피타고라스 학파 역시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신비주의적이고 독특한 경향을 보여준다. 피타고라스는 새로운 철학적 삶의 형상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나이 18세 즈음 올림피아력 제 48기 1년(B.C. 588)에 소년들과 겨루는 권투 대회에 참가를 희망했지만 거절당하고, 장정리그에 가서 우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그의 출생년도는 B. C. 606년이 된다. 피타고라스가 기원전 606년에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보다 한 세대 이상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정리 (3) 아낙시메네스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3장 아낙시메네스 1절 개괄 아낙시메네스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가 밀레토스 사람이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이자 동료라고 전해진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로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아낙시메네스는 1) 아낙시만드로스보다 젊고 제자이거나 동료이며, 2)생몰년대는 보통 자의적이라고 판별된다. 3) 아폴로도스는 그가 올림피아력 63기(B.C 529-525)에 전성기였으며 사르데스의 정복기인 올림피아력 70기(BC.501-497)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성기를 태어남으로 본다면 필사본이 옳을 수도 있고 이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죽은 셈이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올림피아력 58기의 두 번째 해(B.C...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정리 (2) 아낙시만드로스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2장 아낙시만드로스 1절 개괄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했던 해(기원전 585/4)에 25살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탈레스보다 젊었지만 아마도 많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사고라스를 오늘날에는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른다.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혈족이며 제자이며 후계자였다. 그는 처음으로 “자연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도와 해시계를 만들었다고도 여겨진다. 그 전에는 글을 쓴다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이점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저술은 유럽 최초의 철학책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사물의 생성소멸의 원인에 대한 설명에서 논리적으로 반대-모순 현상으로 파악하고 이의 논리적 관계에 주의하고 철학을 하였기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정리 (1) 탈레스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1장 탈레스 (Thales) 1절 개괄 기원전 6세기 초반에 활동한 이오니아의 철학자. 희랍의 철학과 과학적 전통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아낙시메네스는 “탈레스는 항상 우리 대화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전하고 있으며, 추가적으로 탈레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라에르티오스는 “탈레스는 체조 경연대회에 참가했으며, 발열, 간염, 허약증 등으로 사망했다.”, “이 묘비는 작으나 그의 지혜는 명성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찌른다.”는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탈레스는 스스로 많은 것을 발견했고 또한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일례로, 그는 삼각형의 맞꼭지각은 같음을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탈레스가 수학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업적들은 그가 이집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