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Phenomenology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2)

Soyo_Kim 2018. 12. 28. 22:56

1부 합스부르크 관료 체계_타성 대 개혁

 

"죽지도 않고 고칠 수도 없는 병, 그것이 가장 나쁜 병이다."

- 에브너-에센바흐

 

1. 바로크에서 비더마이어로

 

"1867년부터 1914년 사이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렇다 할 목표나 국호가 없는 이상한 왕조 국가였다. 1800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중동부에서 적어도 세 가지 과업을 수행했다. 남부 독일인들을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했으며,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물리쳤고, 서구 문명을 반(半) 동양적인 나라에 전파했던 것이다."[각주:1] 

 

합스부르크 왕조는 1800년 즈음 되어 그들 스스로를 합스부르크 왕조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임하였다. 이들은 1806-1867년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1867-1918년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불리었다. '아우스트리아'는 한 나라나 민족이 동서로 나누어져 있을 때,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동고트(493년 이탈리아 왕국을 세우고 555년 멸망)나 아우스트라시아(6~8세기 프랑크 왕국의 동쪽 나라. 라인강을 중심으로 지금의 프랑스 북동부, 독일 서부 및 벨기에를 포함한 지역)같은 명칭이 이에 앞서 쓰였다.

1156년에 도나우강 동쪽 변경이 오스트리아 공작령으로 승격되었으며, 같은 해 바르바로사라고 불리는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소특전Privilegium minus에 의해 바벤베르크 가의 하인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공작으로 봉해졌다. 1192년 슈타이어마르크가 바벤베르크에 상속되면서 바벤베르크인들은 적-백-적색으로 된 문장을 만들었는데, 1918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국기에 이 색깔을 넣어 사용했다.

신성 로마 제국 및 합스부르크 왕조 주요 사건

 

800년 카롤루스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황제 대관을 받음

843년  프랑크 왕국의 3분할

911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4세 사망 (카롤링거 왕조 종결)

911-918년 콘라트 1세 동프랑크 국왕 계승

919년 하인리히 1세 독일 국왕 즉위

962년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대관 - 신성로마제국(Sacrum Imperium Romanum) 선포

1077년 카노사의 굴욕

1122년 보름스 협약[각주:2]

1138년-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

1155-1190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1세 제위

1156년 도나우 강 동쪽 변경이 오스트리아 공작령으로 승격

1192년 슈타이어마르크가 바벤베르크에 상속

1220-1250년 프리드리히 2세 제위

1254-1274년 대공위 시대[각주:3]

1508-1519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막시밀리안 1세 제위(결혼 동맹)

1519년-1556년 카를 5세 제위 (합스부르크 가문 최전성기)

1517년 종교개혁 시작 (마르틴 루터 95조 반박문)

1618년 30년 전쟁 발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1683년 2차 빈 공방전 (오스만 제국의 빈 공성전)

1701-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참전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1745년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로트링겐 공작)

1740-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56-1763년 7년 전쟁

1803-1805년 오스트리아 전쟁(나폴레옹 전쟁의 제 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 성립 (프란츠 2세의 황제 즉위)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멸망 (프란츠 2세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 및 제국에서의 기타 지위 포기 선언) 

1809년 제 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1815년 워털루 전투 및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 몰락

1814-1815년 빈 회의 및 빈 체제(메테르니히 체제) 성립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1848년 빈의 3월 혁명(메테르니히 실각 후 영국 망명)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67년 대타협(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분리주의자 사이의 협상)

1914-1918년 세계 1차 대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최초로 집정한 사람은 독일인 루돌프 1세 (1273-1291)였다. 독일의 대공위 기간에 뵈멘 왕 프레미슬Otto Premysl이 바벤베르크 공작령인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및 그라인스를 점령했다. 루돌프 1세는 1278년 8월 마르히펠트 평원에서 프레미슬을 물리치고 그 영토와 슈바벤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의 본산을 1283년 아들인 알프레히트에게 봉토로 주었다. 전 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로 알려진, 현재 바덴이 있는 슈바벤 영지는 1805년까지 제국에 속했다. 1355-1382년 캐른텐과 티롤, 트리에스트가 이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됬다. 1526년 헝가리와 뵈멘의 왕인 루트비히Ludwig 2세가 터키인의 싸움에서 전사해 두 왕위가 스페인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1세에게 상속되면서 제국의 영토가 단번에 어느 때보다 크게 확장됐다. 또 페르디난트는 그의 형인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1556-156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됐다. 페르디난트 1세는 (1740년만 제외하고)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를 차지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계를 창건했다. 카를 5세의 아들은 스페인을 다스렸다. 1745년 로트링겐 태생의 슈테판Franz Stefan이 선 제후들에 의해 황제로 선출된 이후부터는 이 왕조를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로 불렀다.[각주:4]

"1683년에 빈은 오스만 터키인들에게 점령당할 뻔했지만 나중에 이들이 패주하면서 제국이 확대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터키인이 1525년경 헝가리를 정복한 이후 제국의 수도가 영웅적으로 방어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전초부대라는 합스부르크인의 사명이 각색됐다. (...) 황제 레오폴트 1세(1658-1705)는 수도를 구하기 위한 십자군 조직에 성공했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중부 헝가리가 해방됐다. 또한 1686년 부다Buda가 함락됐으며 이듬해에 헝가리 의회는 왕관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남계에 위임했다.[각주:5]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오스트리아 특유의 바로크 문화가 생겨났다. 교회와 수도원, 궁성이 재건되었고, 황제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는 바로크 시대 군주들이 몹시 좋아한 화려한 의식을 도입했다.[각주:6] 오스트리아 인들의 세계관에 있어서 현세는 하느님의 예정에 따라 움직이는 연극이요, 인간은 내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봉사하는 존재라고 여겨졌다.[각주:7]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은 극단에 시달리는데, 사랑과 증오, 허기와 포만, 신성함과 죄 등의 분열 등이 이러한 극단의 징후로써 나타난다.[각주:8] 이러한 세계관을 단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사상이 바로 라이프니츠와 그의 모나드론(단자론)이었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는 이들이 품고 있었던 세계관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러한 모순성의 인식을 통해 오스트리아인들은 신의 세계질서에 종교적으로 귀의하게" 되었다.[각주:9]

 

"남자나 여자나 위계조직의 성원이라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창조질서에 대한 이러한 순종적인 태도는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약화시켰다." [각주:10]

1620년부터 신교에 대한 승리를 성모 마리아께 감사하는 순례가 합스부르크 군주들에게 있어 무수히 행해졌다.[각주:11] 죽음은 삶의 일부로, 세상은 삶과 죽음의 무대로 여겨졌고, 모든 합스부르크 지역에 바로크 교회 양식의 호사가 퍼지게 되었다. 바로크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 시간이 지나며 퇴화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19세기에 유미주의, 실증주의, 인상주의 등으로 세속화 되었다는 점이다.[각주:12]

합스부르크의 이러한 바로크적 신앙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계몽절대주의 정치와 묘한 결합을 이루어냈다.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재위: 1740-1780)와 그의 아들 요제프 2세(재위: 1780-1790) 치하에서 계몽절대주의는 관료화와 반교황주의적인 가톨릭주의가 결합된, 이른바 요제프주의로 발전한다."[각주:13] 마리아 테레지아는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시도했고, 이러한 시도에는 금융제도 개편, 법전 공포, 도량형 체계 통일, 학교의 국유화 등이 있었다. 테레지아는 이 밖에도 헝가리 문학을 육성하였으며 1760년에는 빈에 헝가리 친위대를 창설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1918년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는 이성과 열광이 혼재된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각주:14] 그는 철저한 중앙집권주의자로서 관료의 수를 줄이고, 검열법을 도입했다. 요제프 2세는 특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변화를 주도하였다. 그는 1781년 10월 13일 종교 관용령에서 루터교도, 칼빈교도, 그리스 정교회도에 종교의 자유와 공민으로서의 평등을 인정해주었다. 또한 유대인에게 적용되었던 윤리규제법Bekleidungsgesetz 역시 폐지하여 유대인들은 처음으로 게토 밖에서 살거나 장사를 하고 국립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각주:15] 그는 한달 후 수업과 사제직 또는 병자를 돌보지 않는 수도원을 400개 이상 해산시켰다. 이러한 칙령을 통해 수도원 소유의 땅을 팔아 생긴 수익으로, 지방의 사제들이 출생, 혼인, 사망 시의 기록원으로서 근무하고 콘그루아Kongrua라는 보수를 대가로 지급받는 기금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요제프 2세의 정책은 국가 교회 육성과 함께 수사와 예수회 수도사들의 박해를 통한 "국교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오스트리아식의 절충"[각주:16]이라고 표현해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요제프주의는 프랑스의 얀센주의와 같이 교회 정책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각주:17] 

그의 계몽주의는 공공보건위생 제도에 있어 큰 효과를 보았으나, 독일어를 제국의 공용어로 선포한 일(1784년)은 거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체코, 헝가리, 세르비아 사람들의 어법이 문학어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존속하게 되었다. 또한 헝가리에서는 "1867년 이후 모든 시민에게 마자르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요제프주의에 분명한 거부를 표명했다."[각주:18]

1792년 이후 요제프주의는 행정가로 이루어진 우파와 개혁가들로 이루어진 좌파로 갈라져 그 사이에 종교철학적인 중심이 생겨나게 되었다. 보수 우파는 요제프 2세의 조카인 황제 프란츠 1세에 의지하였으며, 프란츠 1세는 중앙집권화 방법을 완성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체코 지식인들이 1840년 무렵까지 협력했던 뵈멘에서는 요제프 2세의 합리주의적인 신앙을 찬양한 자들이 계속 버티고 있었다."[각주:19] 이렇게 빈에서는 요제프주의와 더불어 관료주의적인 억압이 발달한 반면 뵈멘의 요제프주의는 철학과 문학의 르네상스를 촉진시켰다. 이렇게 요제프주의는 "이성이 공무와 종교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원칙을 가지고 모든 파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계몽의 수단과 목적을 도입했다."[각주:20] 프란츠 1세와 메테르니히는 합리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이성적 계획을 이용하였고, 반대로 볼차노와 슈테를베르크와 같은 개혁적 가톨릭주의자들은 종교와 자연과학의 조화를 위해 힘썼다.[각주:21]

프란츠 1세 치하에서 행정적 요제프주의는 정치적 체념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황제 역시 이런 정신에 빠져,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1809년 메테르니히 후작이 정부를 조직해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면서, 요제프주의 관료들은 일반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검열, 비밀경찰, 번거로운 행정절차를 사용하였다.[각주:22] 이와 동시에 헝가리와 뵈멘에서는 정치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욕구가 존속하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졌다.

메테르니히 치하에서 빈의 연극, 음악, 회화 전통은 비더마이어라는 특유의 문화를 배출하게 된다.

 

이 명칭은 칼스루에 근처 두어라흐 출신의 유머 작가 아이히로트Ludwig Eichrodt가 1855년 경에 만든 고틀립 비더마이어Gottlieb Biedermeier라는 슈바벤의 교사를 풍자한 인물에서 비롯됐다. 아이히로트는 (...) 취미 삼아 시를 쓰던 자기 학교 선생인 자우터Friedrich Sauter(1766-1846)를 본떠 비더마이어 인물을 만들었다. 법을 잘 지키는 정직한 시골 학교 선생은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도 3월 혁명 이전 시대(1815-1848)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 계층 문화의 상징이 됐다. 비더마이어란 용어는 1906년 유겐트 양식의 지지자들이 1848년 이전의 실내장식에 대한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되살아났으며, 1923년 클룩혼Paul Kluckhohn은 해당 시기의 문학까지 이 개념에 포함시켜 사용했다.[각주:23]

비더마이어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항존하는 미적인 쾌락과 결부된 정치적 체념과 가톨릭적 신앙심의 결합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각주:24] 사회학적으로 비더마이어는 순수한 산업화 이전 사회가 점점 사라지는 시기를 뜻한다. 비더마이어 시대의 오스트리아는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공동사회Gemeinschaft를 유지한 반면, 비더마이어 이후부터 이익사회Gesellschaft라는 산업자본사회가 생겨났다. 공동사회가 오스트리아에서 1870년까지 존속되었다는 사실은 공동사회로부터 이익사회로의 급격한 이행 및 양자의 공속을 이루어낸 시기라는 점에서 오스트리아의 독특한 문화형성에 기여하였다.

비더마이어 문화는 중류계급으로 하여금 귀족들이 전념했던 미적분야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시민 계층은 정치를 외면하고 예술활동으로 도피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예술가가 슈베르트(1797-1828)이다. 슈베르트의 가정음악에 대한 관심 역시 소품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애착(향수), 정치적 무관심, 미적 쾌락의 추구,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공존 등이 비더마이어 문화를 이루고 있는 중추적인 요소들이다. 박물관이 건립되었고, 조형예술에 있어 모든 기념물에 현재를 고착시키고 싶어하는 욕구가 반영됐다. 문학에서는 이른바 "보통사람" 주인공으로 대두되었다. "보통사람"은 관료주의와 귀족사회에 대해 서민으로서 체념하면서도 지위가 낮은 사람이 신의 창조법칙에 순응하며 신의 창조물에 기쁨을 느끼는 인물이다.

비더마이어 문화에서 가장 발전했던 예술장르는 다름아닌 연극이었다.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1790-1836)의 익살스러운 마법극, 풍자기술을 완성시킨 빈의 네스트로이Johann Nestroy(1801-1862) 등이 있었으며, 네스트로이의 말장난은 검열관마저 농락하기 일쑤였다. 여기서 네스트로이의 유명한 경구(“진보가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서문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비트겐슈타인이 서구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자신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할거라면서 이 책은 "신의 영광을 위해 씌여졌다."라고 썼을 때, 우리는 이를 쉽게 네스트로이와 비더마이어 문화에 연관시킬 수 있다.

비더마이어 극작가들은 바로크적 사고방식-세상을 극장으로 보는태도-를 부활시켰다. 그릴파르처는 <꿈같은 인생Der Traum ein Leben>(1834)에서 칼데론의 말을 빌려 관객에게 하늘과 땅, 현실과 환상에 관한 바로크적 해석을 가르쳐주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일종의 위계질서라고 상기시켜주었다. 체념은 죽음과 공생관계에 있었는데, 그릴파르처는 죽음을 훌륭한 위로자로 묘사하면서 이를 보여주었다. 오스트리아 지식인들은 어떤 치유책도 제안하지 않는 치유 허무주의Therapeutischer Nihilismus를 만들어냈다.

브레히트Brecht는 1913-1925년 빈의 독문학자이자 문예비평가로 활동하며 오스트리아의 비더마이어 문화를 프로이센과 비교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200년 전에 독일 전체가 가지고 있었던 문화적 가치를 20세기 넘도록 유지했다고 주장하였다. 지방분권주의, 가족의 결속, 국가의식 결핍 등은 공동사회의 특징이며,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지속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브레히트에 의하면 규칙 위반을 못 본 채 함으로써 규칙을 교묘히 피하는 태도는 관료주의의 부수현상으로 비능률적인 명령 집행의 일환이다. 이는 독일어로 칠칠맞음, 흐리멍덩함을 뜻하는 슐람페라이Schlamperei로 알려져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슐람페라이를 프로이센적 규율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힘과 약함의 원천을 뜻했다.

"하위 계층에게 있어 이 해이 상태는 하급자들이 보통사람을 자기네와 같은 부류로 보고 동정함으로써 매수와 통사정이 가능하게 된 데서 나왔다. 상급 관료들에 있어서 이와 비슷한 슐람페라이는 봉건적 가치가 남아 있는 데서 생겼다. 관리가 대공이나 백작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예의였기 때문이다. 파슨스의 용어로 말해 하급 관리들은 지방분권적인 견해를 지켜가고 있는 반면 상급 관료들은 성과보다 근무 지침을 더 높이 쳤던 것이다."[각주:25][각주:26]

빅토르 아들러는 오스트리아 정부를 두고 "슐람페라이로 말미암아 누그러진 절대주의"라고 일컬었다.[각주:27] 여기에는 반프로이센적인 느슨한 삶을 찬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휴고 호프만스탈 역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인에 관한 개요>(1917)에서 훌륭한 다양성, 인간성, 전통을 들어 오스트리아 사람을 찬양하였다.[각주:28]  "그는 여기서 퇴니스의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이분법을 요약, 설명하면서 오스트리아가 산업화 이전의 가치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각주:29] 비록 지방의 관습이 상위법에 위협받고는 있었으나, 슐람페라이는 오스트리아에서 1938년까지 존속했다.[각주:30]

오스트리아 지식인을 설명할 때, 유대인 철학자들의 독창적 영향력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슈니츨러, 크라우스, 카프카 같은 문학가들, 프로이트, 후설, 바이닝거, 비트겐슈타인, 말러와 같은 이론가들이 오스트리아 철학사를 수놓고 있다. 정신분석학과 오스트리아 마르크시즘에서 유대인들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사유를 도운 것은 유대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베네딕트Benedikt가 이끄는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지는 유대인에 의해 유대인을 위해 쓰여진 자유로운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카를 크라우스의 <횃불Fackel>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민족종교에 힘입어 유대인들은 일종의 원시적 단일체를 고수했고 그 덕분에 동화작용이라는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동화작용은 두 가지 상이한 태도, 즉 현세적 문화에 동조하는 긍정적 행동과 유대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부정적 행동이 연관된다.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반유대주의자들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혈통을 떠올리게 되지만 대다수 동화된 유대인에게는 독일어 문화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곧 종교적 관습의 포기를 뜻했다. 유대인들은 신자나 비신자를 막론하고 벤 하퍼른이 말한 '운명 공동체'로 묶인 채 유대교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각주:31]

 

유대인 아이들은 1880년까지 최소한의 히브리어를 배웠다. 또한 그들은 탈무드를 공부했는데, 벨리코프스크Velikovsky에 따르면, 대다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기도하며 신을 우상으로 재현하는 것이 금지돼 추상적 사고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일찍부터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단련된 변증법적 언술을 지니고 있었다. 브로흐Hermann Broch는, 유대인들의 종교성에서 또 다른 특징을 찾아낸다. 그에 따르면, 생명에 대한 공경이 율법의 기초를 이루며, 신성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신에 대해 도달할 수 없다는 겸손의 태도를 배운다. 브로흐, 후설, 헤르츨, 카를 크라우스의 사상에는 이러한 신의 고고함-어떤 인간의 행위도 신을 진정시킬 수 없음-이 나타난다.

유대인들이 겪었던 또 다른 교육은 노골적 차별에 대한 불안과 굴욕감을 느낌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들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또 굴욕을 익살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굴욕은 또한, 손쉽게 자기혐오로 이어지곤 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는 물론 오토 바이닝거이다. 그는 유대인 특유의 수동성을 (그가 혐오해 마지않는) 여성성과 동일한 것으로 놓을 정도로 자기 혐오에 빠져있었다. 바이닝거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비트겐슈타인 역시, 그의 일기에서 반 유대주의적인 저술을 남기곤 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 사상의 수많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긴장과 모순은 유대인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독창적인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냈지만,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마르Wilhelm Marr가 1889년 유대인 기질Semitismus, Semitism이란 용어를 만들어냈고, 농촌 경제에서 상호 보완 관계에 있었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산업화 시기로 접어들자 경쟁 관계로 넘어갔다. 이러한 경쟁에서 밀려난 수공업자, 소매상인 농민들이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영국,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프랑스에서는 경제 발전이 유대인이 출현하기 전에 이뤄졌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산업화는 1848년 이후, 그러니까 유대인이 해방된 이후에 시작됐다. 자본주의의 경쟁이 시작될 경우 유대인들은 걸출한 벼락부자가 되어 나타나 중하위층들을 깊은 좌절감에 빠뜨렸다."[각주:32]

"1800년대 이후 오스트리아에선 작가와 사회의 소원한 관계가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유대 지식인들이었다. 그와는 달리 헝가리의 유대인들은 더 동화될 태세가 돼 있었을 뿐이며, 작가들은 대체로 독자들의 존경을 누리고 있었다. 가장 고생이 심했던 것은 뵈멘이었는데, (...) 뵈멘의 많은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 가운데는 말러, 켈젠이 있었으며, 크라우스 역시 한동안 가톨릭이었다. 한편 아들러[각주:33]같은 사람들은 신교를 받아들였다."[각주:34]

   "빈에서는 농촌의 유대인들이 몰려들며 반유대주의가 심해졌다. 1923년 경 빈의 유대인 수는 20만명으로 주민의 10퍼센트에 이르렀다. 1900년 이후 빈의 거리에서 민족의상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유대인과 터키인뿐이었다."[각주:35]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어째서 독일의 유대인들보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이 그렇게 더 혁신적이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존스턴은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에서는 유대인들이 농촌지역에도 살고 있었다."[각주:36]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독일과 프랑스의 유대인들이 도시의 유대인 거주지역에 살았던 반면에, 오스트리아에서는 농촌 지역 유대인들이 곧장 도시로 올라오면서 토지 및 신비주의와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각주:37]

  1. 윌리엄 존스턴,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번역 고원, 김래현, 변학수, 사순옥, 신혜양, 오용록, 이기식, 채연숙, 주 문학동네, 2008, p.31 [본문으로]
  2. 1122년 8월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와 로마 교황 칼리스투스 2세가 체결한 협약. 11세기 후반부터의 서임권(敍任權) 다툼을 해결한 것으로, 그 내용은 순전히타협적이다. 성직자의 세속적인 지위와 종교적 측면을 엄격히 구분하여, 주교·대수도원장직은 성직자가 뽑도록 하나, 후보가 여러 명일 때는 황제가 결정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성직에 뽑힌 자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신으로서권력·특권 등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름스협약 [Concordat of Worms] (두산백과) [본문으로]
  3. 독일 역사상 국왕(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1254(또는 1256년)~1273년. 1254년 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1256년 대립왕(對立王) 네덜란드 백작 빌헬름이 죽자 정정(政情)이 어지러워졌으며, 라인 지방의 제후(諸侯)는 영국왕의 영향 아래 리처드 오브 콘월(영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을 추대하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왕의 지지 밑에 아폰소(카스티야왕)를 옹립하여, 제위(帝位)는 사실상 공백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選帝會議)에서 합스부르크왕가(王家)의 루돌프 1세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대공위시대는 종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공위시대 [Interregnum, 大空位時代] (두산백과) [본문으로]
  4. Ibid. p.32-33 [본문으로]
  5. Ibid. p.35 [본문으로]
  6. Ibid. p.36 [본문으로]
  7.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8.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9. Ibid. p.37 [본문으로]
  10.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11.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12. Ibid. p.38 [본문으로]
  13. Ibid. p.38 [본문으로]
  14. Ibid. p.39 [본문으로]
  15. Ibid. p.40 [본문으로]
  16. Ibid. p.41 [본문으로]
  17.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18. Ibid. p.42 [본문으로]
  19.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20. Ibid. p.43 [본문으로]
  21.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22. Ibid. p.44 [본문으로]
  23. Ibid. p.44-45 [본문으로]
  24. Ibid. p.45 [본문으로]
  25. Ibid. p.50 [본문으로]
  26. 파슨스가 말한 공동사회는 "지방분권주의적"이고 "귀속적"이다. 이익사회는 보편주의적이고 업적지향적이다. 파슨스의 유형들을 1800년 무렵의 오스트리아에 적용하면 군주와 농부가 지방의 기준을 지키며 각자 물려받은 기능을 수행했던 것처럼 보인다. 오스트리아에선 산업화가 늦어졌기 때문에 통일된 기준과 성과지향성이 농촌지역에 적합한 지방분권주의적이고 귀속적인 특성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본문으로]
  27. Ibid. p.50 [본문으로]
  28.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29.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30.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31. Ibid. p.52 [본문으로]
  32. Ibid. p.57 [본문으로]
  33. 요즘 유행하는 아들러 심리학의 그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 맞다. [본문으로]
  34. Ibid. p.56 [본문으로]
  35. Ibid. p.57 [본문으로]
  36. Ibid. p.60 [본문으로]
  37. Ibid. 같은 곳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