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경. (2017). 이동하는 북한 여성의 원거리 모성: 친밀성의 재구성과 수치심의 가능성. 문화와 사회, 23, 265-309.
Kim, Sung Kyung (2017). Mobile North Korean Women and their Distant Motherhood: Reconstruction of Intimacy and Possibility of the Sense of Shame. The Korean Journal of Cultural Sociology (KJCS), 23, 265-309.
Ⅰ. 들어가며
북한 체제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더 쉽게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주도 산업의 일자리에 남성을 우선적으로 배치한 북한의 가부장적 정치경제 구조 때문이다. 식량난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사회 전반에 공고하게 작동하는 가부장제는 역설적이게도 권력구조와 경 제체제의 측면에서 소외되어 있는 여성들에게 더 많은 이동의 기회를 제 공하게 된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식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표 방하면서 중공업 우선주의를 내세운 북한은 국가 주도의 중공업 산업에 남성 노동력을 집중시켰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국가의 통제가 느슨한 경 공업이나 가정2)에 머물게 하였다(박영자, 2004; 이미경, 2004a; 2004b).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북한의 식량난에서 국가 주도의 산업에 복무 하는 남성은 직장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고, 국가 또한 기간산업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남성 인력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계속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국가의 통제에서 자유로웠던 여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 마당에서 물건을 사고팔기 시작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성은 주거지 주변을 이동하며 소규모 장사를 하다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 무역 사업에 뛰어들기도 하고, 상당수는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노동이주 를 떠났다(Kim, 2014). [266-267]
때마침 돌봄 노동의 영역에서 여성 노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중국 쪽 접경지역은 북한 여성의 이동을 추동(pull factor)하였다. 북한과 국경 을 마주한 중국의 동북 3성3)은 19세기 이래로 조선족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도시화와 한국으로의 노 동·결혼 이주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조선족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한 곳 이다. 특히 농촌지역의 여성 인구가 중국의 연안도시나 한국으로 급격 하게 유출되어 성비 불균형 문제가 크게 대두되면서, 결혼이나 돌봄 노 동의 영역에서 여성 인력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었다(최재현·김숙진, 2016: 179). 이런 맥락에서 북한 여성은 조선족 여성이 떠나버린 동북 3 성에서 불법적이나마 정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는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 이주자이기도 하고, 또 다른 상당수는 조선족이나 한족 남자와 함께 살면서 정착하는 ‘결혼’ 이주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초국적 이주의 광풍으로 해체되어 버린 중국 조선족 사회는 북한 여성이 중국에서 정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상당수의 북한 여성이 경제력이나 네트워크 등을 구축하여 한국이나 제3국을 향 한 또 다른 이동을 감행할 수 있는 피난처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267-268]
이렇듯 북한여성의 이동은 그 면면이 젠더적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동 은 ‘북한’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로 인해서 젠더적 시각에서 충분 히 다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북한 주민의 이동을 정치적 망명이나 강제적 이주로만 분석하려는 시각이 주류 학계에 팽배하고, 이 동하는 북한 여성의 행위주체성을 주목한 몇 안 되는 연구도 이들의 초 국적 경험에서 실천되는 모성에 대한 문제까지는 다루지 못했다(이희영, 2012; 김성경, 2013). [268]
본 논문은 북한 여성의 초 국적 모성의 실천 양식을 원거리 모성이라고 명명하고, 모국과 정착국 사이의 지리적 공간성, 합법과 불법이라는 신분의 차이, 정착지에서의 정착 정도에 따라 다양한 원거리 모성 실천이 수행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자 한다. 한편, 원거리 모성 실천을 추동해내는 감정 체계로 본 글이 주 목하고 있는 것은 죄의식과 수치심인데, 특히 본 연구는 기존의 페미니 즘 논의에서 가부장적 모성이데올로기의 억압기제로 주목해온 죄의식이 북한 출신 어머니들의 경험을 통해서 수치심으로 확장되고 있음에 주목 한다. 이는 이동이 점차적으로 보편화되어가는 현 상황에서 자녀와 물리 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어머니 이주자들이 자신을 자책하거 나 죄의식에 고통 받으며 기존의 가부장적 모성이데올로기를 재생산 하 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윤리적 질문을 통한 진정한 주체로의 이행 가능성을 탐색하게 할 것이다. [269]
Ⅱ. 이동하는 여성의 초국적 모성
글로벌 이주의 가장 도드라진 특성은 바로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인데, 그만큼 많은 여성들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 혹은 재 이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글로벌 돌봄 노동 산업의 등장과 성산업 등 은 여성을 이동하는 주체로 만들었고, 이주여성 중 대부분은 어머니 이 주자(migrant mother)이다. 초국적주의 시각에서 어머니 이주자는 초국적 연결망의 중요한 행위주체인데, 그 이유는 그녀들이 본국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272]
페미니즘과 사회구성주의의 등장으로 ‘자연적’으로 여겨졌던 모성 은 존재하지 않으며, 불변의 보편적인 모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 장이 대두되었다(Glenn, 1994: 4). 오히려 모성이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양육과 돌봄의 영역 내 구축된 사회적 행위와 관계 등의 총체로 해석하 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Forcey, 1994: 357). 하지만 가부장제는 특정 모성 실천을 ‘보편적 사실(universal truth)’로 명명하고, 이를 ‘진리’로 둔갑시킨다. 오릴리(O’Reilly)는 보편적 모성의 특징을 1) 생물학적 어머니가 아이들의 돌봄에 가장 적합하며, 2) 어머니 노릇은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하며, 3) 아이들이 욕구가 항상 어머니의 필 요보다 중요시되어야 하고, 3) 어머니는 전문적이어야 하며, 5) 어머니는 모성을 통해 완성되며, 6) 어머니는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서 경제적, 감 정적, 시간적 자원을 아낌없이 희생해야만 하고, 7) 어머니는 책임은 지 워지지만, 그에 따른 권력을 갖기 어렵고, 8) 자녀 양육은 정치적 의미가 없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으로 정의한다(O’Reilly 2004; 2010: 20). [274-275]
이렇듯 공유되는 모성의 특성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 서,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요 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 양육과 돌봄의 실천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 이 ‘이상적인 어머니’가 될 수 없음을 깨닫기 쉽다. 다시 말해, 이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 상’과 ‘현실’의 어머니 자신 사이의 괴리가 상당수의 여성들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갖게 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275]
자녀와 함께 할 수 없는 어머니 이주자는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 에 휩싸이게 되고, 이 때문에 강한 죄의식에 노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머니 이주자는 송금, 경제적 이득, 자신들이 제공하는 교육의 기회 등에 대해서 도덕적인 가치를 높게 책정 하면서, 자신들의 이주는 자녀들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 니라 송금, 선물, 교육의 기회 등을 사랑과 애정의 증표라고 의미화 하는 경향도 발견된다. 자녀의 곁에서 돌봄과 양육을 수행하지는 못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송금과 선물이 더 중요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 머니 이주자가 자녀 곁에서 머무는 어머니보다 도덕적으로 더 높은 위치 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276]
Ⅲ. 북한 여성의 원거리 모성: 이동의 촉매 혹은 결과
국가 건설기의 북한은 한국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 노 동력이 절실했다. 이 때문에 여성을 노동의 주체로 호명하는 것은 전쟁 극복과 경제 개발에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하지만 북한 여성은 가부장제 내의 ‘전통적’ 여성의 역할과 의무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또 다른 노동의 의무를 지게 되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모두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박영자, 2004: 318-321). [277]
북한 체제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여성’은 혁명적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인자하고 강인한 어머니이다.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과 김일성의 부 인이면서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은 북한 체제가 오랫동안 선전해온 이상적인 여성상의 상징인데, 이 두 여성은 모두 지도자들의 어머니면서, 혁명적 자세를 갖춘 전사의 모습을 띤다. 국가와 사회주의 혁명 대열에 서는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적극적 정치주체이며, 동시에 가족 내에서 는 자녀 교육을 책임지는 존재로 재현되는 것이다. 특히 김일성은 여성 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책무가 바로 자녀 교육이라고 강조하였다(김일성, 1974: 108; Jung and Dalton, 2006: 748에서 재인용). 주체사상에 충실한 다음 세대를 양육해내는 것이 북한 여성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선전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에서는 ‘어머니’가 아닌 ‘여성’은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278]
이주의 촉매제로서의 ‘북한적 모성’은 이들이 체류국을 결정하는 것에 도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북한 여성은 송금과 같은 경제적 부양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며, 도덕적인 모성 실천이라고 진술하 는 경향이 있다. 물리적으로는 자녀의 곁을 떠났지만, 정기적 송금과 경 제적 지원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높은 수준의 친밀성을 공유한다고 느낀 다. 예컨대 박옥희씨는 자신이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시작하여, 자녀 에게 안정적인 경제적 지원을 하게 되면서 “그래도 제대로 어머니 역할” 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 아들이 11살 되던 해에 사고로 죽게 되면서, 남은 아들 하나의 뒷바라지가 그녀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된 것 이다. “난 정말 모든 걸 다 보내. 북한이 과일 이런 게 진짜 귀하거든. 그래서 딸기까지 중국에서 다 보내. 여기 과일이 좋잖아. 이만한(손바닥 을 가리키며) 딸기 이런 것 다 보내”. 박옥희씨의 아들은 어머니의 경제 적 도움으로 북한에서 특별한 직장 없이 그냥 지내는데, 그래도 그녀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자신이 힘닿는 한 아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모든 지원을 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자기가 필요한 것, 원하는 것만 말하는 아들”이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절 때 따뜻한 밥 한 끼 못해준 불쌍한 아들”에게 아낌없는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것으로 보 상하려는 시도를 한다. [280]
게다가 사실상 불법 적 지위로 인해 정착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머물러 있을 확률이 높고, 호모사케르(homo-sacer)면서 ‘예외적 상태’ 속에 살아가는 그들이 북한에서부터 구축한 기존의 모성성을 적극적으로 수정하기는 어렵다. 다리가 불편한 조선족 노인을 간병하면서 받는 월급 2,000원에서 20-30 원 빼고는 모두 모아서 아들에게 보낸다는 이순이씨, 자신의 송금에 30 여 명의 목숨이 달렸다며 김치와 나물 하나로 점심을 먹으며 쉼 없이 일 하는 금영숙씨, 그나마 자식들의 목소리라도 마음껏 들을 수 있어 한국 으로의 이주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허남영씨의 삶은 온통 ‘어머니’의 역할에 집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접경지역의 특성상 북한과 근접해 있는 중국에서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자녀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고, 이는 이들이 중국에 있으면서도 마치 ‘북한’에 있는 것과 같이 ‘북한적 모성’ 을 실천하게 한다. 예컨대 금영숙씨의 경우에는 자녀와 자주 통화하기도 하고, 화교를 통해서 자녀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최근 북한 사 정은 어떤지 항상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녀는 일하는 것이 힘들다 가도, 북한에서 자녀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쉴 수가 없다. [283]
반면에 한국으로 이주한 북한 여성은 좀 더 적극적으로 ‘북한적 모성 성 ’을 수정하는 경향이 있다. 합법적 지위를 갖게 된 북한 여성은 더 이 상 ‘예외상태’가 아닌, ‘정상적’ 삶의 궤적에 재진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정착국인 한국의 문화, 사회적 규범과 가치 등을 학습하 려는 시도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고, 그만큼 정착과 적응을 삶의 중요 한 목적 혹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즉,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상적인 모성성’을 체화하기도 하고, 기존의 자신들이 내재화한 모성성 을 새로운 가능성과 한계를 감안하여 변화시키기도 한다. 이제 이들은 단순히 송금하는 것으로는 도덕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자리만 잡히면 자녀를 데려오겠다는 엘리트 탈북자 김영주씨, 몇 년간의 노력 끝에 결국 얼마 전에 아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온 최미숙씨, 아이보다는 내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박선영씨, 그 리고 아들이 자신을 부양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으 면서 아들의 부담을 덜어줬다고 생각하는 김혜영씨까지 이들이 생각하 는 ‘어머니 노릇’은 경제적 지원에 머물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양상 이다. 김영주씨와 최미숙씨의 경우에는 남한 어머니들이 자녀들과의 감 정적 연대와 친밀감의 확대 등에 집중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자신도 자 녀들과의 정서적 교감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284]
남겨둔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심연에서 끊 임없이 이들을 괴롭히고 있다. 할 만큼 했다는 식의 자기 방어적 표현이 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연락해봤자 좋은 것이 없다는 현실적 판단, 그리고 남겨진 자녀가 과도하게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책망 등은 이들이 아무리 자녀에 대해서 무관심한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그 이면에는 아직도 ‘이상적인 어머니’라는 모성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극 복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286]
Ⅳ. 모성 실천 이면의 감정: 이순이씨와 박선영씨의 사례
이순이씨는 2012년부터 같은 조선족 노인과 함께 살면서 돌봄 노동과 사실혼이 혼재된 일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지독한 관절염을 앓고 있지 만, 약값까지 아껴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송금하려고 노력한다. 가 끔씩 전화로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데, 그때마다 아들은 울면서 “우리 어 머니. 늙은 우리 어머니. 이렇게 고생시켜서. 어머니 때문에 우리 다 삽 니다. 늙은 어머니. 죄스러워 죽겠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 돌 아오시오. 돌아오시오” 이렇게 목 놓아 운다고 한다. 그럴 때면 그래도 본인이 여기서 조금이라도 돈을 보내 자식들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마 음이 든든해진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노력이 자식들에게 인정받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이순이씨는 자신이 보내는 송금으로 자식뿐만 아 니라 손자, 손녀, 고손녀 까지 20여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만큼 자식들이 자신을 여전히 좋은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고, 장성한 아들딸이 지만 송금이나 물품 등을 보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식과 감정적으로 친밀함을 느낀다. 이순이씨는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죽을 만큼 간 절”하지만, “그래도 여기 남아서 조금이라도 자식들한테 보태줘야 해서” 당분간은 더 있어야만 한다고 되뇐다.[288]
평범한 노동자로서, 장마당 에서 장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기 위 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이주한 사례이다. 그녀가 북한에 남겨두고 온 딸은 이미 성인이 되었고, 중국에 있는 동안 사는 것이 팍 팍해서 그만 딸과의 연락을 이어갈 수 없었다. 탈북한 처지에 괜히 딸에 게 연락했다가 오히려 딸의 안전이 위협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 다. 접경지역에서 식당을 전전하면서 일했던 박선영씨는 차라리 결혼해 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어 매매혼을 선택하였고, “배운 것 없이 착하디, 착한 한족 농부”와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그 사이에 남자 아이를 출산 하게 되었지만, 시골구석에서 밥이나 먹으면서 사는 것보단 한국에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한족 남편을 중국에 남겨둔 채 어린 아들과 한국행 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정착하면 남편을 부르겠다고 하기는 했 지만, 처음부터 남편과 평생 살 생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어린 아들을 중국에 두고 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 먼 길을 아이와 함께 떠났다. [289-290]
몇 달 후 가을에 다시 만난 박선영씨는 아들을 중국의 남편에게 보냈다고 담담히 털어놓았다. 제대로 “어머니 노릇”을 하기 위해서 아들을 중국으로 보냈 다고 설명하면서, “한국에서 돈을 벌어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주변에서 모진 엄마라는 비난 섞인 눈초리를 의식해서 그런지,11) 그녀는 중국에 “돈만” 보내면 그곳 환경이 오히려 아이에게 훨씬 더 좋다고 내게 반복해서 설명하였다. 한 국에서 살면서 탈북자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 사는 것보다 중국에서 떳 떳하게 중국인으로 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290]
예컨대 이순이씨는 자녀들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는 단순한 죄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노력 여하(송금)에 따라 더 나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한 사례다. 반면에 박선영씨의 경우에는 살아남기 위해 이상적인 어 머니가 되는 것을 포기한 자신을 자책하고, 그 과정에서 자녀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마음 깊이 숨기려는 시도를 한다. [292]
예컨대 어머니에게 지워진 양육과 부양의 의무라는 사회문화적 원칙을 지키지 않고, 양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인적 욕망에 더 천착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바로 죄의식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즉, 죄의식은 ‘나쁜’ 어머니의 행동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감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나 피해의식 등으로 전개될 수 있기에 문제적이다. 반면 수치심은 죄의식보다는 좀 더 관계적이면서 윤리적인 고민으로서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이상적인 어머니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자신을 마주하는 것으로 이상적인 상에 다다르기 위한 의지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292-293]
Ⅴ. 남겨두고 떠난 자의 수치심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이주여성의 모성과 수치심의 관계성과 함께 ‘북한’ 출신 여성이 가족을 남겨둔 채 자신만 ‘북한’을 떠났다는 사실에 대한 감정이다. 예컨대 중국에서 정주하고 있는 연구 참여자들은 북에 남겨둔 자녀에 대한 엄청난 책임감을 보여주는데, 참여자 모두는 어머니로서 자녀의 양육과 보호를 맡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한걸음 더 나 아가 자녀의 삶 자체를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이 유는 자신들은 북한의 열악한 환경에서 한걸음 비껴나가 있고, 적어도 자녀들의 삶 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기인한 다. 불법적 신분이기는 하지만 더 많은 문명 기술적 혜택을 누리면서 살 고 있는 처지 또한 자녀에 대한 부채의식에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즉,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들만 빠져나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이 이상 적인 어머니가 되지 못한 ‘부족한’ 어머니로서 느끼는 수치심과 함께 뒤 엉켜 자녀들에 대한 이들의 절대적 책임감과 부채의식을 만들어낸다. 뿐 만 아니라 중국에서 살고 있는 연구 참여자의 대부분(진영미씨만 제외하 고)은 자녀를 잃어본 경험이 있는 어머니들이었고, 이들은 남아있는 자 녀들의 생계를 위해서 중국으로 이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자식 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더불어 자녀를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 인 북한에 남겨두고 혼자서 중국으로 이주해왔다는 사실은 일상의 매 순 간마다 ‘자녀를 남겨두고 혼자 떠난 자’의 수치심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296]
Ⅵ. 나가며
본 연구는 이동하는 북한 여성들의 모성 실천의 추동 기제로 북한 출 신 어머니들의 죄의식과 수치심을 주목하였다. 죄의식은 여성 스스로 ‘희생적이고 훌륭한 어머니’가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쫓는 행위를 하는 것에서 발생되는 도덕 감정을 의미한다. 즉 여러 상황으로 인해 ‘나쁜’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북한 출신 어머니는 자녀에 대한 죄의식에 노 출될 확률이 높고, 이는 자녀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긍정적 감정이나 행 동 규범으로 확장되는 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 이유는 죄의식이 관계적 인 감정이기 보다는 스스로 내면의 처벌에 머무는 경우가 많고, 동시에 기존의 억압적인 모성이데올로기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 서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임에 분명하다. 반면에 수치심으로 감정의 전이 를 경험하고 있는 북한 출신 어머니들은 자신이 ‘이상적 어머니’에 비해 서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반성하며, 동시에 이를 극복하여 조금이 라도 더 나은 윤리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모색한다는 측면에서 전복적 가 능성을 띤 도덕 감정이라고 하겠다 [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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