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웅. (2013). 이산 속의 북한여성: 하위주체로서의 여성의 삶과 정체성의 정치. 아세아연구, 56(2), 269-302.
Kang, Jin Woong (2013). North Korean Women in the Diaspora: Subaltern Women’s Lives and Identity Politics. The Journal of Asiatic Studies, 56(2), 269-302.
I. 들어가며
본 논문은 북한 여성 주체를 지배 권력과 담론에 의한 희생자로 보는 타자 화된 시선을 극복하고자 하며 하위주체로서 북한 여성들이 젠더화된 사회구조 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으면서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정체성의 정치를 실천하는 과정을 드러내고자 한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서도 논의되었듯이, 젠더화된 하위주체로 위치되는 제3세계 여성의 삶은 반드시 서구/비서구, 지 배/피지배, 남성/여성의 이분법에 의해 타자화된 희생양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Minh-ha 1989; Mohanty 2003; Spivak 1988). 이러한 이분법에서 타 자화되는 여성들은 타자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기존 사회질서에 비판적으로 교섭하는 적극적인 행위 주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270-271]
II. 이론적 배경: 하위주체로서의 여성과 이산적 정체성
이러한 배경에서 사회주의, 경제난, 탈북, 한국정착 등 이산과 사회적 격변 을 경험해 온 북한 여성들의 정체성의 문제는 젠더화된 하위주체의 수동성과 능동성의 역동적인 변화를 잘 드러내준다. 북한 사회주의 국가건설 과정에서 여성은 이념적으로 혁명적인 주체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주 체로 설정되었지만 실제로 이들의 삶과 지위는 경제적 동원과 국가권력의 대 상이자 수단으로 전락했다. 반면, 경제난, 탈북 및 한국정착 등 심각한 사회변 화에 직면할 때 하위주체로서의 여성들은 사회변동에 맞물려 변화하고 때론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이끄는 능동적인 주체로 올라서기도 한다. 경제난으로 부터 탈북 및 한국정착에 이르는 현대 북한여성들의 이산의 삶은 이러한 하위 주체로서의 여성의 지위와 정체성의 문제를 다시금 평가하게 한다. [273]
결국 이산의 과정에서 정체성의 정치란 ‘무엇이냐’(being)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becoming)의 문제가 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 속의 구축물로 이해되어야 한다(Hall 1990). 기본적으로 주류집 단의 정치적 기제 속에서 억압과 배제를 경험하는 여성 주체들의 대응은 ‘차이 의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 나 이러한 차이의 정치는 단순히 지배집단의 권력에 저항하는 대항헤게모니로 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의 권력, 담론, 정치문화와 융화, 교섭, 갈등하 는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Ong 1996). 따라서 급 격한 사회변화 및 이주의 경험을 통해 경계에 놓인 소수자 그룹의 정체성은 차 이성, 다양성, 혼성성의 다양한 맥락을 반영하는 것이다(Hall 1990, 235). 탈북 과 이산을 통해 한국에 정착한 북한 여성들은 과거의 부정과 현재의 모순된 삶 속에서 이방인적 경계를 넘나들며 현재의 국가와 젠더질서 속에서 동화, 교섭, 모순 등의 과정을 통해 주체화된 삶을 지향하고 있다. 과거의 삶과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 하는 새로운 하위주체로서의 능동성은 다시 한국사회의 제도와 문화 및 젠더정치 속에서 재구성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Choo 2006). [274]
IV. 경제난과 탈북, 북한 여성들의 정체성의 변화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북한사회에서 사회주의 여성해방 담론은 변화하 지 않는 정권의 선전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해방 담론과 정책은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간극에서 실질적으로 후퇴되어 왔다. 1946년 7월 30일 공포된 남녀평등권 법령에 의해 제도적인 관점에서 남녀평등이 옹호되었고 여 성의 사회진출 역시 적극 권장되었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실질적인 개혁은 여성의 경제동원을 위한 사회참여에 모아졌 다. 김일성은 1971년 10월 7일 조선민주여성동맹 제4차 대회에서 “우리 당은 녀성들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기 위하여 커다란 국가적 부담을 무릅쓰면서 녀성들의 사회진출을 적극 장려하고 있으며 더욱더 많은 녀성들이 사회에 나 와 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김일성 1984, 383)라면서 여성의 노동계급 화를 모토로 한 경제적 동원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참여와 노동에 대한 권리 보장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가사일과 전통적인 성별분업은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정의 혁명화와 후대교양사업의 명목으로 여성의 젠더화된 하위주체로서의 지위는 현대적인 방식에서 더욱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11월 16일 전국어머니대회에서 김일성은 여성 동원의 목표를 “모든 녀 성들을 공산주의 어머니로, 후세들에 대한 훌륭한 공산주의 교양자로 만들며 그들을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하는 것”(김일성 1981, 351)이 라고 강조하고 여성들이 가정 밖에선 전투적인 산업역군으로, 가정 내에선 2 세대를 양육하는 ‘공산주의 어머니’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276-277]
이러한 여성 담론에서 북한 여성의 여성성(femininity)은 ‘모성’(mother hood)으로 강조되는 반면 진정한 ‘여성성’(womanhood)은 부재하게 되는 것 이다(Ryang 2000). 가사노동과 일상에서의 성별 차별구조뿐만 아니라 길거리 에서 담배를 피운 여성이 처벌을 받는 일들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Halliday 1985). 이에 대해 응답자 1은 남한과 북한의 성평등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북한에서의 성평등은 국가건설과 사회참여에서 의 제도적 평등이지 가정과 사회에서의 남녀간 문화적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의 젠더화된 하위주체로서 북한 여성은 혁명건 설의 노동자이자 사회주의 2세대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 만 여성 그 자체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근대 북한여성 의 정체성의 정치는 ‘망각 속에 있는 젠더’ 정치였던 것이다(Ryang 2000). [278]
1. 경제난과 ‘적극적 생산주체’로서의 여성
실제로 북한 여성 70% 이상이 장사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안 인해 2001). 이러한 변화로 인해 생계 담당자로서 여성들이 이전처럼 남편 말 에 순종하지 않거나 이혼하는 경향이 증가했고 남자들 또한 시키지 않아도 여 성의 집안일을 거드는 등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가정내 성별분업과 위계구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279]
그러나 경제난으로 인해 남녀간 엄격한 성별분업이 이완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가정내의 기본적인 가부장적 질서가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279-280]
그러나 사회적 지위와 강압의 권력에서 여성은 여전히 무기력한 존재였다. 여자가 돈 벌어서 큰 소리치고 나다니고 이혼해도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으 며 아무리 여자가 능력이 있어도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사회가 해주는 것 도 없기에 여성이 정말로 사회에 진출하거나 사회를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조정아 외 2010, 343).[281]
2. 탈북과정에서의 변화: 자아와 여성성의 발전
북한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은 경제난 이후 남성들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 는 실질적인 세대주이자 적극적인 경제적 생산자로 등장했다. 비록 근본적인 가부장적 국가 권력과 사회질서는 변화하지 않았지만 가정내에서의 성별분업 의 변화와 함께 견고했던 남존여비의 의식구조에도 부분적으로 변화가 있었 다. 또한 여성의 제한된 지위 상승과 의식의 변화가 전체 사회질서에 직간접으 로 영향을 끼친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북한에서의 체험과 더불어 이 러한 변화가 본격화되는 계기는 북한 여성들이 기존의 통제된 사회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 접하게 되는 탈북 경유지에서의 경험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 여성들은 기존에 내재화했던 의식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거나 부정하 게 되며 통제된 북한 사회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망각했던 자아와 여성성 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282]
그녀는 “중국에서 사창가로 시골 한족 농부 집으 로 팔려가는 탈북 여성들의 비참한 일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고 또 운이 좋은 경우는 착한 조선족, 한족 남자들과 만나 잘 사는 경우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서 경제난으로 타지에서 성노예로 희생되 는 북한 여성들의 처지를 개탄하면서도 북한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젠더관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기 와 보니깐 허드렛일을 하더라도 여자도 자신이 한 만큼 돈도 벌 수 있고 좋은 사람 만나면 북한에서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중국 한족 부부들 보더라도 남자들이 여자들 위하잖아요. 북한에 있을 땐 이런 거 잘 몰랐죠. 이런 생각하다 보니깐 남한에 대한 생각도 서서히 바뀌었고 그래서 한국행도 결심한 거죠. 거기 가면 내 삶도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를 했었고 뭔가 속거나 잃어버린 내 삶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282]
이 응답자는 자의반타의반 조선족 남자와 사실혼 관계에서 3년간 중국에 체류할 수 있었고 한국행 역시 준비할 수 있었다. 단속을 피하고 먹고 살기 위 해 불가피했던 동거였지만 그녀는 이를 나쁜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남성들보다도 여성인 자신을 더 위해준 조선족 남편에 대해 고맙게 생 각했고 남편을 속이고 중국을 떠나 한국에 온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었 다. 여기서 중국 체류 동안 그녀에게서 싹 트기 시작한 변화 중 가중 큰 것은 중국에 오지 않았다면 북한에서는 갖지 못했을 ‘자기 자신의 발전’에 대한 생각 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남편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는 북한사회에선 가부 장적 구조에 대한 종속을 통에서만 여성들의 ‘자아 아닌 자아’가 보장되었다. 많은 탈북자들이 지적하듯이, 북한 여성에게는 사실상 ‘자아’라는 개념이 부족 했고 자아의 부재는 ‘여성성’의 망각 혹은 모성으로서의 대체로 이어진 것이다. 이 응답자의 중국에서의 경험은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자아 정체성 역시 발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83]
V. 한국정착과 탈북 여성들의 정체성 분화
먼저 한국에 정착한 이후 다수의 북한 여성들은 북한사회의 가부장적 질서 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강화시킨다. 사실 탈북 여성들은 이미 자본주의에 노 출되고 상대적으로 여권이 신장된 중국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실제로 탈북자들의 이혼율이 64%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된 사실 도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Daily NK 08/11/11). [286]
가부장적 남성의 폭력을 경험한 탈북 여성들은 모두 ‘과거의 희생자’라는 피해의식을 안고 있었고 이러한 피해의식은 폭압적인 국가 권력과 가부장적인 남편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새로운 삶 이란 과거의 부정적인 인연의 끈을 모두 끊어 버리고 현재 한국사회에서 새로 운 자아와 여성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다수의 응답자들에게서 과거에 대한 피해의식에 기반을 둔 이러한 이분법적 대비는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었다. 응답자 5는 “엄마나 제 주위의 사람들 보면 왜 저렇게들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한에서 새 삶을 시작한 것이니깐 남한 여자들 처럼 자기 목소리 내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이 응답자의 주장처럼 남한의 우월성은 여권의 신장이었고 북한의 모습은 ‘나쁜 것,’ ‘뒤떨어진 것’으로 전락하면서 과거의 젠더관계를 지속시키는 북한 남성들 과 여성들의 모습 역시 이러한 기조에서 비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삶의 지향 은 과거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한국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하려는 삶의 자세 를 반영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서의 한국사회의 여성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전략을 보여준 것이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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